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법원 건물에서 멜빈스키 사건을 심리하던 판사들과 검사들은 휴정 시간이 되자 이반 예고로비치 셰베크의 집무실에 모여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크라소프사건에 대해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 P9

동료의 죽음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불러일으킨 것은 그로 인해 가능해진 자리 이동이나 직위 변경에 대한 생각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가까운 지인의 사망 소식을 접하면 으레 그렇듯이 죽은 것은 자기가 아닌 그 사람이라는 데에서 모종의 기쁨을 느꼈다.
- P11

<어쩌겠어, 죽은 걸. 어쨌든 나는 아니잖아> 모두들이렇게 생각하거나 느꼈다. 이반 일리치와 아주 가까웠던이른바 친구들이란 사람들은 그러면서도 이제 예절이라는 이름의 대단히 지겨운 의무를 완수하기 위해 추도식에 참석하고 홀로된 부인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해야만한다는 사실을 부지불식간에 상기했다.
- P12

그녀는 표트르 이바노비치에게 연금에 관한 조언을 구하는 척했다. 하지만 분명 과부는 이미 아주 세세한 부분은 물론 심지어 표트르 이바노비치도 잘 모르는 정보까지 모조리 꿰뚫고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을 빌미로 국가에서 받아 낼수 있는 모든 지원금의 종류를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 돈을 더 긁어낼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를 알아내고 싶었던 것이다. 
- P22

그리고 이러한 재미는 결국 그를 통째로 삼켜 버렸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밟아 버릴 수 있다는 권력의 의식, 법정에 그가 들어설때나 부하 직원들을 마주할 때면 그들의 얼굴에 역력하게 드러나는 존경심, 상사와 부하 직원들을 상대로 거두는 성공,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 느끼는 자신의 뛰어난 업무 수행 능력-이 모든 것이 그를 기쁘게 만들었다.
- P39

남편과 아내가 폭발하지 않고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작은 섬들이 다시 떠오르곤 했지만 그 섬의 수는 아주 적었다.
- P55

이제까지 그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무섭고 낯설고 의미심장한 무언가가 그의 몸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걸 아는 것은 오직 그 자신뿐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들은 세상이 전과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 점이 무엇보다도 이반 일리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 P64

혼자 남은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삶에 스며든 독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퍼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 P67

그는 그렇게 파멸의 벼랑 끝에서 자신을 이해해 주고 불쌍히 여겨 주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외롭게 살아가야만 했다.
- P68

이건 맹장 문제도 아니고 신장 문제도 아니야. 이건 삶, 그리고...... 죽음의 문제야. 그래, 삶이 바로 여기에 있었는데 자꾸만 도망가고 있어. 나는 그걸 붙잡아 둘수가 없어. 
- P73

이제 남은 것은 죽음인데, 나는 맹장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맹장 고칠 생각에 전전긍긍하고 있지만 사실 문제는 죽음이야. 그런데 정말 나는 죽는 걸까?
- P75

이반 일리치는 서재로 돌아가 자리에 누웠다. 그는 또다시 죽음과 단둘이 남겨졌다. 죽음과 마주 보고 있었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죽음을 바라보며 차갑게 식어 가는 자신을 느낄 뿐이었다.
- P83

모든 이들의 관심은 그가 과연 언제 자신의 자리를 비워 주게 될것인지, 과연 언제 사람들을 그의 존재로 인해 야기된 의무와 압박에서 해방시켜 주고 자기 자신도 고통에서 자유롭게 될 것인지에 쏠려 있었다. 
- P84

「우리는 언젠가 다 죽습니다요. 그러니 수고 좀 못 할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는 죽음을 앞둔 사람을 위해 고생 좀 하는 것이 전혀 힘들거나 괴롭지 않으며, 그 또한 언젠가 죽을 때가 되면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이렇게 수고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심정이 담겨 있었다.
- P91

늘 이런 식이었다. 어디선가 한 줄기 희망이 반짝하는가 싶다가도 금방 절망의 파도에 휩쓸려 버리고 결국 똑같은 통증, 그 빌어먹을 통증, 똑같은 절망만 남고 모든것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혼자 있을 때면 무섭도록 외로워서 누군가를 부르고 싶었지만, 정작 다른 사람들이 오면 기분이 더 나빠진다는 것을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 P96

