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투자, 기본으로 돌아가라
아이리 지음 / 원앤원북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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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저자가 80억이라는 숫자를 내세우며 6채의 아파트 매입 성공담을 펼쳐놓을 때, 나는 오히려 그 이면의 공백에 시선이 갔다. 실패는 어디에 있었을까. 손실의 기록은 왜 보이지 않는가. 투자의 서사가 늘 상승 곡선만으로 그려지는 것은 아닐 텐데, 책은 그 부분을 의도적으로 생략한 듯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책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화려한 성과 자체가 아니라는 점도 분명하다. 제목부터가 그렇다. '기본으로 돌아가라.' 이 말은 지금 이 순간, 부동산 시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조용한 경고처럼 들린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예측 불가능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금리는 들쑥날쑥하고, 정책은 한순간에 뒤집히며, 공급 물량은 어디서 터질지 알 수 없다. 심리는 더욱 혼란스럽다. 누군가는 지금 사야 한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 사이에서 투자자들은 조급해지고, 불안해지며, 결국 잘못된 타이밍에 손을 뻗는다. 저자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더 벌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덜 잃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 시장을 예측하려는 태도 자체를 경계하고, 예측에 의존하는 순간 무너지는 구조를 경고한다. 부동산 투자는 타이밍 게임이 아니라 구조를 이해하는 작업이라는 말은, 듣기에는 평범하지만 실천하기에는 어렵다. 상승장에서는 누구나 천재가 된다. 레버리지를 활용해 빠르게 자산을 불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안목을 과신한다. 하지만 하락장이 오면 그 자신감은 위험으로 바뀐다. 시장이 좋을 때는 실력과 운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은, 지금까지 나의 투자가 정말 실력에 의한 것이었는지 돌아보게 만든다. 혹시 나는 시장의 호황 속에서 그저 운이 좋았던 것은 아닐까. 기본의 유무가 드러나는 순간은 시장이 식었을 때다. 그때 비로소 누가 진짜 준비된 투자자였는지 알 수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기본을 점검하게 한다. 그리고 그 기본이 얼마나 피상적으로 소비되어 왔는지를 드러낸다.

입지, 수요, 공급, 가격. 이 단어들을 모르는 투자자는 없다. 하지만 정말로 이해하고 있는 투자자는 드물다. 입지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보통 교통, 학군, 개발 호재 같은 익숙한 키워드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 키워드가 있으면 좋은 입지라고 믿는다. 저자는 이 믿음을 흔든다. 입지는 고정된 조건이 아니라 변화하는 흐름이라는 설명은, 단순히 현재의 편리함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기능을 예측해야 한다는 의미다. 지금 좋아 보이는 곳이 아니라,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하게 될 곳인지를 보라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체크리스트 방식의 접근을 거부한다. 역세권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고, 학군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가치가 오르는 것도 아니다. 그 이면의 맥락을 읽어야 한다. 수요에 대한 설명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흔히 수요를 숫자로만 판단한다. 인구가 많으면 수요가 많고, 인구가 적으면 수요가 적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거주 수요와 투자 수요는 다르게 움직인다. 투자 수요가 몰린 곳은 가격이 오르지만, 실거주 수요가 없으면 결국 공실로 이어진다. 가격의 상승이 실제 가치의 상승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착시에 빠진다. 저자는 이런 착시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반복해서 강조한다. 단편적인 정보에 의존한 판단, 피상적인 이해, 그리고 기본을 안다고 착각하는 태도. 이것이 가장 위험하다.

