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지르기라는 걸 해서 첫 번에 세상이 녹록지 않다는 걸  확 보여줘야 하는 거야. 그러면
‘아, 세상이 그리 녹록지 않구나. 우리 세대는 힘들 것 같으니 다음 세대에 기대를 해보자‘ 하고 호박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지.
사람하고 똑같아.

- P23

흰 눈은 오시고 임은 아니 오시고
고양이는 잠들러 간밤에
두그릇 뚝딱 굴밥
- P109

주지 마 주지 마, 그렇게 말하고 모두가 조금씩 제 몫의 것을 나누어주었나 보다. 잠시 후 고양이는 사라졌다. 배가 부르니 제 처소로 간 모양이었다.
그제야 우리는 말간 토마토 장아찌로 남은 소주를 먹었다. 많이 먹었다. 흰 눈은 오시고, 임은 아니 오시고, 고양이는 잠들러 간 하얀 밤에.
- P116

오스카 와일드 식으로 이야기하면 언제나 착한 사람들이 있어서 재미없는 농담을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모양이다.
- P137

한번은 송이버섯이 한 상자가 도착해 왔기에 전화를 해서 대뜸 "벼룩의 간을 빼먹지, 내가 이걸 어떻게 받아?"
하니까 최도사 형이 천천히 말했다.
"나...... 벼룩 아니야. 그리고 나 네가 아프지 말았으면 좋겠어."
- P140

"가톨릭에 황창연이라는 유명한 신부님이 계시는데 그분이 그러셨어. 다리가 떨릴 때 말고 가슴이 떨릴 때 여행을 떠나라고이스라엘이나 이런 데로 성지순례도 떠나라고, 신자들이 ‘돈 없어요‘ 하니까 ‘애 학원 보내지 말고 그 돈으로 가요. 애 휴학시켜요, 지가 벌게. 그러면 여행 갈 수 있어요‘ 하셨어."
- P184

그러나 어느 날 박경리 선생님의 글을 읽다가 "마당에서 잡초를 뽑는데 어느 순간 뿌리가 뽑히는 잡초에서 진한 향내가 확 끼쳤다. 나는 문득 이것이 식물의 비명이고 피 냄새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는 구절을 읽고는 다시 한번 생각을 고쳐먹어야 했다. 
- P229

젊은 날의 고난은 돈을 주고라도 사야 한다는 말을 멸시했던 것은 내가 젊어서였다. 이제 그 말의 의미를 안다. 고난이 없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런 삶은 사람뿐 아니라 동물, 심지어 식물에게도 없다. 고난이 없다는 것은 그러니까 죽음과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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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슬픈 노래가 좋다. 그 슬픔을 싣고 흘러가는 멜로디의 기쁨이 좋다. 나는 즐거운 노래가 좋다. 그 즐거움을 따라가며 웃는 슬픔의 조용한 미소가 좋다.
- P236

누군가 세상을 떠나면 흔히 그 사람이
‘하늘나라로 갔다‘고 말한다. 이 말은 얼마나 숭고하고 성스러운가. 하늘로 가는 건 승천이다. 승천은 성자만이 한다. 우리는 마지막에 모두 성자가 되는 걸까.
- P250

지금 여기가 아닌 것은 힘이 없다. 지금과 그때 사이에는 무한한 지금들이 있다. 그것들이 무엇을 가져오고 만들지 지금은 모른다.
- P252

걱정하지 마, 라고 주영이 말한다.
그래 걱정하지 않을게, 라고 대답한다.
걱정하지 않으면 무엇이 대신 남을까,
명랑성.
- P258

함께 슬퍼한다는 것, 그것은 반드시 함께 메마르는 것만은 아니다. 그건 그 슬픔의 크기만큼이나 풍성하게 열매를 맺는 일이기도 하다. 오얏나무의 풍성한 열매는 왕상을 가엾이 여기는 오얏나무의 슬픔이었다.
왕상은 그걸 알았고 오얏나무를 사랑했고 그래서 오얏나무를 껴안고 목 놓아 울었던 것이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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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걸어가야 절이 나오나요?"
라고 물으면 촌부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자뿌리고 그냥 가소. 그라면 나오니께......"
- P182

