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 451 환상문학전집 1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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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 소설을 읽으면 마음이 심란해 며칠 씩 고민을 하는데도 찾아 읽게 된다.
읽고선 그러려니 하기보다, 정말 그 세계가 올 것만 같아서 두려움에 떨면서도.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화씨 451,
'1984'를 뛰어넘는 소설이라는 설명에 혹해 빌려봤다.



주인공 가이 몬태그는 방화수이다.(소방수가 아님)
몬태그가 사는 시대에 집은 불연체로 뒤덮혀 화재가 일어나지 않는다.
몬태그는 다만 책을 태운다.


사람들은 벽면 티비, 귀마개 오디오가 주는 감각적이고 단편적인 쾌락에 빠져 순간순간을 살아간다. 고뇌없이, 생각없이 살아간다. 인간은 분자화되고 서로 대화하지 않고, 서로를 의심하며 홀로 살아간다. 인간의 친구는 오직 벽면 티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뭐가 진실인지 알려 들지 않는다.
티비에서 말하는 그대로를 믿는 사람들.



이런 세상에서도 책을 지키고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는데,
몬태그는 책을 태운다.
책에는 진실이 있기 때문일까? 태워버린다. 때로는 책이 있던 집도, 책의 주인도 함께 태운다.



몬태그는 방화수이지만 
결국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책을 지키려고 한다.


뭐 대강 이런 내용인데



딱 잘라 말해 나에겐 1984보다 못하다.

뭐 그거야 개인취향의 차이니, 어떤 사람들에겐 이 소설이 더 좋을 것이고 어떤 사람에겐 별로일 텐데
그런데 내가 왜 이리 까칠하게 1984가 좋다고 주장하냐면

이 책의 뒤에 나온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어와 작가 모두 1984를 까고 있다=_=;;;;
1984는 디스토피아 소설, 미래소설로서의 수명을 다 했니 어쩌니하면서.


그런데 이 소설이 그렇게 뛰어난가?
난 잘 모르겠다.

솔직히 약간 개연성 없는 스토리와 복잡한 서술.
긴박한 상황을 너무 긴박하게 해 읽기 힘들어지는 인물의 심경묘사.
이게 뭐 의식의 흐름 기법도 아닌데 따라가기 힘든 그런!
그래서 긴박한 상황에 독자는 힘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물론 원작의 문제가 아니라 번역의 문제일 수도 있다)




책을 태우는 사회,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두렵겠지.
그러나 실제로 그런 상황이 올 것인가?

뒤에 실린 작가의 인터뷰를 보면
몇몇 소수집단들이 작가의 서술에 반기를 들고 작가의 표현에 문제를 삼아
'검열'이 이루어지자 그에 열받아 이 소설을 쓴 듯 하다.


그런데 '소수자들 때문에 작가는 숨을 쉴 수 없다'는 식으로 소수자를 까려는 작가를 곱게 볼 수만은 없다.


미국인, 백인, 메이저의 메이저인 신세로 살아가는 작가가
소수자를 깐다는게-_- 
물론 지 맘대로 못 써서 짜증은 날 수 있겠지.
그러든가 아니든가 결국은 자기 맘대로 쓸 거 아닌가.


메이저의 메이저 입장에서
작가의 별 쓰잘데기 없는 작은 서술에 
괜히 발끈하고 마는 소수자들의 자격지심에 대해 좀 더 관대하게 생각할 수는 없나?




꽤 재밌게 읽었는데도 왠지 까기 일색인 리뷰가 되어 버렸다.


어쨌건 재밌긴 했지만 마음에 남지는 않는다. 흥



  사람들을 얽어매려고 철학이니 사회학이니 하는 따위의 불안한 물건을 주면 안돼. 그런 것들은 우울한 생각만 낳을 뿐이야. 지금의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듯이, 벽면 텔레비전이 달린 아파트를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은 우주를 계산하고, 펴가하고, 등식화하려는 사람들보다 더 행복해. 뭘 평가하고 등식화한다는 것은 사람을 비인간적으로 외롭게 만드는 일일 뿐이라고.
 
페이지 : 103  



  난 저 불안한 물건(사회학이니 하는 따위의)을 가졌다.
  우울한 생각을 낳아서 불만도 많다. 
  작가 그대가 궁극적으로 옳다고 생각한 것을 가진 나는
  작가를 깐다~

  아우 이 아이러니.


 뭐, 내 생각도 검열당할 수 없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라면, 내 무례함도 참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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