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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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F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다. 김초엽이라는 작가의 이름도 생소했다. 아무리 리뷰대회라는 간판이 걸려 있어도 좋아하지 않는 책을 억지로 읽고 리뷰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었다.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이렇게 리뷰도 쓰고 있다.

 

 인터넷 서점 페이지에서 작가가 포스텍에 다녔다는 것을 발견한 후 바로 구매를 클릭했다. 포스텍이라는 단어를 보자 포항공대가 떠올랐고, 지곡동과 효자동, 학교 안에 있는 호수와 대학식당의 맛있는 메뉴, 한 바퀴만 돌면 초중고 동창 중 몇 명은 만나게 되는 작은 시내와 지금은 영일만 해수욕장으로 불리는 북부 해수욕장의 바닷냄새, 지금 한창 맛있는 과메기의 그 고소함 같은 것들이 연상되었다. 단순히 내 고향이 포항이고 포스텍에는 어려서부터 무수히 드나들었던 것뿐인데, 작가가 포스텍 출신이라는 것만으로 구매욕이 일어났다. 그 어떤 첨단의 과학과 기술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인생은 그 어떤 끄트머리라도 잡고 싶다.

요즘 들어 부쩍 하게 되는 생각과 고민이다. 학연과 지연, 혈연이 전 사회를 아우르며 힘을 발휘하는 대한민국에서 그 어떤 끄트머리를 떠올리는 일은 쉽다. 당장 매일 부대끼며 지내는 직장 동료, 가족, 친구 등등. ‘응답하라시리즈를 보며 맞아, 저 때는 저랬어라며 신기해하고 괜스레 콧날이 시큰거리는 그 어떤 것이다. 그것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싶어 한다. 그게 인생이고 사람이다.

 

맞다. 나는 작가가 포항에서 머무른 그 몇 년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이 책을 읽었다.

  

 

  

인스타그램에서 먼저 유명해진 이모셔널 솔리드는 곧 인터넷 커뮤니티와 문화면 기사를 휩쓸기 시작했다. 유튜버들은 감정의 물성을 직접 사용하는 리뷰 동영상을 찍어 올렸고, 얼마 뒤에는 공중파 방송에도 등장했다.” (p.201)

이곳에 있는 건 책도 논문도, 그 비슷한 자료들도 아니다. 이제 도서관엔 끝없이 늘어섰던 책장 대신 층층이 쌓인 마인드 접속기가 자리하고 있다.” (p.223)

   

 

  작가가 그려내는 미래 또한 그 어떤 끄트머리를 놓지 않는다. 우주를 개척해 나가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미래에도 이모셔널 솔리드마인드 접속기가 인기를 끈다. 감정을 완전히 통제하고 조절하는 것이 기술의 끝이고, 층층이 쌓인 마인드 접속기가 아니라 홀로그램이나 뭐 완벽하게 재현된 입체적 물질(전혀 과학적 지식이 없어 설명을 못 하겠다)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조우할 수 있는 것이 우주를 개척하는 시대의 기술일 것 같은데, 이 책에서는 그 어떤 끄트머리를 계속해서 물고 늘어진다.

  기쁨과 행복이라는 감정의 물성만으로 인간은 만족할 수 없다는 것과 마인드 접속기로도 완전히 구현하지 못하는 부재(不在)한 가족에 대한 추억을 남아 있는 가족이 애써 찾아내고 발견하는 수고로움을 건넨다. 많은 독자가 비슷하게 느끼는 이 작품에 대한 감상평이다.

따뜻하다는 것.

 

 사실, 작가와 독자들의 바람인지도 모른다. 당장 내일 일도 예측해 내지 못하는 인생을 사는 나와 당신들, 혹은 나와 당신들의 후손이 맞닥뜨릴 미래는 따뜻했으면 좋겠다.’라는 바람 말이다.

그 바람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싶은 것이다.

