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위한 역사 - 과거의 세계가 미래를 구할 수 있을까?
로먼 크르즈나릭 지음, 조민호 옮김 / 더퀘스트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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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잘못 배워왔다. 학창시절 외웠던 연도와 사건들, 시험이 끝나면 잊어버려도 무방한 지식의 더미. 역사는 그렇게 박제된 과거로, 추억의 앨범으로 취급되어왔다. 하지만 로먼 크르즈나릭이 제시하는 응용역사의 관점은 전혀 다른 지평을 연다. 역사는 미래를 설계하는 도구이자, 위기를 돌파하는 기술이다.

21세기 인류는 전례 없는 복합 위기의 한가운데 서 있다. 기후변화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며, 인공지능은 통제 불가능한 속도로 진화하고, 민주주의는 피로에 지쳐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불평등은 심화되고, 소비주의는 지구의 한계를 무시한 채 질주한다. 이 모든 위기의 공통된 뿌리는 무엇일까? 바로 '현재 중심주의'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만 매몰되어, 과거로부터 배울 줄도 모르고, 미래 세대를 위해 책임질 줄도 모른다. 이러한 시대에 크르즈나릭은 과감한 제안을 한다. 미래학이 아니라 응용역사학이 필요하다고. 중세 알안달루스의 관용, 에도시대 일본의 순환경제, 18세기 커피하우스의 공론장, 엘리너 오스트롬이 발견한 공유지의 지혜. 이것들은 단순한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실질적 해법의 설계도다. 역사를 대하는 이러한 태도의 전환은 근본적이다. 역사는 예언자가 아니라 상담자다. 미래를 정확히 예측해주지는 못하지만, 다른 길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괴테의 말처럼 삼천 년 세월을 쓰지 못하는 자는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갈 뿐이다. 과거의 인간들이 어떻게 위기를 넘어섰는지, 어떤 시스템이 작동했고 어떤 것이 실패했는지를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미래를 발명하는 세대가 될 수 있다.


역사가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점진주의의 한계다. 기후위기나 AI 윤리, 민주주의 회복 같은 시급한 문제들은 느린 개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여기서 '급진성'의 역할이 드러난다. 흥미롭게도 역사는 급진파가 파괴자가 아니라 진보의 촉매임을 보여준다. 수십 년간의 사회운동 연구가 밝혀낸 사실은 놀랍다. 인권과 사회정의를 위한 성공적인 투쟁들은 급진적 조직이 주도할 때 훨씬 효과적이었다. 그 이유는 역설적이다. 급진파는 극단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온건파의 요구를 '합리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이른바 오버턴의 창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토론의 조건 자체를 바꾸어버리는 것이다. 멸종반란과 같은 불복종 운동을 떠올려보자. 그들의 행동은 과격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은 온건한 환경운동가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준다. 급진파가 없었다면 온건파조차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변화의 메커니즘이다.

크르즈나릭이 제시하는 '위기-운동-사상의 삼각고리'는 이러한 역학을 구조적으로 이해하게 해준다. 위기가 사회운동을 낳고, 운동이 새로운 사상을 만들며, 사상이 다시 법과 제도를 변혁시킨다. 이 순환 속에서 시민의 집단행동은 정부를 결정적 의사결정 지점으로 밀어붙인다. 고대 그리스어로 '크리시스'란 바로 그런 전환의 순간을 의미했다. 하지만 급진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역사가 또한 가르쳐주는 것은 연대의 힘이다. 14세기 이븐 할둔이 말한 '아사비야', 즉 집단 연대는 사회의 내구성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다. 알안달루스 왕국에서 서로 다른 종교와 민족이 공존할 수 있었던 것, 케랄라와 핀란드에서 평등 투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 오스트롬이 발견한 공유지 관리 시스템이 작동한 것. 이 모든 사례의 중심에는 협력과 연결이 있었다. 접촉 이론은 이를 뒷받침한다. 서로 다른 집단이 평등한 조건에서 접촉하고 협력할 때, 편견과 분열은 감소한다. 500건 이상의 연구 중 94퍼센트가 이를 확인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경쟁하는 존재가 아니라 협력하는 존재다. 문제는 우리가 만든 시스템이 경쟁을 강요하고 연대를 어렵게 만든다는 점이다.


