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 지니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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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님은 욕받이다.

매일 아침 사장이 퍼붓는 욕을 그대로 몸으로 받아내는 것으로 사무실의 일과가 시작된다. 하지만 멘탈은 최고다. 과장님은 그렇게 욕을 먹고도 사무실 밑으로 내려와서는 직원들과 실없는 농담을 한다. 과장님 말고는 아무도 웃지 않는 아재개그를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직원들끼리 별명을 만들었다. 보살님이라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진짜 넘쳐나는 욕에 파묻혀 죽을 것만 같아서 안 그런 척 하시는 건지, 진짜 욕을 지속적으로 섭취하다 보니 익숙해져 욕을 받아내지 않으면 뭔가 찜찜하고 개운하지 않아서 그러는 건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렇게 한바탕 욕잔치가 벌어지면 같은 공간에 있는 우리 직원들의 기분과 사기도 축축 처진다. 서로 눈치 살피다 하나둘씩 담배를 피러 나가거나 용무도 없는 화장실을 들락거린다.

 

사건은 지난 주 화요일 일어났다.

평소 그렇게 사장의 욕받이로 활동하시면서도 보살의 경지에 이른 과장님과 함께 고장 난 엘리베이터를 수리하고 있었다. 나는 그 전 주에 다른 작업을 하며 왼손 엄지를 다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쉽게 해결되지 않는 고장인터라 사무실에 있는 다른 자재를 가져와 교체해야 했다. 운이 없었던 건지, 재수가 없었던 건지 마침 그 자재만 없었다. 사장에게 전화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거다.

당일 오전에도 한바탕 욕잔치를 받으셨던 터라 내가 전화했다.

이번 한번은 내가 대신 욕받이 하자.’

딱 이 마음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장께서는 내게 휘황하고도 찬란한 욕을 퍼부었다. 나는 자재를 가지러 두어 번 사무실을 왕복했던 터라 자세한 작업 내용은 모르고 있었다. 휴대폰에 통화중 스피커를 키고 녹음을 눌렀다. 이거 해봤어! 저거 해봤어? 묻는데, 나는 작업을 안 했으니 모를 수밖에. 과장님이 옆에 있는 걸 모르는 사장은 내게 쏟아냈다. 함께 그 소리를 듣는 과장님은 옆에서 자신의 폰 메모장에다 대답 내용을 적어 주었다. 한바탕 회오리 같은 욕 시전이 지나갔다. 결론은 교체해야 할 자재가 없다는 것.

수 십분 후 사장이 왔다. 자재를 사 와서 그것으로 교체했다. 또 다시 시작된 욕잔치. ? 과장님은 왜 가만히 있지? 진짜 나만 욕 먹네? 모든 상황이 끝나고 과장님이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하다.”

 

거절당한 게 무안해서가 아니었다. ‘거봐, 안 될 거라고 했잖아하고 말아버릴 상황이 아니었기에 그랬다. 더 매달려볼 여지가 없어서 그랬다. 배낭 안에서 잔뜩 긴장한 채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그녀의 실망감이 짐작돼서 그랬다. 숨을 죽이고 내가 어떻게든 해주기만을 바라고 있을 그녀가 안쓰러워서 그랬다.” (p.317)

 

민주의 배낭 속에 들어가 숨을 죽인 채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그녀, 지니와 진이처럼 과장님을 생각한 걸까? 지나친 비약일까?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랬다. ‘오늘은 내가 대신 욕받이 하자.’라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상황이 점점 꼬여가고 면전에서 펼쳐진 욕잔치 앞에서는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과장님이 작업 하시고 저는 자재 가지러 갔다 왔는데요.”라고 했으면 더 나은 상황이 펼쳐졌을까?

선택의 기로는 아주 가까이에서 자주, 너무나도 자주 출몰한다. 오늘 점심 뭐 먹지에서부터 지긋지긋한 회사 언제쯤 그만두지에 이르기까지.

 

내가 무엇을 꿈꾸었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뭘 할 수 있느냐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생명을 다루고 연구할 자격이 내게는 없다는 점이었다. 그것을 그날 밤에야 알아차렸다.” (p.77)

불길 속으로 서서히 전진하는 관을 보자 어찌할 수 없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때 달아나지 않았더라면, 자전거를 멈추고 문을 열어 봤더라면…….” (p.91)

 

진이와 민주처럼 극적인 선택의 기로는 물론 더 어려울 거다. 돌이켜보면 후회만 남는 시간이다. 하지만, 얼마나 달라졌을까? 과거의 다른 선택으로 현재의 불만족을 대체할 수 있을까? 희망사항이다. 진이와 민주, 나와 과장님처럼. 사장이 제풀에 지쳐 나간 직후에라도 미안하다고 한 것이 과장님의 최선이다. 내가 그 다음 날 사장에게 사직서를 내민 것도, 민주가 노숙을 하고 진이가 영장류센터를 떠나려 한 것도 최선이다. 그게 최선이 아니라면 인생은 지나치게 비극이다.

