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진 너머의 미래 - 누가 자동차 산업의 패권을 차지할 것인가
안병기 지음 / 흐름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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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2024년 말, 전기차 시장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장밋빛 미래가 보장된 듯했던 전기차 산업이 급격한 냉각기를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예상치 못한 일이 아니었다. 업계 안에서 오랜 시간 현장을 지켜본 이들에게 이러한 조정 국면은 충분히 예견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문제는 너무나 많은 기업들이 낙관적 전망에만 의존한채 무리한 투자를 감행했다는 점이다. 전기차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흥미로운 패턴이 발견된다. 1881년 최초의 충전식 전기차 가 등장한 이래, 전기차는 여러 차례 부침을 겪었다. 1900년대 초반 미국에서 운행되던 차량의 38%가 전기차였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에게 놀라움을 준다. 당시 전기차는 소음과 냄새가 없고 시동이 간편해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 러나 1920년대 포드 모델 T의 등장과 주유소 인프라의 확산으로 전기차는 급속히 쇠퇴했다. 이후 1970년대 오일쇼크, 1990년대 GM의 EV1 등 여러 차례 부활의 기회가 있었지만, 매번 배터리 기술의 한계와 충전 인프라 부족이라는 동일한 장벽에 부딪혔다. 역사는 반복된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전기차가 직면한 근본적 과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높은 생산 단가, 무겁고 충전 시간이 긴 배터리, 부족한 충전 인프라. 이 세 가지 문제는 1910년대에도, 2020년대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숙제로 남아있다. 차이가 있다면 과거에는 소비자 관심과 정부 지원이 부족했던 반면, 현재는 이 두 요소가 어느 정도 충족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21세기 전기차 부흥의 중심에는 테슬라가 있다. 2003년 설립된 이 회사는 불가능해 보였던 것들을 현실로 만들어냈다. 2008년 로드스터 출시 당시만 해도 회사의 미래는 불투명했다. 개발 비용 초과로 CEO의 개인 자금이 투입되고, 출시 일정은 계속 연기되었다. 그러나 2009년 미국 에너지부의 4억 6천만 달러 대출과 2010년 나스닥 상장을 통한 자본 조달로 숨통이 트였다. 특히 모델 S의 성공은 전기차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테슬라의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2010년부터 2019년까지 10년간 단 한해도 흑자를 기록하지 못했고, 누적 순손실은 65억 달러를 넘어섰다. 2019년 하반기 모델3의 대량생산 안정화로 겨우 흑자 전환에 성공했지만, 이는 회사 설립 후 17년 만의 일이었다. 테슬라의 혁신은 전기차를 만드는 것을 넘어섰다. 태블릿 하나로 차량을 제어하는 시스템, 엔진룸을 트렁크로 활용하 는 발상, 노트북용 원통형 배터리 7천 개 이상을 사용하는 파격적인 배터리 팩 구성. 이 모든 것이 기존 자동차 산업의 상식을 깨는 도전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테슬라의 성공은 전기차 산업에 과도한 낙관론을 퍼뜨리는 부작용도 낳았다. 수많은 기업들이 테슬라를 모방하려 했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애플과 다이슨 같은 거대 기술 기업도 전기차 사업에서 손을 뗐고, 코다, 어라이벌, 볼린저 등 수많은 스타트업이 사라졌다. 이들의 실패가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전기차 산업의 진입장벽이 낮다는 것과 성공이 보장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점이다.