가장 실천적인 통찰은 '설계'의 문제로 접근한다는 점이다. 에도시대 일본의 사례는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산업화 이전 일본은 제한된 자원으로 지속가능한 사회를 유지했다. 어떻게? 소비자 선택의 구조 자체를 재설계했기 때문이다. 에도 경제는 재생 가능한 범위 내에서 작동하도록 설계되었다. 파괴적인 선택지는 애초에 메뉴에 없었고, 순환적이고 지속가능한 선택지가 기본값이었다. 이것이 바로 '설계에서 배제'와 '설계에 포함'의 전략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이와 같은 근본적 재설계다. 커피하우스의 사례도 설계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18세기 유럽에서 커피하우스는 단순한 음료를 파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공론장이었다. 인쇄술이 정보를 민주화했다면, 커피하우스는 대화를 민주화했다. 신분과 상관없이 사람들이 모여 신문을 읽고, 토론하고, 아이디어를 나누었다. 이 공간의 설계 자체가 민주적 문화를 만들어냈다.

소셜미디어 시대에 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쇄술이 종교전쟁을 부추기는 증오의 도구로 악용되었듯, 소셜미디어도 분열과 극단화를 조장할 수 있다. 문제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이 작동하는 구조와 공간의 설계다. 우리는 디지털 공론장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경청과 숙의를 장려하는 구조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분노와 즉각성을 증폭시키는 구조에 머물 것인가? 오스트롬의 공유지 연구 역시 설계의 문제다. 그는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통념을 반박했다. 실제 역사에서 수많은 공동체가 공유 자원을 성공적으로 관리했다. 어떻게? 민주적 자치 체제를 설계했기 때문이다. 시장도 국가도 아닌 제3의 길, 협력적 거버넌스가 가능하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한다. AI와 유전공학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기술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기술이 누구의 소유이며,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고, 누가 혜택을 받는지는 설계의 문제다. 조너스 소크가 소아마비 백신의 특허를 거부하며 "특허는 없습니다"라고 선언한 것, 협동조합과 분산 소유권 모델이 한 세기 이상 작동해온 것. 이것들은 우리에게 다른 설계가 가능하다는 역사적 증거다.


궁극적 질문은 윤리적이다. 우리는 어떤 조상이 될 것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도덕적 수사가 아니라, 문명의 지속가능성을 결정하는 핵심 기준이다. 소크 백신의 사례는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그는 백신을 인류와 미래 세대를 위한 선물로 여겼다. 보눔 코무네, 즉 공동선을 지향했다. 개인의 선택을 확장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모든 아이를 돕기 위한 기술이었다. 이것이 좋은 조상의 태도다. 케랄라와 핀란드의 평등 투쟁도 세대를 넘어선 비전을 보여준다. 그들은 식민주의와 가부장제, 극심한 빈곤에 맞서 싸웠다. 끊임없이 조직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나를 먼저 쏴라"고 외쳤다. 그들의 투쟁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다음 세대가 더 평등한 사회에서 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바이오필리아, 즉 생명애는 이러한 윤리의 확장이다.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재통합하는 것. 에드워드 윌슨이 말한 생명에 대한 본능적 친밀감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문명의 내구성을 높이는 궁극의 윤리다. 우리가 다른 종과의 연대를 느낄 때, 지구의 생물리학적 한계를 존중할 때, 비로소 지속가능한 문명이 가능하다. 네이트 하겐스가 말하는 '거대한 단순화'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화석연료 기반의 산업문명은 지속될 수 없다. 파티가 끝나는 순간이 온다. 그때 우리는 부러질 것인가, 구부러질 것인가? 아사비야와 바이오필리아는 우리가 부러지지 않고 구부러질 수 있도록 돕는 두 기둥이다. 집단 연대와 생명애를 바탕으로, 우리는 새로운 생태문명으로 전환할 수 있다. 좋은 조상이 된다는 것은 모든 결정을 미래 세대의 관점에서 점검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경제·교육·기술의 선택을 할 때마다 물어야 한다. "후손이 이 결정을 감사할 것인가?" 이 질문이 불편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직 현재 중심주의에 갇혀 있다는 신호다.


