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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탄생 - 량치차오의 국민국가 건설 분투기
정지호 지음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6년 1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중국의 탄생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황하 문명이나 만리장성, 진시황의 통일을 떠올린다. 그러나 정지호 교수가 조명한 량치차오의 분투기를 접하며, 나는 '탄생'이라는 단어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끊임없는 재구성의 과정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특히 근대라는 격변기를 살았던 량치차오의 고민은 백여 년 전 한 지식인의 사유가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중국 만들기'의 원형질 같은 것이었다. 량치차오가 살았던 청말 민초는 제국이 무너지고 국민국가가 요청되던 시기였다. 그는 이 틈새에서 역사, 경제, 재정, 정치체제, 민족 정체성에 이르기까지 총체적 설계를 시도했다. 마치 한 사람이 나라 전체의 청사진을 그려내려 한 것처럼 보일 정도다. 보통 혁명가는 파괴에, 보수주의자는 보존에 집중하는 법인데, 량치차오는 둘 사이 어딘가에서 '혁명적 보존'을 꿈꾼 듯하다. 그래서 그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면서도 소설계 혁명을 외쳤고,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재정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 모순처럼 보이는 태도가 사실은 당대 중국이 마주한 현실 그 자체였다. 흥미로운건 량치차오의 사상이 일관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망명 초기와 귀국 후 그의 입장은 때로 정반대로 보이기까지 한다. 자본 집중을 강조하다가 소농사회를 긍정하고, 연방제를 소개하다가 강력한 중앙집권을 옹호했다. 이런 변화를 두고 누군가는 기회주의라 비난할 수 있겠지만, 나는 오히려 이 불일치 속에서 진정성을 본다. 그는 교조적 이론가가 아니라 상황에 반응하는 실천가였다. 정치적 필요가 우선이었고, 경제학은 도구였으며, 역사는 국민을 만들 기 위한 서사였다. 이것이 량치차오를 단순한 사상가가 아니라 국가 건설자로 봐야 하는 이유다.
량치차오가 구상한 '대민족주의'는 혈통이나 언어 같은 객관적 요소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나는 중국인이다"라는 자각, 그 주관적 동일시가 핵심이었다. 이 발상은 매우 근대적이면서도 동시에 위험하다. 왜냐하면 민족이라는 것이 발견되는 게 아니라 발명되는 것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치차오는 이 허구를 적극적으로 추동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역사적 진실이 아니라 정치적 효용이었다. 청말 국적법 제정 과정을 보면 이 딜레마가 더욱 분명해진다. 근대 국민국가는 명확한 국민의 경계를 필요로 한다. 누가 우리이고 누가 타자인지 법적으로 정의해야 한다. 그런데 청조는 귀화 이전의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해외 화교의 이중국적을 어떻게 다룰지 명확한 기준을 세우지 못했다. 전통적 천하 질서에서는 국적이라는 개념 자체가 불필요했기 때문이다. 황제의 덕화가 미치는 범위가 곧 세계였고, 그 안의 사람 들은 모두 잠재적 신민이었다. 그러나 근대 국제 질서는 배타적 주권을 요구했고, 중국은 급히 국민을 '만들어내야'했다.
동북지역 조선인의 법적 지위 문제는 이 혼란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중국은 만주 개척을 위해 조선인을 받아들였다가, 일본과의 갈등이 불거지자 그들을 귀화시키려 했다. 일본은 조선인을 자국민으로 규정하면서도 권리는 주지 않고 의무만 부 과했다. 조선인은 두 제국 사이에서 어느 쪽 국민도 온전히 될 수 없는 상태로 남겨졌다. 국민이라는 범주가 얼마나 자의적이고 정치적인지, 그리고 그 경계에 선 사람들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례다. 량치차오의국성론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외부 충격과 내부 규범의 상실 속에서 방황하는 중국인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려 했다. 국성이란국민으로서의 본성, 즉 집단적 성격을 의미한다. 이는 개인의 자유보다 국가의 생존을 우선하는 국가 주의적 발상이지만, 동시에 해방의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량치차오는 민족주의를 통해 국가를 강화하되,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보편적 질서로 나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이 긴장이 바로 근대 중국이 안고 있는 근본적 모순이다.
량치차오는 입헌파로 분류되지만, 그의 입장은 보수주의만이 아니었다. 그는 루소를 소개하고 미국 연방제를 검토했으며, 블룬칠리의 국가 유기체설을 수용했다. 입헌군주제를 지지한 것은 이념적 선호가 아니라 전략적 판단이었다. 광활한 제국을 급격히 공화제로 전환할 경우의 혼란을 우려했고, 청조를 유지하면서 점진적으로 입헌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현실적이 라고 본 것이다.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무너지자 치차오는 입헌군주제의 꿈을 접었지만, 곧바로 강력한 총통제 중심의 통일 공화정체를 지지했다. 연방제는 여전히 경계했다. 분열의 위험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대신 지방자치제도를 도입해 연방제의 장점을 일부 흡수하려 했다. 이런 태도는 일관성 없어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의 목표는 처음부터 명확했다. 강력한 국민국가의 건설. 체제는 수단이었고, 상황에 따라 조정 가능한 것이었다. 량치차오의 소설 속에서 황제가 퇴위하고 총통이 취임하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혁명적 전환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청조의 유산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려 했 다. 제국의 판도를 유지하되 그 안에 새로운 질서를 심으려 한 것이다. 실제로 청조는 멸망 직전 '중국'과 '중화'라는 가치를 만주족을 넘어 전체 판도로 확산시키려 했다. 이는 량치차오가 꿈꾼 '대민족주의'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입헌파와 혁명 파는 격렬히 대립했지만, 둘 다 국가주의 담론에 기반했고, 둘 다 청조 권력의 외부에 있었다. 이 점은 중요하다. 국민국가 건설 논의가 기존 권력 구조 밖에서 전개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단순한 정치 개혁이 아니라 근본적인 체제 전환이었음을 의미한다. 량치차오는 그 전환의 한복판에서 이론과 실천을 동시에 추구한 인물이었다.
책을 읽으며 나는 현재 중국의 여러 모습이 량치차오 시대의 고민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다.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주의적 민족주의, 경제 발전을 통한 국가 강화, 주변부에 대한 통합 의지. 이 모든 것이 백여 년 전 량치차오가 씨름했던 문제들이다. 중국은 여전히 '탄생'하고 있는 중이다. 제국의 유산과 국민국가의 요청 사이에서, 보편주의와 민족주의 사이에서. 량치차오를 보수 개량주의자로만 치부하는 것은 그의 사상이 지닌 복잡성을 놓치는 일이다. 그는 혁명과 보존, 전통과 근 대, 제국과 국가 사이에서 제3의 길을 모색했다. 그 길이 성공했는지는 논쟁적이지만, 그 시도 자체가 근대 중국 형성 과정의 핵심이었다. 중국의 탄생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 과정이며, 량치차오는 그 과정을 설계하고 추동한 건축가 중 한 명이었다. 우리가 량치차오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국가란 무엇이고, 국민이란 누구이며, 정치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는 근본적 질문을 다시 던지기 위해서다. 량치차오의 분투는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여전히 중국 안에서, 그리고 동아시 아 전체의 질서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