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술사 - 최신개정판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북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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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그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 책을 처음 펼쳤을 때, 스페인의 양치기 소년 산티아고가 걷는 길이 나의 길과 그리 멀지 않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산티아고는 꿈을 좇아 안달루시아의 평원을 떠나 아프리카의 광활한 사막으로 향한다. 그에게는 지도도, 확실한 안내자도 없다. 오직 꿈이 가리키는 방향과, 발밑에 닿는 모래의 감촉만이 있을 뿐이다. 대학때 많이 읽었던 연금술사. LLM 생성형 인공지능의 시대 에 대학시절에 읽었던 연금술사를 다시 읽으며 그 의미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책장을 넘기며 자꾸 멈추게 되었다. 2026년, 매일 아침 컴퓨터 앞에 앉아 ChatGPT의 창을 열고, 클로드에게 말을 건네 고, 미드저로 이미지를 만들고, 검색 결과 대신 AI의 대답을 먼저 읽는다. 어느새 일상 속에 스며든 이 존재들은 편리하고 강력하지만, 동시에 나에게 알 수 없는 불안을 심어 놓는다. 이 불안은 정확히 무엇인가. 산티아고가 사막 한가운데서 느꼈을 그 막막함과, 내가 생성형 AI 앞에서 느끼는 막막함은 과연 다른 것인가. 책 속에서 연금술사는 산티아고에게 말한 다. "위험은 꿈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꿈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AI가 가져온 불안의 진짜 정체도 이것이 아닐까. AI가 너무 무능해서가 아니라, 너무 유능해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운 것이다.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일들 즉,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코드를 짜고, 상담을 하는 일들이 하나씩 알고리즘의 영역으로 넘어가 는 것을 바라보며, 내 존재의 좌표를 다시 찾아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다.

연금술사의 서사는 '여정 그 자체가 목적이다'라는 메시지다. 산티아고는 이집트 피라미드 아래의 보물을 찾아 떠나지만, 결국 보물은 그가 처음 출발했던 스페인의 교회 아래에 있었다. 여정이 없었다면 그는 집 앞의 보물도 찾지 못했을 것이 다. 여정 속에서 겪은 실패, 배신, 사랑, 깨달음이 그를 보물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나는 AI가 불확실성을 대표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곤 했다. 어떤 직업이 사라질지 모른다. 어떤 능력이 쓸모없어질지 모른다. AI가 언제 나보다 더 잘할지 모른다. 하지만 연금술사를 읽으며 나는 이 불확실성을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되었다. 불확실성은 사막이다. 사막은 위험하지만, 동시에 목적지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불확실성을 피해서는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다. 코엘료는 말한다.

"당신이 무언가를 원할 때, 그 소망을 이루기 전에 먼저 어디에서 왔는지를 잊어야 한다." AI 시대를 살아가며 내가 붙들고 있는 두려움의 상당 부분은 이전의 나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글 쓰는 사람, 아이디어를 만드는 사람, 문제 를 해결하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이 A로 인해 흔들릴 것 같은 두려움. 하지만 산티아고가 낡은 양 떼를 팔아야 사막을 거닐 수 있었듯이, 나도 이전의 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때 새로운 길이 열릴지 모른다. 시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볼 것인가, 도구로 볼 것인가, 아니면 여정의 동반자로 볼 것인가. 이 선택 자체가 나의 신화(Personal Legeng)를 어떻게 쓸 것 인지를 결정한다.

연금술에서 코엘료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연글술사의 핵심은 변환(transformation)일 것 같다. 가장 흔하고 낮은 물질인 납을 가장 귀한 금으로 바꾸는 것. 코엘료는 이 연금술의 비유를 통해 말한다. 인간의 내면에 있 는 두려움과 평범함을 지혜와 깨달음으로 바꾸는 것이 진정한 연금술이다. AI 앞에서 느끼는 나의 불안이 납이라고 생각한다. 이 납을 금으로 바꾸는 나만의 연금술은 무엇인가. 나는 이 에세이를 쓰며 하나의 답을 찾았다. 그것은 AI를 이기려 하지 않는 것이다. 대신, AI와 함께 더 깊이 생각하고, 더 넓게 연결하고, 더 인간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산티아고가 사막과 싸우지 않고 사막이 되어 바람이 되었듯. 불확실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AI는 더 강력해질 것이고, 세상은 더 빠르게 변할 것이다. 하지만 연금술사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물을 손에 쥔 산티아고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안도가 아니라 웃음 이었다. 그 웃음은 보물을 찾았기 때문이 아니라, 여정을 완성했기 때문이었다. 2026년의 나는 아직 여정 중이다. Al라는 사막 한가운데, 나만의 신화를 향해서.