저자의 응용역사의 아름다움은 추상적 이론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실천될 수 있고, 실천되어야 한다. 거대한 시스템의 변화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일상에서부터 문명 회복의 패턴을 연습할 수 있다. 사유 루틴부터 시작할 수 있다. 하루 한 번, 오늘 마주한 문제를 역사 속 사례와 연결해보는 것이다. 환경 문제라면 에도의 순환경제를, 갈등 상황이라면 알안달루스의 관용을, 정보 과부하라면 커피하우스의 공론장을 떠올려본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시간의 관점을 훈련하는 습관이다. 연대 루틴은 협력의 감각을 몸에 새기는 실험이다. 작은 팀이나 가족 단위로 공유지 프로젝트를 시도해본다. 공동정원, 공용서가, 에너지 절약 챌린지. 이런 작은 실험들이 오스트롬이 말한 협력적 거버넌스의 씨앗이 된다.

소비 루틴은 설계를 체화하는 과정이다. 한 달간 에도노믹스 챌린지를 해본다. 순환소비, 제로웨이스트, 로컬푸드. 지속가능성은 거대한 운동이 아니라 생활의 패턴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공론 루틴은 디지털 소음 대신 숙의의 공론장을 복원하는 시도다. SNS 대신 오프라인이나 온라인 소규모 토론을 조직한다. 시간을 제한하고, 근거 중심으로 말하며, 경청하고 요약하고 제안하는 3단계 대화를 연습한다. 이것이 18세기 커피하우스가 만들어낸 민주적 문화의 현대적 번역이다. 윤리 루틴은 기술과의 관계를 재설정한다. 내가 사용하는 플랫폼과 서비스의 소유 구조와 윤리 기준을 점검한다. 가능한 한 협동조합형, 공공형 플랫폼을 선택한다. AI와 인간의 거리두기를 실천한다. 기술이 나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술을 사용하는 주체성을 회복한다.


역사는 우리에게 하나의 진리를 거듭 확인시켜준다. 인간은 부러질 수도, 구부러질 수도 있다. 부러짐은 붕괴이고, 구부러짐은 혁신이다. 로마는 부러졌고, 비잔틴은 구부러졌다. 마야 문명은 부러졌고, 중국은 여러 번 구부러졌다. 21세기 인류도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기후위기, AI, 불평등, 민주주의의 피로. 이 모든 위기는 우리를 부러뜨릴 수도, 구부러지게 할 수도 있다. 차이는 무엇인가? 바로 응용역사의 지혜를 얼마나 동원하느냐에 달려 있다. 크르즈나릭이 말하는 근본적 희망은 낙관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인간들이 반복적으로 붕괴를 넘어섰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다. 해법은 시스템이 아니라 연대에 있었고, 기술이 아니라 협력에 있었다. 우리도 그럴 수 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응용역사는 과거를 능동적으로 동원해 미래를 발명하는 기술이다. 우리는 미래를 기다리는 세대가 아니다. 과거의 지혜를 현재의 행동으로, 현재의 행동을 미래의 유산으로 바꾸는 세대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할 일은 명확하다. 역사의 실험실로 들어가 문명 회복의 도구를 꺼내들고, 일상에서 연대와 생명애를 실천하며, 모든 선택을 후손의 관점에서 점검하는 것이다. 우리가 좋은 조상이 될 때, 비로소 근본적 희망은 현실이 된다. 부러지지 말고, 구부러지자. 그것이 응용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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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따라 걷는 거야
박동기 지음 / 작가와비평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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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나중에'라는 말에 익숙해졌을까. 언제가 될지 모를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예하고, 완벽한 조건이 갖춰지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흘려보낸다. 건강이 허락할 때, 돈이 충분히 모일 때, 시간적 여유가 생길 때. 그렇게 조건을 나열하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한 채 후회만 쌓여간다. 한 여행자의 기록을 읽으며 문득 깨달았다. 진정한 황금기는 외부의 인정을 받을 때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저 없이 실행에 옮길 때 찾아온다는 것을. 퇴임 후 세계 곳곳을 걸으며 자연과 마주한 그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알프스의 준봉에서부터 히말라야의 고원까지, 중앙아시아의 드넓은 평원을 가로지르며 그가 얻은 것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었다.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는 전율, 스스로를 한계 너머로 밀어붙이는 도전,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견하는 내면의 자유였다. 여행은 때로 우리에게 불편함을 요구한다. 익숙한 일상을 벗어나 낯선 환경에 몸을 맡기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처하며, 체력의 한계를 시험받는다. 하지만 바로 그 불편함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진짜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편안한 소파에 앉아 화면으로 보는 풍경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직접 올라선 산정상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결코 같을 수 없다.

