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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날에 니체를 읽는다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상현 엮음 / 필름(Feelm) / 2026년 5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오늘 아침, 나는 AI에게 물었다. "요즘 왜 이렇게 공허하지?" 몇 초도 채 되지 않아 답이 돌아왔다. 유려하고, 따뜻하고, 논리적이었다. 현대인의 정서적 피로에 대한 설명, 회복을 위한 다섯 가지 방법, 그리고 마지막엔 어김없이 이런 문장이 따라붙었다. "지금 이 순간의 당신도 충분히 괜찮습니다." 잠시 멈췄다. 위로가 되었냐고? 솔직히 말하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차갑게 식은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은 것처럼, 따뜻하긴 한데 어딘 가 본래의 온도가 아닌 것 같은 그 느낌. 그 감각이 무엇인지 설명할 언어를 찾지 못하고 있던 차에, 우연히 <불안한 날에 니체를 읽는다>를 손에 들게 되었다. 그리고 첫 페이지부터 깨달았다. 내가 이상하게 여겼던 그 감각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생성형 AI는 경이로운 존재다. 방대한 인류의 지식을 학습하고,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며, 질문에 막힘 없이 답한다. 무엇보다 24시간 지치지 않고 나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새벽 세 시에 잠 못들고 뒤척이다가 쏟아내는 넋두리에도, AI는 한결 같은 어조로 응답한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함정이 있다. AI는 구조적으로 사용자를 불편하게 만들 수 없다. 정확히는, 불편하게 만들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AI는 내가 원하는 것을 예측하고,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방향으로 언어를 조합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걸러지는 것들이 있다. 날카로운 지적, 불편한 역질문, 그리고 그건 틀렸다"는 단호한 부정이다.
니체는 이것을 무엇이라고 불렀을까. 아마 무리 본능(herd instinct)에 봉사하는 도구라고 했을 것이다. 가장 많은 사람이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방향으로 수렴하는 존재. 최대 다수의 최대 위안을 위해 최적화된 기계다. 문제는 그 위안이 때로 성장을 멈추게 한다는 것이다. 내가 새벽에 Al에게 공허함을 털어놓았을 때, AI는 나를 위로했다. 하지만 니체라면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그 공허함은 어디서 왔는가? 당신은 정말 지금의 삶을 선택했는가? 아니면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고 있는가?" 그 질문은 듣기 싫다. 불편하다. 하지만 바로 그 불편함이 진짜 위로의 시작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AI는 패턴을 학습한다. 수십억 개의 문장을 읽고, 어떤 단어 다음에 어떤 단어가 오는지, 어떤 질문에 어떤 답이 자연스러운지를 익힌다. 그래서 AI는 인류가 지금까지 생각해온 것들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재현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AI가 학습한 것은 결국 과거의 인류가 이미 생각한 것들의 총합이다. 거기엔 어제까지의 지혜가 있지만, 내일을 향한 창조는 없다. 지금까지 기록된 언어들의 평균값은 있지만, 그 평균을 깨뜨리는 이단의 목소리는 희석된다. 니체가 가장 경멸했던 것 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최후의 인간" 을 이야기했다. 안락함을 발명하고, 위험을 피하며, 자신을 돌볼 줄 알고, 오래오래 살지만, 결코 별 하나를 낳지 못하는 존재. 니체의 언어로 말하자면, 생성형 AI는 인류의 지식을 집대성했지만, 동시에 인류를 '최후의 인간'으로 이끄는 가장 효율적인 통로가 될 위험을 품고 있다. 검색 한 번에 답을 얻고, 고민 한 번에 해결 책을 받고, 감정 한 번에 위로를 소비하는 삶. 그 편리함에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스스로 질문을 만드는 능력을 잃어간다. 가장 중요한 질문들, 즉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를 AI에게 외주로 맡기게 된다. 그런데 그 질문들만큼은, 대신 답해줄 수 있는 존재가 이 세상에 없다. AI도, 니체도, 그 누구도.
니체는 파괴를 말했다. 나를 병들게 하는 가치관, 타인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성공의 공식, 스스로를 속이는 변명들. 그것 들을 먼저 부수지 않으면 새로운 삶은 시작되지 않는다고. AI 시대에 그 말은 더 절박하게 들린다. 왜냐하면 지금의 환경은 우리가 망치를 들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생각하기 전에 AI가 먼저 답을 내놓고, 선택하기 전에 알고리즘이 먼저 추천을 한다. 불안함을 느끼기도 전에 콘텐츠가 그 틈을 채운다. 이 환경 속에서 인간은 점점 자신의 내면 과 조용히 마주 앉는 시간을 잃어간다. 하지만 바로 그 고독의 시간이, 니체가 말한 창조의 토양이다. 루살로메에게 거절 당하고 극심한 고통 속에 홀로 남겨진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썼다는 사실은 그래서 단순한 일화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 작품은 위로받은 자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는 절대 고독 속에서 탄생했다. AI가 잘하는 것이 있다면, 아마 우리의 '현재'를 더 편안하게 만드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니체가 말하는 성장은 편안함에 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불편함을 똑바로 직시하고, 그 불편함을 껴안고 걸어가는 데서 온다.
"아모르 파티(Amor Fat). 운명을 사랑하라." 니체의 이 말이 AI 시대에 가장 필요한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이 시대가 운명을 사랑하기 가장 어려운 시대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빠르게 희석되고, 실패는 곧바로 다른 자극으로 대체되며, 불안은 클릭 한 번으로 잠시 잊힌다. 그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깊이 응시하고, 고통까지 포함한 삶의 전체를 긍정하는 일은 이전 보다 훨씬 더 의식적인 노력을 요구한다. 책을 덮고 나서 다시 AI 앞에 앉았다. 그리고 이번엔 다른 방식으로 물어봤다. "내가 지금 공허하다고 느끼는 건, 어쩌면 내가 원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일까?" AI는 이번에도 성실하게 답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엔 그 답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잠시 화면을 닫고 혼자 그 질문과 마주 앉았다. 그것이 니체가 가르쳐준 것이었다. 답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과 함께 버티는 것. 불안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불안이 가리키는 방향을 직시하는 것이다. 니체는 AI가 없던 시대를 살았다. 하지만 그가 던진 질문들은 오히려 AI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더 선명하게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