소멸은 안타깝지만 덧없음이 없으면 저 빛나는 생의 찬란함 또한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러니 물속의 물고기야 울지말자. 그래도 울고 싶으면 도래하는 생의 찬란함을 환대하는 기쁨으로 울자꾸나.
- P203

응어리는 이미 둔 바둑판처럼 남겨두기로 하죠.
- P212

천상병은 노래한다. 세상은 아름답다고,
인생은 깊다고,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러니 바람아 씽씽 불라고......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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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온전히 나에게 주어진 시간- 이 사이의 시간들은 내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는 일 없이 또한 존재할 것이다. 끝없이 도래하고 머물고 지나가고 또 다가올 것이다. 이것이 생의 진실이고 아름다움이다.
- P139

가을 하늘이 왜 그렇게 맑고 깊고 텅 비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봐,나는 텅 비어 있어. 아무것도 가로막는 것이 없어. 사방이열려 있어. 모든 곳이 길들이야. 그러니 날아올라. 날개 아래 가득한 바람을 타고......
- P152

그의 몸은 나날이 망가졌지만 정신은 나날이 빛났다, 라는 식의 역설은 옳지 않다. 몸을 지키는 일이 정신을 지키는 일이고 정신을 지키는 일이 몸을 지키는 일이다.
- P160

이 기록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통과한다. 그 경계 위에서 나는 매일 매 순간 심각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댄스의 스텝을 밟고 있다. 그야말로 우스꽝스러운 줄타기.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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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오르내리지 못해 시장에 못 간 지가 벌써 한달이었고, 말썽을 부리는 나 때문에 걱정할 게 없었다면 정말 사는 의미가 없을 거라고 말했다.
- P147

나는 가끔씩 길거리에 주저앉아 녹음실에서처럼 세상을 뒤로 더 뒤로 거꾸로 돌렸다. 사람들이 문밖으로 나오면 다시 그들을 들어가게 했고, 보도 위에 앉아서 차와 사람들을 멀리 뒤로 돌려보내며 아무도 내게 다가오지 못하게했다. 내 기분이 정말 더러웠으니까.
- P159

샤르메트 씨가 기차며, 역, 그리고 출발시간 따위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그래도 들어줄 만했다. 마치 그는 아직도 시간에 맞춰 기차를 타고 환승역에서 갈아탈 수 있기를 바라는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탄 기차가 이미 종착역에 다다라서 이제 내릴 일만 남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 P168

그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무언가를 생각해내려고 무진 애를 쓰는 듯했다. 그러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양탄자를 팔러 다니던 생활을 그만둔 뒤로는 매일 똑같은 생활의 반복이다보니 백지 위에 백지만 쌓아온 셈이어서 별다른 기억이있을 리 없었다. 
- P175

"하밀 할아버지, 하밀 할아버지!"
내가 이렇게 할아버지를 부른 것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직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그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였다.
- P178

그러나 바로 그때 초인종이 울렸고, 내가 아직은 여기에 설명할 수 없는 저 민족적 대재난이 벌어졌다. 그 일로 나는 단번에 몇 살이나 더 나이를 먹게 되어 다른 문제와는 별개로 무척이나 기뻤다.
- P207

여러분도 알겠지만,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나도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죽을 맛이었다. 이건 아닌데, 생이 이런 건 아닌데, 내 오랜 경험에 비춰보건대 결코 아닌데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뇌리를 스쳐갔다. 사람들은 말없이 하나둘 줄을 지어 밖으로 나갔다. 어떤말도 할 수 없는 순간이 있는 법이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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