테슬라가 연 전기차 시대의 문으로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중국 기업들이었다. 배터리 제조사로 시작한 BYD는 2024년 한 해에만 427만 대 이상을 판매하며 테슬라를 바짝 추격했다. 리샹, 지커, 샤오미, 화웨이 등 다양한 기업들이 전기차 시장에 뛰어들었고, 2024년 전 세계 전기차 판매 상위 10개 기업 중 4곳이 중국 기업일 정도로 그 위상이 높아졌다. 중국의 전기차 굴기는 우연이 아니다. 전통 내연기관 분야에서 선진국을 따라잡기 어렵다고 판단한 중국 정부는 진입장벽이 낮은 전기차를 국가 전략 산업으로 육성했다. 막대한 정부 보조금과 인프라 투자가 뒷받침되었고, 2024년 말 기준 중국의 공공 충전기는 358만 대로 전 세계 공공 충전기의 70%를 차지한다. 중국 내 전기차는 3,140만 대로 전체 차량의 6.2%에 달한다. 그러나 중국 전기차 산업에는 심각한 구조적 문제가 내재되어 있다. 한때 500여 개에 달했던 전기차 스타트업 대 부분이 과도한 경쟁 속에서 부실기업화되었다. 내수 경기 침체로 고급 전기차에 대한 수요가 줄어든 가운데, 국제적으로는 미국과 유럽의 견제가 강화되고 있다. 중국 전기차 기업들은 원가 이하로 수출하며 시장 점유율을 유지하려 하지만, 이는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전략이 아니다. 부동산 기업 다의 전기차 사업 실패는 상징적이다. 6억 달러를 투자하고 한국과 일본의 고급 인력을 대거 영입했지만, 막대한 부채와 경험 부족으로 결국 파산했다. BYD조차도 부품사 미지급금 문제, 대규모 리콜, 빈번한 화재 사고 등으로 이미지가 실추되고 있다. 중국 전기차 산업의 위기는 단지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 세계 전기차 생산과 판매의 60% 이상이 중국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중국발 리스크는 곧 글로벌 전기차 시장 전체의 악재가 될 수 있다.


한때 세계 자동차 산업을 주름잡던 디트로이트 빅3의 현 상황은 참담하다. GM은 2000년대 초 839만 대로 압도적 1위 였지만 2024년에는 600만 대로 줄어 5위로 밀려났다. 포드는 387만 대로 8위에 그쳤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GM과 크라이슬러가 파산하고 정부 구제금융을 받았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이들의 경쟁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빅3의 몰락 원인은 복합적이다. 경직된 조직문화, 고비용 구조, 소비자를 고려하지 않은 전략, 그리고 과거 성공에 안주한 태도. 2005년 당시 GM, 포드, 크라이슬러는 생산하지 않는 노동자 1만 2천 명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잡스 뱅크 제도로 4년간 31억 달러를 썼다. 2008년 구제금융을 요청하러 가면서 회사 전용기를 타고 간 CEO 들의 모습은 방만한 경영의 상징이 되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미래 기술에 대한 준비 부족이다. 전기차 시대를 맞아 필요 한 기술 내재화 없이 부품사에만 의존하는 전략은 한계를 드러냈다. 수십 년간 함께 해온 신뢰할 만한 부품사들이 있었지만, 전기차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완성차 업체의 명확한 리더십이 필요했다. 그러나 빅3는 그런 리더십을 갖추지 못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제조업 부활 정책이 효과를 발휘할지는 미지수다. 오랜 기간 서서히 침몰한 제조업이 몇 년 만에 회복될 수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전기차 보급 확대의 핵심 수단은 정부 보조금이었다. 미국은 2008년부터 최대 7,500달러의 세액공제를 제공했고, 한국도 2005년부터 하이브리드에 최대 310만 원, 전기차에는 더 큰 보조금을 지급했다. 이러한 보조금 정책은 초기 시장 형 성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심각한 부작용도 낳았다. 가장 큰 문제는 보조금이 전기차의 근본적 경쟁력 확보를 지연시켰다는 점이다. 2025년 현재 아이오닉5와 6은 동급 내연기관 대비 45~70% 더 비싸다. 보조금을 받아도 가격 차이가 크다. 20년 넘게 보조금이 지급되었지만 전기차 가격은 여전히 높다. 이는 2.6%의 전기차 소유자를 위해 국민 전체의 세금이 사용되는 형평성 문제로 이어진다. 하이브리드의 경우를 보면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프리우스는 초기 코롤라 대비 54% 비쌌지만, 20년 후 그 차이가 20% 수준으로 줄었다. 