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은 마치 운명의 마녀들처럼, 다정하게 머리를 안쪽으로 기울이고 엉킨 실 같은 매일매일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함께 고민해주었어. 95p 옥상에서 만나요
『규중조녀비서(中操女秘書)』라는 말도 안되는 제목의 그 책에는 제목만큼이나 말도 안되는 주문들이 가득 모여 있었어. 남편의 시앗을 제거하는 주문, 학문에 뜻이 없고 주색잡기만 하는 장남을정신 차리게 하는 주문, 엉덩이가 가벼운 막내딸을 처신하게 하는주문, 입이 가벼운 동네 이웃에게 갚아주는 주문, 얹혀사는 군식구를 독립시키는 주문……. 그것은 주문서라기보다 전근대 여성들의고민을 모아둔 책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았지. 99p 옥상에서 만나요
그리고 놀랍게도 몸이 가뿐했지. 그렇게 가뿐할 수가 없었어. 몸의 모든 독소가, 노폐물이, 운 나쁘게 삼켰던 중금속 성분이 다 빠져나간 것 같았어. 스트레칭도 안했는데 말랑말랑 모든 관절이 부드러웠고, 눈이 건조하지도 않았고, 기분 나쁜 땀이 배어 있지도 않았어. 누군가 나를 키보드 청소하듯 해체해서 먼지를 털고 다시 조립한 것 같았다니까. 새로 태어난 것처럼 개운했다면, 넌 이해하겠니. 상쾌한 아침을 기억하는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을 텐데. 109p 옥상에서 만나요
모친상을 당한 회사동료, 힘들게 이혼한 친척언니, 유전병 증세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친구 오빠, 빚이 많은 아는 동생, 유학을 포기한 대학원생, 교통사고를 당한 운동선수, 대입 삼수생, 공무원 시험 오수생, 뇌종양수술 후 후각을 잃은 요리사, 재활에 실패한 무용가, 험악한 이웃과마찰을 겪은 캣맘, 일베로 가득한 교실의 여중생, 임용이 안된 만년 강사, 만년 아이돌 연습생, 도박 중독자, 텔레마케터, 환경운동가, 부인과 사별한 교감 선생님 수해를 맞닥뜨린 농민, 혹사당하는청년 인턴, 아토피가 심한 어디자이너, 이민에 실패해 돌아온 이내일 작가, 교도관, 구제역 돼지 생매장 직후의 관련인들, 각중 학대에서 겨우 벗어난 사람들, 심각한 식이장애 환자, 20년 넘게 키운 앵무새가 죽은 사람, 진보 정치인의 부인, 극우 국회의원의 딸.... 1111~112p 옥상에서 만나요
이제 내가 있는 옥상은 뛰어내려도 살아남을 수 있는 높이야. 더는 뛰어내리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너는, 내 후임으로 왔다는 너는, 아마도 그 옥상에 자주가겠지. 내가 너에 대해 이상한 책임감을 느끼는 게 왜인지는 모르겠어. 분명히 말할게, 연민은 아냐. 연민은 재수없잖아. 그저, 『규중조녀비서를 받을 사람이 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뿐이야. 너는 분명 울 테고, 운다면 비가 들지 않는 가장 안쪽의 에어컨 실외기 위에 앉아 울겠지. 115p 옥상에서 만나요
언니가 죽었다. 돌연히, 갑자기, 순식간에, 불현듯, 눈 깜짝할 사이에, 그냥, 느닷없이, 금세 , 한순간, 난데없이, 대뜸, 황망히, 별안간, 돌발적으로, 급작스럽게, 찰나에 죽어버렸다. 118p 보늬
컴퓨터공학과에 간 규진이와 지리교육과에 간 나와 현대무용학과에 간 매지가 서로가 뭘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채로 여전히 친구인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125p 보늬
위로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는데, 이용자들은 서로에게서 위로를 얻는것 같았다. 한 사람의 자살은 여섯명 정도의 인생을 크게 바꾸어놓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돌연사는 몇명의 인생을 흔들어놓을까? 127p 보늬
우리가 인간이라서 자연스러운 도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울며불며 이렇듯 쓸데없는 짓을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모든 것으로부터 한발짝 뒤로 물러서는 마음이 드는 그런 날이 있었다. 132p 보늬
"이야, 너 정말 개떡같이 말했는데 찰떡같이 받아 적었네." 138p 보늬
