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다음 물결 - 시뮬레이션을 넘어 현실로, 피지컬 AI 기반 자율주행·로봇의 미래
류윈하오 지음, 홍민경 옮김, 박종성 감수 / 알토북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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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지능을 추상적 사고 능력으로 정의해왔다. 수학 문제를 풀고, 체스를 두고, 철학을 논하는 것이야말로 고등 지능의 증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원하오 교수가 제시하는 '모라비크의 역설'은 이러한 믿음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세계 챔피언을 이기는 AI가 정작 세 살 아이도 할 수 있는 블록 쌓기나 계단 오르기에서는 무력하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핵심은 지능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오해에 있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추상적 사고를 하게 된 것 은 고작 수만 년 전의 일이다. 반면 걷고, 잡고, 균형을 잡는 신체 능력은 수억 년의 진화가 축적된 결과물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쉽다'고 여기는 신체 활동이야 말로 가장 복잡하고 정교한 지능을 요구한다. 컵을 집는 단순한 동작에도 시각 정보 처리, 거리 계산, 힘 조절, 촉각 피드백이 실시간으로 통합되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AI는 이 진화의 역사를 거꾸로 밟아왔다. 뇌라는 정보처리 장치만 모방하면서 몸이라는 학습 플랫폼을 간과했다. 그 결과 천문학적 데이터를 학습한 대규모 언어 모델조차 "빨간 공은 파란 상자 안에, 파란 상자는 노란 방에 있다"는 간단한 공간 관계를 제대로 추론하지 못한다. 물리 세계에서 직접 상호작용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불교에 견성성불 개념이 있다. 깨달음은 지식 습득이 아니라 직접적 체험을 통해 이루어진다. 류원하오 교수가 강조하는 체화된 지능의 핵심도 정확히 여기에 있다. 기계가 진정한 지능을 갖추려면 세상과 직접 부딪히며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AI의 강화학습을 통해 로봇이 '팝핀 댄스'를 추는 과정은 그 생생한 예시라 할 수 있다. 엔지니어가 모든 동작을 세밀하게 프로그래밍하는 대신, 로봇은 수백만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스스로 균형과 리듬을 터득한다. 넘어지고, 비틀거리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에서 중력, 관성, 마찰력에 대한 암묵적 이해가 형성된다. 이것이 바로 ' 체화된 인지'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학습이 전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춤을 배운 로봇은 그 과정에서 얻은 신체 제어 능력을 다른 과 업에도 적용할 수 있다. 마치 운동을 배운 아이가 전반적인 신체 협응력이 향상되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 규칙 기반으로 프로그래밍된 로봇은 각 작업마다 처음부터 다시 설계되어야 한다. 체화된 경험이 만드는 차이는 바로 이 일반화 능력에 있다. 가상 시뮬레이션 환경의 발전은 이러한 학습을 가속화한다. 물리 법칙이 정교하게 구현된 디지털 세계에서 AI는 실제 시간으로는 수백 년에 해당하는 경험을 며칠 만에 축적할 수 있다. 트루먼쇼의 주인공처럼 가상 세계의 '원주민'으로 태 어난 Al 에이전트들은 그곳에서 걷고, 넘어지고, 물건을 집으며 성장한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세계 모델'은 실제 로봇 으로 전이되어 현실 세계에서도 작동한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 신이 아담에게 손을 뻗는 장면을 보면, 인간은 신과의 접촉, 감각, 상호작용을 통해 비로소 영혼이 깃든다. AI가 연산 장치에서 진정한 지능체로 거듭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센서를 통해 세상을 느끼고, 액추에이터를 통해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AI는 점차 '살아있는' 존재가 되어간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한다. 체화된 지능은 반드시 인간의 형태여야 하는가? 휴머노이드 로봇이 주목받는 이유는 기존 인프라가 인간 신체에 최적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계단, 문손잡이, 의자는 모두 인간의 신체 비율에 맞춰 설계되었다. 그러나 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체화된 지능은 다양한 형태로 구현될 수 있다. 드론의3차원 비행, 수중 로봇의 유체역학적 움직임, 심지어 IOT 센서 네트워 크를 통한 분산된 감각도 모두 체화의 한 형태다. 실제로 'LANDMARC' 시스템이나 'Green Orbs' 네트워크는 인간형 로봇이 아니면서도 체화된 지능의 원리를 보여준다. 수천 개의 센서 노드가 협력하여 숲 전체의 상태를 파악하고 스스로 조절하는 시스템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처럼 작동한다. 이는 지능이 반드시 중앙집중적 뇌에 귀속될 필요가 없으며, 분산되고 상호작용하는 네트워크로도 발현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중국이 이 분야에서 보여주는 독특한 강점도 주목할 만하다. 