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야 우리는 언젠가부터 주위 사람들의 진정한 얼굴을 볼 줄 모르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동시대인들에게 더는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그저 그들에게서 우리의 행동 방침에 유용한 방향성이나 규칙을 찾는 데만 급급할 뿐이다. 우리가 그들의 얼굴에서 선호하는 건 더할 수 없이 닳고 닳은 시(詩)이다. 
- P61

가슴으로 확신하는 진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어스름이 피렌체 들판의 포도밭과 올리브나무들을 조용하고 커다란 슬픔으로 물들이기 시작한 어느 저녁, 나는 그 사실이 자명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 고장의 슬픔은 아름다움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일 뿐이다. 저녁 공기를 가르며 달리는 기차 안에서 나는 내 안의 무언가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오늘 슬픔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이것이 그럼에도 행복이라는 걸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 P64

하지만 행복은 늘 과분한 것이기에 놓치기 쉬운 법이다.  - P64

사랑 때문에 죽는 것만큼 헛된 일은 없다. 기필코 살아야 하리라. 살아있는 로렌조가 장미꽃 나무가 곁에 심어진 채 땅속에 묻힌 로미오보다 낫다. 
- P66

묘비명에 따르면 거의 모두가 죽음을 체념하고 있었는데, 아마 그들이 또 다른 의무를 받아들였기때문이리라.
- P68

인간이 자신의 마음이 순수하다고 느끼는 건 흔히 있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순간이 왔을 때 인간의 의무란 자신을 그토록 특별하게 정화시킨 것을 진실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 P69

절망이 어느 정도 연속되면 그 속에서 기쁨이 피어날 수도 있다. 삶의 온도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영혼과 피가 섞여, 모순에도 편안해지고 신앙과 의무에도 무심해진다.
- P70

여기서 우리는 적어도 아무것에도 기대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오직 현재만을 우리에게 ‘덤으로 주어진 유일한 진실로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 P72

모든 진실에는 쓴맛이 섞여있다는것이 사실이라면, 모든 부정에는 긍정의 씨앗이 움트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 P74

이제 이 이야기의 핵심은 어떤 사막에 대한 지도를 그려보려는 시도임이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이 오묘한 사막은 절대 갈증을 속이지 않고 그곳에서 살아갈 능력이 있는 이들에게만 감지된다. 그때서야, 오직 그때서야 비로소 이 사막엔 행복의 청량한 물이 넘쳐나게 될 것이다.
- P76

세계를 이해하려면 때로는 다른 데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인간에게 더욱 헌신하려면 그들과 잠시 거리를 두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힘을얻는 데 필요한 고독은 정신을 집중하고 용기를 가늠하기 위한 긴호흡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 P85

데카르트는 암스테르담에서 문우인 장루이 귀에 드 발작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대규모 군중의 혼잡 속에서, 그대가 그대의 오솔길에서 누리는 만큼의 자유와 여유를 만끽하며 매일 산책을 합니다."
- P93

두 도시의 경쟁심은 아무 이유가 없는 만큼 더 거세다. 서로 사랑할 이유밖에 없기에, 그에 비례하여 서로를 증오하는 것이다. - P96

세계는 아름답고, 세계를 떠나서는 구원이란 없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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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미와 나이가 주는 무게, 삶의 가치 3종세트를 절대 무겁지 않게, 심지어 밝고 살짝 코믹하게 공감하는 책을 읽었다. 제목을 다시 읽어본다. 이 나이는 몇 살일까? 우리 사회에서는 암묵적으로 이 나이면 무엇을 이루었어야 하고, 이 나이엔 이런거 하면 안되고, 저 나이엔 칭찬받는 게 이 나이엔 철 없다는 시선을 둔다. 만약 ‘아닌데?‘라고 하는 누군가 있다면, 난 ‘ 멋있셔‘하면서 바라볼 뿐. 그리고 ‘이 나이‘ 옆에 ‘기어이‘ 라니. 뭔가 안 될 이유도 많은데 뭔가를 했다는 귀여운 뻔뻔함이 느껴진다.

🎶 평소 ‘취미가 너희를 구원하리라‘를 마음에 품고 사는 나로서는, 취미를 가질 시간도 돈도 없던 부모님세대에 죄송했고, 여유도 관심도 없던 우리 세대는 이해가 되기도 하고, 취미도 스펙으로 여겨져 많은 취미에 스트레스 받는 아이들을 안쓰러워했다. 그리고 꿋꿋하게 내 취미를 이어갔다. 그 올드하다는 책을 읽고, 피아노는 연습은 안해도 사랑했으며, 낑낑거리는 바이올린을 다시 시작한지 일 년 반이 되었다. 그렇지만 나를 구원하는 취미라는 건 돈과 시간이 필요했다. 잠 잘 시간도 모잘라 쓰러지던 내가 무슨 취미며 (결국 한참 시절의 베이스기타는 우리집 고물로), 계획 없던 퇴사 후 백수가 된 내가 취미에 쏟을 돈이라니.

🎶 그럼에도 어떻게 어떻게 취미를 이어가고 있는 내게 이 책은 공감과 위로였다. 그래서 우리는 이 나이에 기어이 하고 있다. 저자 역시 같은 장애물이 있었지만 얼떨결에 취미를 시작한다. 꼭 취미가 아니라도 모든 너무 많은 고민을 하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는 법. 비용이 신경쓰여 첼로케이스는 검은 자루(그리고 ‘시체유기용 바디백‘이라는 용어를 같이 쓰는 작가님. 아이구 어머나)부터 시작. 그리고 시작되는 이야기들. 첼로는 저자를 또 하나의 세계로 가게 해 준다.

