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수많은 광고의 홍수속에서 살고있다.
광고도 점점 진화해서 이제는 이것이 광고인지, 기사인지도 모를 정도로 교묘해지고 있다.
컴퓨터를 켜고 원하는 자료를 찾기 위해 서핑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것들을 보고 놀랄 적이 있지 않은가?
잠깐의 여유시간동안 보려고 했지만 계속 보고 있지는 않았는가?
미디어는 우리의 주의력을 갖기 위해 최첨단의 기술과 고도의 심리방법을 이용하고 있다.
이 책은 그러한 주의력을 다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은 주의력을 끌려고 하는 것들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최초로 주의력을 끌려고 했던 것은 신문이였다.
원래 신문의 제작 목적은 지역 사회의 정보 전달이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수익을 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광고를 싣게 되었다.
이러한 광고는 포스터, 건물 외벽, 전단지로 점점 발전되고 그 범위도 넓혀졌다.
20세기는 기술의 발달로 다양한 미디어가 생기면서 TV, 라디오 등의 매체가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주의를 끈다는 것은 그것을 이용한 광고가 생긴다는 의미이다.
20세기까지는 미디어를 통한 소극적인 광고였다면 인터넷의 발달은 보다 적극적인 광고를 가능하게 해줬다.
특히 요즘같이 손안의 컴퓨터라 할 수 있는 스마트폰의 보급은 우리의 주의력을 더 많이 뺏아갈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주목하지 않을 권리를 어떻게 행사해야 할지를 말하고 있지 않다.
그저 거대기업들이 어떻게 우리의 주의를 더 많이, 더 자연스럽게 끌려고 하는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주의력 사업의 부상은 나에게 어떤 변화를 주는가? 왜 나는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아주 간단히 말한다면, 사람들의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업의 본질인 이 산업이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고, 또 바꿀 것이기 때문이다.
책의 서두에 있는 이 글은 왜 우리가 이 책을 봐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
주의를 끌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관심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유도할 수 있고, 내가 아닌 그들의 의도대로 생각하고 믿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거대 테크기업들의 궁극적인 목적이고, 지향점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런 유혹을 이겨내고 주의력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다시 되찾아 오기 위한 방법은 없을까?
시간과 주의력을 되찾겠다는 목표는 높이 평가하기는 쉽지만, 달성하기엔 놀라울 정도로 어려운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주말을 되찾으려는 경우만 하더라도, 이메일이나 페이스북, 기타 소셜 미디어를 확인하는 습관이나 자극적인 클릭베이트는 말할 것도 없고 뉴스 기사를 훑어보는 습관, 몇 시간씩 채널을 돌리며 쇼파에서 뒤척이는 습관 등, 우리의 몸에 깊이 밴 습관들을 거부해야 하는 고통스런 과정을 수반한다.
...
원래 나의 것인 주의력을 되찾는 불편한 과정을 완수하는 데 실직적인 동기가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손해를 생각해보면 도움이 된다.
개인의 목표, 즉 우리가 이루고 싶은 일들이 무엇이든, 그것은 대개 주의력 사업가들의 목표와 상충한다.
쇼파에 앉기가 무섭게 리모컨을 돌리고, 어디를 가든 손에 스마트폰은 손에 쥐고...
스마트폰이 곁에 없으면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무척 고통스러운 과정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리 해야 하는지는 아래의 글이 설명해 준다.
우리가 소비자 문화와 유명인 문화의 마취제 같은 영향은 물론이고 선진 국가식의 노예 상태를 피하는 미래를 바란다면, 먼저 우리의 주의력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고, 여태껏 빈번히 그래왔던 것처럼 쉽게 혹은 경솔하게 주의력을 내어주지 않겠다고 결심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주의력을 다시 본인의 것으로 만들고 삶의 경험 자체에 대한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물리적, 육체적 상태의 노예가 아닌, 정신적인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 주의력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지금 보고, 듣고 있는 것이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인지, 내가 원한 것인지를 한번 더 생각해 보자.
주목하지 않을 권리를 찾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