"하다가 죽지 않는 거, 하고 싶다." "있어? 그런 거?" ".…그럼 하다가 죽어도 상관없는 거, 하고 싶다." "그것도 없을 것 같은데." 142p 보늬
그 순간에도, 그 이후에도 삶과 죽음에 그토록 분절이 없었다는게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한번의 암전도 없이 이어질 줄은 정말이지 몰랐다. 무의식적으로 마침표까지는 아니라도 쉼표는 기대했던모양이었다. 148p 영원히 77사이즈
보통 중요한 질문을 하기 전에는 스몰토크가 좀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173p 해피 쿠키 이어
"명예살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한 교수가 나를 빤히 보며 물었을 때 머릿속이 하얘졌다. 보통중요한 질문을 하기 전에는 스몰토크가 좀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내 누이들은 히잡을 쓰지 않으며 교육을 받았고 연애결혼을 했으며 나는 누이들을 손끝 하나 건드릴 마음이 없다고 말해야 할까, 그래도 우리나라는 인접국에 비하면 훨씬 사정이 낫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아무리 최고형을 선고해도 여전히 이어지는 명예살인이 부끄럽고 이성의 시대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아 절망적이라 고 해야 할까, 한 개인이 한 문화권의 죄악에 대해 바로 대답할 수있어야 한다면 한국 남자는 한중일 삼국 남자들의 죄악에 책임을느끼는지 반문해야 할까..... 덩어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는 덩어리래도, 나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173p 해피 쿠키 이어
나의 감상이란 겨우 ‘새우깡은 정말 새우튀김 맛에 충실한 과자였구나‘ 정도였기 때문이다.
175p 해피 쿠키 이어
일이 잘되려면 모든 게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잘되듯이, 일이 잘못되려 해도 마찬가지로 맞물려 잘못된다.
178p 해피 쿠키 이어
옳은 불화라는 것도 있는 것일 테다. 옳은 불화로 기우는 개체들을 공동체는 소중히 여겨야 할 듯한데 보통은 그렇지 않았다. 여자친구는 마치 희귀 새 같았다. 그토록 소중한 존재를 왜 원하지 않는지, 괴롭히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196p 해피 쿠키 이어
"언제든지" 여자친구가 말했다. 언제든지 돌아오라고? 전화하라고? 메일쓰라고? 나는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럴 땐 똑같이 말하는 게 제일좋다. "언제든지." 나도 말했다.
203p 해피 쿠키 이어
하지만 그게 정말로 끝이었다. 우리는 메신저도 하지 않고 화상통화도 하지 않고 메일도 쓰지 않고 페덱스도 보내지 않는다. 그런사람이라 좋아했으니까,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주기로 마음먹는다. 상당한 의지력이 필요하다.
203p 해피 쿠키 이어
들을 때는 별 도움 안되는 소리를 한다 싶었지만, 그후 지원으이상하게 이재의 말을 자주 떠올렸다. 고정되지 않았어, 고정되지않았어, 하고 주문처럼 되풀이했던 것이다. 보기 드물게 일관적인양육자‘라는 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날에는 보기 드물게 쪽에 방점을 두어 스스로를 칭찬하고, 어떤 날에는 ‘일관적인양육자 쪽에 방점을 두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랬기에 지원은 어떻게든 아이들을 맡기고 이재의 이혼 세일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서 무언가 근사한 말을 돌려줘야 했다. 주문 같은 말을.
216p 이혼 세일
"우리들의 그 아픈 네트워크에 하얀 점들이 등록되는 소리"(142면)를 그가 여전히 듣기 때문이다. 무력할지언정 타인의 고통에 무감하지 않겠다는 충실성의 윤리다.
263p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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