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과학자 - 우리 곁의 자연을 정확하고 아름답게 기록한 과학의 순간들
이동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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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연필 한 자루, 혹은 펜 한 자루를 들고 자연 앞에 선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화가이기 이전에 과학자였고, 과학자이기 이전에 무언가에 깊이 매료된 인간이었다. 마리아 시빌라메리안, 메리 애닝, 알렉산더 폰 훔볼트, 장 앙리 파브르, 존 제임스 오듀본. 이들의 이름을 나란히 놓고 바라보면, 공통된 하나의 장면이 떠오른다. 살아 움직이는 것을 붙잡으려는 손, 그리 고 그 손이 긋는 선이다. 글을 읽으며 내내 한 가지 질문을 놓지 못했다. 왜 하필 그림이었을까? 문자가 없던 시절, 인간은 동굴 벽에 손을 얹고 윤곽을 그렸다. 사냥한 들소, 뛰어오르는 말, 손바닥의 실루엣. 그것은 보았다는 증거였고, 존재했다는 기록이었다. 그 본능은 수만 년이 지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17세기의 메리안이 누에의 허물을 스케치하고, 19세기의 오듀본이 새를 실물 크기로 화폭에 옮길 때, 그들은 동굴 벽의 인간과 본질적으로 같은 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림은 시대와 언어를 초월한다. 라틴어로 쓰인 논문은 시간이 지나면 번역이 필요하고, 언어가 다르면 오해가 생긴다. 그러나 정확하게 그려진 딱정벌레 한 마리는 300년이 지나도 같은 딱정벌레다. 이것이 과학자들이 그림을 선택한 가장 원초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마리아 시빌라메리안의 이야기에서 나는 가장 먼저 '용기'를 읽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그저 흉내내고 예쁘게 보이도록 하기보다 본인이 보고 경험한 모든 것을 그대로 그림으로 옮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 이것은 혁명적인 태도였다. 당시의 박물화는 대상을 아름답게 구성하는 것, 즉 이상화된 자연을 보여주는 것에 더 가까웠다. 메리안은 달랐다. 알에서 깨어나는 애벌레, 탈피 후 남겨진 허물, 고치를 뚫고 나오는 나방. 그녀의 그림에는 삶의 불완전한 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것은 형태만이 아닌 시간의 기록이었다. 생명이 변해가는 과정, 즉 생태 그 자체를 그림으로 포착한 것이다. 여성이 곤충에 관심을 갖는 것이 "매우 이상하게 보이던" 시대에, 그녀는 수리남까지 건너갔다. 뇌졸중으로 몸이 마비된 후에도 붓을 놓지 않았다. 메리안의 그림 앞에서 나는 묻게 된다. 그녀를 그 자리까지 이끈 것은 예술적 열망이었을까, 아니면 과학적 집념이었을까. 아마도 그 둘은 그녀 안에서 처음부터 하나였을 것이다.

메리 애닝의 이야기는 다른 결의 이야기다. 그녀의 손이 찾아낸 익티오사우루스 두개골은 박물관에 전시되었지만, 그 표본을 발굴한 사람의 이름은 오랫동안 기록되지 않았다. 화석을 해석하고 복원한 공로는 학회에 앉은 남성들에게 돌아갔다. 그녀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엘리자베스 필폿이라는 존재에 주목했다. 메리의 재능을 알아보고 물심양면으로 도운 이 여성이 없었다면, “메리 애닝이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는 말. 이것은 과학의 역사 속에 숨겨진 수 많은 협력과 연대의 이야기를 대변한다. 빛나는 발견의 뒤에는 언제나 기록되지 않은 손들이 있었다. 동시에 이 이야기는 과학에서 기록의 윤리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림을 그리고, 화석을 찾고, 표본을 복원하는 행위. 그것이 누구의 것으로 남느냐는 순전히 권력과 제도의 문제였다. 지식은 발견되는 것이지만, 그 공로는 선택되는 것이었다.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650볼트 전기뱀장어의 전기 충격을 네 시간 동안 직접 받아가며 실험했다. 산소통도 없이 6천 미터 고산을 오르며 자신의 몸 상태를 기록했다. 장 앙리 파브르는 정원 한 켠을 실험실로 삼아 평생을 보냈다. 돈도, 장비도, 학계의 인정도 없이. 관찰이란 결국 헌신의 다른 이름임을 깨닫는다. 훔볼트의 기록이 30권의 책이 되고, 파브르의 관찰이 10권의 <곤충기>가 된 것은 단지 지적 호기심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알아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해 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사명감이었다. 파브르가 "나는 곤충을 연구하며 단 한 번도 돈을 생각한 적이 없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 말의 무게를 느꼈다. 