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면 잘 살 줄 알았지
김빛나 지음 / 모티브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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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린 시절, 서른 살은 완성된 어른의 나이였다. 모든 것이 정돈되어 있고, 방향이 명확하며, 스스로를 설명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그런 나이. 하지만 막상 그 나이에 이르러보니, 서른은 완성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의 지점이었다. 여전히 흔들리고, 여전히 불안하며, 여전히 '이게 맞나' 싶은 질문을 반복하는 나이였다. 이번에 읽은 김빛나 작가의 <서른이면 잘 살 줄 알았지>는 겉으로는 안정적인 회사,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조건들을 갖췄지만, 정작 그 안에서 자신이 점점 흐릿해지는 걸 느끼는 순간. 그 흐릿함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한 한 사람의 기록이다.

작가는 학창 시절부터 남들이 정해놓은 코스를 따라 달려왔다. 우열반에 들어가야 뭔가 이긴 것 같았고, SKY 대학에 가지 못한 것이 자격지심으로 남았으며, 그래서라도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을 목표로 스펙을 쌓았다. 그렇게 얻은 직장이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남의 일'을 왜 이렇게 열심히 해야 하는지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세 대 대부분이 그랬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곧 성공이라고 배웠고, 남보다 앞서는 것이 곧 행복으로 이어질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렇게 쌓아 올린 성과 위에 서 보니, 정작 나 자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명함 속 직함은 화려해졌지만, 그게 정말 ' 나'를 설명하는 언어인지는 의문이었다. 작가는 몇 백 대 일의 경쟁을 뚫고 청년 주택에 당첨되었지만, 그마저도 허무했다고 고백한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작 마음은 텅 비어 있었다. 결국 우울증 진단을 받고 나서야, 오랫동안 망설이던 퇴사를 결심한다. 월급 없이 살아야 한다는 두려움을 이겨내는 데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다는 그 고백이, 얼마나 진솔하게 다가오는지를.

책이 다른 자기계발서와 다른 지점이다. 퇴사 이후의 삶을 멋지게 포장하지 않는다는 것. 호주로 떠나고, 디지털 노마드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지만, 그 과정은 화려한 성공담이 아니었다. 여전히 불안했고, 여전히 두려웠으며, 여전히 '이게 맞나' 싶은 순간들이 반복되었다. "잘 사는 법보다 나를 잃지 않는 쪽을 선택하고 싶었다." 이 주제는 책 전체를 관통한다. 작가는 더 이상 남들에게 설명 가능한 삶을 살기 위해 애쓰지 않기로 했다.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이 관심 있는 것,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을 하나씩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비록 작고 사소해 보일지라도, 그것이 진짜 자신을 살아 있게 하는 방법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디지털 노마드는 단순히 장소를 옮겨 다니며 일하는 사람이 아 니라, 삶을 설계하는 방식을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이라는 작가의 정의가 인상적이다. 어디에서 일하느냐보다, 어떻게 살 고 싶으냐를 먼저 묻는 삶. 그것이 바로 작가가 선택한 방향이었다.

