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경기도민 - 계란 흰자처럼 서울을 둘러싼 1400만의 기쁨과 슬픔
이준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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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 어디서 볼까?" 하고 물으면 약속 장소는 대개 서울로 정해진다. 김포, 안산, 용인에 사는 세 친구가 만나는 곳이 사당인 것은 그곳이 모두에게 가장 공평해 보이기 때문이다. 정작 안산과 용인은 같은 노선으로 이어져 있는데도 서로를 향해 가지 않는다. 가끔 있는 모임쯤이야 서울에서 해도 그만이라고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사소한 습관 속에는 경기도에 사는 삶의 구조가 들어 있다. 그 구조는 교통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수도권 교통망은 경기도 사람을 서울로 빠르게 옮기도록 짜여 있다. GTX가 개통되면 역과 역 사이의 시간은 줄어든다. 하지만 그 대가로 마을버스 배차가 절반으로 줄어든 동네가 있다. 고양시 대장동에서는 학생과 노인이 유일한 발을 잃었다. 철도가 가리키는 방향은 서울이고, 이웃 도시로 가는 길은 점점 가늘어진다. 나는 이것이 '장소'의 접근성은 높이면서 '사람'의 접근성은 놓치는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대곡역에서 서울역까지 17분이 줄어드는 동안, 누군가는 동네 버스를 25분 더 기다리게 되었다. 그래서 경기도에서는 "차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상식처럼 통한다. 흥미로운 점은 경기도민이 차를 사는 이유가 서울 출근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서울로 가는 대중교통은 오히려 잘 되어 있다. 문제는 5킬로미터 떨어진 마트에 가는 일이다. 차로 19분이면 갈 거리를 버스로는 47분이 걸리고, 걷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배차 간격은 30분이 넘기 일쑤고, 그나마 정류장에 서 있는 나를 지나쳐 가는 버스도 있다. 그 버스를 모는 기사들이 하루 열대여섯 시간을 운전하며 쉴 틈 없이 일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화를 내기도 어려워진다. 나를 두고 떠나는 버스의 뒤에는 사람이 부족한 노동 현장이 있다. 이동이 어려운 사람은 운전할 수 없게 되는 날 삶의 반경이 좁아지는 노인과 청소년들이다. 이동권이 곧 삶의 조건이라면, 자가용 구입을 사실상 강요하는 구조를 개인의 선택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은 경기도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서울에서 밀려난 사람, 서울에 가지 못한 사람, 언젠가는 서울로 돌아가야 할 사람. 우리 사회는 경기도민을 그렇게 상상한다. '상급지'와 '하급지'라는 말이 공문서에까지 등장하는 나라에서 동네를 사랑한다는 말은 현실을 모르는 자기 위안처럼 들리기 쉽다. 그러나 용인 시민의 상당수가 앞으로도 그곳에서 살고 싶다고 답하고, 적지 않은 사람이 그 도시를 고향처럼 느낀다. 사람들은 넓은 집, 정돈된 도시, 가까운 공원 같은 이유로 자기 동네를 좋아한다. 소속감과 애착은 정주를 결정하는 진짜 변수다. 집이 자산으로만 평가되는 세상에서 이 감정은 비합리적인 것으로 취급받지만, 사람은 경제적 동물이기 전에 어딘가에 뿌리내리고 사는 존재다. 경기도의 문제는 서울에 가깝지 않다는 데 있지 않다. 이 지역이 하나의 얼굴로 소비된다는 데 있다. 경기도에는 서울로 출근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고, 아파트 바깥에 사는 사람도, 도시 중심에서 먼 곳에 사는 사람도, 접경지에서 규제와 공포를 안고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정책과 담론은 이들의 다양한 요구 대신 "서울까지 몇 분"이라는 단일한 기준으로 도시의 가치를 매긴다. 문화 시설도 마찬가지다. 경기도민이 문화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예산과 프로그램이 부족해서 서울로 간다. 서울 밖에는 서울만큼의 갈망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야말로 편견이다. 그렇다고 해법이 '경기도가 노른자가 되는 것'일 수는 없다. 서울을 닮은 더 비싼 아파트, 더 빠른 철도, 더 큰 산업단지를 쌓아 올리면 또 다른 주변이 생긴다. 반도체 클러스터가 다른 지역의 전기와 물에 기대고, 개발 앞에서 자연이 '미개발지'로 불리는 한 위계의 사슬은 이어진다. 중심이 어디냐는 질문만으로는 이 구조를 벗어날 수 없다. 나는 경기도에서의 삶을 생각하며, 중심을 옮기는 일보다 중심이라는 개념 자체를 되묻는 일이 먼저라고 느낀다. 버스 한 대, 동네 도서관 하나, 작은 미술관의 전시 한 편이 누구의 삶을 지탱하는지 살피는 일이 그 출발일 것이다. 이동은 선택이 아니라 권리이고, 사는 곳은 서열이 아니라 삶의 터전이다. 이번 주말에도 친구들과 사당에서 만나겠지만, 언젠가는 우리 동네에서 "여기서 보자"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말이 자연스러워지는 날이 오면, 경기도는 서울의 주변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으로 불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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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과 무릎들 - 성기게 엉기는 남해살이 이야기