   

 

 

남자는 터질 것 같던 심장을 겨우 진정시켰다. 100년 동안 정거장을 점유하고 있다길래 어지간한 괴짜일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과격한 노인네일 줄이야.” (p.176)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p.182)

    

 

  폐기해야 할 우주정거장을 점유한 노인을 결국 설득하지 못한다. 인체에는 해가 없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지구로 송환시킬 캡슐 이동 기술 같은 것이 등장하지 않는다. 젊은 남자는 애초의 임무조차 망각할 정로도 노인의 말에 공감하며 대화하지만 실패한다. 노인의 100년은 기다림과 그리움, 그리고 외로움이었다. 먼저 간 가족들이 있는 우주 저 너머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기다린 것이다. 자신이 개발한 동면기술로 인해 조금씩 자신이 망가지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놓지 못한다. 그 어떤 끄트머리를. 이성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며 연방정부에도 해가 되는 일임을 분명하게 알고 있지만 놓지 못한다. 자신을 설득해 지구로 송환시킬 목적으로 찾아온 젊은이와 많은 대화를 나누지만, 머릿속에는 한가지 생각뿐이었다. 따돌리고 우주 저편으로 그냥 날아가 버리는 것. 소멸해 버리는 것이다.

 결국, 젊은 남자는 괴짜이며 과격한 노인네에게 당한 것이다. 그녀에게는 마지막 낭만이었겠지만 젊은 남자에게는 임무의 실패다.

  젊은 남자의 호의는 불필요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임무만 완수하면 그만이었다. 에피소드의 곳곳에 조금만 더 보태고 살을 붙이면 완벽한 임무 수행이 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이것 또한 작가의 의도라 짐작된다. 여지를 두는 것.

   

 

 

아름답고 뛰어난 지성을 가진 신인류가 아니라, 서로를 밟고 그 위에 서지 않는 신인류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아이들로만 구성된 세계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p.49)

아무리 치명적인 병을 앓는 환자여도 한 10년쯤 얼어 있다 깨어나면 누군가가 해결책을 찾아두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던 시대였지. 마치 인류 지성의 황금기를 보는 것 같았다니까.” (p.159)

   

 

  작가가 그려내는 신인류나 하이테크 기술 또는 단어들이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보다는 조금 더 따뜻하고 인간적인, 그리고 희망적인 미래를 그려낸다. ‘서로를 밟고 그 위에 서는 인류와 함께 살아가는 현재다. 뉴스를 통해 알게 되는 소식은 대부분 화나거나 슬프거나 어이없거나 황당하다. 배려해라, 이해해라, 더불어 잘 살아야 한다. 끊임없이 듣고 이야기하고 가르치고 교육했는데, 갈수록 더 잔인하고 차가운 인류를 만들어 내고 있다. ‘기성세대인 아빠가 미안해~’라는 말은 상투적인지 오래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자위에 불과하다. 비록 실패한 프로젝트로 저 너머 우주로 소멸해 버린 안나의 동면기술 또한 지금 바로 필요한 기술이다. 우한 폐렴으로 전 세계가 쑥대밭이 될 것 같은 요즘에는 더욱 그렇다. 몇 시간 단위로 인터넷을 뒤지면 감염자와 사망자의 숫자가 늘어만 간다. 10년쯤 얼릴 수 있다면 이렇게 난리는 아닐 텐데 말이다.

    

 

어차피 출판사는 다 망해가고 있었어. 미디어 회사들에 모두 통합되어서 책 위주로 출간하는 곳은 사양산업이 된지도 한참 되었고.” (p.263)

    

 

  앞서 여러 번 언급한바, 작가는 나처럼 그 어떤 끄트머리를 계속 붙잡고 있다. 사실, 이 책을 보면서 유일하게 입꼬리를 씰룩이며 본 페이지다.

이야~ 저 때까지 책이 남아 있다는 말이야?’

책의 생명력은 대단하다. 우주를 개척하는 시대에 종이책이라니? 헛웃음이 나면서 동시에 반가웠다. 작가의 유머로 읽혔다. 지금도 종이책은 사양산업이니 말이다. 계속 사양산업인 채로 수백 년을 지속했으면 하는 바람은 나와 작가의 마지막 끄트머리.

   

 

  저 멀리 그때에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차라리 주변에 흩어진 그 끄트머리들을 붙잡아 늘어지고, 꿰매며 하루를 견뎌 나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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