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가격 - 부자들만 알고 있는 돈의 작동 원리
롭 딕스 지음, 신현승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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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출근길에 커피 한 잔 값이 올랐다며 투덜거린다. 점심 메뉴판을 보며 "예전엔 이렇게 비싸지 않았는 데"라고 중얼거린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를 단순히 물가 상승 정도로 치부하고 지나친다. 롭 딕스의 <돈의 가격>은 우리가 무심코 넘기는 이 현상이 사실은 화폐 시스템 전체의 구조적 문제이며, 우리 주머니에서 끊임없이 가치를 빼앗아가는 ‘합법적 절도'라는 것을 폭로한다. 저자는 지난 100년간 파운드화가 99%의 가치를 잃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제시한다. 우리 삶의 질과 직결된 문제다. 20년 전 옷장 깊숙이 넣어둔 지갑에서 100달러를 발견했다고 상상해보자.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은 당시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잠자는 동안 돈의 가치가 절반으로 증발해버린 셈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것이 '정상'으로 여겨지는 시스템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은행 예금이 안전하다는 믿음도 착각에 불과하다. 저자는 2009년 이후 지난 14년간 은행 이자로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구매력 손실을 절대 만회할 수 없었다고 지적한다. 현금을 꼭 쥐고 있는 것은 천천히 녹아내리는 얼음을 손에 들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사라진다. 이는 돈의 세 가지 기능 중 '가치 저장' 기능이 작동을 멈췄음을 의미한다. 교환의 매개로서, 가치의 척도로서는 여전히 기능하지만, 미래를 위해 부를 보존하는 도구로서의 기능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책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현대 은행이 돈을 만드는 방식에 관한 설명이다. 우리는 은행을 예금자와 대출자를 연결하는 중개인 정도로 생각한다. 누군가가 예금한 돈을 다른 누군가에게 빌려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다. 은행 직원이 컴퓨터 화면에 숫자를 입력하는 순간, 새로운 돈이 탄생한다. 금고에 쌓인 현금도, 예금자들의 저축도 필요 없다. 그저 키보드 타이핑 몇 번이면 10만 달러가 세상에 존재하게 된다. 경제학자 갤브레이스의 말처럼, 이 과정이 너무나 단 순해서 오히려 믿기지 않는다. 뭔가 더 복잡하고 신비로운 절차가 있어야 할 것 같다는 기대와 달리, 현실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다. 이는 현대 화폐 시스템의 본질을 드러낸다. 돈은 더 이상 금이나 은 같은 실물 자산에 기반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뢰와 합의, 그리고 컴퓨터 시스템 속 숫자에 불과하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필연적으로 부채의 폭발적 증가로 이어진다. 1970년대 금본위제가 폐지된 이후 정부 부채와 민간 부채는 천문학적으로 늘어났다. 제동장치가 사라진 화폐 시스템은 끊임없이 새로운 돈을 만들어냈고, 그 돈은 곧 누군가의 부채를 의미했다. 저금리는 이 과정을 더욱 가속화했다. 돈을 빌리는 비용이 낮아지자 정부도 기업도 가계도 앞다투어 빚을 늘렸다. 문제는 이 시스템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점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등장한 양적완화는 중앙은행의 궁극적 무기로 여겨졌다. 경제가 위기에 처하면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내 자산을 사들이고,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여 경기를 부양한다는 논리다. 표면적으로는 합리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이 정교하게 계산된 정책이 아니라 부작용을 통제할 수 없는 실험에 가깝다고 지적한다. 양적완화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만들어내는 불평등이다. 새로 창출된 돈은 경제 전체에 골고루 퍼지지 않는다. 금융시장을 통해 먼저 자산 소유자들에게 흘러간다. 주식과 부동산을 가진 사람들의 자산 가치는 치솟는 반면, 현금과 노동에 의존하는 사람들의 실질 구매력은 정체되거나 하락한다. 