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인간에 대하여 - 라틴어 수업, 두 번째 시간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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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수업'이라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한동일님이 신간입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일단 저자분의 약력이 무척 독특합니다.
종교와 법을 동시에 다루는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나 변호사.
이번 책에서는 '인간의 믿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라틴어 수업, 두 번째 시간'이라는 부제처럼 첫 번째 책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상 마주하는 현실, 이를 종교적 의미와 사회적 의미에서 같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종교'와 '법'을 동시에 다루고 있기에 가능한 통찰이라 생각되네요.
현실에 맞지 않는 종교적 의미를 배제하고, 종교도 생활의 일부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당연하다 생각되는 말이지만, 작금의 현실을 보면 이 말이 너무 귀하게 느껴집니다.

'보다'는 생각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능동적이며 열려 있는 동사입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면, 바라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다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우리 스스로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 여러분의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눈에는 무엇이 보입니까?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눈으로만 바라봄을 뜻하지 않습니다.
'보인다'와 '본다'는 완전히 다른 의미입니다.
'보인다'는 수동적이고, 눈에 들어오는 피사체를 말하는 것이라면 '본다'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행태를 말합니다.
본 것을 통해 무언가를 생각하고, 느끼고... 그를 통해 우리는 성장합니다.
단지 '눈'으로만 보는 것은 아니지요.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만드는 글입니다.

이제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주어야 할 유산은, 한 번에 잃을 수도 있는 많은 돈이 아니라 실패의 시간을 버티고 살아갈 수 있는 건강한 태도와 정서일 것입니다.
실패를 마주할 수 있는 용기와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힘도 포함입니다.
그것을 해낸 사람은 자기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강해질 수 있음을, 멈춰 섰을 때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실패를 마주할 수 있는 용기.
저는 아직 이 용기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아이가 가끔 실수, 실패를 하는 것을 보면서 그런 도전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런 적이 있었겠지요.
하지만 언젠가부터 실수나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해 소극적으로 행동한 것 같습니다.
이것이 어른의 부작용일수도 있겠지요.
실수나 실패가 결코 끝이 아님을, 더 성장하기 위한 발판임을 아이에게도, 그리고 저에게도 다시 상기시켜야 될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에게 많은 것을 원하고 바라면서 기도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미래를 희망하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 정확히 방향을 모르면 올바른 기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타인에게 무언가를 갈구하기 전에 자신이 무엇을 희망하는지, 그 희망의 방향성이 맞는지, 그것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거기에서 나아가 신에게 무엇을 어떻게 청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묻고 성찰해야 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언젠가 '기도를 한다는 것이 결코 바라는 것만은 아니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공부를 하지 않고 열심히 100점을 맞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옳을까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요?
아닐겁니다.
기도는 신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기도를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옳은 것인지를 계속 묻는 과정입니다.
기도는 결과가 아닙니다.
자신의 기도에 대해 응답하지 않는다고 원망하기 전에, 기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부터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욕망한다. 그러므로 나는 실천한다.

욕망한다면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종교개혁 시대의 '무신론자'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와는 좀 다릅니다.
당시의 무신론자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과 다른 신앙을 주장하는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이렇듯 종교개혁 시대의 무신론자는 배타적 신앙에 따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입장은 19세기와 20세기에 사상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반대의 입장에 있는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낙인찍었던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신론자'의 개념을 보며 지금 세대를 돌아봅니다.
아군이 아니면, 적이라는 개념은 당시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둘도 아닌 중간도 있는데, 극단적 편향을 가진 사람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다양한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찌 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확실한 성향을 가질 수 있을까요?
모든 사람들의 성향을 존중해야 합니다.
내 편이 아니면 적이 아니라, 그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를 인정해야 합니다.

'라틴어 수업'을 볼때도 그렇지만 이번 책을 보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내가 그러진 않았는가, 난 어떠한가....
나와 다른 관점, 더 깊은 삶에 대한 지헤를 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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