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있지 말아요 - 당신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될 특별한 연애담
정여울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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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잘 있지 말아요」독자가 완성하는 연애담, 그것의 전달

 

 

 

 아무리 유익한 책이라도 그 반은 독자가 만든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문학자 볼테르가 한 말이다. 엄마의 배에서 탄생한 아이가 사회로 나아가며 하나의 인간으로 완성되듯이, 책 또한 작가의 손에서 태어나 독자에게 맞닿을 때 완성된다. 똑같은 이야기라 하더라도 독자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읽혀질 수 있다.

 어떤 사랑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추악하고 더러운 불륜 이야기가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아름답고 절실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1권의 책이 10명에게 읽힌다면 10권의 책이 완성되는 것이다. 

 

 「잘 있지 말아요」는 37권의 연애담이 정여울이라는 1명의 사람을 거쳐가며 완성된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이다. 이제는 불멸의 고전이 된 소설부터 시작해서 영화, 뮤지컬, 연극 등 다양한 매체로 뻗어나가며 사람들을 뒤흔들어놓은 사랑 이야기들이다. 이미 누군가에게 완성된 이야기를 전달받아 다시 한 번 나에게로 완성시키는 벅찬 감성을 담은 책, 「잘 있지 말아요」다.

 

 여기 내가 사랑하는 사랑 이야기들을 모았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은 어떤 기계장치로도 지울 수 없는 메모리와 같아서,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아주 작은 기억의 촉매만으로도 환하게 되살아난다. 이 사랑 이야기들은 수없이 영화나 연극이나 뮤지컬로 리메이크되었지만, 시대가 변할수록 더욱 새로운 울림으로 되살아난다. 

P.18

 

 



 

 등단한 작가와 하지 못한 작가의 큰 차이점 중 하나는 바로 문체, 문장력이다. 허를 찌르는 묘사나 기발한 표현은 그들만의 전유물처럼 따라 잡기 어려운 부분이다. 수 년간 갈고 닦은 그들만의 문체 역시 고유하고 유일한 영역이어서 함부로 넘어갈 수 없다. 책이란 문체가 생각보다 꽤나 중요하다. 

 문체는 말할 때의 말투와 비슷하다. 아마 느낀적이 있을테지만 똑같은 이야기라도 누가 얘기하냐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느낌이 매우 다르다. 어떤 얘기를 해도 재밌는 말투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얘기를 해도 재미없는 말투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등단한 작가들은 바로 그런 면에서 스페셜 리스트다. 똑같은 이야기를 재밌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  그래서 책, 특히 서사를 가진 책을 고를 때 등단한 작가와 그렇지 못한 작가를 차별하는 편이다. 

 

「잘 있지 말아요」프롤로그를 읽다 말고 프로필을 살펴봤다. 정여울이 어떤 작품으로 언제 등단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프로필 어디를 찾아봐도, 인터넷창을 열어 아무리 검색해봐도 그녀의 등단한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 그녀는 등단하지 않은 작가였지만, 명백히 자신만의 문체를 구축하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달할 수 있는 문장력을 가진 작가였다. 

 그녀의 문체는 약간 감상적이고 힘이 실린 느낌이 들긴 했지만, 시공간을 초월한 가치를 지닌 연애담들을 전달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문체였다. 지금 자신이 지니고 있는 감성, 이야기가 품고 있는 감동, 독자 마음에 스며들게 할 수 있는 표현들을 충분히 글로 창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위험한 관계」 의 진정한 매력은 오직 편지로만 이루어진 서간체 소설이라는 것, 나아가 프랑스 혁명 직전 파리 사교계의 방탕과 타락을 목격한 군인 출신의 작가 라클로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오직 편지로만 전해지는 등장인물의 욕망과 갈등은 편지를 쓰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의 은밀한 소통을 엿보는 비밀스런 쾌감을 선사해준다. 아무에게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전하는 편지를 중간에 가로채어 몰래 펴본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수신자에게 천연덕스레 전달해주는 듯한 야릇한 쾌감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다.