이는 구조적으로 부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메커니즘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출구 전략의 부재다. 양적완화로 풍선처럼 부풀려진 자산 가격은 이제 경제의 새로운 정상이 되었다. 만약 중앙은행이 이를 되돌리려 한다면 자산 가격 폭락과 경제 붕괴를 감수해야 한다. 결국 시스템은 계속해서 더 많은 돈을 찍어내는 방향으로만 나아갈 수 있다. 이는 마치 중독과 같다. 처음엔 소량으로 효과가 있었지만, 점차 더 많은 양을 투입해야만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현재 금융 시스템은 궁극적으로 신뢰 위에 세워져 있다. 금이나 은 같은 실물 자산이 뒷받침하지 않는 화폐는 사람들이 그 것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믿음으로만 가치를 유지한다. 정부가 발행한 종이쪼가리나 컴퓨터 화면의 숫자가 가치를 갖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가치 있다고 여길 것이라는 집단적 합의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시스템이 역사적으로 40~70년 정도의 주기로 큰 변화를 겪어왔다고 설명한다. 1971년 시작된 현재의 피아트 화폐 체제는 이미 50년을 넘어 섰다. 전례없는 부채 수준, 지속되는 저금리, 반복되는 금융위기, 심화되는 불평등 등은 모두 시스템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음을 시사하는 징후다.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 예상보다 빠르게, 그리고 극적으로 무너질 수 있다. 비트코인 같은 암호화폐의 등장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발행량이 엄격하게 제한되고, 중앙은행이나 정부가 임의로 증발시킬 수 없다는 특성은 피아트 화폐 시스템에 대한 불신의 표현이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희소성이 보장된 디지털 자산과, 눈에 보여도 무한정 찍어낼 수 있는 법정화폐 중 무엇이 더 가치 있는가? 이 질문은 화폐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를 요구 한다.

저자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금융 문해력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가장 강력한 경쟁 우위라는 사실이다. 시스템은 복잡하게 만들어져 있고, 그 복잡성은 의도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본질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돈은 희소성을 잃어가고 있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부를 잃고 누군가는 축적한다. 어느 쪽에 설 것인가는 이해와 선택의 문제다. 책은 그 이해의 출발점이자, 더 나은 선택을 위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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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F 투자의 기술 - 내 월급을 자산으로 바꾸는
최창윤 지음 / 원앤원북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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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점심시간 카페에서, 퇴근 후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주식 차트를 들여다본 다. 삼성전자가 오늘 몇 퍼센트 올랐는지, 미국 증시는 어땠는지, 내가 보유한 종목에 악재는 없는지. 직장인 투자자의 일상은 늘 이렇게 분주하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열심히 해도 수익은 나지 않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우리는 노력의 방향을 잘못 잡았을 뿐이다. 워런 버핏은 자신의 유산 중 90%를 인덱스펀드에 투자하라고 남겼다. 세계 최고의 투자자가 개별 종목이 아닌 지수추종 상품을 택한 이유는 명확하다. 시장을 이기려 애쓰 는 것보다 시장과 함께 가는 것이 훨씬 현명하기 때문이다. ETF는 바로 그 철학을 가장 효율적으로 실현하는 도구다. 300 조 원을 돌파한 국내 ETF 시장, 1,100개가 넘는 상장 종목. 이제 ETF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책은 이 ETF의 기초 부터 최신 정보와 전략을 상세하게 설명해 준다. 주식시장의 활황과 함께 현 시점은 그야말로 ETF의 전성시대인 것 같다.

