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 심서 - 21세기 시선으로 읽는 동양고전
박찬근 지음 / 청년정신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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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장을 덮으며 문득 생각했다. 2천년 전 난세를 살았던 한 전략가의 통찰이 왜 지금도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가. 인공지능이 일상을 바꾸고, 조직의 형태가 급변하며,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이 시대에, 삼국시대 촉한의 승상이 남긴 글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리더가 맞닥뜨리는 본질적 고민인 신뢰를 어떻게 쌓을 것인가, 위기 앞에서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화두다. 제갈량은 이 질문들 앞에서 흔들리지 않았던 사람이었고, 그가 남긴 기록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나침반이 된다.


"제갈량 심서"를 관통하는 첫 번째 화두는 '위엄'이다. 그러나 이 위엄은 권위적 카리스마나 무력적 통제를 의미하지 않는다. 제갈량이 말하는 위엄은 덕에서 비롯된다. 도덕적 품성 없이 세운 권위는 공허하고, 내면의 단단함 없이 휘두르는 권력은 곧 무너진다는 것이다. 현대 조직에서도 이 원리는 그대로 작동한다. 직급과 직책으로만 사람을 움직이려는 리더는 결국 형식적 복종만 얻을 뿐이다. 반면 자신의 원칙을 일관되게 지키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며, 팀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리더는 자연스럽게 존경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덕에서 우러나오는 위엄이다. 흥미로운 점은 제갈량이 강함과 부드러움의 조화를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부드럽기만 하면 조직의 기강이 무너지고, 강하기만 하면 사람의 마음이 떠난다. 이 둘 사이의 줄타기가 리더십의 핵심이다.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태도를 바꾸되, 중심은 잃지 않는 것. 이것이 진정한 힘이다.

리더십을 '그릇'에 비유한 대목은 특히 인상적이다. 소규모 조직을 이끄는 리더에게 필요한 역량과 대규모 조직의 수장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다르다. 문제는 많은 리더들이 자신의 그릇 크기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면 무모한 결정을 내리고, 과소평가하면 기회를 놓친다. 제갈량이 제시한 해법은 철저한 자기 성찰이다.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어디까지 할 수 있으며, 어떤 한계를 가졌는지 정직하게 직시하는 것. 이 자기 인식이 모든 전략의 출발점이다. 현대 경영학에서 말하는 '메타인지'와 정확히 일치하는 개념이다. 자신의 사고 과정을 관찰하고 평가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 있어야 성정도 가능하다. 제갈량은 이미 2천 년 전에 이 원리를 꿰뚫고 있었다.


조직이 무너지는 이유는 대부분 외부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 내부의 부패 때문이다. 파벌 형성, 유언비어 유포, 사적 이익 추구, 아첨과 배신, 이런 해악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직의 뿌리를 갉아먹는다. 제갈량이 제시한 '아홉 가지 해충' 목록을 읽으며 소름이 돋았다. 정보 왜곡, 독단적 행동, 권력 남용, 규율 무시... 이것들은 현대 조직에서도 여전히 가장 큰 문제다. 특히 성과주의와 경쟁 문화가 팽배한 환경에서 이런 병리 현상은 더욱 쉽게 발생한다. 진정한 리더는 외부 경쟁자를 경계하기 전에 내부의 병을 먼저 진단해야 한다. 조직 문화가 건강한지, 신뢰가 살아있는지, 공정한 시스템이 작동하는지 끊임없이 점검해야 한다. 내부가 단단할 때 외부의 어떤 위기도 이겨낼 수 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불진지' 사상이다. 최고의 전략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라는 명제다. 회피나 도피가 아니다. 갈등이 발생하기 전에 예방하고, 충돌이 불가피할 때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해결하며, 궁극적으로는 상대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현대 비즈니스에서도 이 원리는 유효하다. 가격 전쟁으로 출혈 경쟁을 하기보다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하는 것, 소송보다는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 직원을 통제하기보다 자율과 신뢰를 주는 것. 모두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략의 현대적 응용이다. 이를 위해서는 고도의 통찰력이 필요하다. 상황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상대의 심리를 읽으며, 흐름을 미리 예측하는 능력. 표면만 보지 말고 이면을 보라. 현상에 속지 말고 본질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제갈량은 위기 대응 능력에 따라 리더를 세 등급으로 나눈다. 최고의 리더는 위기가 오기 전에 예방하고, 중간 수준의 리더는 위기가 발생했을 때 탁월하게 대처하며, 최하의 리더는 위기 한가운데서 허우적거린다. 이것은 준비의 문제다. 위기는 예고 없이 오지만 대비는 언제든 할 수 있다. 시나리오를 그려보고, 대응 매뉴얼을 만들며, 평소 훈련을 통해 근육을 만들어두는 것. 이것이 진정한 리더의 자세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우리는 이 원리를 절감했다. 같은 위기 앞에서 어떤 조직은 빠르게 적응하고 새로운 기회를 찾았지만, 어떤 조직은 무너졌다. 차이는 평소의 준비와 리더의 결단력에 있었다.

