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 시대의 귀환 - 팍스 아메리카나의 몰락과 무한 각축의 시작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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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지금 역사적 전환점을 목도하고 있다. 2026년 초 미국이 보여준 일련의 행보들 즉, 베네수엘라에 대한 무력 개입, 그린란드를 향한 노골적인 영토적 야욕등은 언뜻 강대국의 위용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힘의 과시가 아니라 오히려 쇠락의 징후다. 진정한 패권국은 군사력만으로 세계를 지배하지 않는다. 그들은 생산력으로, 기술력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상식'을 만드는 힘으로 세계를 이끈다. 17세기 네덜란드가 해양 무역과 금융으로, 19세기 영국이 산업혁명과 자유무역 이념으로, 20세기 미국이 대량생산 체계와 자유민주주의 담론으로 세계를 재편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더 이상 그런 '총체적 조정자'의 지위를 유지하지 못한다. 제조업은 이미 수십 년 전 아시아로 이전되었고, 기술적 우위마저 빠르게 좁혀지고 있다. 달러 패권과 군사적 네트워크는 여전히 강력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세계를 설득할 수 없다. 설득이 불가능해지자 강제에 의존하게 되고, 강제에 의존할수록 정당성은 더욱 훼손된다. 이것이 바로 모든 패권국이 겪어온 악순환이다.


흥미로운 점은 지금의 상황이 1914년 이전 세계와 놀라울 만큼 닮아있다는 사실이다. 당시 영국의 패권에 도전하던 독일의 GDP는 이미 영국을 추월했고, 두 나라는 긴밀한 무역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다. 현재 중국과 미국의 관계가 정확히 그렇다. 중국 수출의 17%가 미국으로 향하고, 두 나라는 경제적으로 깊이 얽혀 있으면서도 기술 패권, 해양 통제권, 우주 개발권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한다. 20세기 초 독일이 강력한 관료국가와 국영기업을 통해 후발주자의 약점을 극복했듯, 21세기 중국 역시 국가자본주의를 통해 미국을 추격하고 있다. 역사가 정확히 반복되지는 않지만, 패턴은 반복된다. 1914년 이전에도 세계화는 절정에 달했고, 사람들은 전쟁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경제적 상호의존이 너무 깊어서 전쟁은 모두에게 파멸을 가져올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그 비극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지금 우리가 맞이하는 세계는 다시 그 '기존 궤도'로 돌아가는 중이다. 단극 체제라는 역사적 예외가 끝나고, 다극 체제라는 역사적 정상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을 단순히 한 개인의 일탈로 보는 것은 착각이다. 트럼프주의는 미국 패권 쇠락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1970년대 이후 지속된 제조업 공동화, 중산층의 몰락, 불평등의 심화가 누적되면서 기존 엘리트에 대한 신뢰는 바닥을 쳤다. '러스트 벨트'의 노동자들은 세계화가 자신들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일자리는 해외로 떠났고, 남은 것은 마약 중독과 절망뿐이었다. 이들에게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는 단순한 선동이 아니라 유일한 희망처럼 들렸다. 흥미롭게도 이 상황은 1980년대 후반 소련과 겹친다. 옐친이 '러시아 제일주의'를 외치며 제국 유지 비용의 축소를 약속했듯, 트럼프는 '미국 제일주의'로 해외 군사 개입의 축소를 공약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제국을 유지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제국을 더 빠르게 붕괴시킨다. 동맹을 경시하고, 다자주의를 거부하며, 거래적 외교에만 매달리면 패권국이 누리던 '상징 자본' 즉 자발적 동의와 신뢰이 급격히 소진된다.