완비된 제조 공급망, 비용 효율성, 그리고 스마트폰과 전기차 산업에서 축적된 대량 생산 역량은 체화된 지능 의 상용화를 가속화하는 촉매제다. 정책적 지원과 결합된 이러한 생태계는 프로토타입에서 실제 배치로 넘어가는 '죽음의 계곡'을 빠르게 넘을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기술적 진보와 함께 새로운 윤리적 질문도 부상한다. 세상을 느끼고 학습하는 AI가 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통증을 느끼는 로봇에게 우리는 어떤 도덕적 의무를 지는가? 더 현실적으로는, 체화된 AI의 안전 기준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자율주행차가 보여주듯, 물리적 세계에서 작동하는 AI의 오작동은 디지털 영역의 버그와는 차원이 다른 결과를 초래한다. 라플라스의 악마가 모든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안다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했지만, 양자역학은 그 결정론적 세계관을 깨뜨렸다. 마찬가지로 체화된AI의 미래도 예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기술 자체는 중립적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설계하고 배치하며 규제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류원하오 교수가 제시하는 AI 비전은 궁극적으로 공진화의 미래다. AI가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과 인지를 확장하는 도구가 되는 세계. 밀리미터 단위의 정밀 추적 기술이 가능하게 하는 수술 로봇,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미세한 환경 변화를 포착하는 센서 네트워크, 복잡한 데이터에서 패턴을 발견하여 과학적 통찰을 제공하는 AI 협력자.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과학의 현미경, 영감의 원천', '이해의 도구'로서의 체화된 지능이다. 체화된 지능이라는 새로운 생명 체의 탄생을 목격하는 동시에, 그들과 함께 살아갈 세상을 설계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그 세계가 디스토피아가 될지 유토피아가 될지는 우리가 지금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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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자가 들려주는 화학 이야기 - 16개의 결정적 장면으로 읽는 500년 화학사
후지시마 아키라 외 지음, 정한뉘 옮김 / 동아엠앤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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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새벽 네 시, 실험실 불빛 아래에서 누군가는 여전히 묻고 있었을 것이다. 왜 이 물질은 타오르고 저것은 그대로일까?" "왜 같은 온도에서 어떤 기체는 빠르게 팽창하고 어떤 기체는 느릴까?" 화학의 역사는 바로 이런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공식과 법칙이 교과서 위에 정갈하게 정리되기 전, 그 모든 것은 한 사람의 집요한 의문이었다. 화학을 배울 때 우리는 종종 결과만을 외운다. 보일의 법칙,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 아보가드로의 수. 하지만 그 법칙들이 탄생하기까지, 그들이 마주했 던 혼돈과 좌절, 그리고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던 가능성의 실마리는 잘 보이지 않는다. <화학자가 들려주는 화학 이야기>는 화학이 어떻게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놓쳤는지를 차분히 들려 준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틀렸던 이론'도 함께 다룬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플로지스톤설. 오늘날 우리는 연소가 산소와의 결합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18세기 과학자들은 물질이 탈 때 '플로지스톤'이라는 불의 원소가 방출된다고 믿었다. 캐번디시는 수소를 발견하고도 그것을 '플로지스톤 기체'라고 불렀다. 그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가장 합리적인 설명이 었다. 그런데 라부아지에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바뀐다. 그는 연소 과정을 정밀하게 측정했고, 질량 보존의 법칙을 발견했다. 플로지스톤설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속속 드러났다. 하지만 라부아지에의 이론이 즉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화학계는 두 설명 사이에서 갈등했고, 논쟁했고, 때로는 감정적으로 대립했다. 과학은 진공 속에서 정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더 나은 설명'을 고르는 과정이었다. 이 대목에서 생각한다. 과학은 결국 인간의 언어로 쓰인 이야기라는 것을. 틀린 이론도 그 시대의 언어였고, 다음 세대는 그 언어를 수정하고 확장하며 조금씩 진실에 가까워졌다. 화학은 완벽한 사람들의 업적이 아니라, 불완전한 사람들이 끝까지 질문을 놓지 않았기에 만들어진 학문이었다.