 

지붕이 있으면 어디서나 잤다. 비닐하우스, 폐가, 들판 거푸집, 터미널이나 병원 대리석 등등. 일회용 음식이나 통조림으로 허기를 채웠다.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어디에도 내가 찾는 것은 없었다.” (p.48)

볼 때마다 기억은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사진 속 여자는 다정한 그녀였다. 사진 밑엔 그녀의 신상이 적혀 있었다.” (p.100)

 

그렇게 하루를 버텨내는 것이다. 지난한 고통을 감내하는 오로지 개인의 몫이다. 순간을 잊어야 하루를 통째로 버텨낼 수 있다. 진이는 다정한 그녀, 민주는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마침내 어디에게 찾는 것이 없는 곳으로 향하는 것이다. 출근길 지하철처럼 꽉 들어찬 비극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가 그냥 사는 것이다. 아니, 살아내는 것이다.

 

얼마나 후회를 하든, 해병대 노인의 부름을 듣던 순간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뭔가를 하려면 그때 했어야 했다. 뭔가를 할 수 있었던 그때 그 순간에.” (p.91)

 

그때 그 순간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타임머신이다 4차 산업혁명이다 떠들어 대도 불가능한 일이다. 진이와 민주의 후회도, 나와 과장님의 후회도 소용없다. 착각이다. 혹여 그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지금보다는, 최소한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을 거라는 헛된 기대. 그것이 나를 조금씩 좀 먹어 들어가기 시작하면 출구조차 잃어버리게 된다. 인격체로 그나마 버텨나가는 일상이 송두리째 망가진다. 경계해야 한다.

 

막다른 곳에 불시착하는 때가 있다.” (p.7)

자네한텐 동물의 감정을 파악하는 천부적인 자질이 있어. 알고 있을 텐데.” (p.79)

 

사실, 우리는 행운에 기대야 하는 나약한 존재들이다. 월요일 오전부터 로또 한 장을 사서 지갑에 넣어두면 일주일 내내 마음이 든든하고 세상의 행운이 모두 내 것인 양 느껴지는 것이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귀인이 나타나 나의 빛나는 재능을 알려주고 지금 연봉의 수 배가 넘는 멋진 회사에 면접도 없이 쑥 하고 넣어준다면 정말 좋겠다. 물론, 그런 일이 실재한다면 말이다. 또 다시 한숨이 나온다.

 

“‘아가라는 호칭에 속이 거북했을까, 아니면 착하지라는 말에 비위가 틀어진 걸까. 진이는 꼭지가 돌아버렸다. 입술을 귀 밑까지 찢어 이빨을 모조리 드러내더니 창날 같은 소리를 내뿜으며 벤치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p.198)

 

한숨과 후회와 하루를 겨우 버텨내는 것으로 점철된 우리의 삶은 치열하다 못해 처절하다. 물고 뜯는 것의 일상이다. 몇 년 동안 한 사무실에 책상을 맞대고 앉은 동료가 사실은 수 년 동안 내 뒷담화를 하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흔한 일이다. 오랜 투쟁으로 비로소 법적으로 정규직 신분이 된 노동자들의 회사 복귀를 가장 반대하는 무리가 바로 기존 노조의 노동자들이었다는 이야기도 흔하다. 내가 죽지 않으려면 너를 죽여야 하는 아비규환이다.

지니가 된 진이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 영장류센터에 속한 전문가들도 손조차 대지 못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일에 그치지 않는다. 사람과 동물도 그렇다. 아프리카 열병인가 뭔가 하는 것으로 야생 멧돼지를 궤멸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고 한다. 결국 사람에 의해 생긴 바이러스로 인해 죽게 된 그들의 삶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나. 좀 더 고등한 동물이 살아야 한다는 진화론적 관점 내지는 현실적 판단은 전적으로 고등한 동물의 입장이다. 그들의 판단일 뿐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소설의 마지막은 꽤 충격적이었다. 죽어가는 자기 자신을 그대로 응시한 채 죽어가는 진이, 지니에게 어깨를 건 채 끝내 소멸하고 마는 진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과 그들이 만들어 낸 사회에 직격을 날린다. 바로 옆 사람의 어깨에 팔을 걸지도, 내 어깨를 옆 사람에게 내어주지도 못하는 나와 당신들이 맞은 어퍼컷이다. 슬픈 사실은 어퍼컷이 카운터블로우가 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맞은 직후에는 온 몸이 떨리고 소름이 돋았다. 이거 뭐야, 어쩌라는 거야 싶었다. 슬프게도 그 순간뿐이었다. 고작 10분 정도를 뒤척인 채 잠들었다. 그리고 숙면을 취했다.

 

모르겠다. 이게 이 책을 읽은 내 결론이고, 현재까지의 내 상황이다. 선택의 결과로 퇴사 했다. 뭔가 진이처럼 세상과 당신들을 향한 어퍼컷을 날려 보고 싶은데,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여전히 구인 사이트를 기웃거리고 있을 뿐이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어설픈 어깨 걸기를 시도할 능청도, 마주치면 인상 쓰기 바쁜 반려동물과 함께 걷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애기 이름이 뭐예요?”라고 할 오지랖도 없다. 현재까지는.

실수로라도 한 번 휙 지나쳐 버리는 일 없이 정확하게 또 다시 닥쳐오는 일상을,

그저 버텨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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