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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가격 - 부자들만 알고 있는 돈의 작동 원리
롭 딕스 지음, 신현승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6년 1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출근길에 커피 한 잔 값이 올랐다며 투덜거린다. 점심 메뉴판을 보며 "예전엔 이렇게 비싸지 않았는 데"라고 중얼거린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를 단순히 물가 상승 정도로 치부하고 지나친다. 롭 딕스의 <돈의 가격>은 우리가 무심코 넘기는 이 현상이 사실은 화폐 시스템 전체의 구조적 문제이며, 우리 주머니에서 끊임없이 가치를 빼앗아가는 ‘합법적 절도'라는 것을 폭로한다. 저자는 지난 100년간 파운드화가 99%의 가치를 잃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제시한다. 우리 삶의 질과 직결된 문제다. 20년 전 옷장 깊숙이 넣어둔 지갑에서 100달러를 발견했다고 상상해보자.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은 당시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잠자는 동안 돈의 가치가 절반으로 증발해버린 셈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것이 '정상'으로 여겨지는 시스템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은행 예금이 안전하다는 믿음도 착각에 불과하다. 저자는 2009년 이후 지난 14년간 은행 이자로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구매력 손실을 절대 만회할 수 없었다고 지적한다. 현금을 꼭 쥐고 있는 것은 천천히 녹아내리는 얼음을 손에 들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사라진다. 이는 돈의 세 가지 기능 중 '가치 저장' 기능이 작동을 멈췄음을 의미한다. 교환의 매개로서, 가치의 척도로서는 여전히 기능하지만, 미래를 위해 부를 보존하는 도구로서의 기능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책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현대 은행이 돈을 만드는 방식에 관한 설명이다. 우리는 은행을 예금자와 대출자를 연결하는 중개인 정도로 생각한다. 누군가가 예금한 돈을 다른 누군가에게 빌려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다. 은행 직원이 컴퓨터 화면에 숫자를 입력하는 순간, 새로운 돈이 탄생한다. 금고에 쌓인 현금도, 예금자들의 저축도 필요 없다. 그저 키보드 타이핑 몇 번이면 10만 달러가 세상에 존재하게 된다. 경제학자 갤브레이스의 말처럼, 이 과정이 너무나 단 순해서 오히려 믿기지 않는다. 뭔가 더 복잡하고 신비로운 절차가 있어야 할 것 같다는 기대와 달리, 현실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다. 이는 현대 화폐 시스템의 본질을 드러낸다. 돈은 더 이상 금이나 은 같은 실물 자산에 기반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뢰와 합의, 그리고 컴퓨터 시스템 속 숫자에 불과하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필연적으로 부채의 폭발적 증가로 이어진다. 1970년대 금본위제가 폐지된 이후 정부 부채와 민간 부채는 천문학적으로 늘어났다. 제동장치가 사라진 화폐 시스템은 끊임없이 새로운 돈을 만들어냈고, 그 돈은 곧 누군가의 부채를 의미했다. 저금리는 이 과정을 더욱 가속화했다. 돈을 빌리는 비용이 낮아지자 정부도 기업도 가계도 앞다투어 빚을 늘렸다. 문제는 이 시스템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점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등장한 양적완화는 중앙은행의 궁극적 무기로 여겨졌다. 경제가 위기에 처하면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내 자산을 사들이고,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여 경기를 부양한다는 논리다. 표면적으로는 합리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이 정교하게 계산된 정책이 아니라 부작용을 통제할 수 없는 실험에 가깝다고 지적한다. 양적완화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만들어내는 불평등이다. 새로 창출된 돈은 경제 전체에 골고루 퍼지지 않는다. 금융시장을 통해 먼저 자산 소유자들에게 흘러간다. 주식과 부동산을 가진 사람들의 자산 가치는 치솟는 반면, 현금과 노동에 의존하는 사람들의 실질 구매력은 정체되거나 하락한다. 이는 구조적으로 부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메커니즘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출구 전략의 부재다. 양적완화로 풍선처럼 부풀려진 자산 가격은 이제 경제의 새로운 정상이 되었다. 만약 중앙은행이 이를 되돌리려 한다면 자산 가격 폭락과 경제 붕괴를 감수해야 한다. 결국 시스템은 계속해서 더 많은 돈을 찍어내는 방향으로만 나아갈 수 있다. 이는 마치 중독과 같다. 처음엔 소량으로 효과가 있었지만, 점차 더 많은 양을 투입해야만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현재 금융 시스템은 궁극적으로 신뢰 위에 세워져 있다. 금이나 은 같은 실물 자산이 뒷받침하지 않는 화폐는 사람들이 그 것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믿음으로만 가치를 유지한다. 정부가 발행한 종이쪼가리나 컴퓨터 화면의 숫자가 가치를 갖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가치 있다고 여길 것이라는 집단적 합의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시스템이 역사적으로 40~70년 정도의 주기로 큰 변화를 겪어왔다고 설명한다. 1971년 시작된 현재의 피아트 화폐 체제는 이미 50년을 넘어 섰다. 전례없는 부채 수준, 지속되는 저금리, 반복되는 금융위기, 심화되는 불평등 등은 모두 시스템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음을 시사하는 징후다.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 예상보다 빠르게, 그리고 극적으로 무너질 수 있다. 비트코인 같은 암호화폐의 등장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발행량이 엄격하게 제한되고, 중앙은행이나 정부가 임의로 증발시킬 수 없다는 특성은 피아트 화폐 시스템에 대한 불신의 표현이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희소성이 보장된 디지털 자산과, 눈에 보여도 무한정 찍어낼 수 있는 법정화폐 중 무엇이 더 가치 있는가? 이 질문은 화폐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를 요구 한다.
저자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금융 문해력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가장 강력한 경쟁 우위라는 사실이다. 시스템은 복잡하게 만들어져 있고, 그 복잡성은 의도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본질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돈은 희소성을 잃어가고 있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부를 잃고 누군가는 축적한다. 어느 쪽에 설 것인가는 이해와 선택의 문제다. 책은 그 이해의 출발점이자, 더 나은 선택을 위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