P. 133

 

 






 

 

 그녀의 그 탄탄한 문장력으로 전달하려는 것은 사랑의 다양한 속성 중 하나, 처절함이라 느껴진다.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이 사랑에는 숨이 끊어질 듯 사랑하면서도 '잘 있지 말아요'라고 속삭이는 반어적인 성질, 처절하리만큼 가슴을 옥죄는 속성이 있다. 태어나 사랑 한번 안 해본 사람이 없듯, 누군가가 오늘도 울고 아파할 사랑이 떠나간 밤에 위로가 되어줄 처절한 연애담을 들려준다. 

 마치 벼랑 끝에 내몰린 것처럼 아슬아슬한 사랑 이야기들은 촛불이 꺼지기 전에 가장 큰 빛을 내듯이 더 아름답고 눈물겹다. 그게 우리의 마음에 어떻게 와닿을지는 모르겠지만 정여울이 전달하려는 완성된 연애담들은 분명 혼자가 쓸쓸한 밤에 어울리는 한 권의 책이다.

 

 사랑에는 도통 자신이 없지만, 세상의 모든 사랑 이야기에 늘 마음이 끌리는 나는 이 책을 쓰는 내내 허허벌판에 내던져져 헤매다가 뜻밖의 아름다운 꽃들을 발견하고, 길을 잃은 사실도 잊어버린 채 그 모든 이름 모를 꽃들로 소담스러운 꽃다발을 만들어 독자들에게 선물하는 느낌이다. 내가 아끼는 사랑 이야기들로 한 올 한 올 엮어 만든 이 마음의 꽃다발이 여러분의 가슴속에 조금이라도 온기를 불어넣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아무리 힘든 순간에도, 당신의 가슴속에 오직 사랑만을 위해 비워둔 마암의 빈자리가 남아 있기를.

_ 뒷날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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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B끕 언어 : 비속어, 세상에 딴지 걸다
권희린 지음 / 네시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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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B끕 언어」제대로 된 비속어 쓰기 (e-book)


  B급 언어란 권희린 저자가 지칭하는 비속어를 뜻한다. 흔히 일상에서 사용하는 뽀록, 꽐라, 쪽바리 등의 친근한 언어 말이다. 권희린 저자가 현직 국어 교사이니만큼 비속어는 나쁩니다 사용하지 맙시다 같이 딱딱하고 교과적인 내용이 들어 있을까 내심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비속어를 무작정 비난하는 내용은 없었다. 

 

 책은 B급이 가져다 주는 매력에 대해 말하며 시작한다. B급 정서로 세계인을 사로잡은 싸이의 강남 스타일을 예로 드는 설득은 꽤 납득이 간다. 비속어가 만약에 세상에서 금지된다면 '비속어방'과 같은 업종이 유행할지도 모른다는 재밌는 상상을 곁들어 비속어의 존재를 인정한다. 때때로 가슴을 후련하게 해주고 소통을 원활하게 해주는  쿨한 친구 같은 B급을 무작정 배척하지 않는다. 

 다만 그 어원을 살펴보고 그 뜻에 맞게끔 사용하자는 것이다. 예전에 티비프로그램을 통해 일본어로 욕이 쓰여진 티셔츠를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바보같이 멋있다며 입고 다니던 사람들을 본적이 있다. 그들은 전파를 통해 공개적으로 웃음거리가 됐지만, 우리나라 욕도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 쓰는 사람도 마찬가지의 모습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에 따라 어감에 따라 무작정 쓰거나, '욕'이라는 일관된 형태로 사용하지 않도록 정확한 뜻을 새겨놓는 일이 필요하다. 또한 교양을 갖추어야 할 자리에서 대체할 수 있는 언어도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꽤 요긴할 수 있다.

 남녀의 성행위에서 유례된 '빼도 박도 못하다' 라는 표현이나 잘차려진 밥상이라는 뜻의 '차반'에 개를 붙여 개가 먹는 밥상, 즉 대변을 가르키는 뜻의 '개차반' 등의 표현, 단어는 뜻을 알게되어 재밌어지고 사용의 유무를 판단하기에 적절한 도움을 준다. 

