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나는 예술학 - 큐레이터와 예비 전공자를 위한 예술의 길잡이
홍보라매 지음 / 씨마스21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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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기도 하고, 역사적 탐구의 대상이기도 하며, 과학적 분석의 대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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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한 인생 사전 - 두 언어를 오가며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재미
박솔미 지음 / 북스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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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대학교 2학년 때였다. 영문학 개론 수업 교수님이 칠판에 한 문장을 썼다.

"The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

소크라테스의 말이었다. 교수님은 분필을 내려놓으며 잠시 침묵했고, 강의실 안에는 뭔가 의미심장한 공기가 흘렀다. 나는 노트에 그 문장을 받아 적었다. 그리고 옆에 조심스럽게 번역을 달았다. '성찰 없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다 쓰고 나서 밑줄을 그었다. 뭔가 대단한 것을 손에 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게 전부였다. 밑줄 하나 긋고, 노트를 덮었다. 시험에 나올 것 같은 문장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 문장이 내 삶과 무슨 상관인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토익 점수를 올려야 했고, 자기소개서를 다듬어야 했으며, 졸업 후의 진로를 걱정하느라 바빴다. 영어는 그렇게 점점 성찰의 언어가 아니라 스펙의 언어로 자리를 옮겼고, 나는 그 이동을 눈치채지 못한 채 졸업을 했다.

​그 뒤로 오랫동안, 나는 영어 문장을 읽어도 '읽지' 않았다. 이메일을 해독하고, 계약서를 번역하고,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다듬었다. 영어가 필요했고, 영어를 썼고, 영어로 일했다. 하지만 어느 문장 앞에서 멈춰 선 적이 없었다. 단어 하나를 두고 '이게 왜 이 단어여야 했을까' 하고 오래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나에게 영어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었지, 그 자체로 사유의 공간이 된 적이 없었다. 그러다 책을 읽으며, 한 문장을 만났다.

"True integrity comes when we stop seeking approval."

출처도 불분명했고, 누가 보내준 것도 아니었다. SNS 피드를 스크롤하다 그냥 스쳐 지나갈 수도 있었던 문장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손가락이 멈췄다. 'integrity'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우리말로 뭐라고 옮겨야 하는지, 사전적 정의는 알지만 이 문장 안에서 정확히 무슨 무게를 지고 있는지, 금방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오랜만에, 문장 앞에서 멈췄다.

'integrity'를 번역하려고 한참을 씨름했다. '정직함'이라 하기엔 도덕적 울림이 너무 표면적이고, '성실함'이라 하기엔 무언가 핵심을 비껴가는 느낌이었다. '온전함'은 근접했지만 조금 아쉬웠고, '완전함'은 결과의 뉘앙스가 너무 강했다. 무엇보다 이 단어에는 외부의 시선과 무관하게, 자기 스스로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서만 풍기는 어떤 고요하고 단단한 인상이 담겨 있었다. 그게 한 단어로 딱 떨어지지 않았다. 대학 시절의 나라면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어림잡아 '성실함' 정도로 처리하고 다음 줄로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그러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 애매함이 좋았다. 한 단어가 담고 있는 무게가 어느 언어의 그릇에도 완전히 옮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슬프기보다는 경이로웠다. 그건 어쩌면, 내가 그동안 잃어버렸던 감각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많은 것들이 빠르게 처리된다. 감정도, 관계도, 생각도. 느리게 앉아서 한 문장을 이리저리 뒤집어보는 일을 언제부턴가 사치처럼 여기게 되었다. 빠른 결론이 능력처럼 느껴지고, 긴 침묵은 비효율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나도 모르게 나 역시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문장은 달랐다. 문장은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틀린 번역이 있고 나쁜 번역이 있을 수는 있어도, 느린 번역이 나쁜 번역인 건 아니었다. 오히려 오래 들여다볼수록 문장은 다른 층위를 드러냈다. 'integrity'가 단순히 '정직한 사람'을 묘사하는 형용사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이 자기 내면의 나침반을 흔들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나는 그 문장이 나에게 하는 말을 비로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면 나는 지금, 나의 기준으로 살고 있는가. 영어 문장이 던진 질문이 이렇게 깊이 들어온 건 오랜만이었다.