🎶 여담. 책 보다 작가님을 먼저 만났다. 아줌마, 사모님, 어머님 호칭에 불끈하는 책내용을 볼 때마다 우아하고 귀여운 작가님께 그럴리 없다고 도리도리질을 하며 읽었다. 라디오작가와 출판번역을 하신다는 얘기를 듣고 난 얼마나 부러워하며 봤던가. 난 애도 없는데 자꾸 어머님이란 소리를 많이 듣는다. 우리 호칭 좀 바꿔요. 아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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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흥미롭게도 세 명의 작가가 같은 키워드로 각자의 소설을 쓰며 비슷한 듯 다른 독립적인 이야기가 펼쳐지며 연결된다. 제목과 다르게 세 편 모두 얼핏 생각하면 흔히 말하는 봄이 느낌이 없다. 약간 싸하고, 살짝 피곤한 관계인 듯 하기도 하고, 조금은 우울할 수도 있다. 그런데 분명 위로나 따뜻함과는 결이 다른데, <봄이 오면 녹는>이란 전체 제목은 다 읽고 나면 이게 맞다 싶기도 하다. 얼어 있다가 녹을 수도 있는 그런 어떤 것.

🍓 읽는 내내 불편하면서도 공감이 간 책이었었다. 고백하자면... 요즘 계속해서 드러내진 않았지만 아무도 모르게, 손절까진 아니지만 아름다운 거리 두기를 생각했었다. 어떤 인연은 시간이 계속 쌓이면 단단해지는 것이 아니라 보잘 것 없어지는 경우도 있다.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날은 언제나 그렇듯 울적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그래서 이 소설은 불편했다. 동시에 마음이 갔다. 책을 읽으며 책방지기님이 이 책을 선정하신 이유가 궁금해졌다. 이렇게 짜증나면서 마음이 가다니. 싫기도 좋기도 했다.

🍓 세 편 모두 키워드는 손절. 그렇지만 봄이 오면 녹는, 이란 제목은 어울리는. 얼어붙고 녹아내리니. 그게 따뜻해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손절이란 단어는 우울하면서도 단호하고 속상하기도 하다. 어쩌면 내 자신이 단단해지기 위해 아픔을 받아들이는 슬픈 결심이라고나 할까. 과거엔 많이 쓰지 않은 단어였는데 최근 십 몇 년 간 익숙한 단어가 되었다. 그만큼 지금 사회는 관계에 피곤하고 힘들어진 걸까.

🍓 잠시 생각한 것들. 냥냥냥과 냥냥냥 중 누가 더 불행할까? 친하면 선의일까? 어떤 이유로 작가의 다른 책들을 난 보고 싶은걸까? 과거의 기억이 놓아주지 않을 땐 어떻게 해야할까? 미진이 종선을 손절한 이유와 예슬이 그 둘을 손절 안 하는 이유. 우리는 알아야 할 일은 모르고, 몰라도 되는 일은 많이 아는 걸까? 친하다는 건 어떤 의미? 그 시절의 잘못을 되돌릴 수 있을까? 시간은 약일까? 종희는 일영의 저주를 알아차렸을까? 내가 겪은 두 사람의 시차는? 사소한 악의, 그 경험.

🍓 코멘터리까지 읽고나니 완독 후 받은 느낌은 이 세 편의 소설들을 다시, 즉시, 바로 읽고 싶다는 것. 그래야 될 것 같았다. 내가 이 얽힘들을 놓치고 읽었던 건 없었을까 싶었다. 뭔가 사건을 복기하고 싶은 탐정처럼. 그러나 다시 읽지는 않았다. 내년 정도 다시 읽어보기로. 이 세편의 얽힘은 ‘얽힘‘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다. 이 얽힘 시리즈를 계속 탐독해야겠다는 다짐 같은 욕심이 들었다. 그리고 작가의 다른 책들도. 어쩌면 코멘터리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였고, 여운이 가득한 채로 결말을 미처 못 본 아쉬움 비슷한 마음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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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풍은 상쾌하고 하늘은 푸르다. 나는 꾸밈없이 이 삶을 사랑하며, 이 삶에 대해 자유로이 이야기하고 싶다. 
- P23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엔 내 안에 청춘이 넘쳐난다. 하지만 굳이 말해야만 한다면, 내가 두려움과 침묵 사이에서 희망 없는 죽음에 대한 확신을 이야기할 정확한 단어를 찾을 곳은 바로 이곳인 듯하다.
- P35

이곳은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고, 암시하지 않는다. 그저 내주는 것에, 아낌없이 내주는 것에 그친다. 도시 전체가 시선에 스스로를 온전히 내맡기고 우리는 이 사실을, 누리는 동시에 깨닫는다. 이 기쁨엔 치료제가 없고, 이 즐거움엔 희망이 없다. 이 지역이 요구하는 건 냉철한 영혼, 즉 위안하지 않는 영혼이다.
- P42

그렇게 우리는 그가 모든 것을 주었다가 모든 것을 거두는 고장에서 태어났음을 깨닫는다. 이 풍요와 과잉 속에서 삶은 느닷없고, 엄격하고, 너그러운 거센 열정의 곡선을 그려간다. 이곳에서 삶은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불태우는 것이다. 
- P48

삶을 고양시키는 모든 것은 동시에 부조리도 증대시킨다. 알제의 여름 속에서 나는 고통보다 더 비극적인 단 한 가지가 있고, 그것은 바로 행복한 사람의 삶이라는 것을 깨우친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더 위대한 삶의 길일 수도 있다. 기만하지 않도록 이끌어 주니 말이다.
- P54

산다는 것은 스스로 체념하지 않는 것이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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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언젠가 스러져 버릴 무엇이지만, 그의 글은 이렇게나 삶의 본질을 보여주며 유한한 삶을 초월해 우리 앞에 있다.  (책 머리에)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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