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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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재 하는 고통을 직면하는 일은 쉽지 않다. 당장의 궁핍과 절망은 닿지 않는 이상과 꿈을 더욱 멀어지게 할 뿐이다. 달달한 사탕발림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기계발은 유혹조차 되지 않는 것이 다반사다. 어쩌면 미디어와 SNS를 통해 전파되는 고통을 이겨내고 극복하는 후기와 사연은 뜬구름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자각이 당장의 고통을 직면하는 가장 현명한 길일 수 있다.



“내가 책에 빠져 있는 건 아빠에게도 자랑이었지만 엄마에게도 그랬다. 나는 책을 통해 현실에서 도피했는데, 엄마와 아빠는 책을 좋아하는 나를 통해 미래로 도망가고 싶어 했다.” (p.28)


 가장 가깝다고 인식되는 가족 간에도 생각의 차이는 크고 깊을 수 있다. 어쩌면 생면부지의 어떤 대상보다 더 가혹할 수 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조차 가늠이 되지 않는 간극은 분명 존재한다. 실재하는 고통이다.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내재적 고통은 고스란히 당사자의 몫이 된다. 주변에서는 이러쿵저러쿵 훈수를 두기도 하고 위로입네 떠들어 대기도 하지만 1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다.



 “하루하루 죽음 준비하고, 하루하루 소생을 기대하면서 우리는 집단 자폐의 시간에 빠져들었다……. 우리는 좁은 공간에 갇힌 쥐들이 그러하듯 서로를 할퀴고 상처 냈다. 그게 시간을 버티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p.129)


 이 부분을 읽으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겪었던 고통의 경험을 남의 글에서 확인하는 것은 결코 흔하지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나의 고통이지만 도무지 내 말이나 내 글로 표현할 수 없었던 황망함과 거북스러움을 다른 이의 글에서 확인하다니, 정말 놀랐다.

내 아버지는 10년간의 암투병 끝에 작년 1월 돌아가셨다. 10년의 암투병은 곧 10년의 간병을 의미한다. 실제 암투병을 겪는 이의 가족이 아닌 이상 알 수 없는 일이다. 10년간의 간병은 병을 겪는 가족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이 오롯이 겪는 고통이다.

‘좁은 공간에 갇힌 쥐들이 그러하듯 서로를 할퀴고 상처 냈다.’라는 표현은 실제 그 고통을 겪은 사람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문장이고 표현이다. 이 문장을 여러 번 반복해 읽으며 위로를 받았다. 친지와 가까운 사람들이 건네는 인사치레와는 차원이 다른 위로였다.

말 그대로 진짜 위로였다.



 “그 아이는 끝내 구구단을 외우지 못했고, 나는 그 아이의 냄새에서 놓여나지 못했고, 끝나지 않은 구원에 진저리치면서 나는 내 행동이, 내 마음이 결코 선한 것이 아니었음을, 그 바탕에 놓인 건 오만과 치기뿐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날 이후, 나는 누구도 함부로 연민하지 않는다.” (p.9)


 작가의 산문을 읽는 매력을 이 책을 통해 또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일부러 꾸며낸 자학이 아닌 날 것 그대로의 고백을 확인하는 것은 매번 나의 그 고통의 경험을 마주하는 끔찍함이지만,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의 기억을 복기하는 것은 예기치 않은 위로가 된다. 어디까지나 나는 내 기준에서 책을 본다. 작가의 말대로 그 누가 다른 이의 고통과 결핍에 쉽게 대일밴드를 붙여댈 수 있나. 절대 그럴 수 없다.

에세이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내게 공감이 되고 위로가 되는 김현진 작가와 손홍규 작가에 이어 한지혜라는 이름을 리스트에 올려놓게 되었다. 그들의 에세이를 읽으며 나는 그들과 동화되고 그들의 글과 문장에서 표현되는 나의 고통에 다시 한 번 직면한다. 그것이 분명 나 자신에게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만큼 이기적이다.



 “경험이 누군가의 삶을 풍부하게 해주고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해 준다면 그건 바로 자기 자신의 삶이지 타인의 삶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누군가를 위해 고민하고 있다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첫마디는 ‘나는 너를 모른다’여야 할 것이다.” (p.46)


 맞다. 우리는, 아니 나는 너무 쉽게 위로 하려 든다. 너무 쉽게 가르치려 한다. 가만히 돌이켜 돌아보지 않으면 결코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얼마 전 입사한 회사의 후배는 나보다 열네 살이나 어리다. 덩치는 나보다 훨씬 크고 그가 가진 젊음의 기회는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지만 선배입네 하며 떠들어 댔다. 요즘 20대는 나의 20대 때와는 확연히 달라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거나 군에 입대하는 순간부터 미래를 걱정하고 고민하며 진로를 위해 부단히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들으며 놀라지만 그때뿐이다.