 

 


 

 언뜻 사전과 같은 형태로 전개될 모양을 띄고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비속어에 담긴 저자의 재밌는 에피소드, 가슴 뭉클한 이야기가 곁들어져 있어 이야기는 지루할 틈이 없다. 

 

 한 달 동안 이루어진 교원평가, 그 찜찜한(?) 상자를 열어보면 기분이 썩 좋을 리 없다. 이게 수업 평가인지 인기 투표인지 외모 평가인지 구분 못하는 참 수준 떨어지는 고딩들이 몇몇 있기 때문이다. 올해도 마찬가지로 내 교원평가 자료에는 외모에 대해 토론의 장이 펼쳐졌다. 쭉 읽어나가면서 속으로 '내가 뭇느 연예인이니, 내 외모가 무슨 상관이니, 나 그냥 이대로 살게 내버려둬, 그래도 우리 엄만 내가 젤 예쁘댔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즈음, 갑자기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띵~ 하는 느낌을 들게 하는 글이 나타났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선생님 수업 잘 듣고 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쓰시는 '거지같다' 는 표현은 안 하셨으면 해요. 저희 집이 정말 가난한데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뜨끔하고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P. 56

 


 

 전체적으로 에세이 형태로 전개되어서 그런지 읽다보면 문득 책의 방향성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대체 저자는 어떤 의도를 가진 것인지,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정체가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아마 저자도 그런 비슷한 염려를 했는지 '비속어가 만약에 세상에 없다면' 이라는 제목의 에필로그로 정확히 마무리를 지어주고 간다.

 비속어란 것은 대체로 감정적인 표현들이 많기 때문에 마음 속에 쌓인 것들을 배출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주장이다. 굉장히 긍정적인 형태는 아니지만, 상대방에게 큰 상처를 주지 않는 테두리 안에서 사용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B급이란 A급보다 친근하고 익숙하며 때론 활력이 된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이 간다. 우리가 B급의 삶을 살고 있을지라도 A급보다 재밌을 수 있고 누군가에게 웃음을 줄 수 있는 그럼 삶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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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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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소설 읽는 방법」소설 읽는 방법을 반드시 알아야할까?


 



 「책을 읽는 방법」으로 꽤 좋은 반응을 얻었던 히라노 게이치로가 후속편격인 「소설 읽는 방법」을 출간했다. 출간 배경은 이렇다. 「책을 읽는 방법」에서 속독보다는 슬로 리딩을 권하는 내용을 말했다. 그에 대해 책 읽기가 한결 편해졌다는 좋은 반응도 있었지만, 속독을 무작정 안 좋은 시선으로 바라볼 게 아니라 속독으로 읽어도 되는 책, 주로 자기계발서나 정보서 등과 슬로 리딩으로 읽어야만 하는 책을 구분해줬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나왔다. 

 그 의견을 수렴한 히라노 게이치로는 슬로 리딩이 가장 필요한 장르는 소설이라는 판단하에 「소설 읽는 방법」을 쓰게 됐다.

 

 책은 기초편과 실천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기초편에서는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간략하게 정의하고, 지나가는 굼벵이마저 스마트하고 빠른 이세상에서, 왜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까지 소설을 읽어야하는지 말해주고 있다. 

 이어서 매커니즘, 발달, 기능, 진화 등 네 가지 질문을 통해 소설을 분석하는 기술적인 측면과 이 소설은 '무엇'이다 라는 궁극의 술어를 찾는 과정, 그 과정에 포함된 화살표 등을 파악할 수 있게 말해주고 있다.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실천편은, 저자가 고른 소설의 내용 몇 페이지를 첨부해 어떻게 분석하는지 보여준다.


 



 

 책의 의도는 분명하다. 프로 작가, 프로 독서가인 히라노 게이치로가 평생동안 읽고 쓰며 익힌 소설을 읽는 노하우를 가르쳐주는 책이다. 조금 더 쉽고, 재밌고, 많은 것을 알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분석 독서법이 담겨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제목만을 바라봤을 때 이런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을 읽는 방법을 꼭 알아야 할까? 아니, 소설을 꼭 분석하면서 읽어야 하나?

