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허영선 지음 / 서해문집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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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광역시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나의 절친한 친구가 사는 곳이다. 그의 제주 이주는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10년간의 직장생활을 갑자기 그만두고 내게 통보했다. 몇 개월 여행하다 돌아오려니 했는데, 4년이 흘렀다. 농사도 짓고 직장생활도 하면서 지낸다. 덕분에 우리는 휴가만 생기면 제주도로 날아간다. 8번 다녀왔다. 가기 전에는 비싸고 복잡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번 갔다가 오니, 다시 안 갈 수가 없는 곳이다. 매력적인 곳이다.

 

제주도의 매혹적인 풍광에 사로잡혔다 하는 이들, 제주도의 상처를 느끼지 못하였다면 어찌 제주도를 다 본 것이라고 말하겠느냐” (p.21),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허영선, 서해문집

제주경찰의 3·1절 대민발포는 천 프로, 만 프로 경찰이라는 국가권력의 잘못이다. 변명한 여지는 0.000001프로도 없다.” (p.220),우린 너무 몰랐다, 김용옥, 통나무

 

나는 제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지지하고 존경했던 고() 노무현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사과한 것이 제주 4·3을 알게 된 계기다. 그리고 친구의 제주 이주가 없었더라면 그전처럼 잊고 지냈을 거다. 몰라도 내가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영향이 없으니까.

 

이탈리아의 역사철학자 베네데토 크로체가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 All history is contemporary history.’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p.45), 우린 너무 몰랐다, 김용옥, 통나무

걸어 다니거나, 기어 다니는 것은 살려두지 않았다. 세 살, 네 살 난 아이가 기어서 도망가는 것도 쏘았다. 이 밭에도 저 밭에도 냇가에도 죽은 사람뿐이었다.” (p.192),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허영선, 서해문집

 

역사는 반드시 반복된다. 청산하지 않은 잘못된 역사는 현대를 망가뜨린다. 우리는 지난 현대사를 통해 이것을 체험했다. 독재자와 그가 남긴 독재의 파편을 말끔히 제거하지 못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분명히 경험했다. 대통령이라는 허수아비를 세워둔 채 마스터 오브 퍼펫이 국가를 경영했고, 생때같은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생방송으로 지켜봤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반드시 되돌아오고, 그렇기에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

 

언젠가, 서귀포 사계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친구가 이야기했다.

제주, 여기도 진짜 적응하기 힘들다.”섬이니까 그런가 보다 했다.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다고 했다. 밭을 분양받아 농사를 조금 지었는데, 도시 출신이 아는 게 뭐가 있었으랴. 좋지 않은 작황에 임대료도 제때 지불하지 못했는데, 땅 주인인 제주 도박이 할머니가 그렇게 매몰찰 수 없었다면서 연거푸 술을 속으로 밀어 넣었다.

 

조병옥은 제주도민은 이미 70%가 좌익정당에 동조적이거나 가입되어 있다고 선전하면서, 제주도는 좌익의 본거지라고 규정했다.” (p.222), 우린 너무 몰랐다, 김용옥, 통나무

“20세기 끄트머리 199912월에 제주4·3특별법이 통과되었을 때 허영성 시인은 이제는 마음 놓고 울 수 있느냐며 울먹이던 희생자 유족들의 눈물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p.10)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허영선, 서해문집

 

책을 읽고 친구와 다시 통화했다. 여전히 그 제주 토박이 할머니 밭을 분양받아 농사를 짓고 있다. 책을 읽은 겸, 넌지시 물었다.

그 땅 주인 할머니 가족 중에 4·3 피해자 있으셔?”

, 오빠도 있고 친척 중에 여러분 있으시대

반 백 년이 훨씬 지나서도 마음껏 울먹일 수 없었던 그들의 고통과 한을 나는 단 한 치도 가늠할 수 없다. 건방지게 판단할 수도 없다. 친구의 답답함과 서운함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직접 겪지 않고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다.

군대에서 만난 전라도 광주 출신 동기에게 들었던 5·18은 생생한 것이었다. 삼촌이 5·18 때 희생돼 매년 518일이 되면 제사를 지낸다는 동기의 말은 차라리 꿈 같았다.

지난 총선 직전, 통합당 후보의 세월호 관련 막말도 같은 맥락이다. 여전히 역사는 유효하다. 100년 전이든, 4년 전이든 그 역사는 오롯이 현대사다. 반복되고 재현되며 구체화된다.