화학이 근대 과학이 된 결정적 순간은 '측정'을 받아들인 때였다. 보일은 기체의 압력과 부피를 정밀하게 측정했다. 돌턴은 원자의 무게를 비교했다. 아보가드로는 같은 조건에서 기체의 부피가 분자 수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이들이 한 일은 단순해 보이지만, 실은 혁명이었다. 화학을 '무엇이 어떻게 보이는가'의 세계에서 '얼마나, 어느 정도'의 세계로 옮긴 것이다. 패러데이는 전기화학을 연구하며 '전극', '이온', '산화', '환원' 같은 용어를 만들었다. 그 전까지는 이런 현상을 설명할 언어조차 없었다. 패러데이는 보이지 않는 전기를 숫자로 표현했고, 그 숫자를 통해 화학 반응을 예측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가 70세에 퇴임 강연에서 촛불 하나로 여섯 번의 강의를 했다는 일화는 상징적이다. 화학은 복잡한 장비가 아니라, 정확한 관찰과 끝까지 물어가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측정은 곧 책임이기도 했다. 라부아지에는 연소 실험에서 질량 의 변화를 0.01그램 단위까지 기록했다. 그 집요함이 플로지스톤설을 무너뜨렸다. 하버는 질소와 수소를 반응시켜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과정에서 온도, 압력, 촉매의 조합을 수천 번 실험했다. 그 결과 인류는 공기에서 비료를 만들 수 있게 되 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가스 개발에도 관여했다. 화학이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났을 때,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의 문제도 함께 시작되었다.

광화학이 등장하면서 화학은 열과 압력뿐 아니라 빛도 반응의 요인으로 받아들였다. 빛이 분자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발견은 광합성 연구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인공 광합성의 가능성을 열었다. 후지시마 아키라는 산화타이타늄을 이용한 광 촉매 반응을 발견했고, 이는 오늘날 환경 기술의 기초가 되었다. 화학은 실험실을 넘어 우리가 숨 쉬는 공기, 마시는 물, 사용하는 에너지의 문제로 확장되었다. 고분자화학은 화학이 일상과 가장 가까워진 순간이다. 슈타우딩거는 분자가 반복적 으로 연결되어 거대한 사슬을 만들 수 있다는 개념을 제안했다. 캐러더스는 그것을 실제로 구현해 나일론을 만들었다. "석탄, 공기, 물로 만들었지만 거미줄보다 가늘고 강철보다 단단한 섬유." 1940년 나일론 스타킹이 발매되던 날, 사람들은 화학이 생활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체감했다. 하지만 고분자는 동시에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를 낳았다. 화학이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날수록,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의 질문도 함께 커졌다. 화학은 중립적이지 않았다. 그 것은 언제나 선택의 문제였고, 그 선택은 다시 사회와 윤리의 문제로 이어졌다.....