"삶의 비밀은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책을 덮으며 다시한번 AI의 시대를 어떨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해 본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결코 대신해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직접 길을 걷는 경험 자체다. 산티아고에게 누군가 피라미드의 좌표를 알려주었다면, 그는 보물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사막을 건너며 얻은 눈이 없었다면, 보물이 있는 땅을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성형 AI는 나에게 수많은 답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질 문을 던질 것인지, 어느 방향으로 걸어갈 것인지, 그 답을 내 삶에서 어떻게 의미로 만들 것인지는 여전히 나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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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단단해지는 하루 한 문장 일본어 필사
안은미 지음 / 센시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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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에 흠뻑 젖어 축 처진 하루의 끝이 고단 한 시간이 아니라 오늘을 온전히 살아냈음을 선포하는 치열한 기록이라는 말. 그 문장을 쓰는 동안 나는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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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단단해지는 하루 한 문장 일본어 필사
안은미 지음 / 센시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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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이 도착했다. 택배 상자를 열기도 전에 손끝에 느껴지는 묵직함이 심상치 않았다. 뜯어보니 생각보다 두툼하고, 표지는 수수했다. 그런데 펼치는 순간, 나는 그만 멈춰 버렸다. 페이지가 활짝, 그리고 완전히 펼쳐졌다. 억지로 누르지 않아도, 손 으로 잡아당기지 않아도, 책은 스스로 납작하게 누워 나를 기다렸다. 사철제본. 실로 꿰맨 방식이라고 했다. 작은 것 하나 가 하나가 마음을 건드렸다. 나는 아침형 인간이 아니다. 정확히는, 아침을 좋아하고 싶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사람이다. 알람은 여섯 시에 맞춰놓고 실제로 일어나는 건 일곱 시 반. 그 사이 세 번쯤 다시 눕고, 두 번쯤 자책하며, 한 번쯤 오늘은 달라질 거라고 중얼거린다. 그 중얼거림이 공기 중에 흩어지기 전에 뭔가를 붙잡고 싶었다. 말이 아니라 손으로, 머릿속이 아니라 종이 위에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일본어 필사를 시작했다.

처음엔 솔직히 일본어가 목적이었다. 히라가나는 일을 줄 알고, 가타카나는 가끔 헷갈리고, 한자는 더더욱 가물가물한 어 중간한 수준. 드라마를 볼 때 자막 없이 한 문장이라도 알아듣고 싶다는 가벼운 욕심. 그런데 막상 펜을 들고 앉으니, 이상 한 일이 벌어졌다. 문장을 옮겨 적는 동안 일본어가 아니라 나 자신이 보였다. 나쓰메 소세키의 문장.

​(무사태평해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 밑바닥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

​한 글자씩 눌러 쓰면서 자꾸 멈췄다. . 무사태평. 종종 남들이 이야기 한다. 별로 걱정 없어 보인다고, 어디서든 잘 적 응하는 것 같다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씩 웃고 넘겼지만, 사실 그 웃음 아래 고여 있는 것들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 다. 소세키의 문장이 조용하게 그러나 정확하게 그것을 건드렸다. 필사는 그런 것이었다. 타인의 언어가 나의 내면을 비 추는 거울이 되는 순간이다.

하루 루틴이 조금씩 바뀌었다. 일어나서 커피를 내리고, 아직 아무도 깨지 않은 고요한 부엌 식탁에 앉는다. 책을 펼친다. 사철제본이라 책은 언제나 순순히 펼쳐진다. 그 얌전함이 좋다. 억지로 눌러야 하는 것들이 이미 하루에 차고 넘치니까, 아침만큼은 저항 없이 열리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날의 문장을 먼저 눈으로 읽는다. 소리 내어 읽는다. 낯선 발음이 입 안에서 굴러다니다가 혀와 이 사이를 빠져나온다. 처음엔 어색하고, 두 번째엔 조금 익숙하고, 세 번째엔 비로소 내 목소 리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쓴다. 천천히, 한 씩. 손가락 마디가 뻐근해질 즈음이면, 문장이 완성된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순간 하루가 시작된 느낌이 든다. 알람 소리가 아니라, 내 손끝의 감각이 오늘을 열어주는 것이다.