가난 속에서 쓴 그 문장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것은 순수한 열정이 어디까지 인간을 이끌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머릿속에 빠르게 흘러가는 생각을 남기기 위해 필기구는 펜 하나만을 단촐히 사용한다. 유독 오래 마음에 남았다. 화가들 이 완성을 목표로 그림을 그린다면, 현장의 과학자는 사라지기 전에 붙잡는 것을 목표로 선을 긋는다. 근육을 그리고, 골격을 그리고, 동공의 움직임을 포착한다. 전체가 아닌 부분을. 완성이 아닌 순간을. 이 필드 노트의 미학은 불완전함 속에 있다. 미처 그리지 못한 부분을 메모로 채우고, 확인하지 못한 것은 물음표로 남긴다. 그 불완전한 기록들이 쌓여 하나의 과학이 된다. 나는 이 장면에서 과학이 사실 얼마나 인간적인 행위인지를 새삼 느꼈다.

오듀본이 새를 그린 방식은 독특했다. 그는 단순히 새의 외형을 묘사하지 않았다. 날고, 먹고, 싸우고, 쉬는 새의 순간을 포착하려 했다. 그의 그림이 전통적인 야생동물 그림을 초월한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생명을 그림 속에 가두지 않고, 생명이 그림 밖으로 튀어나오게 했다. 이것은 메리안이 변태의 과정을 기록하고, 파브르가 말벌의 외과적 침술 을 묘사한 것과 맥이 닿아 있다. 과학 그림의 목표는 대상의 복사가 아니라 대상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이다. 형태를 그리 는 것이 아니라 삶을 그리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이해는 인간에게 필요하다. 다른 이유는 없다. 우리가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림 그리는 과학자들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남긴 그림들은 인간이 자연 앞에 섰을 때 얼마나.겸손해질 수 있는지, 동시에 얼마나 집요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언이다. 메리안의 누에 허물, 메리 애닝의의티오사우루스 두개 골, 홈볼트의 고산 스케치, 파브르의 말벌 관찰, 오듀본의 살아있는 새들. 이 모든 선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그림 그리는 과학자가 되어야 하는 시대일지도 모른다. 소멸하는 것들 앞에서, 눈을 감지 않을 용기를 가진 채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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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 가장 느린 것들이 가장 오래 빛난다
이유리 지음 / 청림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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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오래도록 속도를 믿었다. 빠르게 배우고, 빠르게 성과를 내고,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곧 잘 사는 것이라고 믿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길 지하철에 몸을 싣고, 빽빽한 일정을 소화하며, 퇴근 후에도 무언가를 더 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하루를 마감했다. 그렇게 달리고 또 달렸는데, 어느 날 문득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니 내가 어디를 향해 달리고 있는 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단순한 번아웃이 아니었다. 내 삶의 좌표 자체가 흔들리는 감각이었다. 식물 이야기를 담은 한 권의 책을 만났다. <식물이 내게 가르쳐 준 것들>. 처음에는 그저 지친 마음을 달래줄 가벼운 읽을거리겠거니 했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면서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묵직한 울림을 얻었다. 식물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오히려 내가 외면해온 수많은 질문들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중앙아메리카 우림에는 1년에 20미터씩 걷는 나무가 있다고 한다.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만큼 느린 움직임이지만, 그 나무는 분명히 걷고 있다. 자신만의 리듬으로, 자신만의 방향으로. 나는 지금 걷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남들의 속도에 떠밀려 흘러가고 있는가 생각해 본다.