‘에헴, 그건 말이지……. 그럴 때는 말이지……. 그런 경우는 말이지…….’하며 꼰대 질을 늘어놓았던 것을 생각하면 쥐구멍에 숨고 싶다.


 ‘맞아, 나는 너를 몰라. 너의 이야기를 들려줘.’

라는 말을 했어야 했다. 과거형으로 앞의 문장을 갈음하는 것은 부정의 의미다.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시간에 전화를 걸어 ‘00야, 내가 말이야 생각해 보니까 너한테 되지도 않는 꼰대 질을 한 것 같아. 미안하다 야, 내일부터 너의 이야기를 들려줘.’라고 하면 ‘이거 뭐야, 미친놈인가?’하겠지만, 휴대폰 주소록을 열어 당장 통화를 하고 싶은 심정이다.

참자, 참고 혼자서 부끄러워하자. 반복하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자. 내가 할 수 있는 지금이 최선이다.



“직장에 다니면서 몇 번의 성추행을 더 경험했다. 자신을 아빠처럼 오빠처럼 대하라면서, 아빠이고 오빠라면 근친상간의 범주에 들어간 짓을 다정과 격려로 포장하는 남자들의 권력을 잡은 나라에서 여자들은 성추행, 성희롱을 일상처럼 경험한다.” (p.163)


 여혐, 남혐이 이렇게 극단으로 치닫는 사회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 사회가 이토록 퇴보할 줄 몰랐다. 따지고 들어야 할 이슈가 아님에도 자극적인 미디어의 장난질에 넘어가는 성(性)분리에 의한 갈등은 불필요한 힘의 낭비다. 성(性)의 구분을 넘어 함께 사회를 지탱하고 어깨를 걸어 살아가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는 작금의 현실이 답답하다.

결혼을 하고 가지게 된 친구들 가정과의 모임에서 꽤나 놀란 사실이 있다. 친구들의 아내, 후배의 아내들이 털어 놓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아침 출근길에 잡아 탄 택시 안에서 겪은 성희롱,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직장 동료와 상사에게 겪은 성차별, 그리고 자신이 여성이라고 인식하는 순간부터 직면해야 했던 일상에서의 성폭력에 대한 노출. 나는 단지 그들과 다른 성(性)이라서 단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 봇물 터지듯 얘기하는 여성들을 보며 정말 놀랐다. 뉴스와 드라마, 영화의 극적 상황보다 더 리얼하고 소름끼치는 것들이었다. 하얀 책 위에 까맣게 인쇄된 작가의 단어와 문장에서 재차 확인 하는 일은 버겁다. 딸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더 눈이 가고 마음이 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너를 모른다.’라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한다면, 힘의 낭비에 불과한 젠더 갈등은 생각보다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당연히 여성이 아니기에 잘 모를 수밖에 없고, 나는 당연히 남성이 아니기에 잘 모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출발점이다. 거창한 논리와 치밀한 설명은 불필요하다. 100분 토론을 보지 말고 이 책을 먼저 봤으면 좋겠다.



“이제 이 글이 어디까지 어떻게 닿을지 모르겠다. 많은 곳에 닿았으면 좋겠다.” (p.283)

“생존이란, 삶이란 순간이 아니라 영속성을 가진 시간을 가리키는 거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당신들, 살아갈 당신들이 저마다의 힘으로 끝내 버티기를. 나는 가늘고 길게 쥔 펜으로 앞으로도 계속 당신들을 쓰고, 나를 쓰고, 이 삶을 기록해볼 작정이다.” (p.283)


 이 책을 읽는 내내 느낀 작가의 겸손함은 그의 글의 힘을 배가 한다. 조심스럽게 기대한 글의 거리가 적어도 내게는 닿았음을 작가가 꼭 알았으면 좋겠다. 바쁘시지 않다면 부족한 리뷰지만 이 리뷰를 꼭 읽었으면 한다. 그리고 꼭 내 마지막 문장은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당신이 그렇게 끝내 버티는 만큼 나도 그 어딘가에서 순간을 버티고 일상을 밀어내며 살아갈 거라고, 당신의 글이 누군가에게는 꼭 닿고야 만다는 것을, 그리고 그곳에서 또 어딘가로 위로와 고백이 퍼져나갈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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