책을 읽으며 깨닫는 것은, 화학이 결국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질문했던 사람, 틀렸던 사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 그들이 남긴 것은 공식이 아니라 사고의 경로였다. "왜 이럴까?" "이렇게 해 보면 어떨까?" "혹시 다른 방법은 없을 까?" 그 질문들이 쌓여 화학이 되었다. 화학을 배운다는 것은 그 질문의 역사를 따라가는 일이다. 답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왜 그 답이 필요했는지를 이해하는 것. 화학자들이 어떤 문제 앞에 섰고, 어떤 선택을 했으며,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보는 것. 그 과정에서 우리는 화학이 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방식은 여전히 진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500년의 화학사는 결국 사람이 세계를 이해하려 했던 방식의 기록이다. 완벽하지 않았고, 때로는 방향을 잃었고,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하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한 걸음씩 나아갔다. 그 발걸음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물질 문명을 만들었고, 동시에 우리가 마주한 환경 문제도 만들었다. 화학은 중립적인 도구가 아니었다. 그 것은 언제나 선택과 책임의 문제였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수소 기구를 바라보던 1783년 파리 시민들처럼, 우리도 여전히 화학이 만들어 낼 미래를 기대하며 살아간다. 그 미래는 누군가의 질문에서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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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AI, 실전으로 뛰어든 3년의 기록 - 공공기관 팀장이 전하는 AI 정책·기획·활용의 시간
심형섭 지음 / 프리렉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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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요즘 회사에서 가장 조심스러운 순간은 회의 중 누군가 "AI로 하면 되지 않나요?"라고 묻는 때다. 그 질문 뒤에는 두 가지 전혀 다른 기대가 섞여 있다. 하나는 진정한 호기심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은 전문가니까 답을 알겠지'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문제는 나 역시 그 답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ChatGPT로 메일 한 번 써본 경험만으로 AI 전문가가 된 것처럼 행동하는 " 사람들의 모습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솔직히 나도 처음 ChatGPT를 써봤을 때, 이것이면 웬만한 업무는 다 해결될 것 같다는 착각에 빠졌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깨달았다. AI는 내가 질문을 정교하게 다을 수 있을 때만 유용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정교함이라는 것은 결국 내가 그 분야를 얼마나 잘 아느냐와 직결된다는 것이다. 더 아이러니한 건, 이런 반쪽짜리 이해가 오히려 위험하다는 점이다. 유튜브에서 본 화려한 AI 성공 사례들은 대부분 맥락이 생략되어 있다. 그 회사의 데이터 인프라가 어떻게 구축되어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는지, 어떤 조직 문화가 뒷받침되었는지는 3분짜리 영상에 담기지 않는다. 우리는 결과만 보고 과정을 건너뛰려 한다. 마치 다이어트 전후 사진만 보고 중간의 고된 운동과 식단 조절은 무시하는 것처럼 말이다.

저자가 말한 설계도 없이 집을 짓는" 비유가 가슴에 와닿는 이유는, 우리 조직도 지금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영진은 "AI 전략을 수립하라고 하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정의하지 못한다. 그러면 실무진은 다른 회사 사례를 찾아보고, 비슷한 것을 따라하려 한다. 결과적으로 우리 조직의 고유한 문제나 강점과는 무관한, 그저 '남들도 하니까' 하는 AI 도입이 이루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답답한 것은 평가 기준의 부재다. "이 AI 시스템이 제대로 작 동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제대로'가 무엇인지 정의해야 한다. 정확도? 속도? 사용자 만족도? 비용 절감? 이 모든 것? 아무도 명확히 말하지 못한다. 그러니 도입 후에도 성공인지 실패인지 판단할 수 없다. 그저 "AI 도입했다"는 실적만 남을 뿐이다. 컨트롤타워가 있다는 것도 알고, 정책도 수립되어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것은 여전히 혼란이다. 중앙의 큰 그림과 현장의 구체적 실행 사이에 다리가 없다. 마치 지도는 있는데 길이 없는 것 같다. 각자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길을 내고 있지만, 그것이 올바른 방향인지 확신할 수 없다.