그래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한다. 모든 ETF가 평등하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멈춰 서야 한다. ETF 시장의 폭발적 성장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순자산 50억 원도 채 되지 않는 좀비 ETF가 35개, 100억 원 미만이 145개에 달한다. 매년 50여 개의 ETF가 조용히 상장폐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투자자는 많지 않다. 이름만 그 럴듯한 ETF, 일시적인 유행에 편승해 급조된 테마형 ETF. 이들은 화려한 수익률 그래프로 투자자를 유혹하지만, 실상은 개별 종목 투자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AI, 양자컴퓨팅', '메타버스'처럼 트렌디한 단어가 붙은 ETF라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ETF가 무엇을 담고 있고, 어떤 방식으로 운용되며, 실제로 추종하는 벤치마크를 제대로 따라가고 있는가다. 같은 이름을 달고 있어도 구성 종목의 비중은 천차만별이다. 반도체 ETF라고 해서 다 같은 반도체 ETF가 아니다. 어떤 ETF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80%를 차지하고, 어떤 ETF는 미국의 엔비디아와 AMD에 집중되어 있다. 표면만 보고 투자했다가는 예상과 전혀 다른 결과를 마주하게 된다. 진짜 투자는 여기서 시작된다. 이름이 아니라 속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최근 국내 투자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는 상품이 있다. 바로 커버드콜 ETF다. 매달 꼬박꼬박 분배금을 지급하는 이 ETF는 마치 월급처럼 안정적인 현금흐름을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은퇴를 준비하는 투자자나 추가 소득을 원하는 직장인에게 매력적이다. 커버드콜 전략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ETF가 보유한 주식에 대해 콜옵션을 매도하여 프리미엄을 받는 구조다. 쉽게 말해, 주식을 보유하면서 "일정 가격 이상 오르면 팔겠다"는 권리를 팔아 수수료를 받는 것이다. 주가가 횡보 하거나 완만하게 상승할 때는 이 전략이 빛을 발한다. 주식 보유에 따른 배당과 옵션 매도 프리미엄까지 이중으로 수익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커버드콜 ETF의 치명적 약점은 상승장에서 수익이 제한된다는 점이다. 주가가 급등해도 미리 정해진 가격에 주식을 넘겨야 하므로, 추가 상승분을 포기해야 한다. 2023년 하반기처럼 빅테 크 주식이 폭발적으로 상승한 시기에는 일반 ETF 대비 수익률이 현저히 낮았다. 그렇다면 커버드콜ETF는 언제 유효할 까? 시장이 불확실하고 변동성이 큰 시기, 주가가 박스권에 갇혀 있을 때가 적기다. 안정적인 현금흐름이 필요하면서도 큰 손실은 피하고 싶은 투자자에게 적합하다. 중요한 건 이것이 '만능 상품'이 아니라 시장 상황에 따라 선택적으로 활용해 야 할 '도구'라는 점이다.

코스피가 연일 신고가를 경신하는데도 인버스ETF를 사들이는 개인투자자들이 있다. "이제 곧 떨어질 것 같아서", 고점인 것 같아서"라는 막연한 감에 기대어 베팅하는 것이다. 결과는? 지수가 계속 오르면서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인버스 ETF는 수익을 극대화하는 상품이 아니다. 하락장에 대비한 단기 방어 수단이다. 보유 중인 주식을 팔기엔 아깝고, 그렇다고 추가 하락이 두려울 때 포트폴리오의 일부로 편입해 리스크를 헤지하는 것이 본래 용도다. 마치 보험처럼 말이다. 문제는 많은 투자자가 인버스ETF를 '하락에 베팅하는 투기 수단'으로 오해한다는 점이다. 장기 보유는 더욱 위험하다. 인버스 ETF는 매일매일 지수 변동의 역방향으로 수익률이 계산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추종 오차가 커진다. 변동성 이 클수록 손실은 가속화된다. 결론은 명확하다. 인버스 ETF는 투자 대상이 아니라 위험 관리 도구다. 하락 추세가 명확히 확인된 짧은 구간에서만 활용하고, 목적을 달성하면 즉시 청산해야 한다.

ETF는 게으른 투자자를 위한 상품이 맞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투자해도 되는 상품'은 아니다. 오히려 ETF 투자는 최소한의 공부와 전략이 필요하다. 어떤 지수를 추종하는가, 구성 종목은 무엇인가, 괴리율은 얼마나 되는가, 거래량은 충분한가, 운용 보수는 적정한가. 이 기본적인 질문들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ETF 이름만 보고 투자하는 것은 음식 이름만 보 고 주문하는 것과 같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형편없을 수 있다. ISA 계좌를 활용한 절세 전략, 포트폴리오 리밸런싱 타이밍, 분배금 재투자 여부, 환지 선택 기준. 이런 디테일이 장기 수익률을 좌우한다. 매달 자동 적립식 투자로 시간 분 산 효과를 누리고, 보조지표(볼린저밴드, RSI, MACD)를 활용해 매수•매도 타이밍을 잡는 것도 수익률 개선에 도움이 된다.