 「소설 읽는 방법」이란 제목은 어딘가 목적성이 느껴진다. 마치 자기 소개서 쓰는 방법, 인맥 넓히는 방법, 상사에게 잘 보이는 방법과 비슷한 제목을 가진 책처럼 말이다. 

 

 눈에 띄는 실적을 올리거나 관계 개선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읽히는 책처럼, 소설 읽는 방법이라는 제목은 즐기거나 감동을 받는 원초적인 소설의 목적과는 다르게 정답을 찾아내거나 오독을 막기 위한 방법론, 이론서처럼 느껴진다. 

 아마 저자도 이런 반응을 우려했는지 여러 페이지를 사용해서 소설을 조금 더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낭만적인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에 대해, 소설이란 원래 감정의 동요를 즐기기 위해 읽는 것이므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보다 우선 느끼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나도 똑같은 의견이다. 내가 어떤 소설을 읽을 때는 역시 감동하면서 읽고 싶고, 독자분들이 내 소설을 읽어주실 때는 더욱더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중략)

 그래도 소설이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어떤 발전을 이루어왔으며, 한 작가의 작품이 어떤 식으로 성장해가고 또한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단이 이쏙 그것을 잘 알게 되면 소설을 사랑하는 방법이 변화하는 일도 있을 것이다. 

P. 47~48





 

 히라노 게이치로 역시 소설을 읽으며 '감동받고 싶어 하는 마음'에 동의하며, 대한민국 현대인들이 책에 거부감을 느끼게 된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정답을 찾는 소설 분석을 권하지 않는다. 오히려 창조적인 오독을 즐기라고 말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생각하면 이 책에 대한 정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작가이기전에 독자였던 히라노 게이치로라는 다독가에게서, 소설을 읽고 분석하는 방법에 대한 여러가지 지식과 노하우를 전수 받아, 조금 더 재밌고, 쉽게 소설을 읽을 수 있게 도와주고 결정적으로 그건 소설을 조금 더 사랑할 수 있게 되는 큰 원동력을 만들어 줄 책!

 

 정의라고 했는데 너무 긴 게 아닌가 싶다. 내 식대로 편하게 해석하면 이렇다. 매일 청결하게 하고 다니는 여자의 그 청결함에 반했다. 알고보니 그 청결함은 직업상 매일 아이들과 접촉하기 때문에 그들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이었다. 그래서 난 그녀의 청결함과 더불어 마음씨에도 반하게 되었다. 

 이런식 아닐까? 더 자세히 알게 되어, 사랑할 수 있는 여지를 넓혀주는 것. 그것이 내가 느낀「소설 읽는 방법」의 궁극의 술어다.

 

 히라노 게이치로가 제시하는 방법적인, 기술적인, 감정적인 소설에 대한 분석이 얼마나 많은 독자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개인적으로 문예창작과를 나온 나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소설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사랑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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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 첫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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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저녁 무렵에 면도하기」작지만 소중한 행복한 일상

 

 어느 날, 무라카미 하루키 씨에게(이하 하루키 씨) 독일의 한 신문사에서 편지가 왔다. 독일에 있는 인기 텔레비전 문예비평 프로그램에서 독일어로 번역된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을 다루었다가 문제가 생겼다는 내용이었다. 레플러 여사라는 고명한 문학평론가가 "이런 책은 이 프로에서 추방해야 한다. 이것은 문학이 아니다. 문학의 탈을 쓴 패스트푸드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했다. 그러자 여든 살의 사회자가 나서서 하루키 씨를 뜨겁게 변호해주었고, 결국 레플러 여사는 화가 나서 십이 년 동안 지켜온 고정패널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무라카미 씨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내용의 편지였다. "그러니까 원래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요, 정말로" 하고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충고해주고 싶은데.