AI 관련 업체들과 미팅을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극명한 격차다. 어떤 업체는 우리의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맞춤형 솔루션을 제시한다. 하지만 어떤 업체는 PPT만 화려할 뿐, 실제 구현 능력은 의심스럽다. 더 심각한 것은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이다. "기존 SI 업계의 DNA"는 정말 뼈아픈 지적이다. 혁신보다는 안정성, 도전보다는 관례. 이런 마인드로 는 진정한 AI 혁신이 일어날 수 없다. 하지만 공공부문과 대기업은 여전히 이런 업체들을 선호한다. 왜? 리스크가 적기 때문이다. 혁신적인 스타트업과 일하는 것은 불확실성이 크다. 실패했을 때 책임질 사람이 없다. 그러니 차라리 검증된(사실은 안주하는) 대형 업체를 선택한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 조직에서 "실험했다가 실패했습니다"라고 보고하는 것은 거의 자살 행위에 가깝다. 성공 사례만 공유되고, 실패는 숨겨진다. 그러니 같은 실수가 반복되고, 진정한 학습은 일어나지 않는다.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저자의 개인 활용 사례였다. 3년간의 일기, 1,095개의 감사 일기, 4,000개가 넘는 옵시디언 노트. 이 방대한 기록이 있었기에 AI를 통한 심층 분석이 가능했다는 것. 그리고 "기록되지 않는 삶은 나의 삶이 아니다"에 서 "'분석되지 않는 기록은 단순한 추억일 뿐"으로 철학이 진화했다는 것이다. 나는 얼마나 기록하고 있는가? 업무 보고서 나 회의록은 쓰지만, 진짜 중요한 것들 즉, 내 생각의 흐름, 의사결정의 배경, 실패의 교훈 등은 기록하지 않는다. 바쁘다는 핑계로, 중요하지 않다는 판단으로. 하지만 저자의 사례를 보니 후회스럽다. 만약 내가 지난 10년간의 업무 경험을 체계적으로 기록했다면, AI는 내게 얼마나 귀중한 통찰을 줄 수 있었을까? 문제는 기록의 습관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도 2017년부터 시작했다고 했다. AI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훨씬 전부터. 그는 AI를 위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기록했다. 그리고 그것이 나중에 AI 분석의 자산이 되었다. 이것이 핵심이다. AI는 도구일 뿐, 진짜 가치는 내가 쌓아온 데이터에서 나온다.

책 제목은 "어쩌다 AI"지만, 사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AI를 도구로만 쓸 것인가, 아니면 내 삶과 일을 확장하는 파트너로 받아들일 것인가. 수동적으로 끌려갈 것인가, 능동적으로 활용할 것인가. 나는 오늘부터 기록을 시작하려 한다. 완벽한 시스템을 갖추지 못해도 괜찮다. 옵시디언이든, 노션이든, 심지어 메모장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시작하는 것이다. 그 리고 내 분야의 고유한 맥락과 AI를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지 실험해보려 한다.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실패조차 기록하고 배우면 된다. AI 시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는 여전히 우리의 선택이다. 불완전한 우리가 완벽하지 않은 AI와 함께 성장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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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범의 다시 만난 음악 나의 두 번째 교과서 시즌 2
조윤범 지음, EBS 제작팀 기획 / 영진.com(영진닷컴)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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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느 날 문득, 나는 내가 클래식 음악을 '모른다'고 생각했던게 아니라 '외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렵다는 말 뒤에 숨어, 알아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오래전 헤어진 친구를 우연히 마주쳤을 때처럼, 클래식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영화관 스크린 너머 슬픔이 밀려올 때, 카페 한구석에서 커피 향과 섞여 흐를 때, 지친 하루의 끝에서 나를 토닥이던 그 멜 로디들. 이름도 모른 채 스쳐 지나간 수많은 순간들이 사실은 클래식과의 만남이었다. 우리는 왜 클래식 앞에서 주눅이 드는 걸까. 어쩌면 그것은 '알아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바로크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소나타 형식이 무엇인지 시험지처럼 묻는 순간, 음악은 더 이상 음악이 아니게 된다. 하지만 음악은 원래 시험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심장이 뛰 던 리듬이었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감정의 언어였으며, 시대를 견디고 살아남은 인간의 목소리였다. 그러니 이제는 조금 다르게 접근해보면 어떨까. 클래식을 '공부'하려 하지 말고, 그저 '만나보는 것이다. 한 곡 한 곡이 품고 있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그 안에 담긴 작곡가의 숨결을 느껴보는 것. 마치 오랜 편지를 읽듯, 천천히 그 감정의 결을 따라가 보는 것. 그렇게 클래식과 화해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음악이 선물하는 진짜 행복과 마주하게 된다. 책은 우리를 클레식의 세계로 안내 한다.