패권에는 가격표가 붙어 있다. 전 세계에 군사 기지를 유지하고, 동맹국을 보호하며, 국제 질서를 관리하는 데는 천문학적 비용이 든다. 그러나 이 비용을 지불하는 이유는 그로부터 얻는 이익이 더 크기 때문이다. 달러 패권, 기술 표준 설정권, 금융 시장 지배력, 문화 산업의 영향력 등이 그것이다. 문제는 트럼프주의가 비용만 줄이고 이익은 그대로 누리려 한다는 점이다. 이는 불가능한 조합이다. 동맹을 홀대하면서 동맹의 충성을 기대할 수 없고, 국제 규범을 무시하면서 규범 설정자로 군림할 수 없다. 더 심각한 것은 트럼프주의가 10~15년 지속될 경우 미국의 장기적 경쟁력 자체가 훼손된다는 점이다. 이민 제한 정책은 실리콘밸리의 인재 풀을 말리고, 고립주의는 과학기술 협력을 단절시키며, 반지성주의는 교육 시스템을 붕괴시킨다. 미국의 진정한 힘은 전 세계의 우수한 인재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몰려드는 데 있었다. 그러나 혈통과 국경을 강조하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강화되면, 미국은 더 이상 인재들의 메카가 아닌 폐쇄적 사회로 전락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현재 세계가 나아갈 수 있는 가장 어두운 미래의 한 가지 버전을 보여준다. 혈통 중심의 국가 정체성, 영구적 전쟁 상태, 군사주의의 일상화, 타자에 대한 무제한적 폭력의 수용—이 모든 것이 1930년대 유럽의 유물처럼 보이지만, 21세기에도 현실로 작동하고 있다. 시온주의는 본래 진보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초기 이스라엘 건국 주역들은 노동 시온주의자들이었고,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를 꿈꿨다. 그러나 '우리 민족만의 국가'라는 배타적 토대 위에서는 진정한 평등과 보편적 인권이 실현될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배제하는 순간, 시온주의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민족주의를 선택한 것이다. 결국 197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화와 극우화가 가속화되면서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1인당 군사비 지출에서 이스라엘은 세계 최상위권이다. 전체 인구의 4%가 동원되는 전쟁이 일상이고, 병역 기피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통령의 아들도, 장관의 딸도 전선에 나간다. 이것이 '시민=군인'이라는 등식이 완성된 사회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런 사회에서 타자의 생명은 '우리'의 안보라는 명분 앞에 언제든 희생될 수 있다. 가자지구에 대한 정기적 공습을 '잔디 깎기'라고 표현하는 것은, 폭력이 얼마나 일상화되고 탈감각화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문제는 이런 체제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해외 유대인들조차 선택권만 있다면 이스라엘로의 '귀환'을 사양한다. 전 세계 인재들이 혈통주의와 군사주의로 점철된 사회로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국제 사회에서의 고립은 심화되고, 심지어 유대인 디아스포라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평화 없이는 미래가 없다. 그러나 극우 세력에게 영구적 전쟁 상태는 오히려 권력 유지의 수단이다. 이것이 바로 민족주의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어두운 종착역이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전환기를 지나고 있다. 미국 패권의 쇠락은 한국에게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다. 위기인 이유는 명백하다. 우리는 지난 70년간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서, 미국 주도의 세계 경제 질서 속에서 성장해왔다. 그 토대가 흔들리면 우리의 생존 전략 전체를 재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기회이기도 하다. 수출 구조를 보면 이미 중국과 아세안의 비중이 구미권과 일본을 넘어섰다. 문화 상품은 비서구권에서 더 잘 팔린다. 지정학적으로도 우리는 더 이상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당할 필요가 없다. 자주국방을 전제로 한 지역 안보 구도를 만들어가는 것이 장기적으로 바람직하다. 중요한 것은 감상적 친미도, 맹목적 반미도 아닌 냉철한 현실 인식이다. '모든 것이 미국 탓'이라는 식의 단순한 프레임은 객관적 상황 파악에 방해가 된다. 중국과 러시아도 각자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고, 한반도는 그 영향권에서 자유롭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국 간 모순의 심화와 경쟁의 첨예화 속에서 우리의 생존 공간을 최대화하는 전략적 사고다.