P. 107

 

 사실 하루키 씨의 소설에 관한 '이런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등장하긴 한다만 나에게 하루키 씨의 소설이란 매우 소중한 존재다. 문예창작과에 처음 입학해서 선배의 추천으로 읽어 본 「해변의 카프카」는 책의 세계로 인도시켜 준 아주아주 고마운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단 한 권만으로(상, 하 두 권이었지만) 하루키 씨를 찬양하게 되어 그 선배에게 열렬히 '하루키 세계'를 토론하며 노벨문학상을 언급 했을 때 선배는 이런 말을 했다. "음… 나도 하루키 소설을 정말 좋아하지만 아마 노벨문학상을 받는 일은 없을 거야." 그때는 그토록 하루키 씨를 찬양하는 선배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사실 하루키 씨의 소설은 꽤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편이고 이제는 조금은 그 뜻을 알 거 같다. 

 

 그런데 그의 에세이의 평가는 어떤가하면, 하루키 씨의 진가는 소설보다 에세이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의 독특하고 기묘한 세계의 본질을 확실히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항상 마주하는 사물이나 일상에 대해서 전혀 다른 생각, 아주 같은 생각으로 재밌는 이야기를 전해주는 그의 에세이는 삶의 소중한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한 해에 한 번 정도 열리는 전국 고양이 회의에서, "이 혹독한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고양이들도 시스템의 재정비 및 과감한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겠나? 같은 결의가 채택되어, 전국의 네코야마 씨들이 신사 정원의 한 구석에서 팔짱을 끼고, "그래, 그래. 그럴지도 몰라"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지 않을까?

P. 27

 

 놀랍도록 기묘한 하지만 일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에세이,「저녁 무렵에 면도하기」는 일주일에 한 번 오는 주말 예능과 같은 대우를 해주고 싶다. 그저 멍청하니 글을 따라 읽어내려가기만해도 하하, 후후 하는 여러 종류의 기분 전환이 된다. 조금 더 주관적인 생각을 덧붙이자면 인위적인 느낌이나는 개그 프로그램보다는 자연스러운 분위기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과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더 아껴보게 된다. 2~3개의 에피소드를 읽고 책을 덮은 뒤, 라랄라하는 발랄한 기분으로 다른 일을 한다. 계속해서 읽으려하면 몸이 견디질 못한다. 마치 일생에 남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소중한 재미를 가불 받아 써버리는 소모적인 느낌마저 든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 하나씩 꺼내 읽게 되는 복주머니 같은 에세이다. 또한 서점에 '진열된 하루키 씨의 책이 흐트러져 있으면 가지런하게 바로해놓는다' 라고 표현하며 팬을 자처한 오하시 아유미 일러스트레이터의 삽화가 주는 꺠알 같은 재미도 빠트릴 수 없다.

 

 굵게 만 김밥이란 정말 참 훌륭하다. 여러 가지 재료들이 모두 한 이불을 덮고 있는 것 같아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데 대부분의 여자들은 김밥 양끝의 내용물이 다 튀어나온 부분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어째서일까?

P. 75

 

 하루키 씨의 소설이 문학인가 아닌가하는 문제는 논외로 접어두고, 그는 분명 많은 팬들을 끌어당기는 힘을 가진 작가다. 출간하는 책마다 대박을 터트리기 때문에, 아마도 그들 중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인간을 알고 싶어 하는 독자도 많을 것이다. 한 사람에 대해 알고 싶고 친해지고 싶다면, 담배를 같이 피우거나, 술 한잔 기울이는 것도 좋지만 그가 쓴 글을 읽어 보는 게 최고라고 생각한다.

 글에는 반드시 쓴 사람의 채취가 뭍어있기 때문에 솔직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어느 때보다 진실한 이야기를 나누는 기분이랄까. 하루키 에세이는 하루키라는 독특하고 기발한 인간을 알기에 아주 좋은 글들임이 틀림없다. 작지만 소중한 행복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분명 하루키 씨의 에세이도 사랑할 거라 생각한다.

 

 체크아웃하고 아침 일찍 호텔을 나와, 차 시동을 걸고 (부릉!) 시가지를 벗어나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수동변속기는 마치 따뜻한 나이프로 버터를 자를 때처럼 부드러웠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아침을 한 다스 고르라 하면 아마 이날 아침이 그중에 들어갈 것이다.