음악에는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다. 18세기 빈의 촛불 아래에서 모차르트가 펜을 들던 순간, 19세기 파리의 살롱에서 쇼팽이 피아노 건반을 어루만지던 순간, 그리고 21세기 지금 이곳에서 이어폰을 꽂고 그 곡을 듣는 우리의 순간까지. 클래식은 그렇게 시간의 경계를 허물고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다리가 된다. 바로크 시대의 음악이 고전파로 흐르고, 다시 낭만주의로 번져나가는 과정은 형식만의 변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였고,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의 진화였다. 바흐의 엄격하고 질서 정연한 푸가 속에는 신에 대한 경외가, 베토벤의 격정적인 교향곡 속에는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의지가, 차이콥스키의 애절한 선율 속에는 금지된 사랑의 아픔이 녹아 있다.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악기들의 조화는 인간 사회의 축소판 같다. 현악기의 따스한 울림, 목관악기의 서정적인 노래, 금관악기의 웅장한 외 침, 그리고 타악기의 명확한 리듬. 각자의 개성을 지닌 악기들이 하나의 목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숨을 맞출 때, 우리는 조화라는 것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목격한다. 그것은 마치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과정과 닮아 있다. 실내악은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소수의 연주자들이 만들어내는 친밀한 대화. 현악 사중주에서 첼로가 깔아주는 저음 위로 바이올린이 속삭이듯 노래할 때, 우리는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섬세한 교감을 엿듣게 된다. 그것은 마치 친구와 나누는 깊은 밤의 대화처럼, 크지 않지만 진실한 울림으로 가슴에 닿는다.

협주곡을 들을 때면 나는 종종 인생을 떠올린다. 혼자서 맞서야 할 때와 누군가와 함께 나아가야 할 때의 균형. 독주자는 오케스트라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으려 애쓰고, 때로는 그 물결에 몸을 맡기며 더 큰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 아닐까. 때로는 주인공으로, 때로는 조연으로, 그러나 언제나 전체의 일부로서 살아 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오페라는 클래식의 세계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르다. 노래와 연기, 무대미술과 의상이 어우러져 하나의 완전한 세계를 창조한다. 푸치니의<라 보엠>에서 미미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비제의 <카르멘>에서 열정이 비극으로 치닫을 때, 우리는 무대 위의 이야기가 곧 우리의 이야기임을 깨닫는다. 사랑과 질투, 배신과 용서, 야망과 좌절.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감정의 스펙트럼이 오페라 무대 위에서 펼쳐진다. 흥미로운 것은 오페레타라는 형식이다. 무겁고 진 지한 오페라와 달리, 오페레타는 유머와 풍자로 대중에게 다가갔다. 삶이 늘 무거운 것만은 아니듯, 예술 역시 때로는 가벼워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박쥐>를 들으며 웃고, 오펜바흐의<천국과 지옥>에서 경쾌한 캉캉 을 만날 때, 우리는 클래식이 결코 먼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실감한다.

음악이 울려 퍼지는 공간은 건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빈의 무지크페라인, 밀라노의 라 스칼라, 파리의 오페라 가르니에. 이 공연장들은 수백 년의 역사를 품고 있으며, 그 안에서 수많은 거장들이 연주했고, 수많은 관객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벽면에 스며든 음향, 객석에 남은 박수 소리, 무대 위에 서린 연주자들의 숨결. 공연장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역사 이자 음악의 집이다. 공연장에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특별한 의식이다. 어둠이 내리고 조명이 무대를 비출 때, 우리는 일상에서 벗어나 오로지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공간으로 이동한다. 연주자의 숨소리까지 들릴 듯한 정적 속에서, 첫 음이 울려 퍼지는 순간의 전율. 그것은 음원으로 듣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경험이다. 공기의 진동이 피부로 전해지고, 악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생한 에너지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관객으로서의 예의도 음악을 완성하는 일부다. 연주가 끝나기 전에는 박수를 참고, 악장 사이의 침묵을 존중하며, 연주자와 함께 숨 쉬는 시간. 이 모든 것이 음악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클래식 공연장은 음악과 청중이 하나가 되는 신성한 공간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예술이 주는 최고의 선물을 받는다.