책을 읽으며 위로가 되었던 부분은, 작가가 자신의 불완전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서른이 되어도 여전히 배우고 있고, 여전히 실수하며, 여전히 흔들린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늦게 배웠다고 해서 덜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돌아온 길이라고 해서 헛된 것도 아니었다. 나 역시 조금 숨을 쉴 수 있었다. 서른을 지나고,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도 여전히 서툴다. 여전히 나다운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여전히 남들과 비교하며 흔들린다. 하지만 그것이 부족함의 증거가 아니라,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는 것. 그 시선이 참 따 뜻했다. 작가는 'No worries'라는 말에서 위안을 받았다고 한다. 걱정하지 말라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그 한마디가, 때로는 긴 설명보다 더 큰 힘이 된다. 미리 걱정하지 말고, 순간 순간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책을 덮으며, 나는 내 서른을 돌아보았다. 인정받고 싶어서, 칭찬받고 싶어서, 잘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 애썼던 그 시절. 마음이 병들 때까지 놓지 못했던 것들. 그리고 지금, 그때보다 조금은 나아졌을까 하는 질문이다. 서른이 힘든 이유는 아직 덜 자라서가 아니라, 이미 충분히 어른이 되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책임은 늘었고, 비교는 더 치열해졌으며, 선택은 더 무거워졌는데, 마음은 여전히 흔들리니까. 하지만 이 책은 그 흔들림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오히려 그것이 우리가 살 아 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마흔이 되어도, 오십이 되어도, 우리는 계속 묻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 나답게 살고 있는가. 내 가슴이 뛰는 방향으로 걷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이 끝나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책은 서른을 앞두고 있는 사람에게는 예고편처럼, 서른을 지나고 있는 사람에게는 동행처럼, 그리고 이미 훌쩍 지난 사람에게는 작은 점검표처럼 읽힐 것이다. 남들 속도에 맞추느라 숨이 찼던 사람이라면, 한 번쯤 펼쳐봐도 좋겠다. 작가는 우리 사회가 끊임없이 비교를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우리가 자주 작아진다고 말한다. 조용히, 깊게 무너진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아픈 시간을 견디고 이겨냈을까. "퇴사하겠습니다"라는 한 문장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고민했을까. 하지만 그 한마디는 인생을 포기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말이었다. 성공과 행복의 기준은 무엇일까. 정답은 정말 존재하는 걸까. 남들이 말하는 정답에만 의존해 살아왔다면, 어쩌면 우리는 중요한 것을 잃은 채 껍데기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타인보다 자신의 목소리를 먼저 들어야 할 때인 것 같다. 작고 사소해 보여도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관심 있는 것, 나를 기쁘게 하는 것. 매일 한 가지씩 나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을 발견 하고, 알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나다운 삶을 향한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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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을 위한 최소한의 철학 수업 - 흔들리는 인생 앞에서 다시 읽는 위대한 문장들
최영원 지음 / 이든서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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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떤 책들은 읽히고, 어떤 책들은 멈춰 선다. <서른을 위한 최소한의 철학 수업>은 후자에 속한다. 페이지를 넘기다가 문득 시선이 허공에 멈추고, 책을 덮었다가 다시 펼치게 되는 순간들이 반복된다. 그것은 이 책이 지식을 전달하기보다 질문을 촉발하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달리고 있는가"라는 물음 앞에서, 우리는 답을 찾기보다 먼저 질문의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서른이라는 시간은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역할이 구체화되고, 자기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되묻게 되는 실존적 지점이다. 겉으로는 어른처럼 보이지만 내면에서는 여전히 불확실성이 맴돈다. 열심히 살고 있는데 왜 불안한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모호한 상태. 이 이중성이야말로 서른 전후를 살아가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감각일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 긴장 지점을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그곳에 철학이라는 도구를 건넨다. 저자는 철학을 학문적 권위로 포장하지 않는다. 그는 30대 청년으로서 자신이 겪은 불안과 방황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고전을 통 해 그 감정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전환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은 교과서 같은 무게감이 아니라, 같은 시간을 살아 가는 동년배가 건네는 대화처럼 느껴진다. 소크라테스, 니체, 칸트, 장자라는 이름들이 낯설게 들릴 수 있지만, 저자는 그 들의 사유를 지금 여기의 언어로 번역한다. 철학은 그렇게 삶의 문제를 푸는 실용적 사유로 변환된다.

