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추에이티드 - 의지, 노력, 끈기를 성공으로 연결하는 사람과 장소의 힘
앤절라 더크워스 지음, 신솔잎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2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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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비즈니스북스로부터 샘플북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더 이상 상황을 바꿀 수 없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바꿔야 한다." 빅터 프랭클의 이야기는 리더십 책이나 자기계발 강의에서 하도 많이 인용돼서, 나는 한참 동안 이것을 "통제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라"는 말로 이해해 왔다. 그런데 더크워스의 새 책 <Situated>에 따르면 지금까지 내가 "마음가짐"이라고 불러온 것 중 상당수가 사실은 바꿀 수 있는 상황을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나 자신만 몰아세운 일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더크워스는 그릿(Grit)으로 열정과 끈기가 성취를 가른다고 말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10년 뒤에 "그릿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쓴다. 계기는 한 대학원생의 비판이었다고 한다. 그릿은 사람들이 충분히 노력하지 않는다고 탓하는 것처럼 읽히고, 그 사람이 놓인 상황은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 책의 한계를 이렇게 인정하고 다시 쓰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내용보다 그 태도가 먼저 마음에 남았다. 책의 핵심은 간단하다. 상황, 생각, 반응이라는 세 개의 상자를 떠올려 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세 번째 상자, 즉 반응에만 매달린다. 화가 나면 참으려 하고, 미루고 싶으면 이를 악물고 책상 앞에 앉는다. 하지만 그 생각과 행동을 계속 만들어내는 것은 첫 번째 상자, 곧 내가 놓인 상황이다. 그래서 상류로 올라가 거기서부터 바꾸라는 것이다. 책은 그 대상으로 공간, 함께하는 사람들, 멘토, 그리고 속한 문화를 든다. 나의 경우는 어땠으까? 시험 기간이면 나는 늘 결심을 했다. 오늘은 폰을 안 보겠다고. 그리고 결심은 늘 두세 시간쯤 버텼다. 의지가 약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폰을 가방 속에 넣고 가방을 다른 방에 두면, 결심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공부가 됐다. 달라진 것은 내 의지가 아니라 손이 닿는 거리였다. 운동복을 침대 옆에 두는 것만으로 삶이 바뀌지는 않는다. 다만 요령 하나하나보다 그 밑에 깔린 생각의 방향이 내게는 더 쓸모 있었다. 안 되는 이유를 나한테서만 찾던 습관을 멈추고, 환경에서도 찾아보는 것이다. 요령이 오래가지 않는다면 그건 요령을 더 잘 짜라는 뜻일 수도 있지만, 한 번 바꾼 환경을 계속 손보며 살펴야 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 올림픽 선수나 테일러 스위프트가 환경을 바꾼 이야기가 평범한 직장인의 삶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책을 덮고 나면 남는 불편함이 있다.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 "바꾸지 못한 것은 네 책임"이라는 말로 뒤집힐 위험이다. 그릿이 받은 비판을 <Situated>가 다른 방식으로 되풀이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상황을 바꾸라는 말은 모든 것을 바꾸라는 요구가 아니라, 바꿀 수 있는 것이 어디까지인지 먼저 따져보라는 질문이다. 이사는 못 해도 책상 위는 바꿀 수 있다. 직장은 못 옮겨도 점심을 같이 먹는 사람은 고를 수 있다. 큰 것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이 작은 것을 바꿀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반대로 작은 것을 바꿨다고 해서 큰 구조의 문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기억하는 편이 정직하다고 생각한다. 내 노력이 부족해서 안 된다는 설명과 환경이 나빠서 안 된다는 설명 중 하나만 고집하면 둘 다 반쪽짜리다. 앞으로 내가 할 일은 거창하지 않을 것 같다. 무언가를 못 하고 있을 때 "왜 나는 의지가 없을까"라고 묻기 전에 "지금 내 주변은 이 일을 쉽게 만들고 있나, 어렵게 만들고 있나"를 먼저 물어보려 한다. 그리고 바꿀 수 있는 것 하나를 바꾼다.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그때서야 프랭클의 앞 문장이 필요해진다. 순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음을 고쳐먹는 것은 방을 먼저 치워본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흥미로게 읽은 샘플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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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어린아이가 울고 있다면 - 오래된 상처를 알아차리고 다정하게 회복하기
멜라니 피그니터 지음, 김희상 옮김 / 서교책방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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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달래 줄 수 있는 어른은 지금의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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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위한 공간 - 인간의 감정과 행동을 조율하는 공간의 원칙
다비데 루촌 지음, 김경일 외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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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건축은 사람이 살아가는 무대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건물을 도면 위의 형태와 수치로만 이해하고, 그 안에서 실제로 몸을 움직이고 감정을 느끼는 사람을 잊곤 한다. 다비데 루촌은 인류학, 심리학, 신경과학의 관점에서 공간이 인간에 게 미치는 영향을 이야기 하하며, 건축 설계의 중심을 사용자의 경험으로 되돌리자고 제안한다. 인류는 수십만 년 동안 자연 속에서 살았다. 언덕, 나무, 호수, 불, 동굴은 우리의 신체와 감각이 형성되는 조건이었다. 루촌이 말하듯이 요 소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행동을 불러내는 신호였다. 물가는 마실 것을 찾게 하고, 불빛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며, 동굴의 입구는 안전과 은신의 감각을 준다. 이러한 인간의 본능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는 탁 트인 전망 을 가지면서도 등을 기댈 수 있는 자리를 본능적으로 찾는다. 환경심리학에서 말하는 조망-피난 이론(Prospect-Refuge Theory)이 설명하듯, 사람은 멀리 볼 수 있으면서 동시에 몸을 숨길 수 있는 장소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그렇다 면 좋은 공간이란 이러한 원초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공간일 것이다.