삼성전자가 부진해도 SK하이닉스가 상승하면 손실을 상쇄할 수 있고, 반도체 업황 자체가 개선되면 자연스럽게 수익이 난다. ETF 투자의 핵심은 '옥석을 가리는 눈'과 '시장을 읽는 감각', 그리고 '나만의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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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요일의 여행 - 개정판 ㅣ 모든 요일
김민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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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은 과연 여행과 일상의 경계는 무엇인가? " 였다. 우리는 흔히 여행을 일상의 탈출구로 여긴다.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것, 그것이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은 그 이분법적 사고에 균열을 낸다. 작가는 여행지에서도 쌀을 씻고,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한다. 여행지의 슈퍼마켓을 돌아다니며 장을 보고, 동네 카페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그 평범한 순간들 속에서 여행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한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 일상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만약 여행지에서의 평범한 일상이 특별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일상 또한 여행처럼 특별할 수 있지 않을까? 작가가 망원동을 '고향'이라고 부르게 된 과정이 이를 증명한다. 태어난 곳도 아닌 그곳을 고향이라 부를 수 있었던 건, 그곳의 골목을 여행하듯 걸었기 때문이다. 그곳의 카페를, 식당을, 사람들을 여행 자의 시선으로 발견했기 때문이다.

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느림'이다. 느리게 주문을 받는 식당, 느리게 음식이 나오는 카페, 헤매고 길을 잃는 시간들.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런 느림은 참을 수 없는 비효율이다. "빨리빨리"가 몸에 배어 있는 우리는 여행지에서조차 그 속도를 유지하려 한다. 최대한 많은 곳을 가보고, 최대한 많은 것을 경험하고, SNS에 올릴 만한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작가는 여행에도 “일요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허락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여행이라는 것이다. 이는 비단 여행에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일상 또한 쉼 없이 달려가야 하는 평일로만 채워져 있지 않은가? 생산적이어야 하고, 유용해야 하고, 무언가를 성취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우리는 '무용한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파리의 카페에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느낀 해방감은,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얼마나 스스로를 옥죄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한다. 슈퍼에고에서 벗어나는 순간, 비로소 '지금 여기'를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나른함 속에서, 무료함 속에서, 무의미해 보이는 시간 속에서 오히려 삶의 본질적인 것들이 드러난다.

여행이 주는 또 다른 선물은 불편함이다. 우리는 여행을 완벽하게 계획하려 한다. 맛집 리스트를 만들고, 동선을 최적화하고,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여행의 진짜 이야기는 계획이 틀어지는 순간에 시작된다. 버스를 놓치고, 예약한 식당이 문을 닫았고, 비가 내려 계획했던 일정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들. 바로 그 순간들이 우리를 여행자로 만든다. 작가가 안개 낀 톨레도에서 깨달은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최선이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진다. 완벽한 날씨, 완벽한 일정, 완벽한 경험을 기대하는 대신, 지금 주어진 이 순간 속에서 좋은 부분을 찾아내려 애쓰는 것. 그것이 여행을 풍요롭게 만드는 비결이다. 이는 우리 일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고, 우리는 자주 좌절한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 그 불편함을 여행에서처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어떨까? "오늘은 일요일이다"라고 선언하며 조급함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일상은 한결 가벼워질 것 이다.