그는 의지할 데 없는 자신의 처지와 절대 고독과 사람들의 잔인함과 신의 잔인함이 서러워서, 신의 부재가 서러워서 목 놓아 울었다. <어째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겁니까? 어째서 저를 이 지경까지 끌고 왔나요? 어째서,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저를 이다지도 괴롭히는 겁니까....?>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엉엉 울었다. 대답은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는 것 때문에 더 울었다.
- P107

그러나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잘못 살아서 이런 일을 당한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올바르게 살았는가를 되새기며 그 이상한 생각을 바로 떨쳐 버렸다.
- P111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최소한 이유는 알아야 할 거 아냐? 그런데 그게 불가능해.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한다면 설명이 가능하겠지. 그렇지만 그건 인정할 수가없어.>
- P115

<만약에, 의식적으로 살아온 내 평생의 삶이 정말로 《그게 아닌 삶》이었다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불현듯 솟구치기 시작한 것이다.
전에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여겼던 생각, 즉 자신이 인생을 잘못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것이 어쩌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P118

그는 똑바로누워 지나간 삶의 모든 것을 완전히 새로운 각도에서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하인에 이어 아내와 딸, 그리고 의사가 차례로 보여 준 행동과 말은 모두 간밤에 그가 깨달은 무서운 진실이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는 그들에게서 자기 자신을 보았고, 자기자신의 삶의 방식을 보았다. 그리하여 자신이 살아온 삶 전체가 <그게 아닌 것>이었다는 사실을, 모든 게 삶과 죽음의 문제를 가려 버리는 거대하고 무서운 기만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 
- P119

그러자 갑자기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이제까지 그를 괴롭히면서 마음속에 갇혀 있던 것들이 일순간 두 방향,
열 방향, 모든 방향에서 쏟아져 나왔다. 저들이 불쌍해.
저들이 더 고통받지 않게 해주어야 해. 저들을 해방시켜주고 나 자신도 이 고통에서 해방되어야 해. <얼마나 좋아, 얼마나 단순해. >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 P125

「끝났습니다!」 누군가가 그를 굽어보며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이반 일리치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죽음은 끝났어.>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더 이상 죽음은 없어.>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도중에 멈추더니 온몸을 쭉 뻗었다. 그렇게 그는 죽었다.
- P126

1883년 10월 20일. 오늘 나는 기관에 끌려가 정신 감정을 받았다. 
- P129

그럼 이제부터 내가 어떻게 그리고 왜 그런 검사를 받게 되었는지, 어쩌다가 미치게 되었으며 어떻게 나의 광기가 드러나게 되었는지를 차례로 얘기해 보겠다. 
- P130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기분이 나쁜거지? 무엇이 그토록 두려운거지?> 「나를 두려워하는 거지.」 죽음이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여기 있거든.」 온몸에 소름이 쫙끼쳤다. 그래, 죽음이야. 죽음이 오고 있어, 바로 여기 와있어. 하지만 그래선 안 돼. 
- P138

나는 아내에게 이 영지의 수익은 사람들의 가난과 슬픔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영지를 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한 순간 갑자기 내가 한말의 진실이 나를 밝게 비춰 주었다. 
- P151

이 모든 고통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고통이 없다면 죽음도 공포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예전과 같이 마음이 찢어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 P151

톨스토이는 평생 동안 문명을 비판했고 평생 동안 죽음을 성찰했다. 그의 무덤은 그의 사상의 출발점이자 종착역이다.
- P155

톨스토이에게 죽음은 삶의 이면이었으며 죽음의 문제는 삶의 문제와 동등하게 중요한 것이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동일한 문제의 양면이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도 해결할 수 없었다. 따라서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를 풀기 위한 문명-자연-도덕의 3중 코드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코드이기도 했다. 
- P166

이때의 체험은 15년 후 「광인의 수기」라는 단편으로 구체화되었다. 비록 미완성의 작품이지만 이 단편은 「참회록」과 「이반 일리치의 죽음」
사이에서 일종의 교량 역할을 하는 중요한 자전적 소설이다. 
- P175

그러니까 이반은 어느 특정 인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처럼 유한한 인간 일반이고 <이반 일리치의죽음>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의 죽음이라 해석할 수 있다.
톨스토이는 평생 동안 자기를 사로잡아 온 죽음의 문제를 이제 가장 보편적인 차원에서 펼쳐 보이는 것이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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