루촌은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 확장된 인지(Extended Cognition), 행화된 인지(Enacted Cognition), 내재된 인지(Embedded Cognition) 같은 개념을 통해, 인간의 사고가 뇌 속에만 있지 않고 몸과 환경의 상호 작용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공간을 머리로만 이해하지 않는다. 걸어 보고, 손으로 짚어 보고, 소리를 들어 보면서 공간을 이해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어포던스(Affordance), 즉 환경이 행위를 허락하고 유도하는 성질 은 매우 중요하다. 계단의 높이, 문손잡이의 모양, 벤치의 깊이는 모두 사람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말해 준다. 좋은 건축은 설명서 없이도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한다. 또한 웨이파인딩(Wayfinding), 즉 길을 찾는 능력도 인간에게 근 원적이다. 복잡한 건물에서 길을 잃고 불안해지는 경험은 공간이 인간의 인지 능력을 고려하지 않았을 때 생기는 문제다. 명확한 축, 자연광의 방향, 랜드마크의 배치는 사람이 스스로 방향을 잡을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장치이다.


루촌은 산업화 이후의 도시가 효율성과 공학적 성취에 집중하면서 정작 가장 본질적인 것, 즉 사람 사이의 관계를 잃었다고 지적한다. 넓은 도로와 거대한 블록, 획일적인 주거 단지는 이동과 생산에는 적합할지 모르나, 사람들이 만나고 머무르는 장소를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물론 현대 건축이 편리함과 안전을 가져온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편리함이 곧 풍요로움은 아니다. 인간은 자연 재료의 질감, 계절의 변화, 햇빛의 리듬 속에서 안정감을 얻는다. 콘크리트와 유리 로 가득한 공간에서 우리는 종종 피로와 소외를 느낀다. 이는 개인의 취향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신경계가 진화해 온 방식과 현대 환경이 충돌하는 결과일 수 있다.


루촌이 강조하듯, 우리 삶의 의미는 수많은 행동의 연속에서 만들어진다. 물을 걷고, 불을 피우고, 이웃과 이야기하고, 함께 식사하는 일상의 행위들이 쌓여 우리는 장소에 애착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건축의 역할은 의미를 강요하는 것 이 아니라, 의미가 자라날 수 있는 행동의 여지를 마련하는 데 있을 것이다. 이때 건축은 기능의 집합이 아니라 의례(ritual)의 공간이 될 수 있다. 전통 마을의 우물가, 마당, 사당은 실용적 기능과 함께 공동체의 기억과 정체성을 담고 있 었다. 현대 건죽이 이러한 의례성을 되찾는다면, 공간은 다시 사람들에게 소속감과 의미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위한 공간은 거창한 기술이나 화려한 형태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먼저 사람이 어떻게 보고, 움직이고, 느끼고, 관계 맺는지를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루촌은 신경과학과 인류학의 지식이 건축 설계의 실질적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결국 좋은 건축은 우리의 몸이 기억하는 고향의 감각을 되살리는 건축이다. 언덕과 나무와 물이 주던 안정과 초대의 감각을 현대의 도시와 건물 안에서 다시 찾아주는 것. 그것이 인간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출발점이 아 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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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예술가는 무엇을 훔쳤을까
데브라 N. 맨커프 지음, 정상희 옮김 / 서교책방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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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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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가 인용해 유명해진 "좋은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는 말은 누가 처음 했는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피카소, 스트라빈스키, T. S. 엘리엇, 오스카 와일드의 이름이 번갈아 붙는다. 출처가 불분명하지만 예술 에서 "독창성"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보여 주는 듯하다. 최근 생성형 AI가 그림, 음악, 글을 쏟아내는 상황에서 이 오래된 질문은 더 날카로워졌다. 수많은 작품을 학습한 LLM과 이미지 생성 모델의 결과물은 누구의 작품인 가? 그리고 그 시대에 "위대한 예술이란 무엇인가?