실전으로 넘어가면 이야기는 더 냉정해진다. 레버리지는 상승기에는 미덕처럼 포장되지만, 하락기에는 가장 큰 리스크로 돌아온다. 대출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감당 가능한 범위를 스스로 정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안전 마진이라는 개념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가격이 떨어져도, 금리가 올라도, 공실이 생겨도, 정책이 바뀌어도 버틸 수 있는 구조를 만들지 못한 투자는 결국 무너진다. 시장의 작은 파도에도 쓰러지는 것이다. 이 말은 단순히 보수적으로 하자는 뜻이 아니다. 더 정확하게 보자는 뜻이다. 막연한 기대 대신 계산된 판단, 그리고 그 판단을 뒷받침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수익률을 계산할 때도 우리는 자주 실수한다. 매매 차익만 보고 보유 비용과 기회 비용을 무시한다. 1억을 투자해서 2억을 만들었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들어간 관리비, 세금, 대출 이자, 그리고 그 돈을 다른 곳에 투자했을 때 얻을 수 있었던 수익을 빼면 실제 수익은 생각보다 적을 수 있다. 저자는 이런 오류를 조목조목 짚어낸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숫자를 보는 사람은 자주 거짓말을 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그래서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책은 투자자의 태도에 집중한다. 시장보다 먼저 흔들리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주변의 성공 사례, 언론의 자극적인 기사, 단기 수익을 인증하는 이야기들이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특히 비교 심리는 치명적이다. 남보다 늦었다는 불안, 지금 사지 않으면 영원히 기회를 놓칠 것 같은 두려움. 이 감정들이 잘못된 결정을 유도한다. 저자는 이 심리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기다림의 가치를 강조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실패가 아니라,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기 위한 전략일 수 있다는 관점은 흔치 않다. 투자에서의 성공을 단기 성과가 아니라 생존으로 정의한다는 말도 인상적이다. 오래 살아남는 사람이 결국 기회를 잡는다. 이 말은 단순하지만 무겁다. 부동산 투자가 단순히 자산 증식의 수단이 아니라 자기 통제의 훈련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급함을 견디는 연습, 유혹을 거부하는 연습, 그리고 자신의 기준을 지키는 연습. 이것이 투자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화려한 기법을 기대하는 이에게는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다. 새로운 전략이나 숨겨진 기회를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장이 흔들릴수록, 선택의 순간이 다가올수록 이 책에서 강조한 기본이 하나씩 떠오를 것이다. 무엇을 살 것인가보다 왜 사는가를 먼저 묻는 태도, 수익보다 리스크를 먼저 계산하는 습관, 그리고 남의 속도가 아닌 자신의 기준으로 움직이는 자세. 이것이 이 책이 남기는 가장 큰 자산이다.


기본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과거로 후퇴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흔들리지 않을 기준을 다시 세우자는 제안이다. 초보자에게는 방향을 잡아주고, 경험자에게는 스스로를 점검하는 체크리스트가 된다. 부동산 투자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정보를 얻는 일이 아니라, 그 정보를 걸러내는 기준을 갖는 일이다. 시장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든, 이 책이 강조한 기본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변하지 않는 기준이 결국 투자금을 지켜준다. 월급만으로는 집을 살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투자해야 한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그 투자의 출발점은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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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5분 명언 필사 365 - 마음 챙김과 악필 교정을 동시에!
타타오(한치선)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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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침 햇살이 창가에 스며들 무렵, 나는 책상 앞에 앉았다. 손에 쥔 펜의 무게가 묘하게 든든하다. 디지털 기기의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다. 종이 위에 펜촉이 닿는 순간, 세상이 조금 느려지는 것 같다. "당신이 하루 종일 무엇을 생각하는지가 당신의 일생을 이룬다." 오늘의 문장을 천천히 읽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읽는다. 단어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하루 종일, 생각, '일생'. 평소라면 스쳐 지나갔을 단어들이 오늘은 유독 또렷하게 다가온다. 첫 획을 긋는다. '당'자의 첫 획. 단순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힘을 주는 강도, 펜을 떼 는 타이밍, 선의 각도. 모든 것이 의식적으로 조율되어야 한다. 평소 휘갈겨 쓰던 글씨와는 차원이 다르다. 정자체는 정직하다. 마음이 산만하면 글자도 흔들리고, 마음이 고요하면 글자도 안정된다.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보내고, 키보드로 업무를 처리하는 일상. 손으로 글을 쓴다는 행위가 언제부터 이토록 낯설어졌을까. 손글씨는 이제 생일 카드나 특별한 편지를 쓸 때나 등장하는, 희귀한 의례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펜을 쥐고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써 내려가는 동안, 묘한 일이 벌어진다. 손끝에서 뇌로, 뇌에서 다시 마음으로 무언가가 흐른다. 단순히 문장을 베끼는 것이 아니다. 그 문장이 내 안으로 스며든다. 눈으로만 읽을 때는 지나쳤던 의미들이, 손으로 쓰는 동안 비로소 이해된다. '하루의 가장 달콤한 시간은 동트기 전의 새벽에 있다'는 문장을 쓸 때였다. '달콤하다'는 표현이 왜 쓰였을까 생각하며 '달'자를 쓰는데, 문득 어제 새벽 4시에 잠에서 깬 적이 떠올랐다. 세상이 아직 깨어나지 않은 그 고요함. 그것이 달콤함이었구나. 손으로 쓰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 쳤을 깨달음이다.