 

그땐 사람들이 다 이레도 붙고 저래도 붙고 했어요. 그 모양으로 약하게 흐름 따라다니던 사람들입니다. 바람 부는 양, 이쪽으로 세게 불면 이쪽으로 붙고, 저리로 세게 불면 저쪽으로 붙고 했습니다. 산에서 말을 하면 그것도 옳아 보이고, 또 아래서 오는 말 그것도 옳아 보이고. 어느 쪽에 붙어야 좋을지 몰랐어요.” (p.118),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허영선, 서해문집

 

결국, 피해는 양민이다. 그저 땅을 일구고 거친 바다를 맨몸으로 들어가던 사람들. 사계리 친구 집 거실에서 산방산이 정면으로 보인다. 반대쪽 사계 해변을 따라 해안도로를 가다 보면 송악산이 나오고 섯알오름이 나온다. 대표적인 학살 장소다.

4살 된 딸아이와 처음 간 송악산에서 맞는 바닷바람은 상쾌하고 달콤했다. 송악산 초입에서부터 시작되는 오르막길은 차라리 신선했다. 군데군데 일본군이 파놓은 벙커와 땅굴을 보기 전까지는. 많은 사람이 죽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좌익이라고, 빨갱이라고. 수십 년이 지나도 쉬쉬했다고 한다. 여러 차례 반복할 수밖에 없는데, 나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친구 덕에 여러 번 가본 제주에서 만난 제주 사람들은, 적어도 내 눈에는 신기하고 반가울 따름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사투리, 거친 듯하지만 정겨운 그들의 행동.

사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기껏 제주 몇 번 가봤다고 제주와 제주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고 있었다. 가소로운 짓이다.

이런 책, 두 권 읽었다고 제주와 4·3을 이해 했다 하는 것도 가소로운 짓이다. 그저 먼지가 켜켜이 덮인 첫 장을 겨우 넘겼을 뿐이다.

제주의 숲, 바람, , 바다, 모래, 오름, 하나하나에 박힌 제주 사람들의 한과 슬픔, 눈물과 탄식, 아픔과 설움을 나는 1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더 제주에 가고 싶다. 언젠가는 이주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시기가 당겨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냥 제주에 가서 살고 싶다. 제주의 숲을 거닐고, 바람을 맞고, 돌을 만지고 바다에 발을 담그고, 모래를 쓰다듬고 오름에 기대고 싶다.

    

제주4·3민중항쟁 지도부의 몇 사람이 남로당에 헌신하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허구적인 정체성이었고 실제 제주민중항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제주민중항쟁은 오직 핍박받는 제주민중이 피압박의 막다른 골목에서 분노를 표출한 사건일 뿐이다.” (p.234), 우린 너무 몰랐다, 김용옥, 통나무

    

요즘 들어 제주 이주에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보도가 많이 되고 있다. 높은 부동산 가격, 배타적인 원주민, 부족한 일자리 등. 갖다 붙인 이유가 많았다. 이주민이든, 언론이든 제주를 이용하려고 한 경우가 더 많았다. 좋은 소재, 흥미로운 주제니까. 반드시 검증하고 짚어내어 재평가해야 할 제주4·3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아직도 빨갱이, 빨치산 반란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제대로 평가하고 처벌한 경험이 없다 보니 왜곡된 역사가 고스란히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현대사의 굴곡은 대부분 그렇다. 제대로 된 역사 청산이나 재평가가 없다 보니 이념의 가면을 쓴 갈등이 산재한 것이다. 오죽하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국정교과서조차 이념 갈등으로 인해 한바탕 난리가 나기도 했다. 국가의 역사려면 어느 정도 동의가 된 방향이 필요할 텐데, 한국의 현대사는 그렇지 못하다. 슬픈 현실이다.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양민 학살, 5·18, 군부독재에 의한 의문사, 세월호 참사 등등 제주4·3을 포함한 미완의 역사가 산재해 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나와 당신들은 최소한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동생들에게, 전해야 한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아직도 제대로 진상규명조차 하지 못한 역사가 너무 많다고, 잊지 않아야 한다고.

 

대한민국 국민이었으나 국민이 아니었던 그 시절, 수 없는 꽃 목숨이 참혹하게 떠났습니다. 잊어라, 지워라, 속솜허라(조용히 해라) 강요당한 망각의 역사가 마침내 왜곡의 무덤을 뚫고 나와 파도처럼 솟구칩니다.” (p.4),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허영선, 서해문집

 

속솜허라,

이제는 제주 사람도, 대구 사람도, 서울 사람도 속솜허지 않아야 한다. 떠들고 외쳐야 한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청산하고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 87년 대선을 앞두고 추락한 KAL858기 동체를 미얀마 바닷속에서 확인했다고 한다. 공중폭발해 잔해를 찾을 수 없다던 당시 정부의 조사 발표와는 180도 다른 증거가 30년이 지나 드러나고 있다. 속솜한 채 살아온 유가족의 한을 반드시 풀어야 한다. 그것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정확한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것이다. 비극의 현대사를 숨기지 않고,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다. 다시는 이런 역사가 반복되어 또 다른 비극의 현대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나와 당신, 우리 모두 속솜허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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