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 희망도서 대출을 신청하려 던 중 신간중에서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내 냥냥 키워드인 연민과 연대를 느낄 수 있을 듯한 제목 이었고, 유명한 주디스 버틀러 교수가 저자였다(책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포스트 모더니즘 이런 거 모름). 그래서 신청하고 받고 읽었는데... 어렵다. 많이 어렵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기억나는 걸 남기기 위해 완독하자마자 이렇게 기록을 남기고 있다는🥲

🫂 책은 미국과 프랑스의 두 정치철학 교수의 2018년과 2022년 대담을 엮은 내용이다. 버틀러는 개인들의 주관적 견해의 공통분모에서 살 만한 삶과 아닌 삶을 구분하고, 보름스 교수는 죽음과 대비한 객관적 조건을 통해 구분한다. 두 교수의 대담은 출발점은 다르지만, 결국 인간의 상호의존성이 필요하고 (그나마?) 민주주의로 가능하다는 결론으로 합치한다. 마침 작년 12월 미쳤던 그 날 오후, 주디스 버틀러는 경희대에서 민주주의를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었다고...참 기가막힌 타이밍. 그리고 12/7 한겨레와 한국민주주의를 위협한 건 윤대통령 자신이라는 인터뷰를 한다.

🫂 살 만하지 않다는 것은 생존의 문제일까, 생존 이상일까? 당연히(?) 두 번의 대담 모두 생존 이상이라고 진행된다. 이 책은 끊임없이 두 교수가 서로에게 묻고, (그리고 내 생각엔) 독자에게 묻는다. 단순히 생존을 넘는 사항이라면, 무엇이 필요한 거냐고.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을 분명하게 나눌 수 있냐고. 그래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없겠지. 나도 잠시 책을 덮고 생각해보았다. 요즘 나의 관심사와도 겹치는 거라. 완전히 다른 얘기지만 나는 삶은 의미가 없어 보여도, 살아가는 것 자체가 특별하다는 생각을 요 근래 몇 년째 하고 있다.

🫂 나중에 두 교수님들이 큰 방향은 합치가 되나...대담에서 나온 의견의 차이때마다, 보름스 교수 의견에 조금 더 마음이 갔다. 내 마음이 더 가고 말고가 뭐가 중요하겠냐마는. 그냥 주디스 버틀러 교수는 좀 무섭다🥲 보름스는 이번에 처음 들었다. 그런데 뭐든 명확하게 경계를 지을 수 있을까? 책 읽는 내내 끄덕거렸음에도 보름스 교수의 살만하다vs그렇지않다를 나누는 객관적 요인은 그냥 심적으로 아닌 듯 하다. 무지개를 정확하게 빨주노초파남보로 나눌 수 없는 것처럼. 물론 이 대담에서 나의 허접함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 최근 읽은 소설, 에세이에서 말하는 걸 여기서도 보았다. 물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기 위해 고른 책이긴 하지만. 두 분의 대담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발견했다. 작년 가을 읽었던 인문학서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에서도 비슷한 말이 나오는데, 지금 사회구조는 서로에게 의존하는 공통의 것이 많다. 결국 다른 이들의 삶이 살 만해야 내 삶도 그렇다. 좀 더 감성적이고 동양적으로 말한다면, 그래서 연민은 단지 연민이 아니고 연대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이건 내가 작가 소개나 프로그램 소개 시 늘상 하는 멘트. 연대가 너무 과한 느낌이면 이 책에 나온대로 ‘돌봄‘정도로 하자. 어려우니 여기서 기록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 만한 삶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런 삶도 역시 살게 되기 때문이다. 즉 이런 삶은 살 만하지 못한데도 살아 있는living 삶이다. 주디스 버틀러가 말했듯, "바로 이런 이중적 의미가 이런 삶도 아직 소멸되지 않았으며, 바로 살아있다는 이름으로 끈질기게 정식으로 요구하고 주장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 P7

두 사상가는 자신들의 철학적 접근 방식을비교하며, 이런 중대한 비상사태를 전환해서 정치적 행동을 위한 새로운 규범을 창조하는 확실한 주장으로 바꿀 가능성을 환기한다.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에게 살 만한 삶의 조건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 P9

실제로 모든 생명체는 유한하고, 어떤 애착 관계도 폭력과 침해의 위험에서 면제되지 않으며, 모든 돌봄 실천은 권력의 역학관계에 스며들어 있다.
- P15

특히 캐럴 길리건 Carol Gilligan의 돌봄이론은 타인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 타인을 돕고 지원하려는의지가 정의justice에 관한 이론에서 주변적인 게 아니라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 P16