소나타 하이브리드도 출시 당시 63% 더 비쌌지만 10년 후 13%로 격차가 좁혀졌다. 배터리와 모터의 원가 하락, 규모의 경제 실현 덕분이었다.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국가가 하이브리드 보조금을 폐지했다는 점이다. 보조금 없이도 가격 경쟁력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전기차는 언제 이 단계에 도달할까? 배터리 원가가 계속 떨어지고 있지만, 내연기관 대비 10~20% 가격 차이까지 좁혀지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각국 정부는 보조금 죽소 의지를 밝히면서도 시장 위축을 우려해 완전 폐지는 미루고 있다. 중국도 2020년 보조금 폐지를 발표했다가 철회했다. 보조금에 의존한 시장은 결국 지속가능하지 않다. 전기차가 자생력을 갖추는 시점이 언제가될지가 산업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전 세계가 전기차 열풍에 휩싸였을 때 유독 한 기업은 다른 길을 걸었다. 바로 도요타다. 많은 전문가들이 도요타의 몰락을 예견했고, 노키아나 코닥처럼 될 것이라 경고했다. 그러나 2024년 전기차 캐즘이 가시화되면서 평가가 달라졌다. 도요타는 전기차를 개발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었다. 도요타의 판단 근거는 명확했다. 자체 분석 결과 전기차 시장의 본격 확대는 2030년 이후가 될 것으로 보았다. 그때까지는 하이브리드로 충분하다는 전략이었다. 이 확신의 배경 에는 1997년부터 시작된 하이브리드의 성공 경험이 있다. 10년 이상 손해를 보면서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손익분기점을 돌파한 후 4년 만에 누적 손실을 모두 회수했다. 도요타는 배터리 기술이 없는 것도 아니다. 전고체 배터리 특허 보유 수에서 세계 1위이며, 2위와 3위인 파나소닉과 이데미츠를 합친 것보다 많다. 2000년대에 이미 배터리와 수소연료전지 개발 인력을 수백명 확보했다. 수소차 미라이도 양산했다. 즉, 도요타는 모든 환경차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시장 상 황에 맞춰 선택적으로 투자하는 전략을 취한 것이다. 2024년 하이브리드 판매가 급증하면서 도요타의 전략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전기차에 올인한 기업들이 배터리 공장 가동률 저하와 대규모 손실로 고통받는 동안, 도요타는 코롤라를 비 롯한 하이브리드 차량으로 안정적 판매를 유지하며 판매 1위를 굳혔다. 하이브리드는 2kWh 미만의 작은 배터리로 연비 를 50% 향상시키고, 별도 충전이 필요 없으며, 전기차 대비 훨씬 저렴하다. 전기차 인프라가 부족한 지역이나 충전 시간 을 부담스러워하는 소비자에게는 여전히 최선의 선택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핵심 키워드는 '미국 우선주의'다. 2025년 4월 2일 '해방의 날'에 발표된 새로운 관세 정책은 충격적이었다. 전 세계 수입품에 10% 기본 관세, 중국에는 총 104%의 관세가 부과되었다. 중국도 즉각 미국산 제품에 84% 관세로 맞불을 놓았다. 미중 무역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기존 패권국 미국과 급부상하는 도전자 중국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일본을 견제했던 미국이 이번에는 중국을 겨냥하고 있다. 다만 일본과 달리 중국은 15억 인구와 광대한 영토, 막강한 제조업 기반을 가진 만큼 쉽게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자동차 산업은 이러한 패권 경쟁의 최전선이다. 전기차와 자율주행 기술은 운송 수단을 넘어 Al, 반도체, 배터리 등 핵심 기술의 집합체다. 미국은 IRA를 통해 자국산 배터리를 사용하는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주고, 중국산 모델은 제외했다. 유럽도 점차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중국 전기차 기업들에게 허용된 시장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한국은 이러한 미중 경쟁의 한가운데 있다. 안보는 미국에, 경제는 중국에 의존하는 구조다. 전기차 배터리 분야에서 한국 기업들은 세계적 경쟁력을 갖췄지만, 미국 공장 건설 비용은 급증하고 있고, 중국 시장은 자국 기업 우대로 진입이 어렵다.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 없는 딜레마 속에서 균형을 찾아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다.