1914년 이전으로 돌아가는 세계에서 한반도는 다시 한번 완충지대가 될 위험이 크다. 핵무기 시대에 열강 간 전면전은 불가능하지만, 대리전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크라이나가 그 비극적 사례다. 한반도가 그런 전장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이를 위해서는 남북 관계 개선, 주변국과의 다자 외교 강화, 자주국방 역량 확보가 동시에 필요하다. 동시에 우리는 '포스트 서구 세계'를 준비해야 한다. 서구 중심의 세계 질서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이제 모두가 알게 되었다. 새로운 세계는 더 다원적이고, 더 경쟁적이며, 어쩌면 더 폭력적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비서구 국가들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이 열리는 시대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 기회를 포착하려면 과거의 성공 방정식에 안주해서는 안된다.

야만 시대의 귀환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영토와 자원을 둘러싼 무한 각축, 민족주의와 배타주의의 폭발, 전쟁과 혐오의 일상화 등 이 모든 것이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 1914년 인류는 제1차 세계대전을 막지 못했고, 1930년대 인류는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예방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도 똑같은 실패를 반복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중요한 것은 냉철한 인식과 전략적 대응이다. 미국 패권의 몰락을 부정하거나 미화할 필요가 없다. 동시에 그것을 단순히 환영만 할 일도 아니다. 패권의 공백은 혼돈을 낳고, 그 혼돈 속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약소국과 민중이다. 우리의 과제는 이 혼돈을 최소화하면서, 새로운 질서 속에서 우리의 자리를 확보하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더 큰 목표를 잃지 말아야 한다. 민족주의의 폐쇄회로에 갇히지 않고, 진정한 평등과 연대를 향해 나아가는 것. 이것이 궁극적으로 야만을 넘어서는 유일한 길이다. 이스라엘의 사례가 보여주듯, 혈통과 배제에 기반한 체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평화 없이는 미래가 없고, 연대 없이는 희망이 없다. 야만 시대를 건너는 지혜는 결국 여기에 있다. 힘의 논리를 이해하되 그것에 함몰되지 않고, 생존을 추구하되 인간성을 잃지 않는 것. 이것이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균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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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문혁 교수의 이야기 민사소송법 호문혁 교수의 이야기
호문혁 지음 / 베네딕션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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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 로마법 시대부터 내려온 이 원칙은 냉정하게 들린다. 하지만 더 냉정한 현실은 권리가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이다. 호문혁 교수의 <이야기 민사소송법>은 우리시대의 민사소송법에 대해 친근하게 다가온다. 법을 알아야 권리를 지킬 수 있고, 소송이 무엇인지 알아야 비로소 법이 제공하는 보호막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 사례와 함께 설명해 준다.


민사법과 민사소송법은 수레의 양쪽 바퀴라는 비유가 이 책의 존재 이유를 명확히 보여준다. 권리를 안다는 것과 그 권리를 실제로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계약서를 쓸 줄 알아도 막상 분쟁이 생겼을 때 법원 문턱 앞에서 주저하는 사람들, 소장을 받고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는 사람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추상적인 법 이론이 아니라, 실제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안내다. 저자는 이 어려운 과제를 '이야기'라는 오래된 방식으로 풀어낸다. 법학교육에서 스토리텔링은 흔히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조문과 판례, 학설의 정확한 이해가 우선이고, 이야기는 기껏해야 흥미를 돋우는 양념 정도로 취급된다. 하지만 호문혁 교수는 이 통념을 뒤집는다. 이춘풍과 김선달이라는 익숙한 인물들이 겪는 구체적 사건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소송요건이 무엇인지, 왜 관할법원이 중요한지, 입증책임이 어떻게 분배되는지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교육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다. 법을 누구의 것으로 만들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과 맞닿아 있다. 법률가들만의 전문 언어로 쓰인 교과서는 결국 법을 그들만의 영역으로 만든다. 하지만 법은 본질적으로 시민의 것이어야 한다. 특히 민사소송법은 개인의 권리를 실현하는 가장 직접적인 도구다. 이 도구를 다루는 방법을 시민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 사회에서 법치가 제대로 작동한다. 33개 이야기로 구성된 이 책의 체계는 실제 소송의 흐름을 그대로 따른다. 침해된 권리를 인식하는 순간부터 소장 작성, 답변서 제출, 증거 준비, 변론, 판결, 그리고 강제집행에 이르기까지. 독자는 마치 실제 소송 당사자가 된 것처럼 각 단계를 경험한다. 소송요건을 갖추지 못해 각하되는 상황, 증명이 어려워 입증책임 분배가 문제되는 경우, 판결에 불복하여 상소하는 과정까지, 이론이 아닌 경험으로 이해하게 된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책이 법학 전공자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 장마다 시민과 저자의 대화로 시작하는 구성, 용어와 핵심 개념을 정리한 박스, 복잡한 절차를 시각화한 도표들은 모두 비전공자를 배려한 장치다. 실제 소장과 답변서 예시까지 포함한 것은 더 나아가 독자가 필요할 때 직접 활용할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다. 이것은 법학 교재가 아니라 시민을 위한 실용서에 가깝다. 민사소송법이 어렵다고 알려진 이유는 내용이 복잡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과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계약 위반, 손해배상, 소유권 분쟁 등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그것이 법적 분쟁으로 비화했을 때 우리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뿐이다. 이 책은 그 막막함을 덜어준다. 법원이 멀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사람들에게, 소송이라는 절차가 사실은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과정임을 보여준다.


