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살아보는 인생이라서 그래 괜찮아
오광진 지음 / 미래북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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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살이나 어린 남자친구가 있는 사무실 여직원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오랜만에 가지는 회식 자리에서 술도 몇 잔 마시지 않은 채 휴대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평소 허물없이 이야기하고 장난치기도 하는 사이라 넌지시 물었다.

 

? 요즘 사이가 안 좋아?”

 

질문은 한마디였고, 대답은 수십 마디였다. 마치 누군가 물어봐 주기를 기다린 것처럼. 한참을 쏟아내고 나서 속이 시원하다며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헤어져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여직원에게 내 얘기를 시작했다. 대학 과 커플로 10년을 사귀고 다음 달이면 결혼 10주년이 되는 나와 아내의 얘기. 기질이 비슷하고 대화가 잘 통하며 무엇보다 유머 코드가 99% 일치한다는 얘기. 잠잠이 듣고 있던 여직원이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탁! 치며 이야기했다.

진짜 맞아요! 걔랑은 유머가 안 맞아요. 유머가!”

 

웃음이 있다는 것, 웃을 수 있다는 것. 아직도 죽지 않을 만큼 건강하다는 증거야.” (p.7)

 

얼마 전, 힘든 일이 있었다. 부부간의 일이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나와 아내 둘 다의 잘못이었다. 한동안 아내와 대화조차 하지 않았다. 20년 동안 친구로 연인으로, 부부로 지내오면서 처음이었다. 숨 막히는 침묵은 은연중에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하려는 시도였다. 먼저 사과하지 않으면 입을 먼저 떼지 않겠다는 찌질함이었다. 한 달이 지났다. 이대로 대화하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생각까지 이르게 되던 어느 날 밤, TV 앞에서 둘 다 피식 웃어버렸다. 가장 좋아하던 TV 예능 프로그램의 재방송 화면이었다. 피식대던 웃음이 박장대소로 발전된 후 대화를 시작했다. 한 달 동안 못했던 대화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며칠 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힘든 일이 해결되었다.

함께 웃을 수 있다는 것이 복이다. 나는 피식 웃었는데, 그 꼴을 보고 아내가 더 한심해하거나 화를 냈다면 아직도 우리는 침묵 속에 있었을 것이다. 나와 아내 사이가 건강하다는 증거를 확보하고 나니 더 마음이 편하다.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잘못했더라도 상대방을 다치게 하기 싫어서 나에게 결함을 찾게 되지. 이것은 정말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야.” (p.161)

 

내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한 달 동안 내 속이 그랬다. 아내에게서만 이유를 찾으려 했다. 직접 쏘아붙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원망하고 무시하고 외면했다. 한참을 뒤척이던 잠자리에서 문득 내 잘못이 또렷하게 눈앞을 맴돌면 애써 외면했다. 나는 아직 많이, 너무 많이 부족한 사람이다.

 

좋은 기운을 가진 사람에게서 좋은 일들이 생긴다지. 부정적인 말과 생각을 하면 안 좋은 일들이 몰려온대. 잘 살고 싶으면 고치면 돼. 좋은 기운을 가지고 싶다면 오늘부터 부정적인 생각과 불평을 끊어봐.” (p.144)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아내와의 침묵과 부부에게 닥쳤던 힘든 일이 해결되는 걸 보고 너무 애면글면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 더 험한 일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고되게 애쓰고 비교를 시작하고 원망을 가중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진짜다.

 

우리는 단 한 번 인생을 살 수밖에 없어. 그렇기에 인생에는 연습이 없지. 실수 좀 하면 어때? 실패 좀 하면 어때? 우리도 처음 살아보는 인생인데. 그래서 괜찮아.” (p.121)

 

늘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책으로 보니 더 각인된다. 애처가와 츤데레의 중간 정도는 된다고, 센스도 만점까지는 아니지만 90점 정도는 된다고 자임했었다. 근데, 아니더라. 힘든 일이 지나간 후 또 얼마간 자책을 했다. 내가 이거밖에 안 되는 인간인가. 집안에 흐르는 냉기류에 눈치 보던 딸아이의 걱정스러운 눈동자가 잊히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처음이다. 실수하고 실패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줄만 알았다. 괜찮다는, 네 탓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니 그렇다. 남편, 아빠 노릇이 처음이다. 가장으로 살아가는 것도 처음이다. 타인과 사회가 괜찮다고 해주지 않더라도 스스로는 나에게 괜찮다고 말했어야 했다. 자책하지 말라고 토닥여야 했다.

어쨌든 괜찮다.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내 삶을, 나를 둘러싼 다른 이의 삶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은 달라졌기 때문이다. 강박적으로 애쓸 필요도, 너무 자책할 필요도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괜찮아, 진짜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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