자동차 산업의 현재 상황은 기술적 변혁과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의 경쟁, 자율주행의 상용화 시기, 미중 패권 경쟁, 각국의 관세 정책. 모든 것이 유동적이다. 과거 100년 동안 이처럼 많은 변수가 동시에 작용한 시기는 없었다. 그러나 역사는 교훈을 준다. 첫째, 충분한 검토 없는 무모한 투자는 재앙을 낳는다. 전기차 열 풍에 휩쓸려 플랜B 없이 올인한 기업들이 지금 고통받고 있다. 둘째, 공급자 중심이 아닌 소비자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 만들고 싶은 차가 아니라 소비자가 원하는 차를 만들어야 한다. 셋째, 타이밍이 중요하다. 너무 빠른 투자도, 너무 늦은 대응도 모두 위험하다. 지금 한국 자동차 산업은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세계 3위의 자동차 기업, 5위의 생산국이라는 위상을 지켰지만, 앞으로 5~10년이 더 중요하다. 선진국의 견제와 중국의 추격 사이에서 우리만의 길을 찾아야 한다.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면 몰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냉정한 자기 성찰, 명확한 미래 비전, 그리고 현재의 올바른 실천.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엔진 너머의 미래에서도 한국 자동차 산업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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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영혼의 미술관 - 우리가 사랑한 화가들의 삶이 담긴 낯선 그림들
김원형 지음 / 지콜론북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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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예술가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뭉크 하면 '절규'가, 고흐하면 '해바라기'가, 클림트하면 '키스'가 떠오른다. 마치 한 사람의 인생이 단 하나의 장면으로 압축될 수 있다는 듯이. 그러나 인간의 삶이 그토록 단순할 리 없다. 한 사람이 평생 동안 느끼는 감정의 스펙트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내면의 풍경, 세상과 맺는 복잡다단한 관계들을 어떻게 단 하나의 작품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책은 우리가 ' 안다고 ' 생각했던 거장들의 이면, 대표작의 그늘에 가려진 또 다른 작 품들을 조명함으로써, 예술가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한다. 책이 소개하는 작품들은 유명세와는 거리가 멀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작가의 내밀한 영혼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 된다.

책을 읽으며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풍경화를 바라보는 방식의 변화였다. 이전에는 풍경화를 아름다운 자연이나 도시의 재현 정도로만 이해했다. 그러나 저자는 풍경화 속에도 작가의 감정이, 시대의 분위기가, 사회적 변화가 스며들어 있음을 섬세하게 짚어낸다. 모네의 파리 풍경화는 도시 스케치가 아니라 근대성의 발견이었고, 고흐의 글루아 다리는 향수와 예술적 실험의 결합이었으며, 실레의 풍경화는 불안과 고독이 투영된 영혼의 지도였다. 건물에도 감정이 있다는 표현처럼, 풍경화는 결코 객관적인 기록이 아니다. 작가가 어떤 시선으로, 어떤 마음으로, 어떤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았는가가 모두 화폭에 담긴다. 특히 벨라스케스의 '세 명의 음악가들'에 대한 해설은 사실주의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했다. 사실주의란 단순히 대상을 정확하게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생과 삶의 태도까지 작품 안에 담아내는 것 이라는 통찰은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깊이를 한층 더해준다. 작가가 무엇을 그렸는가만큼이나, 왜 그것을 선택했고 어떻 게 표현했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책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대표작'이라는 프레임에서 예술가를 해방시킨다는 점이다. 우리는 종종 한 작가를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인생이 단 하나의 순간으로 설명될 수 없듯, 예술가의 세계 역시 대표작 하나 로 요약될 수 없다. 오히려 덜 알려진 작품들, 실험적인 시도들, 개인적인 동기로 그린 작품들이 작가의 진면목을 더 잘 드러낼 수 있다. 뭉크에게 절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태양도 있었고, 클림트에게 화려한 인물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요한 풍경화도 있었으며, 마네에게 파리의 세련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박한 해변도 있었다. 이러한 다양성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술가를 한 명의 살아있는 인간으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고 성장하는 존재로 이해할 수 있다. 프리다 칼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녀를 고통받는 여성 화가로만 기억하지만, 그녀는 죽음을 몇 달 앞둔 시점에서 생명의 찬가라 할 만한 '생명의 과실'을 그렸다. 탐스러운 과일, 선명한 색채, 터져 나오는 생명력. 이것이 평생을 사고 후유증과 유산의 아픔으로 고통받은 그 화가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인간의 정신이 얼마나 복잡하고 역설적인지를 보여준다. 고통 속에서도 생명을 찬미할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예술의 본질이 아닐까. 이 책을 읽기 전과 후, 예술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달라졌다. 