현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빠르게 산다는 것과 같다. 빠른 배송, 빠른 응답, 빠른 성장. 모든 것이 속도를 요구한다. 그 속도에 익숙해지면서, 우리는 천천히 음미한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5분. 하루 중 고작 5분이다. 커피 한 잔 마시는 시간, SNS를 스크롤하는 시간보다 짧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5분이 주는 평온함은 몇 시간 분량의 드라마나 영상이 주지 못하는 것이다. 명언을 필사하는 시간은 강제적인 느림이다. 빨리 쓸 수 없다. 정자체로 반듯하게 쓰려면 한 획 한 획에 집중해야 한다. 처음에는 답답했다. 타이핑하면 1분도 안 걸릴 텐데, 왜 이렇게 느리게 써야 하나.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그 느림이 주는 선물을 알게 되었다. 느리게 쓰는 동안, 생각도 느려진다. 빠르게 지나가던 잡념들이 정리된다. 오늘 해야 할 일, 어제 있었던 일, 내일에 대한 걱정. 그 모든 것들이 잠 시 멈춘다. 지금 이 순간, 이 문장, 이 글자에만 집중한다. 그것이 명상이다.

나는 악필이었다. 학창 시절 필기 노트는 나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친구들은 내 글씨를 보고 "의사 될거나"며 농담했다. 그래서 포기했다. 어차피 컴퓨터로 치면 되니까. 손글씨 따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 데 필사를 시작하고 나서,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처음에는 저자가 써놓은 글자를 그대로 따라 그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가'자 하나를 쓰는데도 삐뚤빼뚤했다. 하지만 매일 조금씩 쓰다 보니, 선이 곧아지기 시작했다. 글자 의 균형이 잡혔다. 100일쯤 지났을 때, 처음 썼던 페이지와 비교해보았다. 같은 사람이 쓴 글씨가 맞나 싶을 정 도로 달라져 있었다. 물론 아직도 완벽하지 않다. 가끔 삐뚤어지고, 크기가 들쭉날쭉할 때도 있다. 하지만 분명 나아지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이 즐겁다. 바른 글씨를 쓴다는 것은 글씨를 바르게 쓰려고 집중하는 그 시간이, 마음을 바르게 세우는 시간이었다. 글자가 반듯해지면서 마음도 반듯해지는 것을 느낀다.