봄의 하이쿠를필사하던 날은 유독 기억에 남는다. 오늘까지의 날은 오늘 버리네, 첫 벚꽃 피니. 비우는 용기. 책은 그 말을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 어제의 나를 기꺼이 비워내야만 오늘의 내가 들어설 자리가 생긴다고. 나는 그 문장을 세 번 썼 다. 한 번은 따라 쓰듯, 한 번은 되새기듯, 한 번은 다짐하듯. 버리는 것에 서툰 사람이다. 지난 실수, 오래된 후회, 이미 끝 난 관계에서 비롯된 감정들을 오래 붙들고 산다. 그런데 벚꽃 한 줄기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는 그 하이쿠의 결기 가, 다섯 글자 열두 글자 사이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짧아서 더 날카로웠다. 짧아서 더 오래 마음에 걸렸다. 필사를 마친 뒤 나는 노트 여백에 작게 적었다. 오늘은 어제의 나를 좀 내려놓기. 거창한 계획이 아니라, 그냥 그 하루를 위한 작은 다짐 하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여름 파트에서는 고바야시잇사의하이쿠가 나를 웃겼다. 때리지 마라, 파리가 손 비비고 발 비비거늘. 파리 한 마리에게 연 민을 품은 시인. 우습고도 따뜻한 시선. 필사를 하며 나는 피식 웃었는데, 그 웃음이 어쩐지 가슴 깊은 곳에서 왔다. 뜨거운 계절을 살아내느라 전력을 다한다. 파리도, 나도, 이 여름을 버티고 있는 것이다. 땀에 흠뻑 젖어 축 처진 하루의 끝이 고단 한 시간이 아니라 오늘을 온전히 살아냈음을 선포하는 치열한 기록이라는 말. 그 문장을 쓰는 동안 나는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살아냈다, 오늘도. 필사를 시작하면서 변화를 눈치챘다. 일본어 실력이 늘었냐고? 그것도 조금. 하지만 그보다 먼저 달라진 건 아침이었다. 예전의 나는 아침을 잃어버린 채로 하루를 시작했다.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뉴스와 SNS와 누군가의 일상을 스크롤하다가 어느새 30분이 증발해 있었다. 그 30분 동안 나는 세상의 소음을 잔뜩 집어삼키고, 정작 나 자신의 목소리는 한 번도 듣지 못한 채 하루 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지금의 아침은 다르다. 가장 먼저 하는 일 이 필사가 되면서, 하루의 첫 목소리가 바뀌었다. 소세키의 문장이든, 잇사의 하이든, 오타니 쇼헤이의 말이든-그날의 문장이 하루의 첫 음표가 된다. 그 음표에 맞춰 하루가 시작되니, 뭔가 달라도 다르다. 언어는 변화무쌍하다고, 책은 말했다. 마치 사람의 인생처럼. 같은 문장도 쓰는 날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무기력한 아침에 읽는 행복과, 충만한 아침에 읽는 행복은 같은 두 글자인데 온도가 다르다. 그 온도의 차이가 나의 하루를 조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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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지브리 - 지브리를 통해 만나는 불교의 지혜
스즈키 도시오 지음, 민경욱 옮김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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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도 모순투성이다. 스즈키 토시오도 답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만들고, 계속 물어보고, 계속 살아간다. 나도 그렇게 살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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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지브리 - 지브리를 통해 만나는 불교의 지혜
스즈키 도시오 지음, 민경욱 옮김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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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늘 빠른 사람이고 싶었다. 빠르게 이해하고, 빠르게 결론을 내리고, 빠르게 다음으로 넘어가는 사람. 모호함 앞에서 멈추지 않는 사람. 그게 능력 있고 효율적인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선과 지브리>를 읽으면서 처음으로 그 믿음이 흔들 렸다. 스즈키 토시오는 이 책에서 선을 종교적 교의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모름과 함께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이 선이라고. 답을 찾지 않고 물음 곁에 계속 앉아 있는 것.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림을 그리고, 부수고, 다시 그리는 것처럼. 완성이 보이지 않아도 손을 멈추지 않는 것처럼. 그 말이 내 어딘가를 조용히, 그러나 깊이 건드렸다.