보름스는 돌봄을 "주체적이고, 나아가 주체성을 창조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 (이런 관계가 없이 우리는 개인이 될 수 없다)라고 정의한다. 돌봄은 도덕적이면서 사회적인 관계이며, 그렇기에 이미 정치적인 관계이다. 즉 돌봄은 세상과의 관계이고, 똑같이 자연적이면서 문화적이고, 생태적이면서 정치적인 세상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다."
- P17

버틀러는 젠더에 관한 초창기 저서에서부터 특정한 사회규범이 어떻게 개인만이 아니라 집단 전체를 사회적 인정의 가능성에서 배제하는지, 그래서 어떻게 살 만한 존재를 영위하는 데 꼭 필요한 사회적 수단을 박탈하는지 보여주려 했다.
- P18

보름스와 버틀러는 서로 반대편에서 출발했지만, 두 사람의 사회정치적 성찰이 살아 있는 삶의 사회철학에 입각해 있다는 점에서 둘은 일치한다. 
- P23

살 만하지 않다는 것은 단순히 생존의 문제일까요, 아니면 삶이 진정으로 살 만한 것이 되려면 생존 이상의 무엇이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의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요?
- P31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을 구분하는 일종의 기준을 정의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 P33

궁극적으로, 삶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두 가지 방법, 즉살만하지 않음과 죽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 P37

살 만하지 않은 삶은 우리 몸의 삶이나 생명의 조건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종의 중단을 겪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자아의 파괴를 수반할 것입니다. 그리고 비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죽음보다 "덜한less" 것이 아니라, 죽음보다 더한worse 것인데, 왜냐하면 삶이 계속되는데도 삶을 삶으로 만들어주거나 누군가가 그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것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 P39

인간의 삶이 죽음에 맞서 살아 있는 삶을 돌보는 것으로 이루어지듯, 그것은 또한 모든 의미에서, 살아 있는 인간의 모든 생기적 차원에서, 살 만한 삶의 조건을 준비하면서 살 만하지 않은 삶에 맞서 살 만한 삶을 돌보는 것으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 P42

우리는 삶을 충만하게 살고 싶어 하죠. 삶의 모든 차원(생물학적, 상호주체적, 창조적, 상징적 차원 등)이 통합된 삶을 살고 싶어 한다는 말입니다. 
- P46

그들이 삶을계속 살아간다 해도, 살 만하지 않은 삶과 더불어 계속 산다는 것은 회복탄력성과 같다고 볼 수 없습니다. 아니요, 전혀 다른 것이지요. 사실 제가 우려하는 것은 "회복탄력성"이라는 용어가 현실을 부정하고 트라우마를 억압하는 작용을 해서, 더 이상 회복할 가능성이 없는 게 분명한데도 너무 급히 회복의 가능성을 보고 회복의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 P56

주체를 상호주체성으로 언급해야 하는 이유는 당신의 삶이 살 만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수많은 삶들이 살 만하지 않고서는 나의 삶도 살 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공통되게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고 공통된 삶을 위해서 사회구조에 의존하기 때문이지요. 
- P59

제가 맞다면, 살 만한 삶의 상호주체적 조건은 타인의 삶에 대한 나의 일종의 의무를 암시하며, 그 타인 역시 나에게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이 의무는 개인을 정의하고, 개인의 주장을 탈중심화하는 사회적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그런 조건을 명시한 계약서가 없더라도 나의 삶은 당신의 삶과 묶여있습니다. 
- P60

이런 기독교적 가치는 경제적 황폐화와 궁핍을보상하기 위해서 매우 전통적인 가족 개념과 여성의 돌봄노동 개념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연히 저는 돌봄이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 P69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단지 "여기에 무언가 살 만하지 않은것이 있다고 느껴져"라고 말하고 나서 상황을 분석하고, 그다음에 누군가가 "그래, 이것이 그들에게 살 만하지 않은 것이라면 우리가 바로잡고 도와주고 돌봐주고 싶어"라고 말한다는 것이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P89

제가 보기에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양가적이 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삶과 죽음이 바깥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 P91

그러나 우리가 일상생활을 재개할 때, 취약한 상태로 남아 있는 사람들, 면역이 약한 사람들, 신체적 조건이나 감염 민감성 때문에 아직 쉽게 세계를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다수‘의 이름으로 버려지거나 희생되어야 할까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잔인한 공리주의자가 되어버립니다.
- P91

