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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외출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아버지의 영원한 외출이, 14개월째다.
이 책을 구입하고 읽은 건 순전히 “아버지와 딸, 데면데면하지만 애틋한 관계”, “마스다 미리가 보인 솔직함에 우리는 마음을 털어놓고 싶어진다.” 라는 출판사 리뷰와 책소개 글 때문이다. 나도 14개월째 영원한 외출 중이신 아버지, 아버지와 나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냥 회상하며 돌이켜 보고 싶다.
“아버지와 딸, 데면데면하지만 애틋한 관계”라고 하는데, 사실 아버지와 아들만큼 데면데면한 관계가 또 있을까 싶다. 데면데면하기만 하면 다행이다. 주위에도 보면 40줄이 넘어서도 아직 아버지를 무척 무서워하는 사람도 있다. 이미 틀어져 버린 관계를 어떻게 회복해야 할 지 모르는 아들들도 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어머니를 통해 말을 전달하는 아들들도 있다.
나는 아버지와 가깝지 않았다. 어릴 때는 많이 무서워했다. 한껏 기대를 받는 큰 아들이었는데,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가 극도로 나빠졌을 무렵 나는 아버지와의 통화에서 절대로 하면 안 되는 말을 했다. 아버지도 절대로 하면 안 되는 말을 하셨다. 두 분, 서로를 위해 갈라서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절차를 밟고 서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오후였다.
“오전에 오는 전화로 좋은 소식은 없다. 스마트폰에 뜬 이름은 엄마였다. 전화를 받기 전,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버지의 용태가 심각하다고 한다. 앞으로 2,3일 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p.71)
어머니는 울음을 터뜨리며 전화하셨다.
“아버지가 암이래, 큰 병원에 당장 가보래.”
4기에 들어 선 직장암 판정. 2009년 봄이었다.
휴가를 내고 대구에서 부모님이 계신 포항으로 차를 몰았다. 귓가에 윙윙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반쯤 갔을까. 시야가 흐려지고 콧날이 시큰거렸다. 팔다리도 후들거려 운전하기가 쉽지 않았다. 가까운 휴게소로 급히 차를 세웠다. 터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어디쯤 왔냐는 어머니의 전화가 없었다면 한참을 그렇게 눈물만 쏟아내고 있었을 것이다.
내 잘못 같았다. 아버지에게 그렇게 독한 말을 쏟아내고 분노로 가득 차서 아버지를 몰아세웠었던 내 모습과 말과 행동들이 슬라이드처럼 지나갔다.
아버지는 4번의 수술, 5번의 항암치료, 2번의 방사선 치료를 하며 투병하셨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10년 동안.
“아버지는 이 방에서 임종을 맞고 싶겠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엄마에게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이 눈에 보였다. 들어줄 수 있는 것과 들어줄 수 없는 것. 앞으로 우리 가족은 하나하나 답을 내면서 아버지의 죽음과 마주해야 한다. 목에 작은 사탕이 걸린 것처럼 멍하고 답답했다.” (p.55)
돌아가시기 2년 전부터는 골반 뼈와 허벅지 뼈의 일부까지 암세포가 전이되어 하체를 거의 쓰지 못하고 누워 계셨다. 아버지의 간병은 오롯이 어머니의 몫이었다. 80kg에 육박하는 아버지를 누이고 일으키고 씻기고 밥 먹이고 침대에서 휠체어로 휠체어에서 침대로 옮기는 일을 50kg의 어머니가 떠안으셨다. 어머니의 몸에도 서서히 무리가 오기 시작했고, 어깨와 무릎 연골이 다 닳아 정형외과 치료를 받으시며 간병을 하셨다. 떨어져 있다는 핑계로 일주일에 한 번, 포항에 있는 병원에 내려 갈 때에야 어머니의 간병을 하루 덜어드릴 수 있었다.
10년의 투병 생활을 두고 병원에서는 열성적인 어머니의 간병이 아니었으면 벌써 돌아가셨을 거라고 했다. 몸이 아프면서도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는 어머니를 나무랐지만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요양병원을 수소문 했다. 아버지와 같은 환자는 받아주지 않았다. 챙겨먹는 약도 많고 하반신을 아예 쓰지 못하고 이것저것 달고 있는 장치들이 많아 안 되겠다고 했다. 포항, 경주, 영덕에 있는 요양병원까지 알아봤지만 받아주겠다는 곳이 없었다.
포항에 내려가는 날 저녁은 아버지와 나, 둘 만 병실에 있게 되었다. 여러 명이 함께 쓰는 다인실이었지만 개별 침대에 커튼을 다 치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아버지와 둘만 있게 되는 것이다. 매 시간 소변을 체크하고 씻기고 심부름을 하고 휠체어에 태워 운동을 하는 것이 전부다. 이렇게 쓰면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하지만 몸이 힘든 것은 별 거 아니었다. 아버지와는 해결되지 않은 일이 있었다. 목구멍에 걸려 도무지 빠지지 않는 생선 가시처럼 불편하고 답답했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나쁜 생각도 들었다.
호전되지 않는 아버지와 온 몸에 성한 곳이 없는 어머니를 보며 야금야금 들어 선 생각이었다.
‘차라리 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셨으면 좋겠다.’