책은 정체성에 관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제는 조언이라기 보다는, 삶을 검토하는 태도 자체를 요청하는 철학적 명령이다. 우리는 종종 자신을 안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타인의 기대, 사회적 기준, SNS 속 이미지들에 자신을 맞추며 살아간다. 라캉의 욕망 이론이 지적하듯, 우리의 욕망은 대부분 타자의 욕망을 모방한 것이 다. 내가 원한다고 생각한 것이 실은 누군가의 기준을 내면화한 결과일 수 있다는 사실은 불편하지만, 그래서 더 중요하다. 카프카의 변신은 이 문제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주인공 그레고르는 가족을 부양하는 성실한 직장인이었지만, 어느 날 벌레로 변한다. 그가 벌레가 되었을 때 비로소 드러난 것은, 그가 가족에게 사랑받았던 것이 아니라 기능적으로 필요했을 뿐이라는 잔인한 진실이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외면한 채 타인의 기대를 충족하는 도구로 살았고, 그 삶은 결국 붕괴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누구의 기대 속에서 살고 있는가? 그 기대는 당신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 는가?" 파스칼은 "인간의 모든 불행은 고요히 방 안에 머물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자신과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외부 자극을 찾아 떠돈다. SNS를 스크롤하고, 일정을 빼곡히 채우고,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증명하려 한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는 그런 바쁨 속에서 오지 않는다. 고독 속에서 자신을 직면할 때, 비로 소 자기 인식의 가능성이 열린다. 이 책은 고독을 회피의 대상이 아니라 성장의 자원으로 전환하는 법을 제안한다.

노동에 관한 장은 책의 핵심 중 하나다. 현대 사회에서 일은 생계 수단을 넘어, 자아의 가치를 증명하는 기준으로 작동한다. 우리는 직함으로, 연봉으로, 성과로 자신을 설명한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지적한 소외 개념은 노동이 어떻게 개 인을 체계 속의 부품으로 환원시키는지를 보여준다. 베버는 이를 '철의 감옥'이라 표현했다. 우리는 성과 중심의 구조 속에 서 끊임없이 비교당하고, 경쟁하며, 결국 탈진한다. 니체는 번아웃의 본질이 피로가 아니라 의미 상실에 있다고 보았다. “왜 살아가는가를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는 그의 말은, 일의 의미를 스스로 정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일깨운다.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 그 일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은 반복이 되고, 삶은 공허해진다. 스토아 철학은 통제할 수 없는 것과 통제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하라고 조언한다. 승진, 인정, 외부 평가는 우리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나 일을 대하는 태도,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 자신의 반응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이 구분은 단순해 보이지만, 실천하기 는 어렵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일 속에서 자기 주체성을 회복하는 첫걸음이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자신을 규정한다. 플라톤은 사랑을 결핍의 충족이 아니라 더 나은 자아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한 우정을 덕을 기반으로 한 관계로 정의했다. 헤겔은 인정의 과정을 통해 자아가 성립한다고 보았다. 이들의 사유는 관계를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자아 형성의 필수 조건으로 이해하게 한다. 그러나 관계는 필연적으로 갈등을 동반한다. 사랑이 끝나고, 친구와 멀어지고, 가족과 오해가 쌓인다. 이때 우리는 상처를 실패로 받아들이기 쉽다. 하지만 헤겔의 변증법적 시각에서 보면, 갈등은 성장을 위한 필연적 과정이다. 대립과 충돌을 거쳐야만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관계 속에서 겪는 상처는 우리를 더 성숙한 사람으로 만드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관계를 어떻게 해석하고 실천하는가이다. 타인에게 끊임없이 맞추며 자신을 잃는 것도, 타인을 도구로만 여기는 것도 건강한 관계가 아니다. 진정한 관계는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도 타인을 존중하는 균형 속에서 형성된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반복적인 성찰과 실천을 통해 가능해진다.