책에는 365개의 명언이 실려 있다. 1년, 매일 하나씩이다. 어떤 날은 공자의 말씀이고, 어떤 날은 인디언 속담이고, 어떤 날은 이름 없는 현자의 지혜다. 시대와 지역은 다르지만,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놀랍도록 비슷하다. "행복은 나비와 같아서 쫓으면 도망가지만, 가만히 있으면 다가와 앉는다." 문장을 쓰는 날, 나는 최근 몇 달 간 얼마나 많은 것을 쫓아다녔는지 깨달았다. 성공, 인정, 성취. 그것들을 붙잡으려 애쓰느라 정작 곁에 있는 작 은 행복들을 놓쳤다. 필사하며 새긴 이 문장은, 그날 하루를 다르게 살게 만들었다. 명언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필사하는 과정에서 더 깊은 의미를 갖는다. 눈으로만 읽으면 좋은 말이네" 하고 넘어간다. 하지만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쓰다 보면, 그 문장이 내 안에서 질문을 만든다. '이것이 나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나는 이 것을 실천하고 있는가?', '오늘 나는 이 가르침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의지로 시작했다. '매일 5분씩 필사하기'라는 목표를 세우고, 달력에 체크 표시를 했다. 놓치는 날도 있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하지만 다시 시작했다. 하루 이틀 놓쳐도 괜찮다. 중요한 건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이제 의지가 아니라 습관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책상에 앉아 펜을 든다. 이 일련의 과정이 자연스러워졌다. 오히려 필사를 하지 않으면 하루가 어딘가 허전하다. 석 달쯤 지나자, 습관이 아니라 필요가 되었다. 이 시간이 없으면 하루가 제대로 시작되지 않는다. 마치 아침 세수나 양치질 처럼, 필사는 나의 하루를 여는 의식이 되었다. 작은 루틴이 만드는 변화는 극적이지 않다.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이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365일이 지나고 돌아보면, 나는 분명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더 차분하고, 더 성찰적이고, 더 중심이 잡힌 사람으로. 필사는 결국 나를 만나는 시간이다.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고, SNS의 알림을 무시하고, 오로지 나와 마주한다. 펜을 쥔 나, 종이를 응시하는 나,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쓰는 나를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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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바이브 코딩 - 코딩을 몰라도 50개 앱과 웹사이트를 AI와 LLM을 활용해서 개발한다 AI Insight
코다프레스 지음, 양희은 옮김 / 인사이트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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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코딩을 배운다는 것은 오랫동안 새로운 언어를 익히는 일이었다. 파이썬, 자바스크립트, C++… 각각의 문법과 규칙을 외우고, 세미콜론 하나 빠뜨리면 에러가 났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배경을 검은색으로 하고, 중앙에 'Coming Soon'이라고 써줘"라고 말하면 웹페이지가 만들어진다. "할 일 목록 앱을 만들어줘. 완료된 항목은 회색으로 표시되게"라고 하면 동작하는 애플리케이션이 생긴다. 이것이 바이브 코딩이다. 코드를 직접 작성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언어로 설명하면 AI가 그것을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준다. 마치 숙련된 개발자와 대화하듯이, "여기 색이 너무 차갑네, 좀 더 따뜻하게 해줘" "이 버튼에 마우스를 올리면 살짝 커지게 해줘" 같은 요청을 주고받으며 결과물을 다듬어간다. 이 방식의 핵심은 '대화'에 있다. 완벽한 한 문장으로 원하는 것을 정확히 표현할 필요가 없다. 첫 시도에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말하면 된다. AI는 지치지도, 짜증내지도 않는다. 수십 번을 다시 요청해도 묵묵히 개선된 버전을 내놓는다. 코딩이 시험이나 과제가 아니라 협업이 되는 순간이다.

바이브 코딩이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비개발자도 소프트웨어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카페를 운영하는 사람이 예약 시스템을 만들고, 교사가 학생 관리 앱을 만들고, 예술가가 자신의 포트폴리오 웹사이트를 직접 구축한다. 이들은 for문이나 if문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 전환이 일어난다. 바이브 코더는 코더가 아니라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되어야 한다. "어떻게"보다 "무엇을"에 집중하는 것이다. 사용자가 이 버튼을 누르면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이 페이지는 어떤 느낌이어야 하는가? 데이터는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답할 수 있으면 된다. 구현은 AI의 몫이다. 물론 아무런 공부 없이 모든 것이 가능한 건 아니다. 오히려 생각을 더 많이 해야 한다. 막연히 "멋진 웹사이트 만들어줘"라고 하면 AI도 막연한 결과를 낸다. "검은 배경에 흰 텍스트, 굵은 sans-serif 폰트를 사용한 미니멀한 단일 페이지 사이트"처럼 구체적으로 설명할수록 원하는 결과에 가까워진다. 바이브 코딩을 잘하는 사람은 기술을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의도를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다.