​책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는 '기록'이다. 작가는 끊임없이 쓴다. 여행지에서도, 일상에서도. 그리고 그 기록들이 모여 삶이 된다. 단순히 어디를 갔고 무엇을 샀는지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의 감정을, 생각을, 의미를 기록한다. 불행을 쓰면 그것이 수첩 속에 갇히고, 행복을 쓰면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된다고 말하는 작가의 고백은 기록의 치유적 힘을 보여준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들을 그냥 흘려보내는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순간도, 가슴 뛰었던 순간도, 아 팠던 순간도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진다. 그러나 기록은 그 순간들을 붙잡는다. 더 나아가 기록은 그 순간을 재해석하게 만든다. 막연히 좋았던 순간이 왜 좋았는지, 불편했던 순간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돌아보게 된다. 작가가 "나는 이런 걸 좋아 하는 사람이구나"를 여행을 통해 배웠다고 말할 때, 그것은 여행을 다녀온 것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깨달음이다. 기록하고, 돌아보고,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작업이다. 나는 무엇을 좋아 하는 사람인가? 무엇을 위해서는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인가? 이런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일상을 기록 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일상을 여행처럼 사랑하고자 한다. 여행지에서 느끼는 설렘과 호기심, 관대함과 여유를 일상에도 가져오고 싶다. 매일 아침 기지개를 켜며 ”오늘이 다시 오지 않을 한 때"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하루는 달라질 것이다. 여행은 멀리 떠나는 것만이 아니다. 익숙한 동네를 낯선 눈으로 바라보는 것, 자주 가던 카페에서 새로운 메뉴를 시도하는 것, 늘 지나치던 골목을 천천히 걸어보는 것. 이 모든 것이 여행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태도다. 호기심을 잃지 않는 것, 불편함을 받아 들이는 것, 느림을 허락하는 것, 무용한 시간을 견디는 것.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을 기록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책을 덮으며 나는 다짐해 본. 내 일상의 고향을 사랑하겠다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여행하듯 바라보겠다고, 희망을 고집하겠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이 다시 오지 않을 한 때임을 기억하며 이 순간을 살아가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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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말을 잘하게 됩니다 - 일이 술술 잘 풀리는 말하기 스킬
박수연 지음 / 현익출판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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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종종 착각합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타고났다고, 나는 원래 말주변이 없다고, 성격이 내성적이라 어쩔 수 없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박수연 변호사의 이야기는 이러한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아나운서에서 변호사까지, 말이 곧 경쟁력인 분야를 종횡무진 누빈 그녀조차 스스로를 '코맹맹이 염소'라고 표현했습니다. 중요한 건 시작점이 아니라 훈련의 방향과 지속성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말하기 능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유튜브, 팟캐스트, 각종 SNS를 통해 누구나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대. 1인 미디어가 일상화되면서 말은 개인 브랜드를 구축하는 핵심 도구가 되었습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보고, 발표, 면접, 협상처럼 말 한마디가 결과를 좌우하는 순간들이 넘쳐납니다. 같은 내용을 다루더라도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고, 그 평가는 곧 커리어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말을 잘하게 될 수 있을까요? 화려한 수사나 위트 있는 농담이 정답일까요? 저자는 명확하게 선을 긋습니다. 진짜 말 잘하는 사람은 상황에 맞게 핵심을 전달하고, 질문의 의도를 파악해 논리적으로 응답하며, 무엇보다 신뢰를 주는 말투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친구들과 나누는 편안한 대화와 회의실에서 요구되는 발표는 전혀 다른 차원의 커뮤니케이션입니다. 평소 수다스럽고 사교적인 사람도 프레젠테이션 앞에서는 얼어붙습니다. 반대로 조용하고 과묵한 사람이 중요한 순간 한 마디로 회의의 분위기를 바꾸기도 합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바로 '말의 구조'입니다. 일상 대화는 자유롭고 감정적이며 맥락 의존적입니다. 하지만 업무 환경에서의 말하기는 명확한 목적, 제한된 시간, 평가하는 청중이라는 세 가지 조건 아래 이루어 집니다. 여기서는 감정보다 논리가, 장황함보다 간결함이, 모호함보다 명확함이 우선시됩니다. 저자가 소개하는 OBC 구조는 이러한 업무 말하기의 기본 뼈대입니다. Opening(시작)에서 청중의 관심을 끌고, Body(본론)에서 핵심 내용을 전달하며, Closing(마무리)에서 행동을 촉구하거나 메시지를 각인시킵니다. 이 단순해 보이는 구조가 발표를 횡설수설에서 설득력 있는 커뮤니케이션으로 바꿔놓습니다. '3단 키워드 프레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정리가 안 되는 사람, 질문을 받으면 두서없이 대답하는 사람에게 이 방법은 구명조끼와 같습니다. 핵심 키워드 세 개를 먼저 정하고, 그 주위로 내용을 배치하면 말은 자연스럽게 구조를 갖추게 됩니다. 듣는 사람도 따라가기 쉽고, 말하는 사람도 길을 잃지 않습니다.