우리 사회는 나이에 따른 역할과 행동방식을 암묵적으로 규정한다. 은퇴 후에는 손주를 돌보거나 여유롭게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겨진다. 해외 원정 트레킹을 떠난다고 하면 주변에서는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낸다. 몸이 감당할 수 있겠느냐, 위험하지 않겠느냐, 굳이 그런 고생을 해야 하느냐고. 하지만 진정한 노년은 숫자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를 멈추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잃고, 자신을 제한하는 틀 속에 스스로를 가둘 때 비로소 늙음이 시작된다. 반대로 끊임없이 움직이고 배우며 새로운 경험을 추구하는 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해발 사천 미터가 넘는 고지대를 걸으며 고소증과 싸우고, 험준한 암벽 사이를 통과하며, 낯선 문화권에서 소통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 이 모든 것이 쉽지 않은 도전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얻는 성취감과 자기 확신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 된다. 누군가를 위한,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성취가 아닌, 순전히 자신을 위한 도전이기에 더욱 값지다. 체력적 한계에 대한 걱정도 이해한다. 하지만 체력은 키우는 것이다. 처음부터 완벽한 준비를 갖춘 사람은 없다. 작은 산책부터 시작해 점차 거리를 늘려가고, 가까운 산을 오르며 호흡을 다스리는 법을 익히고, 조금씩 고도를 높여가며 몸을 적응시킨다. 중요한 것은 시작하는 용기와 꾸준히 이어가는 의지다.

도시에서의 삶은 인공적이고 예측 가능하다. 에어컨이 온도를 조절하고, 조명이 밤을 밝히며, 포장된 도로가 우리의 발걸음을 안내한다. 모든 것이 통제되고 계획된 환경 속에서 우리는 자연의 리듬을 잊고 살아간다. 하지만 산길을 걷다 보면 자연은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친다.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 앞에서 우리는 무력하다. 예상보다 가파른 오르막에서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생각보다 긴 거리에 다리가 후들거린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상황들이 연속되고, 우리는 그저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법을 배운다. 자연은 우리에게 놀라운 보상을 준다. 땀을 흘리며 오른 산정상에서 마주하는 일출의 장엄함,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설산의 위용, 고산 호수가 반사하는 에메랄드빛 물빛. 이런 순간들은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동시에 이 광대한 우주의 일부로서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한다. 자연 속을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운동이나 관광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인이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는 과정이다. 발바닥으로 느끼는 흙의 감촉, 피부에 와닿는 바람의 온도, 코끝에 스치는 나무와 풀의 향기, 귀에 들리는 새소리와 계곡물 소리. 오감이 깨어나고 존재 자체가 선명해지는 경험. 이것이 바로 트레킹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많은 사람이 '언젠가'를 말한다. 은퇴하면, 아이들이 다 크면, 여유가 생기면 여행을 떠나겠다고. 하지만 완벽한 타이밍은 오지 않는다. 항상 무언가가 부족하고, 항상 어떤 이유로 미룰 수 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미루던 것들은 영원히 실현되지 못한 채 후회로 남는다. 중요한 것은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히말라야를 꿈꾼다면 먼저 근처 산을 올라보라. 장기 여행을 꿈꾼다면 주말 여행부터 시작하라. 큰 배낭을 메고 떠나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가벼운 당일치기 산책으로 시작하라. 첫걸음을 떼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돈이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다시 생각해보라. 여행은 반드시 럭셔리할 필요가 없다. 소박한 산장에서의 하룻밤, 현지 시장에서 사 먹는 간단한 식사, 대중교통을 이용한 이동. 이런 것들이 때로는 고급 호텔보다 더 진정성 있는 경험을 선사한다. 중요한 것은 돈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어떤 마음가짐으로 여행하느냐다.