바이브 코딩에서 프롬프트는 붓이나 조각칼 같은 도구다. 같은 의도라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완전히 달라진다. 효과적인 프롬프트에는 패턴이 있다. 목표를 먼저 밝히고, 세부사항을 추가하고, 원하는 동작을 명시하는 식이다. "문의 양식을 만들고 싶어"라고 시작해서, "이름, 이메일, 메시지 필드를 포함하고, 스타일은 미니멀하게"라고 세부사항을 붙이고, "제출하면 감사 메시지를 보여주고 양식을 비워줘"라고 동작을 지정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빈 필드에 대한 검증을 추가해줘" "모바일에서도 잘 보이게 해줘" "다크 테마로 바꿔줘" 같은 요청을 이어가며 점진적으로 완성도를 높인다.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라고 거창하게 들리지만, 실은 명확한 이메일을 쓰거나 업무 지시를 내리는 것과 비슷하다. 모호함을 줄이고, 맥락을 제공하고, 예시를 들고, 단계별로 나누는 것. 이런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코딩 스킬보다 중요해진 시대다. 중요한 것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첫 프롬프트가 완벽할 수 없다. 시도하고, 결과를 보고, 다시 요청하는 반복 과정이 바이브 코딩의 본질이다. 빠른 피드백 루프 속에서 점점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가는 것. 이 과정 자체가 학습이 된다.

바이브 코딩이 마법은 아니다. AI는 놀랍도록 유능하지만, 동시에 치명적인 약점도 있다. 자신감 있게 틀린 답을 내놓는다. 존재하지 않는 함수를 지어내기도 하고, 보안에 취약한 코드를 아무렇지 않게 제안한다. 요청이 모호하면 엉뚱한 방향으로 달려간다. 그래서 바이브 코더에게는 비판적 사고가 필수다. AI가 만든 코드를 맹신하지 말고, 의문을 가지고, 테스트하고, 개선을 요청해야 한다. "이 코드가 정말 안전한가?" "더 효율적인 방법은 없나?" "이게 모바일에서도 작동할까?" 같은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한다. AI는 구현 파트너일 뿐, 최종 책임은 인간의 몫이다. 한계도 분명하다. 대규모 프로덕션 환경에 바로 적용할 만큼 정교한 코드를 생성하기는 어렵다. 전체 아키텍처를 보는 눈이 없어서 복잡한 시스템의 일부만 다룰 수 있다. 디버깅 능력도 사람보다 떨어진다.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면 근본적인 수정 대신 임시방편만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프로토타입을 빠르게 만들고, 아이디어를 검증하고, 가능성을 탐색하는 데는 탁월하다. 개발자를 고용하기 전에 내 아이디어가 실현 가능한지 확인할 수 있다. 며칠 걸릴 작업을 몇 시간 만에 끝낼 수 있다. 바이브 코딩은 완전한 대체가 아니라 강력한 보완 도구다.

바이브 코딩은 새로운 문해력에 관한 이야기다. 20세기에 컴퓨터 문해력이 중요해졌듯이, 21세기에는 AI와 효과적으로 소통하는 능력이 기본 스킬이 되고 있다. 이는 프롬프트 작성 기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명확하게 생각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지속적으로 개선하는 능력. 이것들은 AI 시대 이전에도 중요했던 능력이지만, 지금은 더욱 직접적이고 실용적인 가치를 지닌다. 막연한 아이디어를 구조화된 요청으로 다듬는 과정에서 우리는 더 깊이 생각하게 된다. 바이브 코딩의 진정한 가치는 코드 생성 속도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기술 창작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 있다. 아이디어와 실현 사이의 간극이 줄어들면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창의성이 소프트웨어로 구현될 수 있다. 이는 기술의 다양성과 풍부함을 키우는 일이다. 코딩의 미래는 문법이 아니라 대화에 있다. 우리가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 명확히 알고, 그것을 설득력 있게 표현할 수 있다면, 기술적 장벽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쩌면 바이브 코딩은 코딩이 아니라, 창작의 새로운 형태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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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궁리한 조선의 선비들 - 청빈과 이익 사이, 조선 선비들의 머니 스토리