데브라 맨코프는 40개의 작품을 빛에 비춰 그 속에 숨은 흔적을 이야기 한다. 앤디 워홀이 상업 이미지를 재활용한 방식, 르네상스 화가들이 고대 조형 질서를 가져다 쓴 방식, 3,000년 동안 순환해 온 도상 이 현대 회화에 거의 변형 없이 다시 등장하는 장면이 그 예다.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예술이 과거의 이미지를 흡수하고 조금씩 바꾸고 잘못 기억하고 다시 세상에 내보내는 순환 구조였다. 이 순한 속에서 "빌림", "인용"," 도용", "표절"은 같은 행위가 아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반복해 재해석한 것은 의식적인 대화였다. 반면 특정 시대의 색감이나 분위기를 무의식적으로 흡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맨코프는 이 구분을 완벽하게 해내지는 못한다. 현대 예술의 몇몇 사례에서 문화적 전유라는 복잡한 문제는 지나치게 가볍게 다뤄진다. 그럼에도 이 책이 가치 있는 이유는 "원작자의 의도"와 수용자의 기억"이 예술 안에서 어떻게 뒤섞 이는지를 구체적인 사례로 보여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LLM 생성형 인공지능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대규모 언어 모델이나 이미지 생성 모델은 방대한 기존 작품을 학습한다. 그 과정에서 인간 작가의 문장 리듬, 붓질의 패턴, 구도의 관습을 통계적으로 흡수한다. 그리고 이를 새롭 게 조합해 결과물을 만든다. 이것은 맨코프가 묘사한 "흡수, 변형, 재방출"의 순환과 닮아 있다. 하지만 차이도 분명하다. 인간 예술가는 대개 왜 그것에 끌렸는지를 자각한다. 베이컨은 벨라스케스를 붙잡고 씨름했고, 워홀은 상품 이미 지를 통해 대중문화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드러냈다. 그들의 차용에는 삶의 경험, 욕망, 불안, 그리고 시대에 대한 입장이 개입했다. 반면 모델은 사람의 의도나 체험 없이 확률적으로 결과를 내놓는다. 그 결과물이 아무리 세련되어도, 그 안에는 한 인간이 세계와 씨름한 흔적이 없을 수 있다. 그렇다고 AI의 결과물을 쉽게 "훔친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학습 데이터의 출처, 원작자의 동의, 그리고 결과물이 원작과 얼마나 닮았는지는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LLM 시대에 위대한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좋았다. LLM 시대의 위대한 예술을 무엇을 왜 가져왔는지를 아는 예술"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기술은 빌림의 속도와 규모를 바꾸었지만, 빌 림을 예술로 만드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질문이다. 무엇에 끌렸는가, 그 끌림을 어떻게 나의 것으로 바꿀 것인가, 그리고 그 과정을 어떻게 정직하게 드러낼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작품이 오래 살아남을 것이라고 믿는다. 맨코프 의 말처럼 독창성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신화일지도 모른다. 모든 예술은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재배치이며, 가장 창의적인 예술가는 가장 열정적으로 훔친 사람이었다. 그러나 훔침이 곧 위대함은 아니다. 위대함은 훔친 것을 다시 바라보게 만들고, 보는 사람이 자신의 시선을 되묻게 만드는 힘에서 나온다. AI가 무한히 이미지를 생산하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그럴듯한 결과"보다 "의미 있는 질문"을 만드는 예술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

좋은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질문만큼은 분명하다. 우리는 무엇을 빌리고, 무엇을 더하며, 어디에 책임을 질 것인가. LLM이 인간의 과거를 학습해 새로운 것처럼 보여 주는 시대에, 위대한 예술은 기술의 화려함 이 아니라 인간이 던지는 정직한 질문과 그 질문을 향한 책임 있는 변형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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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밖 감정