책을 읽으며 나는 조금씩 달라졌다. 아주 거창하게 달라진 건 아니다. 다만 예전엔 스크롤을 멈추지 않았을 문장에서 손가락이 멈추는 횟수가 늘었다. "Stay grounded." 요가 선생님이 즐겨 쓰던 표현인데, 어느 날 다시 읽었더니 삶 전체에 대한 조언처럼 들렸다. 흔들리는 건 두렵지 않다. 다만 중심축이 어디인지 모를 때가 두렵다. 그 말이 그런 뜻이었구나, 하고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The way we talk to our children becomes their inner voice." 이 문장은 더 오래 앉아 있게 만들었다. 아이에게 하는 말이 결국 그 아이의 내면을 짓는다는 것. 그렇다면 지금 내가 스스로에게 하는 말들도, 나의 내면을 계속 짓고 있다는 것. 하루에도 몇 번씩 스스로를 향해 내뱉는 말들을 돌아보게 됐다. 그 말들이 나를 자라게 하는지, 아니면 조용히 쪼그라들게 하는지. 번역을 하려다가 나 자신을 읽게 됐다.

"When in eternal lines to time thou grow'st."

셰익스피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 말. 나의 언어로 너를 붙들어두겠다는 다짐. 그 오래된 문장을 읽으며 나는 생각한다. 나는 어떤 문장을 붙들고 살아가고 싶은가. 어떤 말을 내 내면의 목소리로 삼고 싶은가. 대학 시절, 밑줄 하나 긋고 덮었던 노트를 이제야 다시 펼치는 기분이다. 늦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문장은 기다려준다. 언제 돌아와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 천천히, 다시 읽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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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묻는 사회 - 한국형 연령차별주의와 멸칭 문화
정회옥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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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가장 먼저 묻는 것이 나이라는 사실을, 나는 오랫동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냥 당연한 일이었다. 공기처럼 존재하는 것들은 질문받지 않는다. 우리가 언제부터 숨을 쉬기 시작했는지 묻지 않듯이, 나는 왜 나이를 먼저 묻는지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외국인 친구와 처음 만남을 가졌을 때, 그 친구가 내 나이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음악을 듣는지, 요즘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물었다. 그 대화는 이상하게도 훨씬 가벼웠고, 동시에 훨씬 깊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는데, 한참이 지나서야 그 감정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숫자로 분류되지 않은 채 그냥 한 사람으로 존재했던 느낌이었다.

나보다 어린 사람 앞에서 나는 선배가 되고,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 앞에서 나는 후배가 된다. 이 질서 속에서 우리는 어디에 서야 하는지, 어떤 말투를 써야 하는지, 어느 자리에 앉아야 하는지를 순식간에 파악한다. 참으로 효율적인 시스템이다. 하지만 효율과 인간다움은 종종 정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나이가 위치를 결정하는 순간, 사람은 사라지고 숫자만 남는다. 서른 살의 누군가는 그가 어떤 슬픔을 안고 살아왔는지, 무엇에 웃음을 터뜨리는지, 새벽 세 시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와 무관하게, 그냥 '서른 살'이 된다. 예순 살의 누군가는 지난 수십 년간 쌓아온 경험과 지혜, 여전히 뛰고 있는 욕망과 꿈과 무관하게, 그냥 '예순 살'이 된다. 인간이라는 복잡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두 자리 숫자로 납작하게 눌린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우리가 나이 대신 다른 무언가를 먼저 물었다면 어땠을까. 요즘 가장 관심 있는 것이 무엇인지, 최근에 읽은 책이 무엇인지,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선택이 무엇인지. 그랬다면 우리는 훨씬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훨씬 많은 의외의 연결을 발견했을 것이다.

나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집착이 만들어낸 가장 잔인한 결과 중 하나는, 모든 나이대가 차별받는다는 역설이다. 어린이는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발언권을 빼앗기고, 청년은 아직 모른다는 이유로 훈계를 듣고, 중년은 시대를 모른다는 이유로 조롱받고, 노인은 이미 늙었다는 이유로 배제된다. 어느 나이대도 온전히 환대받지 못한다. 모두가 차별받고 있으면서도, 역설적으로 모두가 누군가를 차별한다. 아무도 안전하지 않은 이 구조 속에서 우리는 그저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 더 씁쓸한 것은, 이 차별이 너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것을 차별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어린 사람에게 기특하다고 말하는 것이 칭찬이라고 생각하고, 늙은 사람에게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공경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특하다'는 말 속에는 그가 동등한 인격체가 아니라는 전제가 숨어 있고, '어르신'이라는 호칭은 어느새 공동체의 중심에서 그를 밀어내는 거리감이 되었다. 좋은 의도가 차별이 되는 순간이다. 나는 한 초등학생이 헌법재판소에서 기후위기에 대해 또렷하게 발언하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그 목소리가 담고 있는 절박함과 진지함을 생각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반응이 대견하다는 것이었다면, 그 아이의 메시지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 내용이 아닌 그 나이가 먼저 읽힌 것이다. 우리는 말의 내용 앞에 나이를 먼저 세워두는 사회에 살고 있다.