우리는 마치 세계의 이런 지역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장소에서 눈길을 돌리고, 자신을 보존하려는 이 집단적인 "우리" 주변에, 문자 그대로의 장벽 혹은 은유적인 장벽을 쌓아서 우리 자신을 보존합니다.
우리는 파괴의 확대에 일조하거나 방조하지 않으면서 이런 파괴로부터 거리를 둘 수 없습니다. 
- P99

우리는 단지 우리가 함께하는 행동 속에서만 서로에게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세계 저편의 어떤 사람이 행동하는 방식이 내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지요.  - P106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차원에서 최소한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 P109

하지만 적어도 살 만함의 조건이 어느 정도 갖춰지지 않으면 아무도 행복해지지 못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 P111

그래서 제 생각에 개인의 자유라는 발상에는 일종의 죽음 충동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죽음 충동은 대개 도망자처럼 행동합니다. 죽음처럼 보이지 않는 어떤 다른 것에 붙어서, 심지어는 삶이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 P123

"이건 나의 삶이라고, 나는 원하는 대로 할 거야. 그 때문에 타인이 죽고 내 목숨이 위험해진다고 해도 말이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죽음 충동에 휘말려서, 삶의 이름으로 위해를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에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삶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렇죠? 하지만 이제 삶은 공통된 취약성과, 상호의존성과, 살만함에 필요한 최소치의 확립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 P124

피할 수도 있었을 죽음이 일어나도록 허용하는 순간, 그게 여러분의 죽음이건 아니면 누군가 다른 사람의 죽음이건, 그것은 삶의 의미에 전반적으로 모순이 됩니다. 저는 그것이일반적인 배신과도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말하자면 패배이기도 한 전반적인 침해입니다. 그러니 선생님이 애도의 슬픔이나 애도 가능성이라고 부른 것을 우리가 어떻게 재도입해볼 수 있을까요?  - P128

버틀러: 맞아요. 슬픔은 살아 있는 자의 특권입니다.
- P129

반면 삶이라는것은 삶이 무엇인지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살아 있는 것을 돌본다는 게 어떤 것인지는 압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내삶을 소유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내 소유의 삶인데 말이죠.
- P130

나는 내 삶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 P1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그 유명한 듀나 작가지만 사실 듀나의 SF소설을 많이 읽진 않았다. 그래도 오래전에 읽었던 <태평양횡단특급>은 내용은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기억나지 않음에도 충격적일 정도로 재미있었던 느낌이 생생하다. 그래서 이번에 이 책이 새롭게 나올때 원래 팬이었던 것처럼 기대하며 읽었다.

🧟‍♂️ 읽으며 사실 힘들었다. 듀나 작가가 친절하게 용어 정리를 해주었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숙주, 코어, 앤서블, 마자, 대행인, 감각노동자, 해결사, 미개문명관리국, 갈라테이아나, 꼭두각시 등 많은 용어에 사전 정리가 있었다면 좀 더 쉽고 재미있게 책을 읽었을 거란 아쉬움. 다만 세계관을 알아가는 재미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런 용어 정리는 사족이 될 수도 있고, SF 매니아들에게는 방해가 될 수도 있을 듯.

🧟‍♂️ SF를 많이 읽지 않은 초급 수준의 독서가지만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사이언스 픽션은 과학 기술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생명과 자아, 존재를 말하는 세련된 철학이라는 것. 결국 성찰이 필요한 시간이라는 것. 그게 이 초급 SF 독서인이 매번 드는 생각이다.

🧟‍♂️ 수미의 머릿속에 이식물을 넣을 때 은채는 고민한다. 이식물을 넣고 난 후 수미의 인격과 자아는 어떻게 될지, 수리된 수미는 과연 수미일지 확신하지 못한다. 만화 공각기동대에서 독자에게 질문하고, 김영하작가의 작별인사를 읽고 난 후 생각거리들이 직접적으로 주인공 은채를 통해 나온다. 영화 프레스티지에서는 복제된 인간이 기존의 기억을 가지는 내용이 나온다. 은채는 수미의 기억을 가진 또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이 모든 질문에 나는 여전히 답을 알지 못한다.