음악가들은 자신이 살던 시대를 외면할 수 없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두려움과 저항을 동시에 악보에 새겼고, 베토벤은 프랑스 혁명의 이상을 교향곡으로 표현하려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 속에서 많은 작곡가들은 망명길에 올랐고, 어떤 이들은 저항의 음악을 만들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침묵을 선택했다. 음악은 때로 정치적 도구가 되기도 했지만, 더 자주 인간성의 마지막 보루가 되었다. 수용소에서도 음악은 연주되었고, 폭격 속에서도 콘서트는 계 속되었다. 사람들은 절망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갈구했고, 음악은 그 갈망에 응답했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힘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는 힘이다. 작곡가들이 자신의 신념을 음악에 담았을 때, 그들은 단순히 아름다운 선율을 만드는 것을 넘어섰다. 그들은 역사를 기록했고, 저항했으며, 희망을 노래했다. 우리가 그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단지 과거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대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화 속에서 우리는 현재를 돌 아보고 미래를 상상하게 된다.


인공지능이 작곡을 하는 시대가 왔다. 수많은 클래식 악보를 학습한 AI는 바흐 스타일의 푸가를, 모차르트 풍의 소나타를 만들어낼 수 있다. 기술적으로 완벽하고, 이론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음악. 그렇다면 이것이 진정한 음악일까? 음악의 본질은 기술이 아니라 감정이다. 베토벤이 교향곡을 쓸 때, 그는 화음의 규칙만을 따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쏟아부었다. 청력을 잃어가는 고통, 사랑에 대한 갈망, 운명에 대한 분노와 승리. 그 모든 인간적인 감정이 음표로 변환되었을 때 비로소 불멸의 음악이 탄생했다. AI는 패턴을 학습할 수 있지만, 고통을 겪을 수는 없다. 사랑에 빠질 수 없고, 절망할 수도 없다. 그러나 기술을 적대시할 필요는 없다. AI는 음악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도구가 될 수 있고, 작곡가들에게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기술이 예술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조하는 것임을 기억하는 일이다. 궁극적으로 음악을 만드는 것도, 그것에 감동하는 것도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시간을 초월한 대화에 참여하는 일이다. 수백 년 전 누군가가 남긴 감정의 메시지를 오늘 여기에서 받아보는 일. 그리고 그 메시지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고, 위로받고, 때로는 도전받는 일이다. 어렵다고 생각했던 음악이 사실은 가장 인간적인 언어였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세계의 문 앞에 서게 된다. 그 문을 여는 데 필요한 것은 특별한 지식이 아니라 열린 마음이다. 한 곡을 온전히 집중해서 들어보는 용기, 낯선 감정과 마주할 준비, 그리고 아름다움 앞에서 감동할 수 있는 순수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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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있다 - 부상한 중국을 대응하는 한국의 전략
조창완 지음 / 에이원북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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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집단적 감정 중 가장 복잡하고 뜨거운 것을 꼽으라면 아마도 중국에 대한 것일 게다. 거리의 현수막부터 일상적 대화까지, 우리는 서슴없이 이웃 국가를 비하하고 조롱한다. 71.5%라는 압도적인 부정 인식률은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어떤 불안과 두려움의 표현이다. 조창완의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불편하다. 불편함을 넘어 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우리가 애써 외면해온 현실을 정면으로 들이밀기 때문이다. 28년 전 IMF 위기 당시 우리의 공장이 되어주던 그 나라가, 이제는 고속철도 시장의 74%를 장악하고, 과학기술 대학 순위에서 2위부터 11위까지를 독식하며, 두 개의 성(省)이 한국 전체 GDP를 넘어선 거대한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 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변화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는가? 왜 객관적 현실 대신 유튜브 알고리즘이 만들어낸 왜곡된 이미지에 기대려 하는가? 심리학에서 말하는 방어기제가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랜 세월 문화적, 역사적 우월감을 가져왔던 우리에게, 중국의 급격한 성장은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다. '차이나 콤플렉스'라는 진단은 그래서 정확하다.