현대사회는 끊임없이 우리를 분류한다. 성공과 실패, 주류와 비주류, 이름 있는 것과 이름 없는 것. 그 기준에서 조금이라 도 벗어나면 마치 뽑아버려야 할 잡초처럼 취급받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직장에서의 평가, SNS 속 타인의 화려한 일상, 사회가 제시하는 성공의 척도들.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끊임없이 측정하고 판단한다. 그런데 책은 말한다. "잡초는 아직 이 름 불리지 않은 꽃이다." 버려져야 할 존재가 아니라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능성이라고. 그리고 세상을 지탱하는 것은 화 려한 꽃이 아니라 흙 속 뿌리처럼, 들판의 잡초처럼 눈에 띄지 않는 존재들이라고. 오랫동안 부끄러워했던 나의 평범함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화려하지 않아도 괜찮다. 주목받지 않아도 괜찮다.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가능성으로 흙 속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닐까. 무미건조한 일상을 반복하며 나는 종종 스스로를 잡초 취급 했다. 특별하지 않고, 두드러지지 않고, 누군가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고 느낄 때마다 의기소침해졌다. 그러나 식물의 세계 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연에는 위계가 없다. "자연은 말하지 않는다. 어느 것이 옳은지, 무엇이 정상인지, 그 저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서로의 삶을 이어갈 뿐이다." 그 말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멈춤'은 종종 실패나 게으름으로 읽힌다. 잠시 쉬어가겠다고 말하면 뒤처지는 것 같고, 속도를 늦추면 도태되는 것 같다. 이 도시의 문법은 끊임없는 전진을 요구한다. 그런데 식물은 안다. 언제 피어나야 하는지, 그리고 언제 내려놓아야 하는지를. 가을이 오면 나무는 수백만 장의 잎을 미런 없이 떨군다. 그것은 상실이 아니다. 멈춤은 후퇴가 아니라 다음 계절을 위한 전략이다. 죽은 줄 알았던 나무 밑동치에서 봄이 오면 새 가지가 솟아오르듯, 내려놓음은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기 위한 준비다. 맹그로브를 생각한다. 진흙 속 협기성 환경에서도 뿌리로 숨을 쉬며 살아가는 나무. 누가 봐도 불리한 조건에서, 남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숨구멍을 찾아낸다. 그 모습이 나의 지난 시간과 겹쳐 보였다. 나 역시 지금 내 자리가 답답하고 불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어쩌면 이 자리가, 이 시간이, 뿌리로 숨을 쉬는 나만의 방식을 익히는 계절인지도 모른다.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발아의 순간을 기다리는 씨앗처럼, 삶이란 깨어날 수 있는 가능 성이다. 죽음은 단지 잠시 멈춘 침묵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내게는 단순한 위로를 넘어 하나의 철학으로 다가왔다. 내가 지 금 멈춰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시간도, 언젠가 새순을 틔우기 위한 고요한 기다림일 수 있다.

삶의 의미에 대한 거대한 질문들이 나를 오랫동안 괴롭혀왔다. 잘 살고 있는가. 이 길이 맞는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그 질문들은 답을 주기보다 더 깊은 불안 속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스피노자는 코나투스(Conatus)를 말했다. 모든 생명체에 내재된, 자신을 보존하려는 근원적인 힘. 식물도 그 힘으로 산다. 거대한 의미를 위해서도 아니고, 허무주의에 반항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단순한 진리가 오히려 나를 편안하게 했다. 지금의 벗어남과 망설임, 겉으로 뻗 어낸 뿌리 하나하나가 결국 내 깊이를 만들어온 시간이었음을. 그렇게 생각하니 억울할 것도, 자랑스러울 것도 없었다. 모 는 꽃이 아름다울 필요는 없고, 모든 아름다움이 눈에 띄어야 할 필요도 없다. 나는 나만의 속도로 봄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다.