책은 답을 주는 책이 아니다. 질문을 제대로 하게 만드는 책이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 행복은 무엇인가", 미래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이 질문들은 바쁘다는 이유로 미뤄왔던 것들이다. 그러나 미룬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무겁게 돌아온다. 책은 고전을 현재적 맥락에서 재해석 하고, 삶의 구조를 다시 배열하고 있다. 철학은 여기서 추상이 아니라 태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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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얼굴이 아니라 마음을 고치는 의사입니다
이상욱 지음 / 모티브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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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장을 넘기기 전, 나는 오늘도 욕실 거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눈가에 새로 생긴 잔주름을 손가락으로 펴보고, 어제 보다 더 깊어진 것 같은 팔자주름을 확인하며, 작아진 눈매를 한탄했다. SNS에서 본 또래 연예인의 매끈한 얼굴과 나를 비교하며 한숨을 쉬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거울이 나를 위로하는 공간이 아니라 심판하는 법정이 된 것이다.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스스로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법정에서 사용되는 잣대는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그러나 너무나 확고하게 우리 안에 자리 잡은 '보편적 미의 기준'이라는 이름의 환상이었다. 저자는 말한다. 황금비율도, 이상적인 얼굴형도 사실은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라고. 우리는 그 합의에 동의한 적도 없으면서, 그것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해왔다. 그 깨달음은 작은 해방감을 안겨주었다. 내가 부족한 게 아니라, 기준 자체가 허상이었다는 것이다.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저자 자신의 고백이었다. 생사를 다투는 내과 레지던트에서 피부과 전문의로 방향을 튼 그의 결정. 그것은 진로 변경이 아니라 정체성의 위기였다. "진짜 의사"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 세상이 "레이저나 쏘는 사람"으로 보는 일을 선택했을 때의 자괴감. 그 솔직한 고백 앞에서 나는 숙연해졌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선택 한 길 앞에서 비슷한 회의감을 느끼고 있을까. 예술을 하고 싶었지만 취업을 선택한 사람, 이상을 품었지만 현실과 타협한 사람들.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인간 이상욱'과 '의사 이상욱' 사이의 간극을 경험하며 산다. 중요한 것은 그 간극을 어 떻게 메우느냐였다. 저자는 그 답을 환자들에게서 찾았다. 겉모습의 흉터가 내면의 상처와 연결되어 있다는 발견. 그것은 임상적 관찰이 아니라,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고통에 진정으로 공명했을 때만 가능한 통찰이었다. 십시일반 모은 200만 원으로 주름 시술을 받으러 온 50대 어머니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울컥했다. 저자가 그분의 주름을 '인고의 시 간'으로 읽어낸 그 순간, 의료 행위는 기술을 넘어 인간에 대한 경외로 승화되었다. 레이저를 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을 읽고 존중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의사가 하는 일이 아닐까.

책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부모님 얼굴을 떠올렸다. 특히 어머니의 손등에 새겨진 검버섯들. 어릴 적 그 손은 세상에서 가 장 부드럽고 따뜻했는데, 언제부터인가 거칠어지고 주름투성이가 되었다. 어머니는 그 손을 부끄러워하셨다. 나와 외출할 때면 핸드크림을 여러 번 바르시고, 손톱에 매니큐어라도 바를까 망설이시다가 이내 포기하셨다. "나이 들면 다 이렇게 되 는 거야. 뭘 해도 소용없어." 그 체념 섞인 말 뒤에 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에게 투자할 시간도 돈도 없이, 오직 가족 을 위해 살아온 여자의 자기 포기. 스스로를 돌보는 것이 사치라고 여기며 살아온 한국의 수많은 어머니들. 저자가 말한 “자신을 꽃처럼 가꾸던 시절을 잊어버린 엄마"가 바로 우리 어머니였다. 아버지의 피부병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건축 현장에서 뙤약볕 아래 일하며 생긴 피부 손상. 병원을 가도 크게 나아지지 않는 그 흔적들을 볼 때마다 느꼈던 속상함. 그 런데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증거"였다. 왜 우리는 부 모님의 주름과 흉터를 그렇게 읽어내지 못했을까. 왜 그것을 노화와 손상으로만 보고, 헌신과 희생의 기록으로는 보지 못 했을까.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지만 차마 직시하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주름 하나하나가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너무 무겁게 느껴져서.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꼽으라면 단연 이것이다. 상처 없는 매끈한 삶보다, 찢어지고 다시 붙은 흉터투성이의 삶이 더 강한 인장력을 가집니다." 인장력. 끌어당기는 힘에 견디는 강도. 물리학 용어를 삶에 적용한 이 표현이 얼마나 정확한 지. 넘어져 까진 무릎이 새살이 돋으면서 오히려 더 단단해지듯, 우리의 삶도 그렇다. 실패와 좌절, 상실과 배신. 그 모든 것이 우리를 찢었지만, 동시에 우리를 더 견고하게 만들었다. 말기 암 환자가 죽음을 앞두고 피부과를 찾은 이야기는 이 책의 백미다. 그분이 원한 것은 치료가 아니라 존엄이었다. 가족의 기억 속에 '여자'로서, '엄마'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인 간으로서 아름답게 남고 싶다는 소망. 그 절절함 앞에서 미용의학이 가진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외모를 가꾸는 것은 허영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존엄을 지키려는 몸부림이고, 세상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며, 내일도 살아갈 이유를 스스 로에게 부여하는 행위다. 문제는 그 행위가 자기 긍정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혐오에서 시작된 변화는 결코 충 분함에 도달하지 못한다. 필러를 맞아도, 보톡스를 맞아도, 성형수술을 해도, 근본적인 자기 부정이 해소되지 않는 한 우 리는 영원히 거울 앞에서 유죄 판결을 받을 것이다.