여행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최고의 장비를 갖추고, 최적의 시기를 기다리는 것도 좋지만, 그것들이 없다고 해서 떠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마음이 가는 곳이 있다면, 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경험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면, 그저 출발하면 된다. 길은 걸으며 만들어진다. 모든 답을 알고 떠나는 여행은 없다. 예상치 못한 상황들, 계획에 없던 만남들, 생각지도 못한 감동들. 이런 것들이 모여 우리만의 독특한 여행이 된다. 완벽하게 준비된 여행보다 불완전하지만 진심 어린 여행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고,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은 무궁무진하다. 책이나 영상으로 보는 것과 직접 그곳에 서서 느끼는 것은 천지 차이다. 사진으로는 담을 수 없는 공기의 맛, 영상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공간의 스케일,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의 감동. 이런 것들은 오직 직접 가야만 알 수 있다. 마음따라 걷는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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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는 이미 내 안에 있습니다 - 미혹의 시대를 건너는 반야심경, 금강경, 천수경 필사집 원명 스님의 필사집
원명 지음 / 오아시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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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빠름에 길들여져 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속도로 생각하고, 스크롤을 넘기는 순간에 판단한다. 그 와중에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천천히 음미하는 시간'일 것이다. 원명 스님의 필사집은 바로 그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주는 초대장과 같다. 펜을 들고 한 글자씩 경전을 따라 쓴다는 행위. 얼핏 보면 지극히 아날로그적이고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느린 행위 속에서 역설적으로 가장 빠른 변화가 일어난다. 손끝이 종이 위를 천천히 지나가는 동안, 우리의 정신도 함께 느려지며 고요해진다. 박문호 박사가 말한 '손의 귀환'이란 표현이 정확히 이를 가리킨다. 우리는 손으로 쓰는 과정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다시 연결하고, 흩어진 감각을 모아 중심을 잡는다. 스님은 50년 수행의 정수를 담아 불교 3대 경전을 현대어로 풀어냈다. 반야심경, 금강경, 천수경. 이 고전들이 품고 있는 심오한 진리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한 것은, 깨달음이란 특정한 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열려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일 것이다.

반야심경이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공(空)'이다. 많은 이들이 공을 무(無)와 혼동한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상태, 허무한 공허함. 하지만 스님은 공이란 오히려 '충만함'이라고 설명한다.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개념이 그것이다. 참으로 비어 있으면서도 묘하게 가득 존재하는 상태. 이 역설적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소유'에 대해 갖고 있는 관념부터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어야 안심한다. 물질을, 관계를, 지위를, 심지어 생각과 감정조차 붙들고 놓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 모였다가 흩어진다. 고정된 실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것일까? 아니다. 역설은 여기서 빛을 발한다. 집착 없이 소유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소유를 경험한다.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 도달하게 되는 묘유의 경지. 이는 단순한 철학적 수사가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 체험 가능한 경지다. 가령,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려보자. 그 사람을 내 것으로 만들려 할수록 관계는 질식한다. 하지만 상대방이 독립된 존재임을 인정하고, 언젠가는 이별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일 때, 역설적으로 더 깊은 사랑이 가능해진다. 그것이 공의 지혜가 우리 삶에 적용되는 방식이다.

스님은 오온(五蘊) 즉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이 모두 공하다고 말한다. 우리를 구성하는 물질적·정신적 요소들이 모두 실체 없이 변화한다는 뜻이다. 이 통찰이 왜 중요한가? 그것이 바로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과 직결되기 때문이다.대부분의 고통은 '나'라는 고정된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나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것을 잃으면 안 된다'는 생각들. 하지만 무아(無我)의 진리를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 모든 집착의 허구성을 본다. 나라는 존재조차 끊임없이 변하는데, 무엇을 그토록 붙들고 있어야 하는가.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보고 모든 괴로움과 재앙을 건넌다는 이 구절은, 실제로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 볼 때 고통이 사라진다는 경험적 진실이다. 현대인들은 다양한 형태의 고통 속에서 산다. 경쟁 사회에서 오는 불안, 관계에서 오는 상처, 미래에 대한 두려움. 하지만 이 모든 고통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결국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내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집착'에서 비롯된다. 변화를 받아들이고, 통제할 수 없음을 인정할 때, 역설적으로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스님의 해설 중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유한함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다. 만약 우리에게 무한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질 것이다. 끝이 없다면 시작할 필요도 없고, 소중히 여길 이유도 없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빛나고, 이별이 있기에 만남이 소중하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열심히 살자'는 상투적 조언과는 다르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을 유일무이한 것으로 대하라는 가르침이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여기에 온전히 깨어 있으라는 것. 아픈 사람이 건강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그 소중함을 깨닫는 것처럼, 우리는 종종 잃고 나서야 가치를 안다. 하지만 공의 지혜를 체득한다면, 잃기 전에도 그 가치를 알 수 있다. 모든 것이 언젠가는 사라질 것임을 아는 것이 허무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지금을 더 깊이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보리살타의 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菩提薩埵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罣礙)'. 보살은 위대한 지혜에 의지하여 마음의 걸림을 놓는다. 마음에 걸림이 없기에 두려움도 사라진다. 우리의 일상은 온갖 걸림투성이다.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일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끊임없이 미래를 걱정하고 과거를 후회하며, 현재를 놓친다. 이 모든 걸림은 결국 두려움에서 온다. 잃을까봐, 상처받을까봐, 실패할까봐. 하지만 공의 지혜로 무장한 마음은 다르다.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두려움이 사라진다. 이는 무책임한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더 자유롭고 능동적으로 현실에 대응할 수 있게 한다. 결과에 대한 집착 없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유다.