오늘도 도시는 빠르게 돌아간다. 지하철은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알림은 쉼 없이 울리고, 누군가는 더 높이, 더 빠르게 올 라가고 있다. 그 속에서 나는 오늘 식물 하나를 떠올리기로 했다. 말없이, 그러나 묵묵히 자신의 계절을 살아가는 식물. 나도 그렇게, 오늘 하루에 충실하며, 내 뿌리가 닿는 곳을 믿으며, 그냥 살아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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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썬의 도구들
정국진 지음 / 영진.com(영진닷컴)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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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챗GPT에게 질문을 던지면 코드 한 줄 몰라도 웬만한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를 매일같이 듣는다. 그런 시대에 왜 여전히 파이썬 같은 "구식" 프로그래밍 언어를 처음부터 배우라고 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 책이 취하고 있는 태도, 즉 AI 보조 코딩을 전제로 하되 파이썬 자체를 손에 쥐여주는 방식을 보면서, 나는 생성형 AI의 시대에도 파이썬 같은 기초 도구가 왜 여전히, 어쩌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중요해졌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생성형 AI가 우리에게 준 가장 큰 변화는 '실행'의 문턱을 낮췄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에러 메시지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 검색창에 오류 문구를 붙여넣고 여러 블로그와 스택오버플로우 글을 헤매야 했다. 지금은 챗GPT에게 코드와 에러를 함께 보여주면 몇 초 만에 원인과 해결책을 알려준다. 이 서평에서도 강조하듯, AI를 "코딩 학습 도우미"처럼 활용하는 경험은 분명 학습의 진입장벽을 크게 낮춘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남는다. AI가 답을 잘 준다고 해서, 우리가 무엇을 물어봐야 하는지까지 대신 알려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코드에서 어떤 라이브러리를 써야 이미지 처리를 할 수 있을까?", "REST API로 공공데이터를 받아오려면 어떤 구조로 요청을 보내야 할까?" 같은 질문 자체를 던질 수 있으려면, 최소한의 개념적 지도가 머릿속에 있어야 한다. AI는 훌륭한 내비게이션이지만, 목적지를 입력하지 않으면 아무 데도 데려다주지 않는다. 파이썬 문법과 라이브러리에 대한 기초 지식은 바로 그 목적지를 스스로 설정할 수 있게 해주는 최소한의 지도인 셈이다.

책이 문법 설명이 아니라 22가지 라이브러리와 REST API를 활용한 9개의 완성품 제작을 중심에 둔다는 점이 특히 인상 깊었다. 생성형 AI 시대에는 지식의 총량보다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라는 실행력이 훨씬 더 중요한 경쟁력이 된다. AI에게 코드를 대신 짜달라고 요청할 수는 있어도, 그 코드가 내가 원하는 결과물로 이어지도록 전체 흐름을 설계하고, 각 조각들을 연결하고, 실제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것은 결국 사람의 몫이다. 특히 로그인 GUI, 문서 자동화, 영상 처리, 웹 크롤링, 웹 서버 구축처럼 서로 다른 영역의 프로젝트를 두루 경험하게 하는 구성은, 파이썬이라는 언어 자체보다 "이 문제는 어떤 도구로 풀 수 있는가"를 판단하는 감각을 길러준다. 이런 감각은 챗GPT가 아무리 발전해도 AI가 대신 채워주기 어려운 부분이다. 왜냐하면 그 감각은 결과물을 직접 만들어보고, 실패하고, 다시 고쳐보는 과정에서만 쌓이는 경험적 지식이기 때문이다.

특히 눈에 띄었던 부분은 REST API를 활용해 카카오, Twilio, 서울 열린데이터광장, Gemini 같은 외부 서비스와 연결하는 프로젝트였다. 사실 생성형 AI 자체도 대부분 API라는 형태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챗GPT를 웹 화면이 아니라 나만의 프로그램 안에서 활용하려면, 결국 API 요청을 보내고 응답을 받아 처리하는 방식을 이해해야 한다. 즉 파이썬으로 REST API를 다루는 경험은 옛날식 프로그래밍 훈련이 아니라, 앞으로 AI를 나의 업무나 서비스에 실제로 통합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관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우리가 마주할 자동화는 단일 프로그램이 아니라, 여러 서비스와 여러 AI 모델이 API로 서로 얽혀 돌아가는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 날씨 데이터를 가져와 AI에게 분석을 맡기고, 그 결과를 다시 메신저로 전송하는 식의 파이프라인을 상상해보면, 그 모든 연결의 밑바탕에는 결국 파이썬 같은 언어로 짜인 코드가 있다. AI가 개별 코드 조각을 써줄 수는 있어도, 이 전체 파이프라인을 설계하고 관리하는 사람에게는 각 조각이 어떻게 맞물리는지 이해하는 기초 체력이 필요하다.

