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 - 한국인 유일의 단독 방북 취재
진천규 지음 / 타커스(끌레마)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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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야 산다. 알아야 산다.

 

화생방 교관이 땀에 찌든 나를 포함한 교육생들에게 한 첫마디다. 이론 교육을 끝내고 실기 교장으로 구보로 이동하는 중에도 계속 왼발 구령에 맞춰 알아야 산다.”를 외쳤다. 육군 화학병과의 모토이기도 하다. 십수 년 전, 무시무시한 화생방 훈련을 앞두고 수백 번 외친 말이다. 정말 맞는 말이다. 화학전이 발생할 경우 방독면을 쓸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생사가 달라진다. 방독면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쓰는지 알고만 있어도 생명을 건질 수 있다.

남과 북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정말 알아야 산다.”

 

얼마 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죽었다가 살아 돌아왔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뉴욕타임즈조차 가짜뉴스에 넘어갔다. 북한 이탈 주민 출신으로 국회의원이 된 두 사람은 확신했다. 모두 잘못된 정보였다. 한국 정부와 정보기관은 처음 그런 보도가 나왔을 때부터 줄곧 특이 사항이 없다고 말했다. 북한을 이탈한 지 수년이 지나거나 북한에서의 위치가 VIP의 신변을 전혀 알 수 없는 사람들의 말을 단지 북한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보도했다. 한심하기 그지없다. 가짜뉴스를 가지고 일주일 넘게 난리를 치고 나서도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조차 없다.

알아야 하는 것이다. 알아야 살고, 알아야 거짓에 넘어가지 않는다.

 

이런 일상적인 느낌이 진짜 현실로 받아들여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렸다. 아직 나는 북녘을 잘 모르고 있었다.” (p.37)

“‘석유 한 방울, 나사못 하나 들어오지 못하는물 샐 틈 없는 제대 국면에 이렇게 자동차가 많이 보일 줄 몰랐다.” (p.139)

 

이 책 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는 기자가 쓴 책이다. 눈앞의 장면을 그대로 기록하는 카메라를 든 기자다. 적어도 카메라에 저장된 이미지는 반드시 사실이다. 그런 기자가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하는 말이다.

몰랐다.”, “모르고 있었다.”

가장 기자다운 표현이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해야 한다. 확실하지 않은 것은 보도하지 않아야 한다. 충분하지 않은 정보를 사실로 포장해 전달하는 것은 일반 대중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가짜뉴스에 불과하다.

“2017년 가을, 하루하루 위기로 치닫는 국제 정세와는 동떨어진 대동강 변의 모습은 며칠 전까지 내가 있었던 서울과 다르지 않았다. 핵미사일을 쏘는 날에도 서울에서는 주식시장이 서고, 학교에서 수업하고, 프로야구가 열리고 (중략) 이곳 대동강 강가에서도 평양시민들의 일상은 변함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p.71)

 

더군다나 이 책은 남북 관계가 극에 치달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시기가 배경이다. 2010년 이명박 정부의 대북제재 조치 이후 줄곧 평행선만 달라던 남과 북이었다. 북은 북대로 남은 남대로 서로를 비난하고 비판하기에 바빴다. 그런 와중에 북한으로 들어간 최초의 민간인이 있었다. 참 대단하다. 함께 방북하기로 한 미국 기자들은 입국 허가가 나지 않아 홀로 북한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실을 기록했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통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사실 내가 17년 만에 평양을 다시 방문하게 되었을 때 이곳 사람들이 제대로 먹고 살아가고 있는지 걱정이 앞섰다.” (p.169)

우리는 70년 동안 제재를 받아왔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어느 한순간 제재를 받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준비해왔습니다.” (p. 225)

 

10여 년 전만 해도 이런 표현은 위험했다. 북한과 그 체제를 옹호하거나 찬양·고무하는 표현이 될 수 있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김일성이 죽었다.” 교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며 교사가 외쳤다. 모두 기겁했다. 학교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고, 평소 EBS 강의 말고는 틀어본 적이 없던 교실 내 TV를 교사가 직접 틀었다. 뉴스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잠시 후, 교내 방송이 나오고 우리는 모두 하교했다. 자전거로 하는 하굣길에는 중고등학교 몇 개가 걸쳐 있었는데, 모든 학교에서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집에 도착하자 어머니는 짐을 챙기고 있었고, 아버지도 회사에서 곧 오신다고 하셨다. 우리 모두 그랬다. 김일성이 죽으면 당장 전쟁이 일어나는 줄만 알았다. 선거를 앞두고 돈을 건네주며 휴전선 인근에서 총을 쏴달라고 했다. 이후에 사실로 드러나기 전에는 진짜 북한에서 전쟁을 위해 총을 쏜 줄 알았다.

지금은 그런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 이제는 수구세력이 만들어 낸 북풍을 믿지 않는다. 더 정확한 정보를 손안에서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세상이 온 것이다. 그래서 얼마 전 김정은 위원장의 가짜뉴스를 두고도 수구세력과 수구 언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세상은 이렇게 바뀌고 있고, 더 많이 알아가고 있다. 모르던 때는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다. 지금은 아니다. 그래서 강조할 수밖에 없다.

진짜 알아야 산다.” 화생방 훈련에서도, 남북 관계의 발전을 위해서도.