돌이켜보면, 오랫동안 '이해'를 수집해왔다. 어떤 영화를 보면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감독의 의도를 찾아보았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이 사람은 어떤 유형이다'라고 정리하려 했다. 어떤 경험을 하면, 그것이 내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바로 이름 붙이고 싶어했다. 그렇게 하면 세상이 더 안전하게 느껴졌다. 정리된 것은 불안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내가 이해하려는 속도만큼, 나는 무언가를 놓쳐왔다는 것을. 아직 다 피지 않은 감정을 서둘러 닫아버렸 다는 것을. 이름 붙이기 전의 그 짧은 순간, 그 여백 안에 오히려 진짜가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저자는 지브리 작품이 많은 것을 설명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원래 복잡하고,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고. 감정에는 정답이 없고, 행동에는 명확한 이유가 없을 때가 많다고. 그것을 억지로 정리하는 것은 진실을 왜곡하는 일이라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업 방식은 유명하다. 계획 없이 시작하고, 그리면서 이야기를 발견하고, 완성이 보이지 않아도 계속 손을 움직인다. 완성된 스토리보드 없이 제작에 들어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이것은 분명히 비효율이다. 그런데 스즈키 도시오는 그것을 비효율이라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 미야자키는 미아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길을 잃는 것 자체가 새로운 길을 발견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잠시 책을 덮고 생각해 본다. 나는 얼마나 '미아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는가. 방향이 보이지 않으면 멈추고, 계획을 세우고, 리스크를 계산하고, 확실해진 다음에야 움직이려 했다. 불확실함 속에서 일단 손을 움직이는 것을 나는 '무모함'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어쩌면 그게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걸으면서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계획하는 동안에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우연이 있다. 미야자키의 비효율은 혼돈이 아니라, 불확실함을 창작의 연료로 쓰는 방식이었다. 선에서 말하는 '좌선'처럼, 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 니라 물음 곁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행위였다. 그 용기를 한 번이라도 가져본 적 있었나, 자문해 본다.

책에서 또 하나 마음에 걸린 부분이 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내면에 있는 모순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전쟁에 반대하면 서도, 어린 시절 전투기와 병기에 매혹되었다. 아이들이 밖에서 뛰어놀기를 바라면서도, 아이들이 집 안에서 반복해서 볼 수밖에 없는 작품을 만들었다. 그 아이러니를 그 자신도 잘 알고 있다. 보통은 이런 모순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긴다. 일관 성이 없다고, 말과 행동이 다르다고,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모순을 숨기거나, 한쪽을 억누르며 산다. 그런데 책에서 소 개되는 일본의 사유 방식, 양행(I(5)은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대립하는 두 가지를 모두 살려두면, 거기서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는 생각. '빨리 가라'와 '돌아가라'가 동시에 진실일 수 있다는 것. 모순은 해소해야 할 오류가 아니라, 오히려 창 조의 씨앗이라는 것. 모순들을 떠올렸다. 사람이 그립지만 혼자 있고 싶은 것. 인정받고 싶지만 주목받는 것이 불편한 것이다. 변화를 원하면서도 익숙한 것에 매달리는 것. 오랫동안 나는 그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느 쪽이 '진짜 나'인 지를 결정해야 한다고. 그런데 어쩌면, 그 양쪽이 모두 진짜 나일 수도 있다. 그 긴장 안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방식일 수도 있다.

"이 세상, 버릴 것 없다" 지브리의 기본 자세라고 스즈키 도시오는 말한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직면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그 자체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낙관주의와는 다르다고 느꼈다. 낙관주의는 '잘 될것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문장은 그런 확신이 없다. 잘 될지 안 될지 모른다. 세상이 좋아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 있는 이 세계를 통째로 버리지 않겠다는 태도. 이것은 용기에 가깝다. 어쩌면 선이 말하는 것도 이것과 같지 않을까 생각했다. 답이 없어도 좋다. 길을 잃어도 좋다. 모순을 안고 있어도 좋다. 그래도 지금 이 자리에서, 손을 움직이고, 생각 하고, 살아보는 것일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책을 읽고 나서 나는 무언가를 '알게' 된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확신이 조금씩 느슨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느슨함이 불안하지 않았다. 흔들려도 괜찮다는 것. 모르는 채로 걸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지금 이 자리의 혼란이 곧 실패가 아니라는 것. 지브리의 인물들은 완벽하지 않다. 미야자키 하야오도 모순투성이다. 스즈 키 토시오도 답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만들고, 계속 물어보고, 계속 살아간다. 나도 그렇게 살아보려 한다. 빠르게 이해하는 것보다, 먼저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정리하는 것보다, 여백을 남기는 사람으로. 그리고 흔들리는 것을 숨기는 것보다, 흔들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으로. 이 세상, 버릴 것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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