김소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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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 속 저자는 남해에 와서 낫을 들고 풀을 베다가 "성기지만 엉기게"라는 말에 감동했다고 했다. 책을 읽으며 한참 멈춰 있었다. 사람이 사는 일도 흙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숨은 쉬되 쓸려가지 않는 것. 거리는 두되 이어져 있는 것. 남해라는 낯선 땅에서 사는 일은 아마 그 어려운 균형을 몸으로 배우는 일일 것이다. 남해살이는 낭만이 아니라 노동에서 시작한다. 글쓴이는 도시를 떠나온 지 얼마 안 되어 빈집 한 채 구하지 못해 보름 동안 헤매고, 월세가 귀해 개와 함께 5평 방에 머문다. 도어록 없는 문, 눅눅한 벽, 겨울이면 삭풍을 견디게 하는 전기장판. 시골의 평화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이상하게도 춥지가 않다. 집을 구하려고 인맥을 총동원해 반바지 아저씨를 몰아붙이던 신발달인, 냄비를 들고 간 사람에게 된장찌개를 가득 담아주던 식당 아주머니, 다 열어두고 사는 문들이 있어서다. 집은 벽과 지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기척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이 이야기는 보여준다. 도시에서의 내 집을 생각했다. 현관문에 도어록이 있고, 베란다 샷시가 있고, 이웃의 얼굴은 모르는 집. 안전하지만 아무도 부르지 않는 집. 우리는 그것을 '내 공간'이라 부르며 안심했지만, 그 안심은 사실 서로를 재는 눈금 위에서 얻은 것이기도 했다. 책 속의 화자도 말한다. 주소와 직업과 학력을 넣으면 삶의 등수가 나오는 모눈종이가 있었다고. 남해에서는 그 눈금이 흐려진다. 누구네 집이 더 비싼지 포털에 나오지 않고, 사람들은 N잡러로 각자의 방식대로 산다. 눈금이 사라진 자리에 비로소 사람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몽덕이와 아이들이다. 리드줄을 서로 잡겠다고 협상하는 아이들, 정작 줄을 쥐어봤자 이끄는 쪽은 개라는 사실. 해변 웅덩이에서 이유도 없이 새우를 옮기며 몰입하는 아이들 곁에서 어른은 그저 그 순간에 같이 있는다. 화자가 책방에서 얻은 깨달음도 비슷하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임을 증명하려고 발을 동동 구르던 사람이, 개의 배를 채우고 곰팡이를 닦는 일 같은 작은 사랑으로 자기 자리를 확인한다. 사랑받기 위해 애쓰는 대신 사랑하는 쪽에 서 보는 것. 그 자리에서 비로소 숨이 쉬어진다는 이야기가 조용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물론 남해가 이상향은 아니다. 아이가 열이 끓던 밤, 응급실을 찾아 순천까지 달려야 했던 엄마의 이야기는 시골의 불편이 어디까지 내려가는지 보여준다. 출생신고서가 어디 있는지 몰라 서랍을 뒤지던 면사무소, 입학생이 없어 합쳐지는 학교들. 이곳의 느슨함은 때로 결핍과 한 몸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이 남해를 예찬하지 않아서 좋았다. 화자는 투덜대고, 지치고, 매출에 따라 인성이 달라지는 자신을 웃으며 고백한다. 그 솔직함이 있기에 마지막 장면의 놀이가 더 따뜻하게 읽힌다. 나이 쉰이 넘은 어른들이 "몽덕이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주문에 맞춰 네발로 기고, 한쪽 다리를 드는 장면 말이다. 의미는 알 수 없어도, 서로의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따라 하는 것. 그것이 이해를 대신하는 사랑이라고 글은 말한다. 우리는 서로를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한 채로도 손을 맞잡고 원을 그리며 돌 수는 있다. 남해살이가 내게 가르쳐준 것이 있다면, 관계는 빈틈없이 채우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드나들 만큼의 틈을 두고 엮는 일이라는 것이다. 흙 속 미생물이 알아서 균형을 맞추듯, 사람 사이에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서로를 받치는 힘이 있다. 상추가 당귀에 기대어 자라듯, 우리도 누군가에게 기대어 자란다. 도시로 돌아가든 이곳에 남든, 나는 책을 덮으며 작은 다짐을 한다. 문을 조금 열어두기로. 낯선 이웃에게 먼저 인사하기로. 그리고 누군가 내미는 손에 어정쩡하더라도 내 손을 얹어보기로. 성기게, 그러나 엉기게. 그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아, 내가 사는 어느 곳에서든 작은 두둑 하나를 일구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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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처방합니다 - 삶을 다시 일으키는 미적 경험 너머의 힘
데이지 팬코트 지음, 조현욱 옮김 / 디플롯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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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예술이 사람을 살린다는 말은 익숙하다. 그림을 그리며 마음이 가라앉았다는 경험, 음악이 힘든 시기를 버티게 해 주었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봤을 것이다. 그래서 <예술을 처방합니다>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반가움 보다 경계심이 먼저 들었다. 제목만 보면 예술을 만능 치료제로 그리는 또 하나의 낙관적인 책일 것 같다는 걱정이 컸기 때문이다.