같은 팀, 같은 연차, 비슷한 업무를 하는데도 유독 주목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이 특별히 더 똑똑하거나 화려한 말재주를 가진 건 아닙니다. 차이를 만드는 건 '말의 디테일'입니다. 단어 하나, 표현 하나를 다듬는 데는 5초도 걸리지 않지만, 그 작은 차이가 능력으로 평가되기도 하고 미숙함으로 기억되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그냥... ", "뭐..." 같은 말버릇은 무심코 내뱉는 것처럼 보이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불확실함과 자신감 부족으로 전달됩니다. 반대로 "제 판단에는", 자료에 따르면"처럼 근거를 제시하는 표현은 같은 내용도 더 무게감 있게 만듭니다. 말의 무게감은 권위나 직급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이런 작은 습관들의 축적에서 비롯됩니다. 속도와 호흡도 중요합니다. 긴장하면 말이 빨라지고, 빨라진 말은 불안 함을 더 증폭시킵니다. 문장 사이에 1~2초의 여백을 두는 것만으로도 말은 훨씬 안정적으로 들립니다. 침묵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적절한 침묵은 청중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다음 문장을 정리할 여유를 줍니다. 목소리 자체도 훈련의 영역입니다. 좋은 목소리는 '예쁜 소리'가 아니라 안정된 호흡, 명료한 발음, 듣는 이를 사로잡는 울림을 갖춘 소리입니다. 근육과 호흡, 공명이라는 세 가지 축을 꾸준히 훈련하면 누구나 또렷하고 신뢰감 있는 목소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루 10분, 아나운서처럼 발성 연습을 하는 것만으로도 변화는 시작됩니다.

커리어에서 가장 오래 남는 브랜딩은 '말'입니다. 학력, 경력, 자격증은 이력서에 명시되지만, 말하기 능력은 면접과 발표, 협상의 순간마다 실시간으로 평가됩니다. 그리고 그 평가는 사람에 대한 전체적인상을 형성합니다. 말을 잘한다는 건 나의 강점과 매력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상대가 원하는 답을 명확히 전달하며, 신뢰를 쌓을 수 있는 말투를 갖추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하기 이력서'입니다. 한번 익혀두면 진득하게 오래도록 써먹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커리어 무기입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말하기는 분명한 원리와 구조가 있는 기술입니다. 자신의 약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체계적으로 훈련하면 누구나 개선할 수 있습니다. 긴장으로 목소리가 떨린다면 호흡과 발성을 연습하고, 내용이 산만하다면 키워드 프레임을 활용하며, 말투가 거슬린다면 불필요한 습관을 제거하면 됩니다. 중요한 건 시작입니다. 비싼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타고난 재능이 없어도, 매일 10분씩 의식적으로 연습하면 변화는 반드시 찾아옵니다. 말 때문에 손해 보는 삶에서, 말로 기회를 잡는 삶으로. 그 변화의 시작점은 바로 '오늘부터' 시작하는 작은 훈련입니다.