'이야기 민사법'과 '이야기 민사소송법'으로 완성된 '권리보호의 기초'라는 수레는 이제 시민 누구나 탈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물론 복잡한 사건에서는 여전히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자신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시민의 위치는 달라진다. 무지한 상태로 전문가에게 의존하는 것과, 기본을 이해한 상태로 협력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결국 책이 하려는 일은 법의 민주화다. 법을 법률가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시민 모두가 접근할 수 있는 공공재로 만드는 작업이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첫 문장처럼, 법을 아는 것은 지식 습득만이 아니라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앎이 진정으로 힘이 되려면, 그것은 이해 가능한 언어로, 접근 가능한 방식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호문혁 교수의 이 책은 바로 그 일을 해낸다. 법의 문턱을 낮추되 법의 본질은 지키면서 법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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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탈 회복력의 기술 - 자기 의심을 끊고 원하는 삶을 밀어붙이는 힘
데이먼 자하리아데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서울문화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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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머릿속에 끊임없이 말을 거는 존재를 품고 산다. 그것은 때로 격려자이기도 하지만, 더 자주 가혹한 비평가로 나타난다. 데이먼 자하리아데스는 이 내면의 비판자에게 '샘'이라는 구체적인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추상적이고 막연했던 자기비판의 메커니즘을 눈앞에 드러낸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곧 인식의 시작이며, 인식은 변화의 첫걸음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하며 살아간다. 새로운 시도 앞에서 주저하고, 실패의 가능성에 압도되며, 타인의 시선에 과도하게 민감해진다. 이러한 현상의 배후에는 내면화된 비판의 목소리가 자리한다. 저자가 지적하듯, 이 목소리는 단순히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사고방식 전체를 왜곡하고, 감정을 교란하며, 결국 행동의 마비로 이어진다. 흥미로운 점은 이 내면의 비판자가 교묘하게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개 정당한 우려나 합리적 판단의 형태로 위장되어 나타난다. "너는 아직 준비가 안 됐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실패하면 어쩌지" 같은 말들은 표면적으로는 신중함을 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장의 기회를 박탈하는 족쇄가 된다. 이러한 생각들이 반복되면서 배경 잡음처럼 일상화되고, 결국 우리는 그것이 진실인 양 받아들이게 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존재다. 우리는 타인의 인정과 소속감을 갈망하며,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욕구다. 문제는 내면의 비판자가 바로 이 지점을 공략한다는 데 있다.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을 때, 그 목소리는 "네가 그걸 해낼 수 있을까?", "실패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창피당하는 건 아닐까?" 하고 속삭인다. 이러한 두려움은 행동을 가로막는 강력한 억제제가 된다. 사람들은 실제로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 봐 시도 자체를 포기한다. 저자는 이것이 단순한 소심함이나 게으름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비판자가 우리의 정당한 욕구를 왜곡하여 만들어낸 함정임을 분명히 한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 욕구가 행동의 동력이 아닌 마비의 원인이 될 때다.