외모에 대한 집착의 근원은 결국 인정받고 싶은 욕구다. 사랑받고 싶은 갈망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갈망을 잘못된 방식으 로 해소하려 한다. 타인이 만든 기준에 나를 맞추면 사랑받을 수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조건부가 아니 다. 이상적인 얼굴형을 가졌을 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저자가 환자들에게 건네는 진짜 처방전은 시술이 아니라 이 깨달음이다. 당신은 이미 충분하다는 것. 더 나아질 필요도, 더 바뀔 필요도 없다는 것.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상처받은 치유자다. 완벽하게 나은 사람은 없다. 다만 자신의 상처를 어떻게 대하느냐가 다를 뿐이다. 그것을 숨기고 부끄러워할 것인가, 아니면 인정하고 금빛으로 채울 것인가. 그 선택이 우리 삶의 질을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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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지 않을 용기 -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연습
천하이센 지음, 박영란 옮김 / 더페이지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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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흔히 “꿈을 가져라", "목표를 향해 달려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하지만 정작 그 꿈이 누구의 것인지 묻는 사람은 드물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남들이 박수 쳐줄 만한 것을 원하는 건지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영화 <소울>의 주인공 조는 평생 재즈 피아니스트의 꿈을 좇았다. 그에게 중학교 음악 교사로서의 일상은 무의미했고, 가족이나 다른 관계는 부차적이었다. 오직 무대 위에 서는 그 순간만이 진짜 인생의 시작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토록 기다리던 기회 를 잡은 바로 그날, 그는 맨홀에 빠져 죽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 직전까지 그는 "이제야 진짜 삶이 시작된다"고 믿었다. 그의 인생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시간은 준비 과정일 뿐이었고, 진짜 삶은 항상 미래 어딘가에 있었다. 이것이 바로 꿈의 잔인함이다.