성해나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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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약속을 잡을 때 우리는 으레 묻는다. "어디서 볼까?" 그러면 대화는 비슷한 길로 흘러간다. 서울 사람은 서울의 어느 역을 말하고, 서울 밖에 사는 사람은 잠시 말을 고르다 "그럼 거기서 보자" 하고 만다. <서울 밖 감정>에서 김화진 작가가 서울 사람들의 약속 장소가 당연히 서울인 것은 곰곰 생각하면 여전히 이상하다고 쓴 대목을 읽고 나는 한참 웃다가 조금 씁쓸해졌다. 나도 그 이상한 일을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한 채 오래 지나쳐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울을 향한 마음을 아주 일찍 배운다. 열일곱 살 무렵이면 대학 이름 앞에 '인서울'이라는 말이 먼저 붙는다. 어디서 무엇을 공부하느냐보다 서울 안이냐 밖이냐가 먼저 갈리고, 그 선 하나로 노력의 값이 매겨진다. 서울에 산다는 것은 오랫동안 성공의 다른 말이었고, 서울을 떠나는 일은 한 걸음 물러서는 일로 읽혔다. 그 중력은 사람의 시야까지 바꾼다. 서울과 안양 사이에서만 자라 다른 도시로 갈 생각은 해본 적 없다는 김화진 작가의 고백을 읽으며 나는 내 지도를 떠올렸다. 내 머릿속 지도에는 서울이 한가운데 크게 그려져 있었고, 그 바깥은 '서울에서 몇 분 거리'라는 설명으로만 존재했다. 나는 서울을 기준으로 세상을 읽는 일이 너무 익숙해서 그것이 하나의 선택이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성해나 작가는 고향의 버스를 손을 세차게 흔들지 않으면 멈춰 세울 수 없는 버스라고 적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불편한 교통 이야기로만 읽혔다. 다시 읽으니 그것은 존재 증명에 가까웠다. 손을 흔들지 않으면 아무도 서지 않고, 서지 않으면 있었는지조차 모른 채 지나간다. 인구가 적으니 어쩔 수 없다는 말, 예산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말이 굳어지는 동안 누군가는 치료를 포기하고 누군가는 배움을 접고 누군가는 체념하듯 떠난다는 문장은 오래 남았다. 그런데 이 장면에는 반대편의 진실도 있다. 서울에서는 전광판을 올려다보며 안달복달하고, 환승역에서 긴 줄을 서고, 택시가 잡히지 않아 초조해하던 사람이 이곳에서는 손을 흔든다. 어디에 있든 사람은 기다리고 애쓴다. 달라지는 것은 그 수고가 얼마나 눈에 띄느냐다. 서울의 피로는 풍경이 되어 묻히지 않는데, 서울 밖의 피로는 조용히 잊힌다. 서울 밖은 어떤 곳일까. 나는 그 질문에 '서울이 아닌 곳'이라는 정의 말고 다른 대답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서울 밖의 장점을 '서울보다 한적하다', '서울보다 싸다'처럼 서울과의 비교로만 말하면 우리는 여전히 서울이라는 좌표 위에 서 있다. 한적하다는 말도 서울이 분주하다는 전제에서 나온다. 그래서 서울 밖을 서울 없이 설명해 보려 한다. 그곳에는 계절마다 다른 냄새를 풍기는 동네 길이 있고, 이름을 알고 인사하는 가게 주인이 있고, 해가 지면 어두워지는 골목과 별이 보이는 밤이 있다. 새벽 버스 정류장에서 마주치는 얼굴들은 서로를 모르면서도 같은 시간을 산다. 이것들은 서울을 거치지 않아도 충분히 설명되는 삶이다. 책에서 가장 오래 남은 것도 거창한 담론보다 겨울 결로 탓에 노트북 자판에 떨어지던 물방울, 옆방 소음이 그대로 들리던 자취방 같은 구체적인 장면들이었다. 삶은 늘 구체적인 곳에서 일어나고, 구체적인 곳에는 저마다의 이름이 있다. 책을 덮고 나는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왔다. "어디서 볼까?" 이제는 이 질문이 조금 다르게 들린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 이동의 수고를 어느 한쪽이 당연하게 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당연함이 우리의 마음까지 한쪽으로 기울여 놓은 것은 아닌지 묻게 된다. 다음에 약속을 잡을 때는 서울이 아닌 곳을 먼저 말해 보고 싶다. 서울 밖 어느 동네의 작은 식당이나 막차가 일찍 끊기는 역 앞이라도 좋다. 그곳에서 서울은 어떤 모양으로 우리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지 이야기해 보고 싶다. 서울을 미워하자는 것이 아니다. 서울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도 말할 수 있는 삶이 우리에게 이미 많다는 것을, 손을 흔들어야 서는 버스의 풍경까지 포함해서 기억하자는 것이다. 서울 밖은 서울의 바깥이 아니라, 누군가의 한가운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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