이전에는 작품의 표면적 아름다움이나 기술적 완성도에 주목했다면, 이제는 작가가 왜 이것을 그렸을까, 어떤 심리 상태에서 이런 선택을 했을까, 당시의 사회적 맥락은 무엇이었을까를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된다. 모네가 루브르 발코니에 선 순간의 의미, 고흐가 글루아 다리를 반복해서 그린 이유, 키르히너가 다보스의 빛을 담아낸 배경. 이러한 맥락을 이해할 때 작품은 시각적 대상을 넘어 작가와의 대화가 되고, 한 시대와의 만남이 되며,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이 된다. 특히 르누아르의 꽃 정물화가 아내 알린의 꽃꽂이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 마티스가 딸 마르그리 트를 그리며 야수파의 폭력적 색채를 절제했다는 점 같은 구체적인 일화들은 작품에 인간적 온기를 더해준다. 예술은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고, 그 사람의 삶과 관계, 감정이 고스란히 작품에 스며든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영혼의 미술관을 가지고 있다. 어떤 순간에는 빛나는 순간의 방에 있고, 어떤 때는 어둠의 방에서 고통을 견디며, 때로는 치유의 방에서 회복하고, 탐구의 방에서 의미를 찾으며, 교감의 방에서 세상과 연결된다. 예술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평생 동안 이 방들을 오가며 작품을 남겼고, 우리는 그 작품들을 통해 그들의 여정을 따라갈 수 있 다. 대표작만 보는 것은 그 미술관의 가장 화려한 방 하나만 구경하는 것과 같다. 물론 그 방도 아름답고 의미 있지만, 다른 방들을 보지 않고서는 그 미술관의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없다. 이 책은 우리를 숨겨진 방들로 안내하며, 거장들의 영혼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예술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결국 한 인간의 영혼과 만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만남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타인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영혼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뭉크의 태양을 보며 절망 너머의 희망을 발견하고, 클림트의 호수를 보며 고요함의 가치를 깨닫고, 모네의 발코니에서 현재를 바라보는 용기를 배운다. 이것이 바로 숨겨진 작품들을 찾아 나서는 이유이며, 명성 너머 거장들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나는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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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도시 2026 - 소음 속에서 정보를 걸러 내는 해
김시덕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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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부동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해본다. '어디에 집을 사야 할까?''이 지역은 정말 개발될까?' 뉴스와 유튜브, SNS에는 매일같이 새로운 개발 호재가 쏟아진다. GTX가 들어온다더라, 신공항이 생긴다더라, 대규모 택지개발이 진행된다더라. 하지만 정작 그 소식들 중 얼마나 많은 것이 실제로 이루어질까? 이번에 읽은 김시덕의<한국도시 2026>은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책은 부동산 투자 가이드라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본질을 이해 하고,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을 키워주는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정치와 정책의 순환 구조였다. 대통령이 바뀌고 시대가 변해도, 선거철만 되면 비슷한 공약들이 되풀이된다. 균형발전, 지방 분권, 신도시 개발, 교통망 확충. 겉으로 보기엔 새로운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과거의 정책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이런 반복 속에서 시민들이 피로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정말 될까?" 하는 기대와 "어차피 안 되겠지" 하는 냉소 사이를 오가며, 우리는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바로 '왜 어떤 공약은 실현되고 어떤 공약은 실패하는가'에 대한 구조적 이해다. 저자는 과거의 사례들을 통해 이 패턴을 보여준다. 가덕도 신공항 은 수십 년째 논의되고 있지만 실제 착공은 요원하다. 반면 GTX는 논란 속에서도 단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 차이는 무엇일까? 정치적 의지의 문제일까, 아니면 더 근본적인 경제적: 기술적 타당성의 문제일까?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정책이나 개발 계획조차 제대로 모르면서, 서울이나 강남의 부동산 뉴스만 열심히 챙긴다는 것. 이것은 올바른 판단일까? 우리는 종종 '서울 중심의 시각'에 갇혀 있다. 언론도, 유튜버도, 심지어 전문가라는 사람들조차 서울 사대문 안의 관점에서 전국을 바라본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성장하고 있는 지역들을 놓치고, 반대로 과대평가된 지역에 현혹되기 쉽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바로 '현장'이다. 부동산을 평가할 때 단순히 호재 뉴스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인구 구조, 산업 기반, 교통 인프라, 생활 환경을 직접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회사 근처인가, 교통이 편리한가, 자연환경은 어떤가, 실제 도시계획은 어디까지 진행됐는가. 이 모든 것은 발로 뛰어야만 알 수 있다.