꿈은 우리에게 방향을 주지만, 동시에 현재를 무가치하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꿈을 이루면 행복해질 거야"라고 생각하며 지금의 불행을 참아낸다. 승진하면, 결혼하면, 집을 사면, 아이가 대학에 가면... 끝없이 행복을 유예한다. 하지만 경마장의 말처럼 눈가리개를 쓴 채 앞만 보고 달리다 보면, 길가에 핀 꽃도, 옆에서 함께 뛰는 사람도, 지금 이 순간의 햇살도 보지 못한다. 영화 속 이발사는 어린 시절 수의사를 꿈꿨지만 경제적 이유로 이발사가 됐다. 누군가 그를 동정하려 하자 그는 말한다. "난 지금도 좋아요." 그는 자신의 기술에 자부심을 느끼고, 손님들과의 대화를 즐기며, 매일 누군가를 더 나 은 모습으로 만들어주는 일에서 의미를 찾았다. 거창한 꿈은 없었지만, 그의 삶은 충만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떠오른다. 꿈을 이루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실패한 인생을 산 것일까? 아니다. 그들은 단지 다른 곳에서 의미를 발견했을 뿐이다. 일상의 작은 성취, 관계 속의 따뜻함, 기술의 숙련됨,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순간. 이런 것들이 삶을 지탱하는 진짜 기둥이다. 꿈은 필요하다. 하지만 꿈이 삶보다 커져서는 안된다. 꿈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풍요롭 게 만들기 위한 도구로 꿈을 활용해야 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친구와 웃고, 음악을 듣고, 바람을 느끼는 이 순간들이 모여 삶이 된다. 꿈은 그 삶을 조금 더 선명하게 만드는 향신료 같은 것이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를 요구한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라", 성장하라", "발전하라". 변화하지 않는 사람은 뒤처지는 사람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질문은 "무엇을 변화시킬 것인가"보다 "무엇을 변화시키지 않을 것인가"일지 모른다. 변화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한다. 끝, 중립지대, 새로운 시작. 대부분의 사람들은 '끝'을 제대로 경험하지 않고 바로 '새로운 시작'으로 뛰어들려 한다. 하지만 끝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진짜 시작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를 꿈꾼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사직서를 낸 다음 날부터 바로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그 전에 필요한 것은 애도의 시간이다. 그 직장에서 보낸 시간, 형성했던 관계, 익숙했던 루틴, 그 모든 것과 작별하는 시간. 이 과정 없이는 새로운 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때로는 변화하지 않을 용기도 필요하다. 모두가 이직을 꿈꿀 때 같은 자리를 지키는 것, 유행을 좇지 않고 자신의 속도로 가는 것, 남들이 뭐라 해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는 것. 이것도 용기다. 중요한 것은 변화의 유무가 아니라, 그 선택이 진정으로 내 것인가 하는 점이다. 남들이 기대 해서가 아니라, 두려움 때문도 아니라, 정말로 내가 원해서 선택한 것인가.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를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다.

책에서 저자는 많은 이야기를 통해 나에게 조언을 해준다. 결국 저자의 이야기들은 하나로 수렴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꿈을 이루지 못해도, 부모와 완벽한 관계가 아니어도, 계속 변화하지 못해도, 우리는 충분하다. 행복은 어딘가 먼 곳에 있지 않다. 꿈을 이룬 후에 시작되는 것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숨 쉬고, 느끼고, 생각하고, 관계 맺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 성장이 자기 부정에서 출발해서는 안된다. "지금의 나는 부족 해. 더 나아져야 해"가 아니라, "지금의 나도 괜찮아. 그리고 더 나아질 수도 있어"여야 한다.

한 어머니가 떠나는 아들에게 했던 말을 기억해 본다. "네가 떠나면 외롭겠지만, 내 외로움을 네가 떠나지 못할 이유로 삼지 않겠다." 이것을 나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 나는 완벽하지 않아. 하지만 내 불완전함을 내가 행복하지 못할 이유로 삼지 않겠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 가지 용기다.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용기, 그리고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 지 않을 용기. 그 둘을 구분하는 지혜.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존재하는 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자비다. 나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동시에, 내 안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이 두 진실은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완성한다. 지금을 받아들일 때 진짜 변화가 시작되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을 때 지금을 온전히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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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역, 괴테의 문장들 - 200년이 지나도 심장을 뛰게 하는
민유하 지음 / 리프레시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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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름 없이, 그러나 쉼 없이 가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적용해야 한다." 그 말은 200년을 건너와, 지금 이 순간 나의 심장을 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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