🧟‍♂️ 대리전은 내게는 어렵고 재미를 느끼기전에 심란함을 먼저 느낀 소설이었다. 힘들었다. 하지만 덕분에 다른 SF소설을 어서 읽어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천선란 작가 소설을 사두고 아직 읽지 못한 것도,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작품도. 그래, 그거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저씨만이 아니었다. 인쇄 골목 사람들이 모두 똑같이모른다고만 했다. 아빠가 독립군도 아닌데 모두 한통속으로 숨겨줬다.
- P203

형님이 집으로 돌아가면 일이 복잡해지잖니. 형수님이 대신해 처리한 일들이 다시 형님에게로 돌아오고, 형님은 다시 형수님을 찾고, 형수님은 너를 찾고, 모든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다. 세 사람이 돌아가며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지.
- P203

달아난 아빠가 돌리고 있는 다른 세계. 프로는 아름답고모두 부자가 된다는 말이 통하는 세계. 인쇄공 한 명이 돌리는 세계가 도무지 그려지지 않았다. - P204

저주받은 남자가 되어 스스로 벌하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었던 끔찍한 일. 그 기억이 관장을 주술의 세계에 평생 가둬놓았는지도 몰랐다. 카마우는 그에게 지독한 주술을걸어놓은 셈이었다.
- P207

서로의 좌표를 안다는 것은, 뭐랄까. 우주를 향해 열려 있는 내 방의 와이파이 신호 같다고 할까. 부질없게 들리지만아예 가망 없는 것도 아니다. 살다보면 만나고 싶을 때도 있을 테고, 그때 기적처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누가 알겠나.
서로의 세계로 탈출하고 싶을 때 우연히 여행 경로가 겹칠지. 
- P212

그깟 알파벳이 뭐라고. 사랑하는데, 엘지.
- P217

수장고 안에서 내가 만난 건 카사바 인형으로 돌아온 아빠였다. 아빠가 입술을 움직였지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 P224

마지막으로,
도망치지도 잡히지도 않고이 세계에서 버티고 있는 이들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다들 평안하시길.
- P2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한강 작가 책을 시작한다면 이 책부터 하라는 영상이 있었다. 내 생각엔 절대 그러면 안될 것 같은디. 한강 작가 책 중에 이 책은 어쩌면 폭력적이거나 가슴 아픈 게 다른 책보다 상대적으로 덜해 감정상 쉬운 편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절대 절대 쉽지 않았다. 일부러 작가의 불친절한 구성이었던 게 아닌가 싶다. 등장인물들이 쉽게 살아온 사람들이 아니다. 남주의 첫사랑도 장애가 있고, 여주의 실어증 원인도 자신이 태어나지 말았어야 될 아이라는 걸 계속 친척들한테 들어서고. 남주의 친구조차 쉽게 산 사람이 없다. 그리고 그걸 알려주는 방식은 누구 얘기인지 분명하지 않게, 장소도 헷갈릴 만하다. (혹시, 나만?) 그래서 작가가 이 불친절한 세계에 ‘약간 한번 들어가 볼래?‘ 하고 초대한 것처럼 일부러 작정하고 한 게 아닐까 싶었다. 원래도 그렇게 친절하진 않은데 특히 이번엔 그랬다.

🪨 모임을 하며 느낀 건, 내가 이 책을 잘못 읽었다는 것이었다. 빨리 읽으면 안 되는 소설이었다. 분량이 길지 않아 새벽에 네 시간 정도 읽어 완독했는데, 하나하나 감정을 곱씹어 읽어야 하는 책이었다.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가 있어서 그런지 굉장히 무채색 느낌인데, 그 무채색이 엄청 엷은 색깔로 다가와서 선명하지 않고 뚜렷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조차 한강 작가가 사실은 원했던 분위기인 것 같았다. 뭔가 내 앞에 약간 김서린 유리창이 자꾸 보이는 그런 느낌. 유리창 안을 가만히 보면 어렴풋이 보일 것 같은데, 나는 안 보인다고 답답해 하는 조급함.

🪨 이 모든 당혹스러운 감정과 나의 실패에도 이 책을 완독하고 나니, 연약한 인간의 삶이 역설적으로 아름답다는 걸 이리 잘 표현했을까 감탄한 건 사실이었다. <소년이 온다>나 <작별하지 않는다>는 시대적으로 아픈 얘기. 얼마 전 읽은 <내 여자의 열매>는 역사적 배경이 나오지 않지만 각 개인의 어떤 아픔들. 모두 사회적 약자가 나온다. 이 사회적 약자들은 항상 냉대와 결핍,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그런데 이번에 느낀 건 그 사회적 약자들이 강하다는 것, 지지 않는다는 것. 누구에게도 이해받았던 삶은 아니지만, 그리고 참고 참고 또 참는 들장미 소녀 캔디처럼 정신이 강하지 않지만, 버티고 버티는 사람들이었다. 슬플 정도로. 아름다울 정도로. 끝까지 자신을 잃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잘못 읽었다. 그것이 나의 결론. 난 글렀다. 다시 읽어야 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