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8
페터 한트케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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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당신, 인간이란 모름지기 약한 존재다.

강한 척 하며 낑낑거리며 몸부림치지만 약한 존재인 것은 틀림없다. 노벨상을 받은 작품을 굳이 읽지 않더라도 이것을 깨닫는 일은 어렵지 않다. 다른 이를 둘러볼 필요도 없다. 가만히 이부자리에 누워, 아니면 소파에 멍하지 앉아, 혹은 신호 대기하고 있는 차 안에서 문득 깨닫게 되는 일이다. 겨우 일어나 눈곱을 떼어 내고 대충 씻은 후 출근하기 위해 현관을 나서는 일련의 루틴처럼 일상적인 것이다. 특별한 존재일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나는 성선설이나 성악설 따위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딴 것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이 책을 읽기 전에도 나는 나의 눅진한 일상 속에서 종종 알아채던 바다.



“다음 날 오리건에서는 비가 내렸다. 금지된 행동이기 했지만 나는 밀짚모자를 쓰고는 포틀랜드 공항의 출구 쪽에 서서 에스터케이더로가는 차를 얻어 타려고 애를 썼다. 웨스턴 항공의 비행기를 타고 솔트레이크 시티를 경유해서 이곳으로 왔다.” (p.179)


 아내에게 우스개로 하는 말이 있다.

“로또 되면 나 팔도유람 하면서 떠돌아다니게 해줘.”

귀찮다는 듯 아내는 매번 같은 대답을 한다.

“팔도? 세계 유람하게 해 줄게. 되기나 해.”

주인공은 유리하며 유디트를 찾아다니고, 또 피해 다닌다. 짧은 편지를 쓴 후 긴 이별의 이유를 책의 중후반부터 소거해 나가는 플롯이지만 나는 그러한 일반적인 감상과 평가에도 공감이 가지 않았다. 주인공이 돌아다닌 발자국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어떻게 저렇게 돌아다닐 수 있지?’ 싶었다. 비행기를 타고, 버스를 타고, 히치하이킹으로, 두 발로 북아메리카 전역을 떠돈다. 그의 발자국을 따라다니다 보니 애초의 목적은 잊어버리기 일쑤다.



 “그런데 유디트는 어디 있어? 연극평론가가 휴대용 구급약품 상자에서 꺼낸 알약을 삼키면서 느닷없이 물었다.” (p.155)

“실은 나도 유디트가 어디 있는지 몰라. 우리 헤어졌거든.” (p.156)


 유디트를 쫓아 대륙을 넘어 날아와 떠돌아다니면서 그녀를 찾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찾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렵게 그녀의 흔적을 발견하지만 이내 잊어버린다. 일부러 잃어버리는 것 일지도. 처음엔 헷갈렸다. ‘이 사람 뭘 하고 있는 거야. 귀한 돈, 시간 써가면서 아내를 찾겠다는 거야 뭐야.’ 싶었다. 그런데, 문득 알게 되었다.

아!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구나!



 “오늘 난 미국에서의 두 번째 날을 맞는 거야.”

나는 말하면서 인도에서 도로로 내려가 걷다가 곧 다시 인도로 올라갔다.

“내가 좀 변하긴 한 걸까?” (p.20)


 종종 내가 아내에게 던지는 농담 반, 진담 반의 팔도유람 타령은 사실 지긋지긋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한 변명이다. 그렇게라도 한 번 질러보고 싶은 것이니까. 팔도유람을 한다고 해서 뭐 대단한 소설을 한편 쓴다거나 팔도에 흩어진 맛집유랑기를 쓴다거나 팔도에 숨겨진 특산물을 유통해 돈을 번다거나 하는 따위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인공에게 나를 투영하니 그의 발자국의 이면이 보였다. 기껏 날아온 대륙의 호텔 구석에서 자위를 하고 난 다음 날 길거리를 걸으며 “내가 좀 변하긴 한 걸까?”라는 자기긍정을 늘어놓는 것은 계속된 자위행위에 불과하다. 어딘가로 도망가고, 어딘가로 떠돌고 싶다는 마음은 일상의 숨 막힘의 이면이다. 회사 내 친한 동료들끼리 주고받는 대화방에서도 금요일이 되면 매주 같은 내용의 카톡을 올리는 형님이 있다.

“다음 주 월요일 출근 안 하면 알지? 퇴직금은 1/N로 나눠 가져라.”