자기 의심은 내면 비판자가 가장 선호하는 도구다. 그것은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비난보다 훨씬 교묘하게 작동한다. 의심은 레이더 아래에서 움직이며, 우리가 인식하기도 전에 자신감의 토대를 서서히 침식시킨다. "내가 정말 이걸 아는 게 맞나?", "내 판단이 틀린 건 아닐까?", "다른 사람이라면 더 잘했을 텐데" 같은 생각들이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점점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이는 특히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치명적이다. 모든 선택이 거대한 도박처럼 느껴지고, 작은 결정조차 엄청난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 된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결정을 회피하거나 과도하게 미루게 되며, 이는 다시 자기 불신을 강화하는 악순환을 만든다.


부정적인 자기 대화의 가장 위험한 측면은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정상적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던 자기비판이, 반복되면서 일상의 일부가 된다. 냉소와 조롱, 비난이 제2의 천성처럼 자리 잡으면, 우리는 더 이상 그것에 의문을 품지 않게 된다. 오히려 그것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고 착각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정상화 과정은 변화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면 해결할 수도 없다. 자기비판이 자신의 일부라고 여기게 되면, 그것 없는 삶을 상상하기조차 힘들어진다. 저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각성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익숙하다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니며, 오래되었다고 해서 바꿀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변화의 첫 단계는 인식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성찰 일기는 기록을 넘어선 강력한 도구다. 자기비판적인 생각들을 글로 옮기는 순간, 그것들은 머릿속의 추상적인 소음에서 구체적이고 검토 가능한 대상으로 전환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내면 비판자의 패턴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상황에서 그 목소리가 강해지는지,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공격하는지, 그리고 그 주장들이 얼마나 과장되고 왜곡되어 있는지 명확히 보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곧 거리두기를 가능하게 한다. "나는 무능하다"라는 생각과 "지금 내 머릿속에서 내가 무능하다는 생각이 들고 있다"는 인식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절대적 진실처럼 느껴지지만, 후자는 관찰 가능하고 평가 가능한 정신 현상이 된다. 이 차이가 변화의 문을 연다.


저자가 궁극적으로 제시하는 비전은 단순히 부정적 생각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으며, 실패와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면서도 계속 전진하는 삶이다.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도 충분히 적응할 수 있다는 믿음, 완벽하지 않아도 가치 있다는 인식, 타인의 평가보다 자신의 진정성을 우선하는 용기가 그 중심에 있다. 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변화가 아니다. 저자도 인정하듯, 평생의 주의와 실천이 필요한 여정이다. 하지만 그 보상은 엄청나다. 자기비판의 족쇄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 두려움 없이 도전하고, 실패를 통해 배우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