곽재식 지음 / 믹스커피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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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가 알던 조선은 유교적 명분과 신분 질서로 굳어진 사회였다. 하지만 그 틈새에는 끊임없이 현실을 직시하고, 백성의 삶을 개선하려 애쓴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책상머리에서 고전을 외우기만 한 학자가 아니라, 땅과 돈과 사람의 흐름을 읽고 그것을 바꾸려 했던 실천적 사유자들이었다. 정도전이 <경국전>에서 토지 겸병 문제를 지적할 때, 그는 단지 도덕적 비난을 늘어놓은 것이 아니었다. 부자는 수확물로 다시 땅을 사들여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이는 조금씩 땅을 팔아 더욱 궁핍해지는 악순환. 소작농은 수확의 절반을 지주에게 바쳐야 하는 가혹한 현실. 그는 이 구조적 모순을 냉정하게 분석했다. 개혁은 감상이 아니라 정확한 진단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륜은 다른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했다. 경제의 혈액인 화폐가 제대로 순환하지 않으면 나라 전체가 빈혈에 걸린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1401년, 조선은 그의 제안으로 저화라는 지폐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닥나무로 만든 종이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발상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이었다. 비록 유통에는 실패했지만, 홍제역 근처 어딘가에서 한국 최초의 화폐가 인쇄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조선 경제사의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이지함의 이야기는 특히 인상적이다. 대부분의 선비가 타인의 노동에 기대어 생계를 유지할 때, 그는 직접 노를 저으며 품삯을 벌었다. 바다의 밀물과 썰물을 관찰한 것도 고상한 자연 관조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절박한 학습이었다. 그렇게 몸으로 부딪히며 얻은 지식은 책에서 배운 이론보다 훨씬 강렬했고, 실용적이었다. 상업을 천시하던 시대에 그는 장사의 가치를 깨달았다. 그것도 누군가에게 배워서가 아니라, 밑바닥에서부터 굴러가며 스스로 터득했다. 노비 신분에서 시작해 재산을 축적하고, 결국 아산 현감이라는 관직까지 얻은 그의 궤적은 개인의 성공담을 넘어선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경제 활동의 가능성을 백성들에게도 열어주고자 했다. 이론가가 아니라 실천가로서의 면모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유형원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신분 제도 자체가 과연 정당한가? 1670년에 노비 제도 폐지를 주장했다는 것은 지금 기준으로 봐도 놀라운 일이다. 당시는 사람의 가치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다고 믿던 시대였다. 그런 사회에서 노비 해방을 말한다는 것은 단순한 개혁 제안이 아니라 체제 전복에 가까운 발상이었다. 그는 부안에서 홀로 『반계수록』을 집필했다. 맹자의 정전법을 참고하되, 현실에 맞게 변형한 공전제를 설계했다. 땅을 아홉 조각으로 나누고 중앙에서 공동 경작하는 고대 방식이 아니라, 각자에게 일정 면적을 배분하고 수확의 일부를 세금으로 거두는 방식.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그는 실행 가능성을 고민했다. 생전에는 빛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사상은 후대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1801년 6만 명이 넘는 공노비가 해방되는 역사적 순간으로 이어졌다. 유수원은 유형원과 닮았지만 또 달랐다. 그 역시 <우서>에서 중상주의를 주장했지만, 직접 조정에서 일하며 현실의 벽을 체감했다. 유형원이 시골에서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유수원은 벼슬살이를 하며 정치의 냉혹함을 경험했다. 영조는 붕당 간 싸움을 줄이는 데만 관심이 있었고, 경제 개혁 따위는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학문적 열정으로 청력까지 잃은 그가 나주 괘서 사건에 연루되어 고문 끝에 죽음을 맞이한 것은 비극이었다. 그의 냉소적 어조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에서 비롯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정약용의 삶을 보면 아이러니를 느낀다. 그의 전성기는 정조와 함께 화성을 건설하던 때가 아니라, 오히려 18년간의 유배 기간이었다. 거중기를 발명해 성을 쌓는 것도 훌륭하지만, 홀로 귀양살이를 하며 500권의 책을 저술한 것은 경이롭다. <경세유표>는 입법에 관한 지침서다. 나라를 경영하려면 어떤 제도가 필요한가를 다룬다. <목민심서>는 행정에 관한 것으로, 지방관이 어떻게 백성을 다스려야 하는지를 담았다. <흠흠신서>는 사법, 즉 범죄 수사와 판결의 원리를 연구한 결과물이다. 이 세 권의 책은 현대 국가의 삼권분립 구조를 선취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조선이라는 나라 전체를 자신의 두뇌 속에 담으려 했던 것 같다. 유배지는 그에게 감옥이 아니라 연구실이었다. 정치적으로 소외되었을 때, 그는 오히려 가장 깊은 사유에 도달했다.