P.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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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알려준 것들 - 일상에서 건져올린 삶의 편린들
가와카미 미에코 지음, 정선희 옮김 / M&K(엠앤케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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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평]「인생이 알려준 것들」재해를 버티는 일상의 힘

 

 

리가 아는 개그우먼 정선희 씨가 번역을 맡은 가와카미 미에코의 에세이다. 정선희 씨는 옮긴이의 넋두리에서 이 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지금 이 도시에 차고 넘치는 따스하고 친절한 '힐링 도서'도 아니고, 카리스마 넘치는 '멘토'의 힘찬 메시지와도 거리가 멀다. 

P.12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이, 차고 넘쳐 나에게로 흘러들어 온 힐링 도서, 멘토의 메시지였다면 끝까지 읽을 자신이 없었다. 내 입장을 말해본다면, 힐링과 멘토가 너무 지겹다. 얼마전에는 어느 분야에서나 마치 화장품 샘플을 끼워 넣어주듯 소셜(social)을 어거지로 집어넣더니 요즘엔 힐링과 멘토가 대세다. 이런 현상을 보고있노라면, 인생을 살면서, 마치 비를 맞듯이 어느정도 지니고 있어야 할 상처조차 전부 과도하게 반창고를 붙이는 것 같다. 눈 가리고 아웅하다가 멀쩡하게 성장해야 할 면역 체계를 파괴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피어싱 구멍을 상처라 여겨 자꾸 '치유'해 버리면 곤란한 것처럼. 정선희 씨는 번역을 하며 느꼈던 고단함을 '힐링 도서'가 아님에도 가와카미 미에코와 함께 했던 시간 웃고 있었다고 말한다.

 


 

 참, 그건 그렇고 오래전에 티비에서 봤던 개그우먼이 번역을 했다니 이런 일도 있구나 싶긴 했다. 많은 사람들이 정선희 씨가 일본어를 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보지만, 집에 티비도 없고 라디오도 듣지 않는 나로서는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어쨌든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번역이란 건 그냥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단순하고 일방적인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쪽 세계에서는 나름대로 제 2의 창작이라는 게 정설인 모양이니 실로 어려운 일이라고 봐야겠다. 

 일본어로서 흘러가는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고 한국어의 흐름으로 옮긴다는 일이 보통의 '일본어를 잘한다' 라는 모양으로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개그우먼 출신의 그녀가 그런 '창조적인 일'을 잘 수행해낼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과 걱정, 그리고 관심과 호기심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나보다. 이 책은 초점이 너무 과도하게 '정선희 씨의 번역'으로 맞춰져 있다.

 


 

 가와카미 미에코 씨는 일본 최고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작가에다가 가수로서 앨범을 내고, 시집을 통해 문학상을 수상한데다가 영화배우로도 데뷔하여 신인상을 휩쓸었던 엄청난 예술적 재능을 지닌 인물이다. 그런데, 책이라는 구성물 중에서 꽤 많은 영역을 차지하는 뒷표지 부분이 온통 정선희 씨의 번역에 대한 지인들의 감상이라니…. 물건을 사러 갔다가 물건을 파는 누나에게 정신을 빼앗긴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출판사는 출판사 나름대로 정선희 씨의 프로필에 원저자와 번역자가, 삶, 생각, 유머감각, 성찰 등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고 변명을 하며 초점이 흐트러진 이유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런데 책 내용 중 정선희 씨에 대한 어떤 모습도 찾아볼 수 없으니(당연하지만) 그녀들이 닮았는지 아닌지는 도통 알 도리가 없다.

 


 

 이건 아무리봐도, 상대적으로 국내에 인지도가 부족한 가와카미 미에코 씨이기 때문에 정선희 씨의 번역이라는 등에 업히려 했다는 상술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뒷표지에 대한 아쉬움은 편집으로도 이어진다. 책 안에는 여기가 바로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해주는 듯이 글씨 색깔이 바뀌며 밑줄이 쳐진 부분이 있다. 아무래도 거슬린다. 문제를 풀기 전에 답안지를 봐버린 느낌이랄까. 추리 소설을 읽다가 범인이 누군지 알만큼의 과도한 힌트가 노출된 정도의 느낌. 