책은 추상적인 개념 설명을 넘어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제시한다. 5단계 훈련 과정과 각 장마다 제공되는 실천 과제들은 독자가 수동적 소비자가 아닌 능동적 변화의 주체가 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는 단순히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다. 결국 내면의 비판자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의 일부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우리 삶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둘 필요는 없다. 자하리아데스가 제시하는 길은 그 목소리를 인식하고, 그것의 권위에 도전하며, 결국 그것을 길들이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두려움이 아닌 가능성에 기반한 삶, 비판이 아닌 연민으로 자신을 대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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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만들기 - 성형외과의의 탄생
린지 피츠해리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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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대규모 기계화 전쟁이 벌어진 시기였다. 기관총, 화염방사기, 독가스, 폭탄 파편 등 새로운 살상 무기들은 이전 전쟁에서는 볼 수 없었던 참혹한 부상을 초래했다. 특히 참호전의 특성상 머리를 내밀어야 하는 병사들은 얼굴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약 28만 명의 병사들이 안면 부상을 당했고,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육체적인 것을 넘어섰다. 당시 사회는 얼굴에 상처를 입은 병사들을 영웅이 아닌 괴물처럼 취급했다. 다리를 잃은 병사는 동정과 존경을 받았지만, 얼굴이 일그러진 병사는 혐오와 거부의 대상이 되었다.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황급히 집안으로 들어갔고, 약혼녀들은 파혼을 통보했다. 프랑스에서는 '부서진 얼굴들', 독일에서는 '뒤틀린 얼굴' 또는 '얼굴 없는 사람들'이라 불렸으며, 영국에서는 '가장 외로운 토미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낯선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뉴질랜드 출신의 영국 외과의사 해럴드 길리스가 등장했다. 1915년 프랑스 전선에 파견된 32세의 그는 처참한 안면 부상자들을 처음 마주했을 때 충격을 받았다. 턱뼈가 사라지고, 코가 날아가고, 혀가 찢어지고, 안구가 탈출한 병사들. 전차나 항공기 화재로 얼굴 전체가 녹아내린 이들. 기존의 의학 지식으로는 도저히 치료할 수 없는 환자들이었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참고할 교과서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구순구개열 교정이나 귓불 수술 같은 초보적인 성형술은 전쟁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이처럼 광범위한 안면 재건은 전례가 없었다. 치료의 과학은 파괴의 과학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길리스는 문자 그대로 백지상태에서 시작해야 했다. 그는 먼저 프랑스와 벨기에 전선에서 치과의사들이 턱과 코가 손실된 병사들을 돌보는 모습을 관찰했다. 거기서 영감을 얻은 그는 안면 재건만을 전담하는 전문 센터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처음에는 올더샷의 케임브리지 군병원에 병동 하나를 배정받았고, 1917년에는 시드컵의 조지아풍 저택과 주변 목조 건물들로 이루어진 퀸스 병원을 개원하게 되었다.

길리스의 천재성은 단순히 외과 기술에만 있지 않았다. 그는 외과의사, 치과의사, 마취과의사, 간호사, 화가, 조각가, 사진작가로 구성된 다학제 팀을 최초로 구성했다. 이는 현대 의료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협진 시스템의 선구적 모델이었다. 치과의사들의 역할은 특히 중요했다. 항생제가 없던 시대였기에 입 내부에서 금속판으로 뼈를 고정할 수 없었다. 대신 얼굴 외부에서 틀과 핀으로 턱을 고정하면서, 외과의사가 다른 부위를 치료할 수 있도록 했다. 환자가 음식을 먹고 말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재건 수술 성공의 핵심이었다. 화가와 조각가들도 필수 인력이었다. 그들은 수술 전후의 모습을 세밀하게 기록했고, 수술이 불가능한 환자들에게는 전쟁 전 사진을 참고해 정교한 금속 마스크를 제작했다. 이러한 시각적 기록은 다른 의사들이 복잡한 재건 수술을 배우고 재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예술과 의학의 협력은 성형외과의 독특한 특징이 되었다.


길리스는 각 수술 전에 사무실에 틀어박혀 담배를 피워대며 계획을 강박적으로 검토했다. 참고할 선례가 없었기에 모든 것을 직접 고안해야 했다. 그는 종종 봉투 뒷면에 아이디어를 스케치한 후, 수십 차례에 걸친 수술을 진행했다. 그의 가장 혁신적인 기법은 '피부판(skin flap)' 기술이었다. 가슴이나 다른 부위에서 피부를 떼어내되, 한쪽 끝은 붙여둔 채로 혈액 공급을 유지하면서 얼굴 쪽으로 회전시켰다. 획기적인 순간은 이 연결 부위를 관(튜브) 모양으로 만들었을 때였다. '경관(pedicle)' 기법이라 불린 이 방법은 감염 위험을 크게 낮췄다. 어떤 환자는 코를 재건하기 위해 40차례의 수술을 받았다. 어떤 이에게는 가슴에 얼굴 전체를 그려놓고 통째로 이식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실패도 많았다. 재건된 코는 점막이 없어 수축되었고, 이식된 피부는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하지만 길리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간호사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얼굴의 절반이 완전히 날아가고 피부가 갈기갈기 찢긴" 병사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방법을 시도했다.