말하기 능력은 생존의 문제입니다. 디지털 시대, AI가 많은 일을 대체하는 지금,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은 결국 '관계와 소통'입니다. 기계는 정보를 전달할 수 있지만, 신뢰를 쌓고 사람을 움직이는 건 여전히 인간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말'이 있습니다. 말 한마디가 계약을 성사시키고, 면접을 합격으로 이끌며, 갈등을 해결하고, 팀을 하나로 모읍니다. 반대로 말 한마디가 관계를 망가뜨리고, 기회를 날리며, 신뢰를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나비효과처럼 작은 말의 습관이 커리어 전체를 바꿔놓을 수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시작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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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천재 고려 - 최강대국에 맞선 작은 나라의 생존 전략
이익주 지음 / 김영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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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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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읽다 보면 때때로 놀라운 역설과 마주하게 됩니다. 중국 대륙에서는 송, 요, 금, 원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왕조의 교체가 있었습니다. 각 왕조는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동아시아를 지배했지만, 그 어떤 왕조도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격동의 세월 속에서 한반도의 고려는 500년이라는 긴 시간을 버텨냈습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고려가 가진 외교적 통찰의 결과였습니다. 고려의 외교 전략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가장 먼저 질문한 것은 누가 더 강한가"가 아니라 "이 체제는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당장의 군사력보다 중요한 것은 그 힘이 얼마나 오래 유지될 수 있는지, 그 구조가 얼마나 안정적인지였습니다. 송나라는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매력적인 국가였습니다. 하지만 고려는 송이 군사적으로 취약하다는 점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류는 유지하되, 모든 것을 거기에 걸지는 않았습니다. 요나 금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위협적이지만 적으로만 규정하지 않고, 관리해야 할 변수로 바라봤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려 외교의 핵심이었습니다. 지금 강한 자가 아니라, 오래 남을 구조를 읽어내는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종종 "명확한 선택"을 요구받습니다. 이쪽이냐 저쪽이냐, 흑이냐 백이냐 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지배적입니다. 하지만 고려의 외교를 보면, 그들은 오히려 명확한 편을 들지 않는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송과 금이 대립할 때도, 고려는 어느 한쪽과 결정적인 군사 동맹을 맺지 않았습니다. 사신은 보내되, 되돌릴 수 없는 약속은 남기지 않았습니다. 우유 부단함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는 상황을 끝까지 지켜보며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고도의 전 략이었습니다. 고려는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왕조는 언제든 바뀔 수 있지만, 고려는 이 땅에서 계속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귀주대첩 이후의 행보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고려는 거란군을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뒀습니다. 민족의 자긍심을 드높일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려는 그 이듬해 거란에 사신을 보내 다시 조공 관계를 청했습니다. 감정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입니다. 하지만 고려는 계산했습니다. 전쟁의 승리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안 정이었고, 승전의 기쁨보다 중요한 것은 다음 세대의 평화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체면이 아닌 존속을 선택한 외교였습니 다. 지금의 자존심보다 다음 세대의 국가를 우선시한 결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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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의 담판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학교에서는 "말을 잘해서 영토를 얻었다"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이 것은 서희 담판의 본질을 놓친 설명입니다. 서희가 보여준 것은 언변이 아니라 국제 질서의 구조를 읽어내는 능력이었습니다. 서희는 거란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거란의 진짜 목표는 고려 정복이 아니라 송나라 견제였습니다. 서희는 이 지점을 정확히 짚어냈습니다.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국이다"라는 선언은 역사적 주장만이 아니 었습니다. 거란이 구축하려는 국제 질서 안에서 고려의 위치를 재설정하는 전략적 발언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서희는 국경 문제의 원인을 제3의 변수인 여진으로 돌렸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적이 아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당신이 원하는 질서 안정에 우리가 도움이 될 수 있다." 이 구조를 명확히 만든 뒤, 협상은 자연스럽게 고려에 게 유리하게 흘러갔습니다. 강동 6주는 말로 얻은 땅이 아니었습니다. 상대방의 필요를 정확히 읽고, 그 안에서 고려가 제공할 수 있는 가치를 제시한 결과였습니다. 협상의 본질은 설득이 아니라 구조의 재배치라는 것을 서희는 보여줬습니다.