생성형 AI가 아무리 강력해져도,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차이는 AI가 발전할수록 더 선명해질 수 있다. AI에게 막연히 "이런 프로그램 만들어줘"라고 요청하는 사람과,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결과물의 구조를 어느 정도 파악한 채로 AI와 대화하며 코드를 완성해가는 사람은 결과물의 질에서부터 큰 차이가 난다. 파이썬 같은 기초 도구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옛날 방식으로 프로그래밍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AI에게 더 정확한 질문을 던지고, AI가 준 답을 검증하고, 여러 AI의 결과물을 하나의 완성된 시스템으로 엮어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일이다. 반복 업무를 줄이고 싶은 직장인이든, 개발자를 꿈꾸는 입문자든, 이 기초 체력이 없다면 AI라는 강력한 도구도 결국 반쪽짜리로만 활용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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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 공화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나와 내 돈, 내 사람을 지키는 최소한의 법률 지식
임호균 지음 / 모티브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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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에게 자주 듣던 말이 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표현이었다. 순하고 착하게 살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였고, 나는 그 말을 일종의 칭찬이자 삶의 목표처럼 여기며 자랐다. 경찰서 문턱을 넘을 일도, 법원에 갈 일도 없이 조용히 사는 것이 가장 평온한 인생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최근 우연히 접한 한 책을 읽으면서, 그 믿음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책은 현직 변호사가 자신이 다룬 수많은 사건들을 바탕으로 쓴 생활 법률서였다. 전세 계약, 지인 간의 금전 거래, 직장에서의 부당한 대우, 연애와 이별 과정에서 벌어지는 갈등까지, 책이 다루는 범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고 일상적이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우리 사회에서 한 해에 접수되는 형사 고소와 고발 건수가 수십만 건에 달한다는 사실이었다. 나와는 무관한 이야기라고 여겼던 법적 분쟁이, 사실은 누구에게나 언제든 닥칠 수 있는 일상의 위험이라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책을 읽으며 크게 와닿았던 것은, 법을 모르는 착한 사람이 가장 먼저 손해를 본다는 지적이었다. 처음에는 다소 냉정하게 느껴지는 말이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우리는 흔히 갈등 상황에서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넘어가거나, 억울해도 참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워왔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오히려 상대방에게 만만하게 보이는 빌미가 되고, 결국 시간이 지나 돌이킬 수 없는 손해로 이어지는 경우를 우리는 뉴스에서 심심치 않게 접한다. 전세 보증금을 떼이고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 임금을 받지 못한 채 퇴사 후에야 뒤늦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특히 나는 전세로 거주하고 있는 세입자이기에, 주거와 관련된 부분을 읽으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요즘 뉴스를 켜면 하루가 멀다 하고 전세 사기 피해 소식이 들려온다. 그동안 나는 계약서를 쓸 때 그저 중개인이 알려주는 대로, 관행이라는 말에 기대어 서명해왔다. 계약서에 어떤 특약을 넣어야 내 보증금을 지킬 수 있는지,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 채 막연한 불안감만 안고 살아온 것이다. 이 책을 통해 계약 단계에서부터 확인해야 할 사항들과, 문제가 발생했을 때 활용할 수 있는 법적 장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막연했던 두려움이 조금은 구체적인 대비책으로 바뀌는 기분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낯설게 느껴졌던 영역들도 있었다. 데이트 폭력이나 스토킹, 동거 관계의 정리와 같은 주제들은 평소 깊이 생각해본 적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이별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사건이 때로는 매우 치열한 법적 다툼으로 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접하면서, 내가 그동안 타인의 갈등을 얼마나 피상적으로만 바라보았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헤어진 이후에도 집요하게 연락을 시도하는 상대, 동의 없이 사적인 기록을 유포하는 상황 등은 더 이상 드라마 속 이야기가 아니라 주변 누군가의 현실일 수 있다.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감정적으로 무너지지 않고 침착하게 증거를 모으고 절차를 밟아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지식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훨씬 덜 무력한 상태로 그 시간을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책이 강조하는 태도 중 가장 마음에 남았던 것은, 감정을 앞세우기보다 철저히 증거를 중심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억울함이나 분노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그 감정 자체는 법적으로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한다. 결국 나를 지켜주는 것은 감정의 크기가 아니라 내가 남긴 기록과 준비해둔 증거라는 사실을 이 책은 여러 사례를 통해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대화를 정리해두고, 중요한 순간을 기록으로 남기고, 문제가 될 만한 상황에서는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 한 걸음 물러나 상황을 객관화하는 습관. 이런 것들이 거창한 법률 지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평소의 태도와 습관에서 비롯된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현대 사회는 점점 더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히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온라인 거래, 프리랜서 계약, 동업, 투자 등 예전에는 흔치 않았던 형태의 경제 활동이 늘어나면서 그만큼 분쟁의 종류와 양상도 다양해졌다. 이런 시대에 법을 안다는 것은 더 이상 특별한 전문 지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기본 소양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선하고 신중하게 살아가려 해도, 나를 둘러싼 관계와 계약, 거래 속에서 예기치 못한 갈등에 휘말릴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런 상황 자체를 완전히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이 닥쳤을 때 당황하지 않고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무기를 갖추는 일일 것이다.