책은 내 우려를 비껴갔다. 저자 Daisy Fancourt는 책 곳곳에서 예술이 만병통치약(panacea)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는 예술이 오히려 더 큰 해를 끼친 사례를 직접 제시하고, 예술 치료와 관련해 떠도는 여러 신화를 하나씩 바로잡는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가 과장과 선정성을 드러내는 것이 이 분야를 오히려 강하게 만든다고 본다는 점이다. 과장된 주장을 걸러 내야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구분할 수 있고, 그래야 균형 잡힌 논의가 가능하 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과장된 약속은 결국 실망을 낳고, 실망은 분야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예술의 건강 효과에 대한 엄밀한 과학적 증거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먼저 과장과 신화를 걷어 내는 일이 필요하다.


저자는 신경과학, 역학, 심리학, 면역학, 행동과학 등 여러 분야의 연구를 바탕으로 예술 참여가 가져오는 측정 가능한 건강상의 이점을 설명한다. 그가 300편이 넘는 과학 논문을 발표한 연구자이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과학 자 중 한 명이라는 사실도 신뢰를 더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인정한다는 점이다. 책의 참고문헌이 상징적이다. 주장의 출처를 숨기지 않고 독자가 직접 확인할 수 있게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예술은 좋다'는 믿음을 '예술은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좋은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놓는다고 생각한다. 반면 내가 그동안 읽은 많은 책은 연구 결과 중 듣기 좋은 부분만 골라 쓰거나, 개인의 일화에만 기대는 경우가 많았다. 이 책은 그런 방식과 명확히 거리를 둔다.