다를 그렇게 피하고 싶은 것이다. 도무지 엎어버리지 못하는 일상의 버거움과 개인이 가진 나약함을 잠깐의 시답잖은 운에 기대 게워내려 하는 것이다.



 “세인트루이스에서 클레어에게 유디트와 지내면서 겪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나는 그녀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다.” (p.129)


 거짓말이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 두려움의 무게를 도무지 해결하지 못한 채 던지는 농이다. 회사 형님이 시답잖은 로또 운에 주말을 맡기는 것처럼, 함께 시간을 보내도 시답잖은 한 발자국조차 내딛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클레어와의 시간을 놓치기 싫은 것이다. 클레어라는 잠깐의 도피처 안에서 괜히 강한 척, 괜찮은 척 하고 싶은 거다. 가소롭기 짝이 없어 쓴웃음을 짓다가 클레어 앞에 선 그에게서 내 모습을 또 한 번 발견하게 된다. 내가 발가벗겨진 것은 아닌 가 흠칫 놀랐다. 등과 가슴, 팔다리에 요란한 그림을 그린 채 어깨를 떡 벌리고 사우나에 들어서는 아저씨들을 피해 다니기 위해 어깨를 잔뜩 움츠린 쪼그라든 내 모습 같았다.

  일하기 싫으면 언제든 사표 가져오라는 사장의 추궁은 회의 때마다 나오는 단골 메뉴다. 그 메뉴는 늘 넘칠 정도로 충분해 소화가 되지 않는다. 더부룩한 속을 부여잡고 몇몇이 모여 연기 굴뚝을 만들어 낸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당장 사표를 내던질 것처럼 하지만 아무도 실행하지는 않는다. 당장 이번 달 빠져나갈 카드 값에 대출금에 생활비에……. 호기는 담배연기와 함께 금세 흩어진다.



 “앞으로 내딛는 발은 날아갈 듯 가벼운 데 반해 뒤처지는 발은 납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묘한 기분으로 나는 호텔의 짐꾼을 따라갔다.” (p.60)


 내딛을 때는 신난다. 뒤처지는 발을 끌어당기는 것이 숙제다. 누군가, 어떤 동력이 뒤에서 밀어준다면 발걸음을 한결 가볍고 발자국은 깊게 패이지 않을 텐데. 요행을 바라는 것은 토요일 밤 로또 추첨 시간 직전까지다.

유디트의 행방을 좇는 그의 뒤처지는 발의 걸음이 유독 무겁고, 그 걸음이 딛는 발자국이 유독 깊게 패는 이유는 나와 당신들 또한 동일하게 경험하는 일상이다. 그렇게 나와 당신들은 그냥 ‘존버’하며 순간을 밀어내는 것이다. 그것 말고 다른 신통한 방법이나 요행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번은 길거리에서 서로 목을 조른 적이 있어.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씻었지. 그런 일이 있고 나서 한참 만에 다시 만났지. 처음에는 옛날의 다정함이 되살아나더군. 하지만 채 몇 분이 지나기도 전에” (p.130)


 미워하고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슬퍼하며 그렇게 순간을 살아내는 것이다. 그렇게 순간을 밀어내며 하루를 버티다 불현듯 나의 클레어를 찾아 잠시 쉬게 되고, 나의 연극평론가를 만나 뻔 한 거짓말을 내뱉기도 하며, 나의 영화감독을 만나 그가 늘어놓는 휘황찬란한 인생 이야기를 듣기도 하는 것이다.

출발은 유디트를 찾아 나선 주인공보다 내가 더 약한 존재일수 있다는 자각이다. 

 그 자각은 환각을 미연에 방지한다. 문란한 자기계발서 따위와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야기하는 비현실의 환각 말이다. 그래서 주인공처럼 애초에 어디로 가는지 조차, 누구를 찾는지 조차 잊어버린 채 도망 다니거나 쫓아다니는 존재가 기꺼이 되는 것이다.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순간을 밀어내며 하루를 버티다보면 불현듯 클레어를 만나 잠시 쉴 수도 있을지 모른다. 존 포드를 만나 그의 장황한 이야기 안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기대하지 않은 순간이 주는 쉼과 위안은 나약한 나와 당신의 뒤처진 발을 밀어주는 용기가 될 지도 모른다.


 안개 같은 일상의 반복일 테지만 어쩔 수 있나, 벗어날 수 없는 것을. 

 그렇다면 

 나와 당신, 이제 그 자욱한 안개 속으로 까무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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