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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그녀를 우연히 만났다.
그녀를 그렇게 우연히 만난 건 6년만의 일이었다.
정확하게는 지나친 것이다.
업무 차 나간 외근 길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귀에 붙인 채 통화를 하고 있었다. 가까이 지나치는 순간 그녀가 흠칫 놀라는 걸 보고서야 그녀인 줄 알았다.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웃었다고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운 것은 아니었다. 아니, 울었을 수도 있다. 예측할 수 없던 우연한 만남에 서로 경황이 없었다. 우물쭈물 인사도 제대로 건네지 못했다. 그렇게 그녀는 예의 그 웃음을 지으며 황망히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나는 휴대폰을 귀에 붙인 채 이었다. 귀로는 여보세요. 여보세요. 라는 아득한 부름만 계속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통화를 마저 한 후 그녀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이런, 그녀는 받지 않았다. 전화를 받지 않아서 문자를 남겼다. 문자메시지 창을 띄어 놓고 아마 50번은 넘게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건 나를 피하는 건가, 아마 바쁜 일이 있을 거야, 진동으로 해놨나, 그녀도 반가웠을까, 내 번호를 잊어버려 안 받은 건가, 문자를 보내면 반가워할까, 반가워하겠지, 반가워할 거야. 문자를 보냈다.
물론, 답은 없었다.
근데, 살이 많이 쪘네……. 임신했나?
“나는 일어서서 마지막으로 한 번 수전을 보았다. 눈에서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나오는 길에 접수대에 들러 가장 가까운 주유소가 어디냐고 물었다. 접수대 남자는 매우 친절했다.” (p.380)
폴은 마지막으로 수전을 보았다. 눈물도 나오지 않은 무미건조한 작별이다. 세상의 가치, 편견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심정으로 시작된 그들의 기괴한(내게는 기괴하게 읽혔다)사랑이 결국 이렇게 늦가을 낙엽보다 더 찰나에 바스라 져버렸다. “반면 수전은 아이가 둘이었고 사반세기 동안 결혼 생활을 했지만, 미숙하기는 나와 마찬가지였다.” (p.35) “나는 열아홉이었고, 나는 사랑은 썩지 않는 것이라고, 시간과 퇴색에 내력이 있다고 믿었다.” (p.102)
중년 유부녀와 어린 청년의 연애는 그렇게 종지부를 찍는다. 그들이 만난 테니스장과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입원한 병실에서의 기억들도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거기서 폴은 주유소를 생각한다. 그리고 접수대 남자의 친절을 생각해 낸다. 이 무슨 정신 나간 놈이냐고? 아니. 아니다. 폴은 정신 나가지 않았다.
5년 만에 만난(잠시 지나친) 그녀에게 연락을 해보려 찌질 하게 문자를 썼다 지웠다 했던 것은 그녀에 대한 진심이었다. 그것이 아직도 그녀를 완전히 잊어버리지 못한 병신 같은 태도인지, 결혼식 전날 ‘이제 나는 어떡해…….어떡해’ 라며 울던 그녀와의 마지막 통화에 대한 책임질 수 없는 미안함인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하겠다. 제대로 인사하고 싶고 어떻게 지냈는지 잘 지내는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 그러면서 ‘근데 쟤 왜 저렇게 살이 찐 거지?’라는 생각을 해댔다.
폴이 정신이 나간 거라면 나도 정신이 나간 거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요.”
“‘너무’가 얼마나야?”
“수전의 경우에는 마시는 것 자체가요.” (p.210)
그녀는 늘 주위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친구들, 언니들, 오빠들, 부모까지도. 늘 당했다. 나에게 하소연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지쳐 있었다. 출장 차 먼 지역으로 간 날 늦은 밤,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받지 못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식당 주인이 성폭행을 하려고 달려드는 걸 겨우 뿌리치고 식당 화장실에 숨어 전화한 것이었다. 그런 식이었다. 늘 무슨 일이 생기고 아프고 울고. 그녀를 공격하는 사람 중 몇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그녀의 이야기와 판이하게 달랐다. 그녀는 완전한 거짓말쟁이라는 것이다. 허언증에 과대망상까지. 하지만, 나는 돌이킬 수 없었다. 동정인지 사랑인지 모를 감정이 이미 그녀에게 닿아 있었고,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나만이라도 그녀를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너는 스물다섯이고, 이런 종류의 상황에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신문에는 ‘중년의 여성 알코올중독자 애인을 감당하는 법’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없다.” (p.224)
“그쪽은 환자분의....?”
“대자입니다.” (p.263)
“내가 가장 가까운 친척입니다.”
“아들인가요?” (p.275)
중년의 여성 알코올중독자 애인을 둔 스물다섯 청년 폴. 사랑하는 여인의 대자가 되기도 하고 아들이 되기도 하고 가까운 친척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그들의 사랑은 식어갔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은 도저히 기어오를 수 없는 절벽이다.
그녀의 개인 홈페이지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내 노트북으로 보다가 로그아웃을 하지 않은 것이다. 사진과 날짜를 몇 개만 살펴보았다. 그녀는 거짓말쟁이였다. 내게 한 말들 중 많은 부분이 거짓이었다. 그녀를 공격하던 무리들의 말 중 많은 부분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너무 멀리 와버렸다. 나는 돌이킬 수 없었다. 내가 보지 않은 척, 모른 척 하는 것이 나에게도 그녀에게도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아! 맞다. 나중에 만나면 이것도 꼭 물어보려 했었다.
“나한테 거짓말 한 거 없어?”
그녀를 열심히 변호했었다. 거짓말쟁이가 아니라고 허언증 환자가 아니라고. 니네들이 잘못 생각하는 거라고. 나쁜 년놈들이라고.
그런데, 내가 속고 있었다.
“하지만 물론 수전을 사랑한 것은 절대 후회하지 않았다. 그가 후회한 것은 자신이 너무 어렸고, 너무 무지했고, 너무 절대주의자였고, 자신이 사랑의 본질이자 작용이라고 상상한 것에 너무 자신만만하다는 점이었다.” (p.365)
나도 후회하지 않는다. 사랑인지 동정인지 의리인지 모를 둘 사이. 지금 돌이켜 보면 분명하다. 사랑이었다. 물론, 내 혼자 생각이다.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그녀의 홈페이지에 담긴 것이 진실인지 여부도 중요하지 않다. 그냥 그때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너무 아껴서 내가 돌을 맞아도 아프지 않았다. 오랜 시간 가까웠던 사람들이 내게서 멀어져도 아쉽지 않았다. 미친 사랑이었다.
폴도 정말 수전을 사랑한 것일까?
“그는 가끔 자신에게 인생에 관한 질문을 던져보았다. 행복한 기억과 불행한 기억 가운데 어느 게 더 진실할까? 그는, 결국, 이 질문에는 답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p.289)
나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행복한 기억이 진실이다.
그래야 현재가 덜 비참하니까.
그래야 그녀에 대한 내 연애의 기억이 더 이상 남루해지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