책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느낀 부분은 예술이 도움이 되지 않을 때"를 다룬 대목이다. 저자는 예술 활동이 건강을 해칠 수 있는 여러 상황을 짚는다. 예술가들이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창작을 통해 살아남았지만 그 과정에 서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 창작 활동을 멈춘 뒤에야 자신이 누구인지 묻게 된 사람들이었다. 저자가 이런 이야기를 정면으로 다룬다는 사실은 이 책이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특히 저자가 지적하는 문제점이 오래 남았다. 창작 경력이 정신 건강을 해졌거나, 질병으로 더 이상 창작을 할 수 없게 된 사람에게 "예술이 치유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용한 수준을 넘어 잔인한 일이다. 치유라는 단어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쓰여야 하는지를 이야기 한다.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고통을 부정당하는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Art Cure>는 예술이 사람을 살린다는 낙관적인 믿음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믿음에 과학적 근거와 현실적 한계를 함께 붙여 준다. 책이 예술 치료에 관한 논의에서 그늘과 뉘앙스를 함께 다루는 기준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본다. 예술이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술이 누군가를 아프게 할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인정할 때에야 우리는 예술가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돌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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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의 기술 - 새로운 것은 이미 우리 눈앞에 있다
타나카 타츠야 지음, 김윤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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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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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 연필 한 자루를 보면서 생각해 본다. 무엇으로 볼 수 있을까? 누군가는 막대기라고 답하고, 누군가는 로켓이나 나무 한 그루를 떠올릴 것이다. 같은 연필이라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일본의 미 니어처 사진가 타나카 타츠야는 책에서 이 사실을 미타테라는 개념으로 풀어낸다. 책을 읽으며 관점이란 타고난 감각이 아니라 익힐 수 있는 기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미타테는 두 가지 뜻을 가진다. 첫째는 대상을 다른 것에 빗대어 보는 것이고, 둘째는 여러 가능성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 정하는 것이다. 즉 미타테에는 '재해석'과 '선택'이라는 두 과정이 함께 들어 있다. 저자는 이 개념을 '나만의 감각' 에 맡기지 않고 논리적으로 따라갈 수 있는 방법으로 정리한다. 막연한 영감이 아니라, 관점을 바꾸는 절차를 익히면 누구나 새로운 아이디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타테를 의식하면 일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고, 지금 있는 것들을 조합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며, 타인이 공감하는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책은 미타테의 발상을 일곱 가지 관점으로 나누어 제시한다. 형태(사물을 단순한 도형으로 줄인다), 색(떠오르는 대표 색으로 환원한다), 생활(익숙한 일상의 장면에서 출발한다), 스케일(크기의 관계를 바꾼다), 움직임(운동 방식을 단 순화한다), 의인화(사물을 사람처럼 본다), 세계 공통 사건(보편적 경험에서 출발한다) 이 목록에서 공통으로 보이는 원리는 단순화다. 형태든 색이든 움직임이든, 복잡한 세계를 몇 개의 핵심 요소로 줄이면 그것이 다른 사물과 연결될 수 있다. 저자가 말하듯 아이들이 그리는 그림처럼, 세상을 단순한 도형으로 옮겨 놓으면 아이디어가 훨씬 쉽게 떠오른다. 또 하나 눈여겨볼 점은 공감의 조건이다. 저자는 미타테의 재미가 모두가 아는 원본(JT 5)에서 나온다고 설명 한다. 유명인의 성대모사가 통하는 것은 청중이 원래 인물을 알기 때문이다.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를 흉내 내도 외국인에게는 전달되지 않는 것과 같다. 따라서 좋은 미타테는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을, 누구나 아는 다른 무언가로 바꿀 때 완성된다.

흥미로운 점은 미타테를 눈에 보이는 사물에만 적용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제시한 '형태'나 '색'의 발상은 주로 사진과 미니어처를 위한 것이지만, 미타테의 진짜 힘은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할 때 드러난다. 물리학의 사고실험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된다. 실험실에서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을 익숙한 장면에 빗대어 상상함으로써 우리는 이론을 전개한다. 원자 구조를 태양계에 비유한 초기 원자 모형은 그 대표적인 예다. 물리적으로도, 논리적으 로도, 감각적으로도 쉽게 붙잡히지 않는 개념을 무언가에 견주고 조립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미타테의 확장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즉 미타테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상을 그리는 도구가 된다. 익숙한 것을 빌려 와 낯선 것을 설명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이해가 탄생하는 것이다.