나이에 맞는 삶이라는 개념이 우리를 얼마나 조여왔는지,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보며 깨닫는다. 이십대에는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불안이 있었다. 삼십대에는 안정을 잡아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 사십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내가 좋아하는 것을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것 같은데, 그것이 나이가 들어서 용감해진 덕인지, 아니면 사회가 기대하는 역할들을 어느 정도 해냈기 때문에 허락된 자유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나이에 맞는 직업, 나이에 맞는 결혼, 나이에 맞는 언어, 나이에 맞는 태도. 이 목록은 생각보다 훨씬 길고 촘촘하다. 우리는 매 순간 그 목록에 자신을 대입하며 맞는지 아닌지를 확인한다. 그 확인의 시선은 때로 타인의 것이고, 때로 나 자신의 것이다. 안으로 내면화된 나이의 감옥은 외부에서 잠그는 감옥보다 훨씬 빠져나오기 어렵다. 육십에도 하고 싶은 것이 생기고, 팔십에도 사랑이 찾아오고, 열두 살에도 세상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이것은 나이와 무관한, 살아있다는 것의 증거들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 증거들을 종종 예외나 이변으로 처리한다. 예순의 열정은 감동적인 뉴스가 되고, 열두 살의 용기는 기특한 해프닝이 된다. 예외는 기억되지만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나이라는 숫자가 갖는 의미를 완전히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시간이 흐르면서 쌓이는 것들이 있고, 나이는 그 축적의 흔적이다. 그러나 그 흔적이 사람을 설명하는 일차적 언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이는 그 사람이 몇 년을 살았는지를 알려줄 뿐, 어떻게 살았는지는 말해주지 못한다. 어떤 예순 살은 서른처럼 뜨겁고, 어떤 서른 살은 예순처럼 지쳐있다. 어떤 열 살은 어른들이 외면하는 진실을 보고, 어떤 어른은 평생 그 진실을 마주하기를 피한다. 역연령과 기능적 연령이 다르다는 말은 단지 의학적 사실이 아니라, 사람이란 숫자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오래된 진실을 다른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나는 언젠가 우리 사회가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나이 대신 다른 것을 먼저 묻게 되길 바란다. 그 변화는 작은 것 같지만, 실은 사람을 보는 방식 전체를 바꾸는 일이다. 나이를 먼저 묻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몇 살인지보다 어떤 사람인지가 더 궁금하다는 뜻이니까.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나이를 살고 있지만, 결국 같은 삶을 공유하고 있다. 태어나고 사랑하고 실패하고 늙어가는 그 과정을. 그 공통의 취약함 앞에서, 나이라는 숫자는 생각보다 훨씬 작은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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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업(生業) - 그 징하고도 찡한 노동의 표정들
은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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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5월의 첫날, 창밖으로 보이는 탄천의 연둣빛이 유난히 싱그러운 아침입니다. 거실 한편에 놓인 구슬픈 마리 로랑생의 그림 도록 옆으로, 오늘은 조금 묵직한 제목의 책 한 권을 놓아봅니다. 작가 은유의 인터뷰집 <생업>. 매년 돌아오는 노동절이지만, 올해는 유독 이 단어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옵니다. 아마도 정년퇴직을 코앞에 둔 남편의 뒷모습이나, 이제 막 사회라는 거친 파도에 올라탄 아들의 일상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장을 넘기자마자 조지 오웰의 문장이 마음을 툭 건드립니다. 대용량 음식을 제시간에 내놓기 위해 '인생이 단 5분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움직이는 파리 호텔 주방의 풍경. 그것은 단순히 '바쁘다'는 말로 설명하기엔 부족한, 일종의 장대한 협주곡과도 같다는 표현이었습니다. 곧바로 서울의 한 초등학교 급식실로 이어집니다. 매일 1,700인분의 밥을 짓는 김규희 님의 이야기는 제게 묘한 동질감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안겨주었습니다. 저 역시 수십 년간 가족의 삼시 세끼를 책임지며 '돌밥돌밥(돌아서면 밥)'의 회오리 속에서 지쳐본 경험이 있기에, "해방 삼아 집을 떠나고 싶었다"는 그녀의 고백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마주한 '밥 짓기'는 제가 집에서 정성스레 구워내는 빵이나 정갈하게 차려내는 반찬과는 차원이 다른 세계였습니다. 치솟는 불길 앞에서의 사투, 거대한 솥을 젓는 삽질, 그리고 '동물적인 감각'으로 국수를 건져 올려야 하는 찰나의 판단들. 그녀는 말합니다. "요리는 과학이고, 판단이며,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이라고요. 누군가는 '동네 아줌마들이 하는 하찮은 일'이라 치부했을지 모르지만, 그녀에게 그것은 아이들의 점심시간을 지켜내는 숭고한 임무이자 자부심이었습니다. 뜨거운 튀김 솥 앞에서 땀을 흘리면서도 "애들 뜨끈하게 먹이려고" 배식 직전까지 튀겨내는 그 마음. 그것은 단순한 노동을 넘어선, 타인의 생을 지탱하는 '존엄의 기술'이었습니다.

