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만한 삶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런 삶도 역시 살게 되기 때문이다. 즉 이런 삶은 살 만하지 못한데도 살아 있는living 삶이다. 주디스 버틀러가 말했듯, "바로 이런 이중적 의미가 이런 삶도 아직 소멸되지 않았으며, 바로 살아있다는 이름으로 끈질기게 정식으로 요구하고 주장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 P7
두 사상가는 자신들의 철학적 접근 방식을비교하며, 이런 중대한 비상사태를 전환해서 정치적 행동을 위한 새로운 규범을 창조하는 확실한 주장으로 바꿀 가능성을 환기한다.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에게 살 만한 삶의 조건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 P9
실제로 모든 생명체는 유한하고, 어떤 애착 관계도 폭력과 침해의 위험에서 면제되지 않으며, 모든 돌봄 실천은 권력의 역학관계에 스며들어 있다. - P15
특히 캐럴 길리건 Carol Gilligan의 돌봄이론은 타인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 타인을 돕고 지원하려는의지가 정의justice에 관한 이론에서 주변적인 게 아니라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 P16
보름스는 돌봄을 "주체적이고, 나아가 주체성을 창조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 (이런 관계가 없이 우리는 개인이 될 수 없다)라고 정의한다. 돌봄은 도덕적이면서 사회적인 관계이며, 그렇기에 이미 정치적인 관계이다. 즉 돌봄은 세상과의 관계이고, 똑같이 자연적이면서 문화적이고, 생태적이면서 정치적인 세상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다." - P17
버틀러는 젠더에 관한 초창기 저서에서부터 특정한 사회규범이 어떻게 개인만이 아니라 집단 전체를 사회적 인정의 가능성에서 배제하는지, 그래서 어떻게 살 만한 존재를 영위하는 데 꼭 필요한 사회적 수단을 박탈하는지 보여주려 했다. - P18
보름스와 버틀러는 서로 반대편에서 출발했지만, 두 사람의 사회정치적 성찰이 살아 있는 삶의 사회철학에 입각해 있다는 점에서 둘은 일치한다. - P23
살 만하지 않다는 것은 단순히 생존의 문제일까요, 아니면 삶이 진정으로 살 만한 것이 되려면 생존 이상의 무엇이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의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요? - P31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을 구분하는 일종의 기준을 정의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 P33
궁극적으로, 삶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두 가지 방법, 즉살만하지 않음과 죽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 P37
살 만하지 않은 삶은 우리 몸의 삶이나 생명의 조건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종의 중단을 겪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자아의 파괴를 수반할 것입니다. 그리고 비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죽음보다 "덜한less" 것이 아니라, 죽음보다 더한worse 것인데, 왜냐하면 삶이 계속되는데도 삶을 삶으로 만들어주거나 누군가가 그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것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 P39
인간의 삶이 죽음에 맞서 살아 있는 삶을 돌보는 것으로 이루어지듯, 그것은 또한 모든 의미에서, 살아 있는 인간의 모든 생기적 차원에서, 살 만한 삶의 조건을 준비하면서 살 만하지 않은 삶에 맞서 살 만한 삶을 돌보는 것으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 P42
우리는 삶을 충만하게 살고 싶어 하죠. 삶의 모든 차원(생물학적, 상호주체적, 창조적, 상징적 차원 등)이 통합된 삶을 살고 싶어 한다는 말입니다. - P46
그들이 삶을계속 살아간다 해도, 살 만하지 않은 삶과 더불어 계속 산다는 것은 회복탄력성과 같다고 볼 수 없습니다. 아니요, 전혀 다른 것이지요. 사실 제가 우려하는 것은 "회복탄력성"이라는 용어가 현실을 부정하고 트라우마를 억압하는 작용을 해서, 더 이상 회복할 가능성이 없는 게 분명한데도 너무 급히 회복의 가능성을 보고 회복의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 P56
주체를 상호주체성으로 언급해야 하는 이유는 당신의 삶이 살 만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수많은 삶들이 살 만하지 않고서는 나의 삶도 살 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공통되게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고 공통된 삶을 위해서 사회구조에 의존하기 때문이지요. - P59
제가 맞다면, 살 만한 삶의 상호주체적 조건은 타인의 삶에 대한 나의 일종의 의무를 암시하며, 그 타인 역시 나에게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이 의무는 개인을 정의하고, 개인의 주장을 탈중심화하는 사회적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그런 조건을 명시한 계약서가 없더라도 나의 삶은 당신의 삶과 묶여있습니다. - P60
이런 기독교적 가치는 경제적 황폐화와 궁핍을보상하기 위해서 매우 전통적인 가족 개념과 여성의 돌봄노동 개념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연히 저는 돌봄이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 P69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단지 "여기에 무언가 살 만하지 않은것이 있다고 느껴져"라고 말하고 나서 상황을 분석하고, 그다음에 누군가가 "그래, 이것이 그들에게 살 만하지 않은 것이라면 우리가 바로잡고 도와주고 돌봐주고 싶어"라고 말한다는 것이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P89
제가 보기에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양가적이 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삶과 죽음이 바깥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 P91
그러나 우리가 일상생활을 재개할 때, 취약한 상태로 남아 있는 사람들, 면역이 약한 사람들, 신체적 조건이나 감염 민감성 때문에 아직 쉽게 세계를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다수‘의 이름으로 버려지거나 희생되어야 할까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잔인한 공리주의자가 되어버립니다. - P91
우리는 마치 세계의 이런 지역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장소에서 눈길을 돌리고, 자신을 보존하려는 이 집단적인 "우리" 주변에, 문자 그대로의 장벽 혹은 은유적인 장벽을 쌓아서 우리 자신을 보존합니다. 우리는 파괴의 확대에 일조하거나 방조하지 않으면서 이런 파괴로부터 거리를 둘 수 없습니다. - P99
우리는 단지 우리가 함께하는 행동 속에서만 서로에게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세계 저편의 어떤 사람이 행동하는 방식이 내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지요. - P106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차원에서 최소한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 P109
하지만 적어도 살 만함의 조건이 어느 정도 갖춰지지 않으면 아무도 행복해지지 못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 P111
그래서 제 생각에 개인의 자유라는 발상에는 일종의 죽음 충동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죽음 충동은 대개 도망자처럼 행동합니다. 죽음처럼 보이지 않는 어떤 다른 것에 붙어서, 심지어는 삶이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 P123
"이건 나의 삶이라고, 나는 원하는 대로 할 거야. 그 때문에 타인이 죽고 내 목숨이 위험해진다고 해도 말이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죽음 충동에 휘말려서, 삶의 이름으로 위해를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에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삶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렇죠? 하지만 이제 삶은 공통된 취약성과, 상호의존성과, 살만함에 필요한 최소치의 확립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 P124
피할 수도 있었을 죽음이 일어나도록 허용하는 순간, 그게 여러분의 죽음이건 아니면 누군가 다른 사람의 죽음이건, 그것은 삶의 의미에 전반적으로 모순이 됩니다. 저는 그것이일반적인 배신과도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말하자면 패배이기도 한 전반적인 침해입니다. 그러니 선생님이 애도의 슬픔이나 애도 가능성이라고 부른 것을 우리가 어떻게 재도입해볼 수 있을까요? - P128
버틀러: 맞아요. 슬픔은 살아 있는 자의 특권입니다. - P129
반면 삶이라는것은 삶이 무엇인지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살아 있는 것을 돌본다는 게 어떤 것인지는 압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내삶을 소유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내 소유의 삶인데 말이죠. - P130
나는 내 삶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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