책은 우리에게 필사라는 수행을 권한다.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다해 쓰면서, 그 의미를 곱씹고, 마음에 새기는 과정. 이것이 어떻게 현대인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가? 필사는 멀티태스킹의 정반대다. 오직 한 가지에 온전히 집중하는 행위. 손과 눈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순간. 그 과정에서 우리의 번뇌는 자연스럽게 가라앉는다. 생각의 속도가 느려지고, 감각이 깨어나며, 지혜가 현실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스님의 해설을 따라 경전을 필사하는 것은, 부처의 지혜를 내 몸과 마음에 각인시키는 수행이다. 펜 끝이 종이를 지나는 그 찰나에, 2,500년 전 붓다의 깨달음과 지금 여기의 나 사이에 시공을 초월한 연결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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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의 마음 공부 - 소란과 번뇌를 다스려줄 2500년 도덕경의 문장들
장석주 지음 / 윌마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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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휴대전화를 확인한다. 밤사이 쌓인 알림을 지우고, 뉴스피드를 스크롤하며, 놓친 메시지가 없는지 살핀다. 출근길 지하철에서도, 점심시간에도, 잠들기 직전까지 우리는 무언가를 소비한다. 정보를, 이미지를, 타인의 삶을. 손에서 스마트폰을 내려놓는 순간조차 불안하다.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남들은 앞서가고 있는데 나만 뒤처지는 건 아닐까? 이것은 기술 중독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근본적인 불안의 구조다. 더 많이 배워야 하고, 더 많이 경험해야 하며, 더 많은 관계를 맺고, 더 많은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 그 강박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자신 안에 쑤셔 넣는다. 마치 빈 공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듯이... 문제는 이 채움의 욕구가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아무리 많이 이뤄도 만족이 오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는 결핍감만 커진다. SNS에서 타인의 화려한 일상을 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새로운 자기계발서를 사들이며 변화를 다짐하지만, 결국 또다시 소진되고 만다. 이 끝없는 순환 속에서 우리는 정작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노자가 2500년 전에 했던 말이 지금처럼 절실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채우려 하지 말고 비우라고 했다. 더 많이 소유하려 들지 말고, 덜어내라고 했다. 그것이 역설적으로 진정한 충만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이다.

비움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물건을 버리고 미니멀한 공간을 만드는 것일까. 물론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하지만 노자가 말하는 비움은 더 근본적인 차원의 것이다. 그것은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는 일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원한다. 더 나은 직장, 더 높은 연봉, 더 넓은 집, 더 많은 인정. 그 욕망들이 겹겹이 쌓여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하나를 이루면 또 다른 목표가 생기고, 그것을 위해 또다시 자신을 채찍질한다. 이 과정에서 현재의 순간은 사라진다. 늘 미래의 어떤 성취를 위해 오늘을 희생하고, 지금 이 자리의 작은 행복들을 놓친다. 비움은 바로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출구다. 욕망의 고삐를 잠시 늦추고,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 사회가 성공이라고 규정하는 것들을 맹목적으로 쫓기보다, 내 안의 진짜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소음을 줄여야 한다. 비움은 소극적인 포기가 아니라 적극적인 선택이다. 무엇을 덜어낼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곧 무엇을 지킬 것인가를 명확히 하는 일이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중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다. 의미 없는 약속들을 줄일 때 진짜 소중한 사람들과의 시간이 생긴다. 쓸데없는 걱정을 내려놓을 때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다. 여백이 생긴다는 것은 숨을 쉴 공간이 생긴다는 뜻이다. 빽빽하게 채워진 일정표는 효율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질식시킨다.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을 때 대응할 여유가 없고, 무언가 새로운 것이 들어올 틈도 없다. 반면 여백이 있는 삶은 유연하다. 변화에 적응할 수 있고, 우연한 만남이나 영감이 찾아올 공간이 있다.