책은 또 다른 '밥 장군' 김주휘 님의 이야기로 흐릅니다. 세월호 유가족부터 해고자 농성장까지, 아픈 현장마다 따뜻한 밥을 싣고 달려가는 그녀의 무기는 쇠붙이가 아닌 '따끈따끈한 밥상'입니다. 그녀의 이야기가 특히 가슴에 박혔던 이유는 '대접'이라는 단어 때문이었습니다. 길 위에서 투쟁하는 이들이라고 해서 대충 때우는 밥이 아니라, 고향이 어디인지, 어떤 양념을 좋아하는지 집요하게 물어 차려내는 아홉 가지 반찬들. 얼어붙은 고기반찬 대신 따뜻하게 올린 시래기밥 한 그릇이 주는 위로. "음식은 추억이 7할이다" 그녀의 이 말은 우리가 왜 그토록 정성 들여 음식을 만들고 나누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답을 줍니다. 밥은 흩어진 존재들을 모으는 강력한 연결고리이며, 무너진 일상을 되돌려주는 가장 기본적인 의례입니다. 관절 마디마디가 닳도록 밥을 짓고도 "그분들에게 밥을 해드릴 수 있어 영광이었다"고 말하는 그녀의 꼿꼿한 자존감 앞에서, 제가 가졌던 소소한 고단함은 어느덧 경건함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마음을 머물게 한 것은 가수 안예은 님의 목소리였습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연예인이 아니라, 자신을 '예술업계 노동자'로 정의하는 그녀의 태도는 신선하고도 단단했습니다. 영감을 기다리기보다 매일 작업실로 '출근'하고, 동료들과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돈 이야기를 솔직하게 나누는 프로의 모습. 자신의 아토피 흉터와 우울증마저 숨기지 않고 "내 몸은 나의 역사책"이라 말하는 용기는, 나이 듦의 흔적이나 삶의 생채기를 애써 가리고 싶어 하는 저 자신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그녀에게 기부는 '엄청난 가오'이자 받은 사랑을 돌려주는 당연한 행위였습니다. 선천적인 아픔을 딛고 일어선 그녀가 세상을 향해 건네는 위로는, 마치 잘 구워진 빵처럼 담백하면서도 깊은 풍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그림자 노동'이 존재합니다. 눈에 보일 때는 당연해 보이지만, 그들이 멈추는 순간 우리의 일상은 일순간 마비되고 맙니다. 급식 노동자, 활동가, 뮤지션...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악기를 들고 '생업'이라는 거대한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 이제껏 살아오며 누군가의 노동 덕분에 따뜻한 밥을 먹고, 깨끗한 거리를 걷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 수고로움 뒤에 숨겨진 땀방울과 긍지를 예민하게 감각하는 눈을 갖고 싶습니다. 5월의 햇살 아래, 오늘도 각자의 현장에서 묵묵히 삽을 들고, 펜을 쥐고, 솥을 젓는 모든 '장군'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당신들이 차려준 이 세상이라는 밥상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힘을 내어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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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흥미로운 클래식
송현석 지음 / 링크북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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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작곡가의 상처와 나의 상처가 만나는 지점을 찾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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