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졌을 때 비로소 권력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책이 다루는 인물들은 모두 '궁리'의 사람들이었다. 궁리란 단순히 생각한다는 뜻이 아니다. 사물의 이치를 깊이 파고들어 원리를 파악하고, 그것을 현실에 적용할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들은 경제를 재화의 축적으로만 보지 않았다. 땅의 분배, 화폐의 유통, 노동의 가치, 신분의 구속, 소비의 역할까지 모두 연결된 하나의 체계로 바라봤다. 조선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역동적이었다. 장터는 지역마다 다른 양상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았고, 화폐 부족은 만성적 문제였으며, 기술 혁신은 조용하지만 꾸준히 이어졌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언제나 경제를 궁리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생각이 모두 실현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은 좌절했다. 저화는 유통에 실패했고, 유형원의 공전제는 생전에 채택되지 못했으며, 유수원과 박제가는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사유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후대의 학자들이 그것을 읽고,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조선은 조금씩 변화했다. 경제를 궁리한다는 것은 결국 사람을 궁리하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땅은 어떻게 나눠야 공정할까. 돈은 어떻게 흘러야 경제가 살아날까. 신분은 정말 정당한가. 소비는 사치인가, 아니면 필요악인가. 이런 질문들은 지금도 유효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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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전집 2 다시 읽는 우리 문학 2
이효석 지음 / 가람기획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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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대학 시절 읽었던 이효석의 소설들을 다시 펼쳐 들었을 때, 나는 이상하게도 가을 저녁의 공기를 먼저 떠올렸다. 그것은 특정한 장면이나 문장 때문이 아니라, 그의 문장들이 품고 있는 어떤 온도 같은 것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만난 이효석의 세계는,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입체적이었다. 우리는 너무 오래 이효석을 '서정적 작가'로만 기억해왔다. 메밀꽃이 피는 달밤의 이미지는 너무나 강렬해서, 그의 다른 면모들을 가려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집을 통해 만난 그의 작품들은 단순한 서정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사회주의 계열의 작품을 쓰던 청년이 어떻게 자연과 감각의 작가가 되었을까. 이 변화를 '전향'이라고 부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오히려 그는 현실을 보는 방식을 바꾼 것이 아니라, 현실에 접근하는 경로를 바꾼 것은 아니었을까. 정치적 언어 대신 감각의 언어를 선택했고, 이데올로기 대신 인간의 내면을 응시하기 시작한 것이었을 것 같다.

이효석의 문장을 읽다 보면 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도, 시간은 오히려 천천히 흐르거나 정지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의 소설에서 사건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을 겪는 인물의 내면이 어떤 색깔로 물들어가는가 하는 것이다. 향나무가 시들어가는 장면을 바라보는 인물의 시선. 머루를 먹으며 느끼는 행복감과 그 직후 찾아오는 불행의 예감.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처음 발견한 순간의 놀라움. 이효석은 이런 순간들을 포착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의 문장은 사진처럼 순간을 고정시키면서도, 동시에 그 순간 안에서 흐르는 감정의 물결을 놓치지 않는다. 대학 시절에는 이런 문장들이 그저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다시 읽으니, 그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씁쓸함이 보인다. 이효석이 그린 세계는 결코 목가적이지 않다. 그곳에는 늘 상실이 있고, 도달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이 있으며, 행복과 불행이 종이 한 장 차이로 맞닿아 있다.