 

진 선생에게 우리의 체제를 무턱대고 선전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보편타당하게 기자로서 양식을 가지고 충실하게 보도해달라는 겁니다.” (p.111)

평양에서는 집의 크기를 평수가 아니라 방의 개수로 계산한다고 한다. 2개짜리 집, 3개짜리 집, 4개짜리 집 등으로 집의 크기를 짐작하는 것이다. 국가에서 집을 배정해주기 때문에 방이 몇 개인지만 알면 되는 것이다. 방의 개수는 집주인의 권력 관계나 사회적 지위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양가족의 숫자로 결정한다고 한다.” (p.258)

 

북한의 아파트에 대한 정보는 처음이다. 전혀 알지 못했다. 어쩌면 관심도 없던 부분이다. 한국의 수구 언론은 진짜 평양과 평양사람들의 모습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상한 모습, 경직된 이미지, 부족한 상태, 이질적인 움직임에 집중했다. 그러니 사실은 필요 없었다. 이 책의 저자가 북한에 머무르는 동안 동행한 안내원의 요구는 무척 단순한 것이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보편타당하게보도해 달라는 것. 기자라면 당연할 텐데, 그러지 않았었다.

책의 저자가 아닌 수구 언론 기자가 같은 아파트를 취재했다면 기사 제목부터 달라졌을 것이다.

연봉 차, 3배에도 같은 평수에 사는 처지

뭐 이런 제목을 달았을 것이다. 북한은 아파트가 재산 증식의 수단이 아니라 단순한 주거의 수단이기에 평수에 대한 개념이 없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부양가족의 숫자에 따라 방의 개수가 달라진다고 한다. 우리와는 참 다른 부분이다. 저자가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처럼 평양에 새롭게 지어진 아파트만의 사례라 일반화시킬 수 없다. 평양과 지방 도시와의 편차도 우리의 그것보다 훨씬 클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주거에 대한 개념과 접근이 우리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은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또 다른 걱정이 생겼다. 길지 않은 시간 안에 통일이 될 텐데, 이미 포화 상태인 부동산 시장에 신물이 난 남쪽의 업자들과 부자들이 얼마나 단기간에 북한의 부동산 시장을 망쳐 놓을지에 대해서다. 통일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가 시작되는 즉시 참고해야 할 사항일 것이다. 남과 북이 매우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북측이 201855일 날짜로 표준시를 변경했다. 2015년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맞선다는 명분으로 일본에 맞춰진 표준시를 30분 당겨 우리보다 30분 빨리 가게 했던 시간을 다시 늦춰 서울 시간과 맞춘 것이다.” (p.10)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우리와 북한의 표준시가 달랐다는 사실. 같은 시간을 살아간다는 상징적 의미만으로 충분하다. 비록 남북정상회담 이후, 기대했던 것만큼의 관계 진전이나 뚜렷한 발전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표준시 변경, 여러 차례의 정상회담, 도보다리 회담 등 함께 만들어 가는 하나하나가 새로운 역사가 되고 있다. 함께 만들어 가는 상징이 되고 있다. 이번 김정은 위원장의 행보를 둘러싼 가짜뉴스의 팽배에도 지속적으로 같은 메시지를 내보낸 문재인 정부의 일관됨도 북한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분명, 예전처럼 그렇게 단번에 모든 것이 수포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없어야 한다.

“5000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다.”는 유명한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을 기억한다. 5000년에 비해서는 짧은 70년이지만 불과 2-3년 안에 콩 볶듯이 간단히 뛰어넘을 수는 없는 기간이다. 7년도 아닌, 70년이다. 지속해서 노력하고 꾸준하고 일관된 모습을 서로 확인하면서 신뢰를 쌓아야 한다. 민간 차원에서도 끊임없이 교류가 이어져야 할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지난 10여 년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내 꿈은 평양 상주 특파원이 되는 것이다.” (p.45)

나는 통일TV’를 준비하고 있다. 통일TV는 어떠한 체제나 주의·주장과는 무관한 남과 북이 모두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역사물, 자연 다큐멘터리, 음식 관련 프로그램 등을 제작·방영하는 케이블채널 전문 방송사이다. 이러한 영상물을 함께 보면서 동질감을 느끼고, 다름을 인정하면서 점차 거리를 좁혀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남과 북이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p.291)

 

저자인 진천규 기자와 같은 사람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평양 상주 특파원”. 분명 진기자님이 최초가 될 것 같다. 통일TV도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바, 70년을 헤어져 지냈지만, 함께 한 5000년이라는 시간은 계산할 수 없는 엄청난 유산이다. 공유하고 있는 정서나 역사가 분명 존재한다. 서로 다른 것을 하나씩 알아가는 것도 급한 일이지만 같은 것을 하나씩 확인하는 일은 분명 우선되어야 할 일이다. 북한 이탈 주민이 여러 명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도 좋지만 남과 북이 함께 공유하고 교감할 수 주제를 담은 프로그램도 분명 만들어 낼 수 있다. 시청률이 아닌 통일을 준비하는 채널 말이다.

 

그래야 우리는 북한을 알 수 있고, 북한은 우리를 알 수 있다.

알아야 산다. 자꾸 반복하게 된다.

이념과 체제를 비판하고 견제하기 위한 잣대로 걸러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알아야 한다. 알기 위해서 봐야 하고, 서로의 모습을 진실과 사실의 잣대로 봐야 한다.

 

알아야 함께 산다.

통일된 한 나라에서 함께, 또 다른 5001년을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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