내년은 지방선거가 있는 해다. 벌써부터 각 지역에서는 다양한 개발 공약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신공항, 새로운 철도 노선, 대규모 산업단지.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뛴다. 하지만 저자는 냉정하게 조언한다. "건설 사업 시작 단계에 제시된 예상 시간표는 참고로만 받아들여라. 이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인생 계획을 세우면 안 된다." GTX가 좋은 예다. 처음 발표됐을 때는 금방이라도 완공될 것처럼 보였다. 수많은 노선이 계획됐고, 각 역 주변은 개발 호재로 들썩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공사는 예상보다 훨씬 더디게 진행되고 있고, 당초 계획됐던 일부 노선은 백지화되거나 변경됐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호재'가 아니라 '실현 가능성'이다. 그 지역에 정말로 수요가 있는가? 재정적으로 지속 가능한 사업인가? 기술적으로 실현 가능한가? 정치적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답할 수 있어야 진짜 정보와 소음을 구별할 수 있다.

책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서울에 국한되지 않고 전국을 아우른다는 점이다. 저자는 한국을 세 개의 메가시티(대서울 권, 동남권, 중부권)와 여섯 개의 소권으로 나누어 분석한다. 대서울권은 이미 포화 상태다. 더 이상의 확장은 한계에 달했고, 이제는 재개발과 교통망 최적화가 과제다. 1기 신도시의 재건축, GTX로 인한 교통 패턴의 변화, 서울 외곽 신도시들의 성장. 이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동남권은 방산과 조선, 석유화학을 중심으로 한 산업벨트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분쟁 등 국제 정세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다. 부산의 엑스포 유치 실패는 아쉽지만, 장기적으로 이 지역의 산업 경쟁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중부권은 신흥 강자다. 세종시의 행정 기능, 청주와 오송의 바이오•반도체 산업, 대전 의 연구개발 역량이 시너지를 내고 있다. 포화된 수도권의 대안이 될 것인가, 아니면 독자적인 경제권으로 성장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저자가 언급한 부산 2030 엑스포, 잼버리 사태, 전주와 익산의 코스트코, 고흥의 나로우주센터 같은 구체적인 사례들은 단순한 뉴스가 아니라, 각 지역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신호탄이다. 부동산 투자를 할 때 국제 정세를 고려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은 동남권 방산업체들에게 호황을 가져왔다. 미중 갈등은 반도체 산업의 지형을 바꾸고 있고, 이는 평택과 용인, 천안과 청주의 미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기후 변화 역시 마찬가지다. 올해 발생한 대규모 홍수와 산불은 자연재해만이 아니다. 앞으로 이런 재난이 더 자주, 더 강하게 발생할 것이다. 재난 취약 지역에 거주하는 데는 점점 더 많은 비용이 들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집단 이주도 고려해야 할 수 있다. 이런 외부 요인들은 단기간에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부동산을 선택할 때도 장기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10년, 20년 후에도 이 지역이 살기 좋을 것인가? 산업이 유지될 것인가? 환 경은 괜찮을 것인가?

...

이 책을 읽고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가의 말도, 정치인의 공약도, 유튜버의 분석도 참고는 할 수 있지만, 맹신해서는 안 된다. 부동산을 선택할 때 중요한 것은 남들이 뭐라고 하는가가 아니라, 내가 직접 확인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 지역에 가보고, 주변을 걸어보고, 실제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 그래야만 진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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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로봇 반도체 BIG 3 투자 트렌드
최중혁 외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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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새벽 2시, 스마트폰 화면을 내려다보며 나는 또다시 AI 관련 뉴스를 스크롤하고 있었다. 어느 기업이 수십억 달러를 투자했다는 소식, 새로운 Al 모델이 출시되었다는 발표, 그리고 한편에서는 거품이 꺼질 것이라는 경고. 정보의 홍수 속에서 나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이것이 정말 투자 기회인가, 아니면 조심해야 할 함정인가? 그런 물음 앞에서 나는 한 권의 책을 펼쳤고, 인식의 전환점이 되었다. 우리는 종종 기술을 개별적인 현상으로 바라본다. AI는 AI대로, 반도체는 반도체대로, 로봇은 로봇대로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실제 현장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이들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다. 마치 인체의 장기들이 각자의 역할을 하면서도 하나의 유기체로 작동하듯, 이 세 가지 기 술은 서로를 필요로 하며 함께 진화하고 있다. 생각의 중추를 담당하는 두뇌가 있어도 그것을 움직일 에너지와 신경계가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반대로 아무리 정교한 신경망이 있어도 실제로 행동할 수 있는 사지가 없다면 세상과 상호작용할 수 없다. 기술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첨단 알고리즘이 있어도 그것을 구동할 연산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허한 이론에 불과하고, 강력한 컴퓨팅 파워가 있어도 물리적 세계에 개입할 수단이 없다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 이러한 통합적 관점은 투자와 비즈니스 전략의 근본을 바꾼다. 하나의 기업이나 기술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 사슬 전체를 조망 하고 그 안에서 각 요소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누군가 AI 모델 개발사에 투자한다면, 그 모델을 훈련시킬 데이터센터의 확장 계획도, 그곳에 들어갈 반도체의 공급망도, 최종적으로 그 모델이 탑재될 로봇 플랫폼의 성장 가능성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다.