퀸스 병원은 치료 시설만이 아니었다. 길리스는 환자들의 정신 건강이 육체 회복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병원에서는 체육대회를 열고 연극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환자들이 지역 거리를 산책하도록 권장했고, 파란색으로 칠한 벤치를 곳곳에 배치해 행인들에게 미리 경고했다. 처음에는 병동에 거울을 금지했다. 새로 온 환자들이 자신의 모습을 보고 충격받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환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걱정 마세요. 우리가 작업을 마치면 당신도 우리 대부분만큼 괜찮은 얼굴을 갖게 될 겁니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환자들은 고통스러운 실험적 수술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한 야전병원 외과의사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그 환자가 정상적인 얼굴로 돌아가기 위해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감수하리라는 것을 안다." 길리스도 재건 수술이 시작되면 환자들의 사기가 올라가는 것을 목격했다. 많은 이들이 새로 자란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다듬는 모습이 그 증거였다.


전쟁이 끝난 후 길리스는 개인 병원을 열어 계속 선구적인 수술을 시행했다. 1949년에는 최초의 여성에서 남성으로의 성전환 수술을 집도하기도 했다. 그의 사촌 아치볼드 맥인도가 2차 세계대전에서 화상을 입은 조종사들을 치료한 '기니피그 클럽'으로 더 유명해졌지만, 현대 성형외과를 실질적으로 창시한 사람은 길리스였다. 그는 코 성형술 같은 기존 기법을 개선했을 뿐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기술들을 상상하고 검증하고 표준화했다. 기능뿐 아니라 미학까지 고려하는 신세대 성형외과의사들을 배출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보여준 연민과 인간애였다. 그는 단순히 얼굴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시 세상을 마주할 용기를 갖도록 도왔다. 전쟁의 참혹함은 의학의 혁명을 낳았다. 수십만 명의 병사들이 겪은 고통과, 한 외과의사의 불굴의 노력이 만나 탄생한 것이 바로 현대 성형외과였다. 길리스의 이야기는 인간이 서로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을 할 수 있는지, 동시에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해낼 수 있는지를 모두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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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온회복력 - 아파서 시작한 일, 몸을 살리는 회복의 비밀
박희연 지음 / 바이북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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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몸이 차갑다는 것은 우리 감각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는 증거이고, 견딜 만하다고 여기며 외면해온 신호들이 쌓인 결과다. 우리는 추위를 느끼면서도 '원래 손발이 찬 편'이라고 말하고, 잠들지 못하면서도 '요즘 바빠서'라고 둘러댄다. 하지만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차가움은 그 자체로 하나의 언어다. 저자가 발견한 진실은 복잡한 의학 이론이 아니었다. 체온이 생명이라는, 지극히 근본적인 원리였다. 몸이 차가워지면 면역은 무너지고, 순환은 막히며, 통증과 불면이 찾아온다. 그 악순환의 출발점에서 그는 따뜻함이라는 해법을 찾았다. 겉만 덥히는 것이 아니라, 몸의 중심까지 온기가 스며들게 하는 것. 하루 20분의 찜질이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발견은, 거창한 치료법보다 훨씬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 책을 읽으며 떠올린 건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내 몸을 '참는 대상'으로만 여겨왔는가 하는 반성이었다. 피곤해도 커피로 버티고, 잠이 부족해도 일정을 우선하고, 손발이 차가워도 '체질'이라 치부했다. 회복을 미루는 것이 곧 삶을 미루는 일임을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수면은 쉬는 시간만의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몸이 스스로를 복구하고, 면역세포가 깨어나며, 하루를 정리하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하지만 현대인의 삶에서 잠은 늘 뒤로 밀린다. 해야 할 일이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으며, 밤은 유일하게 나만의 시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작가는 불면의 고통 속에서 잠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 얼마나 긴지, 수면이 부족할 때 통증이 얼마나 증폭되는지를 온몸으로 겪었다. 그리고 몸을 따뜻하게 하고 자연의 리듬에 맞춰 살기 시작하면서, 깊은 잠을 되찾았다. 같은 시간에 눕고 일어나는 습관, 잠들기 전 몸을 이완시키는 루틴, 전자기기와의 거리 두기 같은 실천은 새롭지 않지만, 체온 관리와 결합되면서 현실적인 힘을 얻는다. 나 역시 매일 밤 잠들기 어려운 사람이다. 침대에 누워서도 머릿속은 여전히 할 일 목록을 정리하고, 내일을 걱정한다. 충분히 잔 것 같지 않은 상태로 아침을 맞는 일이 반복되면서도, 그저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은 잠을 지키는 일이 나를 지키는 일임을 상기시킨다. 회복은 잠 속에서 일어나고, 내일의 에너지는 오늘 밤의 온기에서 비롯된다.