조직의 성패는 결국 사람이 결정한다. 제갈량이 인재 활용에 할애한 분량이 많은 이유다. 그는 사람의 본성을 파악하는 구체적 방법부터 적재적소 배치, 핵심 참모 활용까지 세밀하게 다룬다. 특히 '복심‘개념이 흥미롭다. 리더의 배와 심장처럼 가까이에서 함께 호흡하는 참모. 지혜로운 조언자, 신중한 분석가, 용감한 실행자가 모두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명령만을 따르는 부하가 아니라, 리더의 뜻을 깊이 이해하고 함께 고민하는 동반자라는 점이다. 현대 조직에서는 이것을 '코어 팀' 또는 '싱크 탱크'라고 부른다. 리더 혼자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없다. 다양한 관점과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의 협력이 필요하다. 그들의 조언을 경청하고, 그들의 강점을 최대한 활용하며, 그들과 신뢰를 쌓는 것. 이것이 리더의 핵심 역량이다.


제갈량의 사상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미덕은 원칙과 유연함의 조화다. 그는 일관된 원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상황에 따라 전략을 바꾸는 유연함을 역설한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변증법이다. 중심은 흔들리지 않되, 방법은 유연하게. 목표는 명확하되, 경로는 상황에 맞게. 이것이 진정한 지혜다. 고집과 원칙을 혼동해서도 안 되고, 유연함과 무원칙을 동일시해서도 안 된다. 현대의 애자일 경영이나 적응적 리더십도 같은 맥락이다. 빠르게 변하는 환경에서 경직된 계획을 고집하면 실패한다. 그렇다고 방향 없이 표류해서도 안 된다. 비전은 선명하게 유지하되, 실행 방식은 끊임없이 조정하는 것. 이것이 21세기 리더가 갖춰야 할 자세다.

책을 덮으며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왜 2천 년 전의 글이 지금도 유효한가. 답은 명확하다. 제갈량이 다룬 것은 기술이 아니라 본질이기 때문이다. 도구와 환경은 바뀌어도 사람의 마음을 읽는 법, 신뢰를 쌓는 법, 위기를 헤쳐나가는 법,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법, 이런 본질적 역량은 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복잡해진 세상일수록 더욱 중요해진다. 제갈량 심서는 리더를 위한 매뉴얼이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모든 이에게 유효한 지침서다. 누구나 자기 삶의 리더이기 때문이다. 내면의 흔들림을 다스리고, 중심을 잡으며, 현명하게 판단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신뢰를 쌓는 것, 이것은 직급과 무관하게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역량이다. 제갈량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은 특정한 전략이나 기술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가지되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하고, 자신을 냉정하게 성찰하되 타인에게는 따뜻하며, 원칙을 지키되 고집스럽지 않은 태도다. 이것이 난세를 헤쳐나간 전략가가 우리에게 건네는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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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1-14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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