책은 무엇을 보느냐 "보다 " 어떻게 보느냐 "가 창의성을 결정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형태를 줄이고, 색을 떠올리고, 크기를 바꾸고, 움직임을 읽고, 사물을 사람처럼 상상하고, 보편적 경험에서 출발하는 것. 이 일곱 가지 방법은 모두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는 훈련이다. 연필 한 자루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 그 질문에 답하는 방식이 곧 그 사람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관점의 기술이란 결국 세상을 다르게 보는 능력을 기르는 일이며, 그 능력은 연습을 통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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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늦기 전에 인생의 효율 - 나의 시간과 멘탈을 되찾는 법
아놀드 베넷 지음, 충희 엮음 / 여린풀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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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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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서는 해마다 쏟아지고, 대부분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쓰라"고 말한다. 그런데 하루가 24시간이라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같다. 그렇다면 차이는 시간의 양이 아니라 그것을 쓰는 방식에서 생긴다. 아놀드 베넷(Arnold Bennett) 의 책은 오래전에 출간되었지만, 이 질문에 대해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지금도 유효한 답을 준다.

베넷이 가장 날카롭게 짚은 것은 무심코 흘려보내는 시간이다. 그는 특히 출퇴근 시간을 주목했다. 매일 반복되는 이동 시간은 따로 떼어 놓고 보면 짧지만, 쌓이면 일주일에 몇 시간, 일 년이면 수십 시간이 된다. 신문에 대해서도 그는 읽 는 행위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자극적이고 일시적인 매체가 우리의 주의를 빼앗는 방식을 경계했다. 1910년의 출퇴근 시간은 기차와 전차 안에서의 신문 읽기였지만, 지금은 스마트폰 화면을 스크롤하는 시간이다. 도구는 바뀌었 어도 본질은 같다. 나는 하루를 돌아보면서 "시간이 없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의식하지 못한 채 사용된 시간이 훨씬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효율의 첫걸음은 더 빨리 달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어디로 새는지 알아차리는 것이다.

많은 현대의 생산성 서적이 생산성 그 자체를 최고의 가치로 전제하는 반면, 베넷은 시간을 자신의 가치에 맞게 쓰는 것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베넷은 문학이나 음악을 권하지만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의 관심은 교양인이 되는 데 있지 않고, 시간을 지혜롭게 쓰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 지혜란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시간을 배분하는 능력이다. 이 점이 내게 와닿은 이유는, 효율을 추구하다 보면 쉽게 수단이 목적이 되기 때문이다. 할 일 목록을 빨리 지우는 것이 목표가 되면, 정작 그 일이 나에게 무슨 의미인지는 잊게 된다.

베넷이 제시한 방법은 특별하지 않다. 하루에 약 90분 정도를 공부나 탐구에 쓰고, 출근 길에는 전날 배운 것을 떠올리며 정리하고, 퇴근 길에는 하루를 돌아보며 잘된 점과 고칠 점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 대 신 반복과 점진성이 핵심이다. 그가 경계한 것도 흥미롭다. 지나치게 엄격한 일정은 오히려 해롭다고 그는 말한다. 일정에 노예처럼 매이면 사회적 책임과 관계, 기회를 놓치게 된다. 또 처음부터 과도하게 열정을 쏟으면 금방 지쳐 포기 하게 된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나는 새해 계획을 세울 때 모든 것을 한꺼번에 바꾸려 했고, 며칠 뒤 무너지면 "역시 나는 안 된다"고 자책했다. 베넷의 조언은 그 반대다. 조금씩 나아가는 것이 결국 더 멀리 간다. 효율은 완벽한 계획이 아 니라 지속 가능한 리듬에서 나온다. 책은 백 년이 넘은 책이지만, 베넷이 말한 문제의식은 여전히 우리의 문제다. 시간은 이동 중에 새고, 주의는 자극적인 것에 빼앗긴다. 해결책도 여전히 같다. 자신의 가치를 분명히 하고, 그 가치를 향해 작고 꾸준하게 나아가는 것이다.


인생의 효율이란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일을 해내는 것이 아니라, 같은 시간을 더 나답게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빠르게 많이 해내는 사람보다, 자신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고 그에 맞게 시간을 쓰는 사람이 결국 더 충만한 하루 를 산다. 24시간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그중 무엇을 나의 것으로 만들지는 나의 선택이다. 오늘 밤, 나는 하루를 돌아보며 오늘의 시간은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에 쓰였는가?"를 물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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