책상 위의 이론과 현장의 실제는 언제나 간극이 존재한다. 특히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 분야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실제로 그 변화의 최전선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창업자가 밤을 새워 해결한 기술적 난제, 투 자자가 의사결정 과정에서 마주한 딜레마, 엔지니어가 공장 현장에서 체감한 변화의 속도, 이런 생생한 경험들은 어떤 거시적 분석보다 때로는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한 데이터센터 책임자가 전력 공급 문제 때문에 계획을 수정해야 했던 이야 기를 읽으면서, 나는 AI 인프라 투자가 서버만을 늘리는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전력망, 냉각 시스템, 부지 확보, 규제 환경까지 고려해야 하는 복잡한 프로젝트다. 로봇 스타트업 대표가 실험실에서는 완벽하게 작동하던 시스템이 실제 물류 센터에서는 예상치 못한 변수들과 마주쳤다는 솔직한 고백은, 기술의 상용화가 얼마나 험난한 과정인지를 보여준다. 이런 이야기들은 투자 결정에 현실감을 더해준다. 화려한 프레젠테이션과 장밋빛 전망 뒤에 숨겨진 실제 도전 과제들을 이해하 게 되면, 보다 신중하면서도 확신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어떤 기업의 기술 발표를 볼 때도, '저것이 실제 환경에서 작 동할 때 어떤 문제를 만날까?', 공급망은 준비되어 있을까?', '규제는 따라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들을 자연스럽게 던지게 기술 발전의 속도는 우리의 직관을 자주 배신한다. 때로는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고, 때로는 생각보다 더디게 느껴 진다. 중요한 것은 단순한 속도가 아니라 방향성과 지속 가능성이다. 일시적 유행과 구조적 변화를 구분하는 안목이 필요 하다.


에이전틱 AI의 등장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의미한다. 질문에 답하는 시스템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시스템으로의 진화는 업무의 본질을 바꾼다. 개발자의 역할이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서 '무엇을 구현할 것인가'로 이동하고 있다는 관찰은, 개발 분야뿐 아니라 모든 지식 노동의 미래를 시사한다. 우리가 가치를 창출하는 방식 자체가 재정의되고 있는 것이 다. 국방 분야의 변화는 더욱 극적이다. 전쟁의 개념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데이터 기반 예측, 자율 무기 체계, 가상 전장 시뮬레이션 등 이런 기술들은 전투의 비용과 위험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한다. 이는 국방 산업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정밀한 예측과 자동화된 의사결정 시스템은 물류, 제조, 금융 등 모든 산업으로 확산될 것이다.

막대한 자본이 쏟아지고 있지만, 모든 투자가 성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시장의 단기적 흔들림은 불가피하며, 오히려 그것은 건강한 조정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과대광고와 실질적 가치를 구분하는 것이다. 기술의 화려함에 현혹되지 않고, 비즈니스 모델의 타당성과 수익 창출 능력을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무료 체험과 프리미엄 모델, 사용량 기 반 과금, 산업별 맞춤 솔루션 등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 실험이 진행 중이다. 어떤 방식이 가장 효율적이고 지속 가능한지 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바로 이 불확실성이 기회이기도 하다. 새로운 시장에서는 기존의 룰이 통하지 않고, 창의적인 접근이 승부를 가른다. 인프라 투자의 경우, 규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얼마나 많은 서버를 갖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하느냐가 관건이다. 미주 지역에 집중되던 투자가 유럽, 아시아, 중동으로 확산되면서 각 지역의 특성과 규제 환경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해졌다. 글로벌 공급망의 복잡성은 위험이자 기회다.