노자 철학의 핵심에는 무위자연이라는 개념이 있다. 억지로 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긴다는 뜻이다. 이것을 게으름이나 무책임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하게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애쓰지 않는다는 것은 노력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현대인의 삶은 너무 많은 '함'으로 가득하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우리는 쉬지 못한다. 일하지 않는 시간조차 운동을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자기계발에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만히 있으면 뒤처진다는 두려움이 우리를 몰아댄다. 하지만 자연을 보라. 나무는 열매를 맺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계절이 오면 자연스럽게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다. 강물은 바다로 가기 위해 발버둥 치지 않는다. 자신의 흐름을 따라 낮은 곳으로 흘러가다 보면 어느새 바다에 이른다. 이것이 무위의 본질이다.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아도, 때가 되면 일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물론 이것이 수동적인 자세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농부는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일은 하지만, 씨앗이 싹트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씨앗 자체의 생명력과 자연의 섭리에 맡겨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고, 통제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집착을 내려놓는 것. 그것이 무위의 태도다. 이 지혜는 특히 관계에서 빛을 발한다. 우리는 종종 상대를 바꾸려 하고, 내 뜻대로 움직이게 하려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관계는 꼬이고 갈등이 생긴다. 반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변화를 강요하지 않을 때 오히려 자연스러운 변화가 일어난다. 내가 물러설 때 상대가 다가오고, 내가 요구를 멈출 때 상대가 스스로 움직인다.

과잉의 시대에 비움은 저항이다. 더 많이 가지라고, 더 많이 하라고, 더 빨리 달리라고 부추기는 세상에 대한 조용한 거부.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긍정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의 충만함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에 대한, 천천히 흐르는 시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긍정이다. 노자의 가르침은 2500년 전 것이지만, 오늘 우리에게 더 절실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이 바로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비움의 용기, 무위의 지혜, 약함 속의 강함. 이것들은 단순한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태도다. 오늘 저녁, 잠들기 전에 한 가지만 비워보면 어떨까. 내일 해야 할 일에 대한 걱정, 남과의 비교에서 오는 열등감, 더 많이 가지고 싶은 욕망. 그중 하나만이라도. 그렇게 작은 비움에서 시작해, 조금씩 우리 삶에 여백을 만들어간다면. 그 여백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숨을 쉬고, 나 자신을 만나고, 진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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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의 함정
낸시 스텔라 지음, 정시윤 옮김 / 정민미디어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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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두려움을 안고 산다. 어두운 골목을 지날 때,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갈등 상황에서 두려움은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위험 앞에서 우리 뇌의 편도체가 활성화되고, 심장박동이 빨라지며, 온몸이 긴장 상태로 전환된다. 이 모든 것은 생존을 위한 시스템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생존 메커니즘이 실제 위험이 없는 상황에서도 작동할 때 발생한다. 과거의 상처, 해결되지 않은 트라우마는 현재의 사소한 자극에도 동일한 반응을 촉발한다. 상사의 짧은 말투, 연인의 무심한 표정, 프로젝트의 작은 실수가 마치 생명을 위협하는 위기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때 우리는 두려움의 함정에 빠진다. 과거의 감정을 현재로 끌고 와 반복적으로 경험하며, 본래 가능했던 삶보다 훨씬 작은 그림자 속에서 움츠러든 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낸시 스텔라의 <두려움의 함정>은 바로 이 악순환을 직시하고 끊어내는 법을 다룬다.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두려움을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뇌 과학에 기반한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방법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명상과 신경과학을 결합하여, 우리가 두려움에 반응하는 방식 자체를 재훈련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희망적인 동시에 혁명적인 제안이다.