몸이 굳으면 마음도 굳는다. 순환이 막히면 염증이 쌓이고, 통증은 일상을 잠식한다. 작가가 제시하는 순환과 스트레칭의 원리는 복잡하지 않다. 몸을 따뜻하게 데우고, 굳은 곳을 풀어주며, 막힌 곳을 흐르게 하는 것. 케겔운동, 림프 마사지, 두피 마사지, 족욕 같은 방법들은 '운동'이라는 부담 대신 '돌봄'이라는 언어로 다가온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부위별 찜질에 대한 설명이다. 배를 따뜻하게 하면 소화뿐 아니라 면역력까지 살아나고, 눈과 귀를 데우면 긴장이 풀리며, 발을 따뜻하게 하면 전신의 순환이 개선된다. 이는 몸이 분리된 부분들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시스템임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한 곳을 돌보는 것이 전체를 돌보는 일이 된다. 나는 그동안 몸의 신호를 무시하는 데 익숙했다. 어깨가 뻐근해도 그냥 참았고, 허리가 아파도 일단 끝내고 보자는 식이었다. 하지만 참는 것이 강한 것이 아니라, 돌보는 것이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임을 이제야 이해하게 된다. 아침과 밤, 일과 중간에 나를 잠시 살피는 행위 자체가 회복이다.

책은 마음의 태도도 다룬다. 두 마리 늑대 이야기, 불안과 분노, 감사와 평안 중 어느 쪽에 먹이를 줄 것인가,는 회복이 몸만의 문제가 아님을 일깨운다. 체온을 높이는 일은 곧 삶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고, 매 순간 감사와 희망을 선택하는 태도가 결국 몸을 살린다. 작가가 '들꽃잠'이라는 이름에 담은 의미도 마찬가지다. 들꽃은 화려하지 않지만 강인하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의 향기를 내뿜는다. 척박한 땅에서도 묵묵히 피어나는 들꽃처럼, 우리도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회복할 수 있다. 거창한 변화가 아니라, 오늘 조금 더 따뜻하게 나를 대하는 선택부터 시작한다.

저자는 기적을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오늘 당장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따뜻함을 건넨다. 몸을 데우고, 잠을 지키고, 순환을 돕고, 굳은 몸을 풀어주는 일. 그 반복 속에서 몸은 스스로 할 일을 시작한다. 나에게 이 책은 '건강해져야지'라는 거창한 다짐보다, '이제는 나를 좀 덜 혹사시키며 살고 싶다'는 작은 마음을 남겼다. 불면과 피로, 손발의 차가움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일상을 갉아먹는 불편함을 그냥 참고 살아온 사람이라면, 이 책은 꽤 다정하게 다가올 것이다. 회복은 대단한 결심이 아니라, 작은 태도에서 시작된다. 당장 무엇을 바꾸라고 몰아붙이지 않으면서도, 조용히 묻는다. 당신은 오늘, 당신의 몸을 어떻게 대하고 있나요?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잠시 멈춰 선다. 그리고 오늘 밤만큼은, 조금 더 따뜻하게 나를 대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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