난중일기 - 임진년 아침이 밝아오다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7
이순신 지음, 송찬섭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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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동상 뒤에서 잠시 만났을 뿐입니다.”

 

온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는 광화문 집회 참석 여부를 놓고 한 야당 국회의원이 한 변명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순신 장군께 죄송할 따름이다. 질서도 상식도 없이 모여들어 국난을 초래한 그 광화문 집회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셨을 테니 말이다. 얼마나 괴롭고 원통하셨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황망하고 송구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어린 시절 위인전 이후 처음 읽는 난중일기다. 이순신 장군의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하는 것은 위로가 되었다. 책을 통해 발견한 장군의 효심과 절제, 충성의 모습은 두고두고 지침으로 삼아 마땅하다. 하나씩 이순신 장군의 진면모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1. 효심

 

“329일 맑다. 아산으로 문안 보냈던 나장이 돌아왔다.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매우 다행한 일이다.” (p.38, 1592)

 

전쟁 중에도 이순신 장군의 마음속에는 늘 어머니가 있었다. 간결한 문장에 가득한 효심을 책을 읽는 내내 느낄 수 있었다. 탐색선이 들어와 어머니의 소식을 들으면 다행스럽다고 표현했다. 혹여 며칠 소식이 늦으면 끓어오르는 걱정을 어찌할 수 없다(p.230)라고도 표현했다.

 

“413일 맑다. 중략. 조금 있자니 배에서 달려온 종 순화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p.337, 1598)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라는 표현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재작년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지지는 않았다. 내 효심은 장군의 그것에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일 테다.

 

2. 절제

 

“317일 밤에 식은땀이 등을 흠뻑 적셨다. 옷 두 겹이 다 젖고 이부자리도 젖었다. 몸이 몹시 좋지 않았다.” (p.288, 1597)

“2월 초2일 맑다. 동헌에서 공무를 보았다. 쇠사슬을 걸어매는 데 쓸 크고 작은 돌 80여개를 실어 왔다. 10순을 쏘았다.” (p.27, 1592)

 

이순신 장군은 전쟁 내내 건강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결코 멈추지 않았던 것이 있다. 바로 활쏘기다. 1순은 활쏘기 5번이다. 10순이면 50. 있는 힘껏 활시위를 당겨야 하는 전신 운동이자 훈련이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게을리하지 않았다.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활쏘기를 멈추지 않았다. 자신과 국가의 위기가 눈앞에 있었다. 전쟁의 향방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한낱 인간이 품지 못할 사명과 책임감이었다. 임금과 조정은 도망갔고 모리배들의 간계와 질투는 흘러넘쳤다. 어쩌면 장군에게 활쏘기는 단순한 훈련 이상이었을 것이다. 활쏘기를 통해 무너질 듯한 마음과 고통을 다잡고 부하 장수들과 병사들에게도 흐트러짐 없는 리더의 모습을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힘껏 당겨 앞으로 튕겨내는 화살처럼 앞으로 나가 왜적의 배를 맞부딪혀야 하는 거스를 수 없는 운명, 그것을 활쏘기라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몸으로 받아낸 것이다.

 

“4월 초1일 맑다. 옥문을 나왔다.” (p.331, 1598)

 

절제의 백미다. “4월 초1이 맑다. 옥문을 나왔다.”라는 표현을 어떻게 일기에 쓸 수 있었을까? 인간적인 면모 자체가 나의 그것과는 너무 멀다.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을까 싶은데, 장군의 말은 한결같이 짧다. 대단한 절제다. 따를 수 없는 절제다. 너무 먼 과녁이라 보이지 않는다.

 

 

3. 충성

 

“8월 초3일 맑다. 임금이 내린 교서, 유서와 유지를 가져왔는데,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교서에 절을 한 뒤에 받은 서장을 써서 봉해 올렸다.” (p.374, 1598)

 

억울하게 옥살이를 시켜 놓고 중책을 맡겨 버린다. 도망간 왕은 중심이 없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뜨리지 않는다.

 

“9월 초8일 맑다. 우수사 김억추는 겨우 일개 만호직에나 맞겠으며 수사의 자리를 받을 만한 인물이 못되는데, 좌의정 김응남이 서로 친분이 두텁다고 하여 마음대로 임명해 보냈다. 이래서야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때를 못 만난 것만을 한탄할 따름이다.” (p.382, 1598)

나라가 망하기 직전인 상황에서도 조정과 왕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전란인 것을 조정 대신들은 모르고 있었나? 기강과 중심이 무너진 조정과 대신들은 필요악이다. 이순신 장군은 책의 전반에 걸쳐 이 부분을 지적한다.

임금을 속이는 것이 이렇게 갈 데까지 갔다. 나랏일이 이 모양이니 나라가 평정될 리가 없다. 천장만 올려다볼 뿐이다.” (p.151. 1595)

그러나 표현은 이 정도일 뿐이다. 부하들이나 세력을 모아 반란은 모의하거나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다. 조선왕조도 그렇고 현대의 군사정권도 그렇고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역사가 있는데, 이순신 장군은 그렇지 않았다. 그저 천장만 올려다볼 뿐이거나, 때를 못 만났다는 표현 정도일 뿐이다. 억울한 옥살이 이후 마주한 현실은 비참했다. 군함과 병사는 없고 왜적과 암울한 패배감만이 득시글거렸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중책을 떠맡긴 왕과 조정은 예전에도 그랬듯이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당장 포기했을 상황이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모두가 알다시피 포기하지 않았다. 무너진 기강을 다시 세우고 주어진 것에서 최선의 전략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전투 중에 전사했다.

 

어쩌면 참 불행한 인생이다. 늦은 나이에 급제하여 변방으로만 떠돌았다. 한 번도 주류가 된 적이 없었다. 능력에 비해 평가를 받지 못했다. 누구보다 백성을 위하고 병사를 돌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모함과 비방뿐이었다.

만약 난중일기가 없었다면 이순신 장군에 대한 평가가 지금 같지 않았을 것이다.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낸 영웅이지만 정치적 군인으로 둔갑되었을 수도 있다. 난중일기는 정말 중요한 자료다.

 

지금도 어렵고 힘든 상황이다. 정치인들은 여전하고 언론은 제 기능을 못 한지 오래이며 사람의 목숨을 손에 쥔 의사들은 제 밥그릇 챙기기에 혈안이다. 난중일기의 이순신 장군 같은 국가적 영웅이 갑자기 등장해 모든 위기를 극복해 주면 좋겠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저 늘 그랬듯이, 국민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스스로 주변과 사회를 성숙시켜 나가야 한다. 더불어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 한 분인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통해 작금의 어려운 상황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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