전집 속 여러 작품들을 관통하는 것은 사랑에 대한 탐구다. 그런데 이효석이 그리는 사랑은 낭만적이기보다는 실존적이다. 7년을 짝사랑한 끝에 내린 결론이 "외롭고, 적적하고, 얄궂은 것"이라는 문장은, 사랑의 본질이 결핍과 거리에 있음을 말해준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대부분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지만 닿지 못한다. 하늘 위의 별처럼 영원히 자기 것이 될 수 없는 존재를 바라보며 살아간다. 이것은 단지 연애소설의 문법이 아니다.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고독에 대한 통찰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효석이 이런 비극적 정서를 다루면서도 결코 비관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그의 문장에는 체념이 아닌 수용이 있고, 절망이 아닌 애잔함이 있다. 닿을 수 없기에 더 아름답다는 역설. 이것이 그의 서정성의 핵심인지도 모른다.

이효석의 소설에서 자연은 인물의 감정과 공명하고, 때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인격처럼 행동한다. 메밀꽃이 피는 밤은 단지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인물의 내면이 열리는 시간이다. 머루 냄새가 가득한 집은 행복의 공간이자 동시에 불행이 잠입할 틈새다. 대학 시절에는 이런 자연 묘사가 다소 과장되게 느껴지기도 했다. 너무 문학적이고, 너무 의도적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다시 읽으니, 이것이 단순한 수사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효석에게 자연은 인간의 감정을 투사하는 스크린이 아니라, 감정 그 자체를 증폭시키고 변형시키는 매개였다. 그가 묘사하는 자연은 언제나 구체적이다. 막연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냄새와 촉감과 소리를 가진 실재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단지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감각으로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이효석을 향토 작가로만 이해하는 것은 명백한 오독이다. 그는 당대 가장 세련된 도시적 감각을 가진 작가 중 한 명이었다. 서양 문학에 대한 깊은 이해, 근대 문명에 대한 예민한 감각, 성에 대한 개방적 태도. 이 모든 것이 그의 작품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그가 전통과 근대를 대립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향토적 배경과 도시적 감수성은 그의 작품에서 이질적으로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풍부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것은 단순히 두 세계를 병치시킨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미학적 영토를 개척한 것이다. 거울을 보는 원숭이의 비유를 통해 자기 인식의 탄생을 설명하는 대목이나, 사랑의 본질을 교육적 행위로 승화시키려는 인물의 독백 같은 장면들은, 이효석의 지적 깊이를 보여준다. 그는 단지 감각적인 작가가 아니라, 사유하는 작가였다.

이효석을 읽으며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은, 그가 얼마나 형식에 대해 고민한 작가였는가 하는 점이다. 그의 소설은 전통적인 플롯을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야기는 시작과 끝이 명확하지 않고, 인과관계보다는 정서의 흐름이 구조를 지배한다. 나폴레옹을 다룬 작품 같은 경우, 역사 소설도 전기 소설도 아닌 독특한 형태를 취한다. 1인칭 회고 형식을 통해 역사적 인물을 내면화하는 시도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실험이었을 것이다. 이효석은 자신이 쓰고 싶은 이야기에 맞춰 형식을 자유롭게 변형시킬 줄 아는 작가였다. '소설을 배반한 소설가'라는 평가는, 어떤 의미에서는 최고의 찬사다. 그는 소설이라는 장르의 관습에 안주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경계를 시험했다. 그의 산문은 시와 소설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며, 바로 그 애매함 속에서 독특한 미학을 창조해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십여 년이 흐른 지금, 이효석을 다시 읽으며 드는 생각은 문학의 생명력에 관한 것이다. 그의 문장은 여전히 살아 있다. 아니, 어쩌면 지금이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청춘의 감수성으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상실감과 그리움의 깊이가, 이제는 조금 더 가슴에 와닿는다. 이효석이 그린 세계는 과거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보편적 감정의 지도다. 사랑의 불가능성, 행복의 덧없음, 자연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과 위로. 이런 것들은 시대를 초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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