 이런 과도한 친절은 독자를 불편하게 한다. 내가 스스로 판단하고, 주제와 핵심을 찾아나가는 모험적 요소를 뺏어가는 셈이다. 이런 것은 인터넷 소설에서 이모티콘을 사용하는 일과 다를 게 없다. 만드는 이의 의도대로 작위적인, 글이 아닌 다른 무엇의 작위적인 수단을 첨가하는 것. 그것과 똑같이 거북하다. 

 

 이런저런 아쉬움에도 책은 꽤 잘 읽힌다. 취향을 좀 탈 거 같긴 하지만 굉장히 재밌기도 하다. 아마도 나처럼 무라카미 하루키 씨의 에세이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분명히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인상이 있다. 인생이 알려준 것들이라는 제목은 굉장히 대단하고 거창해 보인다. 어떤 철학적, 문학적 메시지가 담겨 있을 것인가 두둥! 이런 느낌이다. 인생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이 대단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에는 인생의 방점을 찍는 결정적인 순간, 영광의 날 같은 손꼽을만한 이벤트를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저 일생에서 맛 본 소소한 에피소드, 거기서 알아 낸 작은 행복감들을 이야기 한다. 생각해보면 인생의 대부분은 일상으로 채워져 있다 .우리가 알아가고 배우고 느끼는 것 대부분 역시 일상에서 우러나온 것! 과도한 업무나 부담스러운 경제 상황, 거북한 인간관계 등이 마치 재해처럼 다가오는 삶이지만,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일상을 통해 그것을 버티는 힘을 말한다.

 


 

 일상의 이야기는 그렇게 흐르고 흘러 3월의 기억, 2011년 3월 11일에 일어난 동일본대지진에 대해 말하며 절정으로 흐른다. 기승전결이라는 일반적인 구조에 부합하는 4개의 챕터 중 3번째에 위치하고 있고,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들은 대지진이라는 재해의 극악무도함과 일상이라는 평온함을 극명히 대조시키켜 하이라이트에 적합하다. 

 '우리들을 덮치는 느긋한 그 무엇' 이야기에선 지진피해를 겪음으로 걱정할 수 있는 정상성 바이어스1와 게슈탈트의 붕괴현상2을 이야기 한다. 가만히 읽으며 '아, 역시 지진이란 무섭구나. 대륙판이 느긋한 나라에 살아서 다행이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것들이 우리의 평소 삶이랑 그다지 다를 게 없다는 걸 느꼈다. 

 게슈탈트의 붕괴 현상. 우리 지금 사회도 돈, 돈, 돈이나 성공, 성공, 성공, 스펙, 스펙, 스펙을 대뇌이다가 대상에 대한 정의를 잃어버린 붕괴 사회가 아닌가. 우리는 어쩌면 이런 심각한 문제에 대한 판단을 느슨하게 내버려서 당황하지 않는 정상성 바이어스를 느낄정도의 충격적인 사회를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지진이라는 큰 재앙을 겪지 않았음에도.

 


 

 이야기의 마지막은 '다만 일상, 결국 삶'으로 마무리 하고 있다. 대재앙에 대한 아픔도, 사회에 대한 아픔도 결국 우리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일상으로 되돌아온다. 가와카미 미에코 씨는 아마도 일상으로 되돌아 가려는 사람들의 힘을 느끼고 이런 마무리를 짓지 않았을까. 그녀의 인생이 알려준 것들은, 재해와 같이 닥쳐오는 아픔들과 그것을 버티는 일상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를 추진해온 거대한 엔진 중의 하나는 이러한 영문 모를 수수게끼에 대한 저항이 아닐까 싶다. 종교도 과학도 전쟁도 사랑도 철학도, 결국 '생을 유지하는 것=죽음에의 공포, 그것에 대한 해명과 극복'을 원동력으로 날마다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P.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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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사물에 대한 판단을 느슨하게 내려버려서 오히려 당황하지 않게 되어버리는 심리 상태
  2. 어떤 대상에 지나치게 집중하여 대뇌이다 보면 그 대상에 대한 정의를 잃어버리 게 되는 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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