몇 년 전만 해도 로봇은 여전히 미래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연구실에서 시연 영상을 공개하면 놀라워하지만, 일상에서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대규모 데이터 학습을 기반으로 한 로봇들이 실제 환경에서 작동하기 시작했다. 단순 반복 작업을 넘어, 복잡한 상황 판단과 섬세한 조작이 필요한 업무까지 수행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로봇 데이터셋의 확장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다양한 환경과 상황에서 수집된 상호작용 데이터를 학습함으로써, 로봇은 예측 불가능한 실제 세계에 점점 더 잘 적응하고 있다. 실험실의 통제된 환경이 아니라 지저분하고 복잡한 현실에서 작동하는 로봇,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혁신이다. 인간의 손 감각을 모방하는 기술, 청소와 요리까지 수행하는 가정용 로봇, 물류센터에서 24시간 작동하는 자동화 시스템 등 이런 발전들은 사회 구조의 변화를 예고한다. 일자리 지형이 바뀌고, 교육 시스템도 재설계되어야 할 것이다. 누군가는 기회를 잡고, 누군가는 적응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이 변화를 어떻게 준비하느냐 가 개인과 기업, 국가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화려한 AI 모델과 정교한 로봇 뒤에는 반도체라는 보이지 않는 영웅이 있다. 연산 능력의 향상 없이는 어떤 혁신도 불가능 하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반도체 수요의 폭발적 증가를 목격하고 있다. 과거에는 기기 출하량이 시장 규모를 결정했다면, 이제는 처리해야 할 데이터의 양, 즉 토큰의 수가 핵심 지표가 되었다. 데이터센터 건설 계획들이 연일 발표되지만, 정작 그곳을 채울 반도체는 부족하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은 앞으로도 수년간 지속될 전망이다. 메모리, 스토 리지, 서버 부품 전반에 걸친 공급망 압박은 단순한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산업 구조 전체의 재편을 촉발하고 있다. 국가들이 반도체를 전략 자산으로 인식하면서 자국 내 생산 능력 확보에 나서고 있다. 이는 경제적 고려를 넘어 안보적 차원의 문제가 되었다. 반도체 없이는 AI도, 로봇도, 나아가 현대 산업 전체가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경쟁 구도에서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가 향후 수십 년의 기술 패권을 결정할 것이다.

이 거대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한국은 어디에 서 있는가? 반도체와 전력 인프라, 정밀 제조 분야에서 강점을 가지고 있지만, 소프트웨어와 서비스 영역에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이 기회일 수 있다. 하드웨어 역량을 바탕으로 피지컬 AI와 로보틱스 분야에서 독자적 경쟁력을 구축할 가능성이 있다. 글로벌 밸류체인이 재편되는 지금, 한국 기업들은 단순 부품 공급자를 넘어 핵심 플랫폼 제공자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맞고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기술 개발뿐 아니라 비즈니스 모델 혁신, 인재 양성, 규제 개선 등 다방면의 노력이 필요하다. 정부와 기업, 학계가 협력하여 장기적 관점에서 투자하고 실험해야 한다. 미국 현장의 변화 속도와 온도를 직접 체감하고, 그것을 한국의 맥락에서 해석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우리의 강점을 살려 차별화된 경로를 개척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확한 정보와 깊이 있는 분석이 필수적이다.


책을 덮고 나서도 질문들은 계속 맴돈다. 이 변화가 가져올 궁극적인 모습은 무엇일까? 일자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불평등은 심화될까, 아니면 새로운 기회의 문이 열릴까? 기술 발전의 혜택을 어떻게 공정하게 분배할 수 있을까? 확실한 것은 변화를 외면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미 경제적 실체로 드러난 이상, AI와 로봇, 반도체가 만들어가는 미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적응의 문제다. 그리고 적응의 첫걸음은 정확한 이해다. 과대평가도, 과소평가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투자는 결국 미래에 대한 베팅이다. 하지만 그 베팅이 맹목적 도박이 아니라 합리적 판단에 기반해야 한다면, 우리는 더 많이 알아야 하고, 더 깊이 이해해야 하며, 더 넓게 조망해야 한다. 한 권의 책이 모든 답을 줄 수는 없지만, 올바른 질문을 던지고 사고의 틀을 제공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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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버블이 온다 - 우리는 진짜 인공지능을 보고 있는가?
아르빈드 나라야난.사야시 카푸르 지음, 강미경 옮김 / 윌북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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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맹목적인 신뢰도, 무조건적인 거부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비판적 사고, 영역 전문성 의 존중, 그리고 기술이 인간의 번영에 기여하도록 보장하기 위한 집단적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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