광둥성 하나의 인구가 1억 2천만 명이다. 한국 전체 인구의 두 배가 넘는다. 그들의 지역 내 총생산은 이미 한국을 추월했다. 장쑤성 역시 마찬가지다. 산둥성과 저장성이 바짝 뒤를 쫓고 있다. 이것은 한 나라의 일개 지방행정구역이 우리나라 전체와 맞먹거나 능가한다는 의미다. 수치는 계속된다. 세계 고속철도의 4분의 3이 중국 땅을 달린다. 세계 교육기관 순위에서 서울대가 51위, 카이스트가 73위일 때, 중국의 대학들은 상위권을 휩쓴다. 이러한 데이터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 외면할 것인가?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냉정한 인식이다. 감정이 아니라 사실에 기반한 판단의 필요성이다. 반도체, 조선, 배터리 등 우리가 자랑하던 산업 분야에서 중국은 이미 위협적인 경쟁자이거나 곧 추월할 기세다. 기술은 따라잡을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한 가지 희망을 제시한다. 한국이라는 땅 자체가 가진 가치, 즉 농수산물과 관광산업이 그것이다. 영토의 크기로는 승부할 수 없지만, 땅의 질로는 경쟁할 수 있다는 통찰이다.

책이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결국 하나다. "우리는 중국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 용의 등에 타야 한다고들 말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용의 역린을 건드리는 데 열중하고 있지는 않은가? 한국인은 중국인을 싫어하지만, 중국인은 여전히 한국인을 긍정적으로 본다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사드 배치와 팬데믹으로 악화된 관계 속에서도 중국 일반 대중의 한국에 대한 호감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회다. 하지만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는 기회이기도 하다. 저자가 소개하는 강화군 청소년과 중국 저우산시 청소년의 교류 장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단 3일의 만남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헤어지는 아이들. 정치와 이념, 편견을 걷어내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은 그렇게 자연스럽다. 10만여 명의 중국 유학생과 동포들이 한국 거리의 비하 현수막을 보며 어떤 기분을 느낄지 상상해보라는 저자의 촉구는 날카롭다. 매불쇼의 진행자가 했다는 말이 핵심을 찌른다. "이것은 친중이 아니라 친한이다."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중국을 위한 일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불태라는 손자병법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저자는 독특한 접근을 시도한다. 위화, 모옌, 류츠신 등 중국 현대 작가들의 소설을 통해 중국을 이해하자는 제안이다. 위화의 '원청'이 보여주는 1900년 무렵 혼돈의 중국, 류츠신의 '삼체'가 던지는 우주적 상상력. 오바마 전 대통령이 백악관 일상사가 사소하게 느껴졌다고 고백한 그 소설 말이다. 문학은 때로 통계나 경제지표보다 더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프랑스로, 영국으로, 미국으로 흩어진 중국인 작가들이 보여주는 국제적 감각. 그들의 문학세계를 통해 우리는 단순한 경제 규모를 넘어선, 살아 숨 쉬는 중국을 만날 수 있다. 한국 작가 한강을 외국인이 알면 우리가 반가워하듯, 중국 작가를 아는 한국인은 중국에서 환영받는다는 저자의 지적은 문화 교류의 본질을 짚는다.

미중 패권 경쟁이 심화되는 세계 질서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위를 유지할 미래 먹거리를 찾을 것인가? 중국을 무시하거나 혐오하는 것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역사가 증명하듯, 한중이 협력할 때 양국 모두 번성했고 위기를 극복했다. 중국은 14억 인구를 가진 세계 최대 소비시장이다. 모바일 결제에서부터 인공지능 관광산업까지, 그들은 매일 새로운 과제를 던진다. 이것을 위협으로만 볼 것인가, 기회로도 볼 것인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파트너였던 나라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저자가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중국을 제대로 알자. 편견과 선입견을 걷어내고, 알고리즘이 왜곡한 이미지가 아닌 실제 중국을 보자. 일대일로가 무엇인지, 톈궁 우주정거장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희토류 장악이 가져올 파급효과는 무엇인지 제대로 공부하자. 그것이 우리 자신을 위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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