우리 삶에는 무수히 많은 트리거가 존재한다. 어떤 이에게는 특정 향수 냄새가, 누군가에게는 목소리의 톤이, 또 다른 이에게는 실패라는 단어 자체가 강력한 트리거로 작용한다. 스텔라는 자신의 이혼 과정에서 전 남편의 향수 냄새를 맡았을 때, 변호사 옆에 앉아 있으면서도 마치 어린 소녀로 돌아간 듯한 무력감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이는 트리거가 얼마나 강력하게 우리를 과거로 끌고 가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트리거가 작동하면 뇌는 순식간에 비상 모드로 전환된다. 전두엽과 편도체 사이의 연결이 차단되고, 이성적 사고는 뒤로 밀려난다. 우리는 싸우거나, 도망가거나, 얼어붙는다. 이 순간 우리가 보는 세상은 극도로 단순화된다. "항상 이래", "절대 안 돼", "좋거나 나쁘거나" 같은 흑백논리 속에 갇히게 된다. 다양한 관점을 볼 수 있는 능력,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여유는 사라진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반응이 관계를 파괴한다는 점이다. 거절의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은 상대방의 작은 침묵도 버림받음의 신호로 받아들인다. 대립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신의 진짜 감정을 숨기고 과잉순응하거나, 반대로 수동공격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새로운 시도 자체를 포기하고, 안전지대에 머물며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한다. 이런 패턴이 반복되면 우리는 점점 더 작아진다.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관계는 단절되며, 삶의 목표는 흐릿해진다. 두려움이 운전대를 잡은 인생은 방어와 회피로 점철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다. 우리는 트리거를 가지고 있지만, 그 트리거의 지배를 받으며 살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스텔라가 제안하는 '용기 있는 사고 프로세스(Courageous Brain Process)'는 여섯 단계로 구성된 체계적인 접근법이다. 이것은 단순한 긍정적 사고나 마음가짐의 변화가 아니다. 뇌의 신경 경로 자체를 재구성하는 과학적 방법론이다.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경험이 현재의 반응을 만들었는지 명확히 인식하는 작업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구체적인 트리거를 찾아낸다. 어떤 상황, 말투, 표정, 냄새가 나를 과거로 끌고 가는가? 세 번째는 자기 파괴적 패턴을 묘사하는 단계다. 트리거가 작동할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도망가는가, 공격하는가, 얼어붙는가? 네 번째 단계가 특히 흥미롭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일을 회피하려 하지만, 스텔라는 오히려 그것을 직시하라고 말한다. 상대방이 나를 떠나면 어떻게 되는가?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이 질문을 통해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최악의 상황조차 견딜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설령 최악이 현실이 되더라도, 우리는 살아남는다. 다섯 번째 단계는 용기 있게 사고하는 것이다. 이는 트리거에 자동으로 반응하는 대신, 의식적으로 다른 관점을 선택하는 연습이다. "이 상황이 과거의 상처를 건드렸지만, 지금은 그때가 아니다", "나는 어른이고, 이 상황을 다룰 능력이 있다"와 같은 새로운 사고방식을 훈련한다. 마지막 단계는 실제로 두려움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새로운 방식으로 행동하고, 관계를 회복하며, 자신의 가능성을 다시 펼치는 과정이다. 이 프로세스의 핵심은 반복이다. 뇌는 반복에 반응한다. 한두 번의 시도로 오랫동안 굳어진 신경 경로를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지속적인 연습을 통해 새로운 경로가 강화되고, 오래된 패턴은 점차 약해진다. 스텔라는 명상과 결합된 이 방법이 자신과 수많은 내담자들의 삶을 실제로 변화시켰다고 증언한다.

저자가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결국 '선택'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지만, 두려움에 지배당할지 말지는 선택할 수 있다. 트리거는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 트리거가 우리 삶을 조종하도록 내버려둘지는 우리가 결정한다. 변화는 쉽지 않다. 수십 년 동안 강화된 신경 경로를 바꾸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명상과 용기 있는 사고 프로세스를 반복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하지만 스텔라는 말한다. 더 나은 기분을 느낄 의지가 있다면, 우리는 할 수 있다고. 변화할 힘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책은 실천서다. 독자가 자신의 무의식적 반응을 이해하고, 트라우마와 현재를 분리하며, 관계의 건강함을 회복하고, 자기수용의 힘을 키울 수 있도록 구체적인 도구를 제공한다. 15분의 명상, 여섯 단계의 프로세스,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모두 실제 삶에서 적용 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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