고려 외교를 이야기할 때 가장 논쟁적인 부분은 아마도 원나라 시기일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시기를 고려 외교의 실패로 규정합니다. 실제로 굴욕적인 사건들이 많았고, 국가 자율성도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긴 호흡으로 바라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몽골제국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초강대국이었습니다.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제국 앞에서 고려만큼 버틴 나라가 얼마나 될까요? 30년 항쟁 끝에 고려는 결국 몽골의 영향권 안에 들어갔지만, 완전히 병합되지는 않았 습니다. 왕조를 유지했고, 언어와 문화를 지켰으며, 제도적 정체성을 보존했습니다. 충렬왕의 친조 외교는 이런 맥락에서 재평가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쿠빌라이와의 협상에서 원칙을 세웠습니다. 형식적 복속은 받아들이되, 내정 간섭은 최소화하는 선을 그었습니다. 몽골 공주와의 혼인도 굴욕이 아니라 왕권 보호의 전략으로 활용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친원 세력의 횡포, 기황후 일족의 전횡, 국가 질서의 혼란 등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외교 전략 자체의 실패라기보다, 국내 정치 역학의 실패로 봐야 합니다. 외교는 성공했지만, 그 성과를 국내적으로 관리하는 데 실패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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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외교가 진짜 실패한 순간은 언제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고려 말 친명반원 노선을 성급하게 선택했을 때였습니다. 원이 쇠퇴하고 명이 부상하는 과도기, 고려는 너무 빨리 명나라 편에 섰습니다. 중립을 포기하고 명확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결과는? 명은 오히려 고려를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려는 대항할 수단이 없었습니다. 원과의 관계를 너무 일찍 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강대국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는 것은 약소국 외교의 정석입니다. 그런데 왜 고려는 이 원칙을 버렸을까요? 그 배경에는 신진 사대부의 명분론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실리보다 명분을 우선시했습니다. "오랑캐 원나라를 버리고 중화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이념적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외교적으로는 재앙이었습니다. 명분에 갇힌 외교는 현실을 읽지 못합니다.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의 입장만을 고집하게 됩니다. 고려가 수백 년 동안 유지해온 실리 외교의 전통이 무너진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2026년 현재, 대한민국은 다시 한 번 강대국 사이에 서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은 구조화되었고, 국제 질서는 빠르게 재편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택을 요구받습니다. 어느 편에 설 것인가, 동맹이냐 균형이냐. 이럴 때 고려의 외교 가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계산하고 있는가? 당장의 군사력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체제의 지속 가능성을 보고 있는가? 명확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압박에 굴복하고 있는가, 아니면 상황을 끝까지 지켜보며 리스 크를 관리하고 있는가? 고려 외교의 교훈은 간단합니다. 힘의 논리에 휘둘리지 말고, 구조의 논리를 읽어라. 감정적 반응보다 전략적 사고를 우선하라. 체면보다 존속을 선택하라. 명분에 갇히지 말고, 실리를 챙겨라. 물론 오늘날의 상황은 천 년 전과 다릅니다. 국제법의 발달, 민주주의 체제, 실시간 정보 유통 등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강대국은 여전히 힘의 논리로 움직이고, 약소국은 여전히 생존의 문제를 고민해야 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에 게는 고려라는 선례가 있다는 것입니다. 500년을 버텨낸 나라, 명분보다 실리를 택하고, 감정보다 전략을 우선시하며, 지금의 자존심보다 다음 세대의 미래를 선택한 나라의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 외교를 공부하다 보면 하나의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약소국의 품격은 강함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품격은 현실을 직시하는 용기에 있고, 감정을 절제하는 이성에 있으며,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에 있습니다. 서희가 거란 앞에서 보여준 것은 힘이 아니라 지혜였습니다. 귀주대첩 이후 다시 사신을 보낸 것은 굴욕이 아니라 성숙함이었습니다. 충렬왕이 몽골과 협상하며 지킨 선은 자존심이 아니라 실질적 자율성이었습니다. 반대로 고려 말 명분에 사로잡혀 성급하게 선택했을 때, 고려는 품격을 잃었습니다. 현실을 읽지 못하고, 감정에 휘둘리며, 미래를 계산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강함이 아니라 현명함, 목소리가 아니라 안목, 선택이 아니라 균형. 고려가 500년을 버틴 비결은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현명했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과거를 외우는 일이 아닙니다. 과거의 선택을 통해 오늘의 기준을 세우는 일입니다. 고려의 외교는 우리에게 하나의 질문을 남깁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으로 판단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고려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을 제대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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