아들이라는 놈의 생각이었다. 첫 아이라고 그렇게 좋아하셨다는데, 퇴근하면 품에서 놓지 않았다고 하셨다는데,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는 걸 늘 안타까워하고 아파하셨다는데, 손녀를 그렇게 예뻐하고 지 애비 닮아서 똘똘하다고 좋아하셨는데……. 나는 차라리 빨리 돌아가시는데 아버지를 위해서도, 어머니를 위해서도, 자식들을 위해서도 최선이라는 생각을 했다. 돌이켜 보면,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생각보다 내 생각이 우선했던 것 같다. 1년 6개월 동안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주 내려갔다. 금요일 저녁이나 토요일 아침에 내려가 일요일 늦은 오후에 올라오는 일정을 반복했다. 언제까지 이래야 되나 싶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 나쁜 생각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빨리 내려와라. 오늘 밤을 못 넘길 거 같대.”
2018년 1월5일 오후에 받은 어머니의 전화.
휴가를 내고 바로 내려갔다. 몇 시간 뒤 강원도에 살고 있는 동생이 내려왔다. 아버지는 임종 직전 입원하게 되는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 더 흘릴 것도 없는 눈물이 어머니의 마른 뺨에 흘려 내렸다.
자정이 막 지날 무렵, 얼마 버티지 못하신다는 의사의 판단이 내려졌다.
어머니는 두 아들에게 아버지께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하셨다. 동생이 먼저 했다. 나는 콱 박혀버린 가시를 여전히 빼내지 못하고 있었다. 눈치를 채신 어머니는 나와 아버지 손을 맞잡고 울며 얘기하셨다.
“여보, 영규가 할 말이 있대. 내말 들려? 여보, 우리 큰 아들이 꼭 할이 있대. 내말 들리지? 엉?”
“아버지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
터지는 울음에 섞여 절규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아버지, 정말 죄송해요. 아버지 기대 못 미쳐서 죄송해요. 그렇게 못되게 굴어서 죄송해요. 이제 정말 좋은 곳으로 가셔서 휠체어 타지 마시고 껑출껑충 뛰어 다니세요. 그렇게 좋아하시던 탁구도 실컷 치세요. 아버지……. 정말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새벽 1시20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영원한 외출이 시작된 거다.
마지막까지 아버지 몸에 연결되어 있던 각종 장치들을 떼어냈다. 하얀색 시트를 가져와 아버지 머리에서 발끝까지 덮으려던 찰나. 잠깐만요. 소리쳤다.
시트를 걷어내고 아버지 얼굴에 내 얼굴을 붐볐다.
“아버지, 애기 잘 키울게요. 어머니도 잘 모실게요. 정말 죄송해요……. 사랑해요. 아버지. 진짜 존경해요. 그 오랜 시간 고생하셨으니 편히 가세요. 죄송해요. 정말…….”
동생이 내 양쪽 겨드랑이를 잡고 일으켜 세울 때까지 무슨 말인지 기억도 안 나는 말을 쏟아냈다.
그게 마지막이다.
“아버지가 죽고 반년이 지나니 아버지를 떠올리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p.131)
맞다. 아버지를 떠올리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작년 가을, 새집으로 이사를 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난 후 어머니를 모셨다. 반갑게 할머니를 맞이한 딸아이가 할머니 품에서 얘기했다.
“할머니, 할머니, 할아버지도 오셨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죠?”
할머니는 한참을 우셨다. 나도, 아내도 울었다. 돌아가시고 나니, 시간이 빨리 간다. 빨리 가는 시간만큼 아버지를 떠올리는 횟수도 줄어간다.
“아빠, 여기서 곧잘 묘목을 사 왔는데.”
“아빠, 여기 풀빵 좋아했었지.”
“여기 고기만두도 좋아했었어.” (p.146)
아직도 어머니는 아버지 얘기가 나오면 눈물을 흘리신다. 그래도 본가에 내려가면 어쩔 수 없이 아버지 얘기가 나온다. 작가가 어머니와 대화하면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듯 남아있는 우리 가족도 그렇다.

얼마 전, 외장하드를 정리하다 눈을 뗄 수 없었던 사진이다.
3년 전 봄이었다. 일산에 있는 암센터에서 방사선 치료를 받으실 때다. 그때는 병원 앞에 환자방(원룸처럼 되어있는 집)을 빌려 치료가 끝날 때까지 계셨었다. 우리는 대구에서 일산으로 갔었다. 저때만 해도 어느 정도 다리를 쓰시던 때라 병원 안에 핀 봄꽃 구경을 하면서 찍은 사진이다. 이때도 아마 나는 투덜댔을 거다. 왔다갔다 힘드신데 뭘 꽃구경이냐고. 아버지도 시큰둥했지만 쟤가 직접 하겠다며 작은 손으로 휠체어를 붙드는 손녀를 보며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예쁘게 핀 꽃보다 우리 손녀가 더 예쁘다며 굳이 아픈 다리 위에 손녀를 올려놓으셨다. 모두가 기분이 좋아졌다. 꽃보다 더 활짝.
아직도 나는 목에 걸려 있던 가시로 인해 생긴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다. 돌아가시던 새벽, 나는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지만 아버지 대답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후회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걸 알고 있지만 또 다시 후회하게 된다.
내게는 영원히 아물지 않을 생채기 일 거다.
아버지, 그곳에서는 평안하시죠?
죄송해요. 사랑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