책을 덮으며 든 생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제부터라도 일상에서 남기는 기록의 습관을 조금 더 의식적으로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이었다. 통장 내역 하나, 대화 캡처 하나가 훗날 나를 지켜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다른 하나는, 이 지식을 실제로 써먹을 일이 내 인생에 없기를 바라는 역설적인 소망이었다. 법을 안다는 것은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당한 상황 앞에서 침묵하지 않을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력을 갖추는 일에 가깝다. 그리고 그 방어력은 나 자신뿐 아니라, 언젠가 비슷한 어려움을 겪을지 모를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나눠줄 수 있는 것이기를 바란다. 평범하고 조용한 하루하루가 여전히 가장 큰 축복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이제는 그 평온함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 정도는 갖추고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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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 생각 수업 - 수학자는 어떻게 발견하고 분석하고 활용할까, 개정증보판
이광연 지음 / 향기책방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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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수학은 어렵고 일상에서는 쓸모가 없다.” 학창 시절 나 역시 이런 생각을 품고 살았던 것 같다. 방정식을 풀고 공식을 외우는 일이 대학 입시를 넘어서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라 여겼고, 수학은 그저 시험을 위한 도구로만 존재했다. 그러나 이광연 교수의 <피타고라스 생각 수업>을 접하고 나서, 나는 오랫동안 붙들고 있던 이 편견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하나다. 수학은 공식을 암기하는 학문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 그 자체라는 것. 문제를 발견하고,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창의적으로 상상하며, 기초에서부터 확장해 나가는 사고의 흐름이야말로 수학의 본질이며, 이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통용되는 힘이라는 사실을 책은 여러 이야기를 통해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책이 제시하는 수학적 사고법(문제를 발견하는 생각,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생각, 창의적으로 상상하는 생각, 발명을 이끄는 생각, 기초에서 확장하는 생각, 실생활에 응용하는 생각...)을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이것이 비단 수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외판원 문제를 통해 일상의 효율을 고민하는 방식이나, 병뚜껑의 각도에서 기하학적 원리를 발견해내는 상상력은 사실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문제 해결의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특히 ‘문제를 발견하는 생각’이라는 것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우리는 흔히 문제가 주어지면 답을 찾는 데만 급급하지만, 정작 어떤 문제가 진짜 풀어야 할 문제인지를 알아채는 능력이야말로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능력이라는 것을 이 책은 일깨워준다. 수학자들이 새로운 정리를 발견해낸 역사는 결국 “무엇을 물을 것인가”를 고민한 역사였다는 사실이, 비단 수학뿐 아니라 내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크고 작은 고민들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단연 인공지능과 수학적 사고를 연결 짓는 대목이었다. 2500여 년 전 피타고라스가 대장간의 소음 속에서 정수비의 조화를 찾아냈던 것처럼, 오늘날의 생성형 인공지능 역시 방대한 언어 데이터 속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확률적 연결을 찾아낸다는 비유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매우 정교한 통찰로 다가왔다. 챗GPT와 같은 인공지능이 다음에 올 단어를 예측하는 원리, 데이터를 벡터와 행렬로 환원하여 처리하는 방식, 유튜브나 넷플릭스의 추천 알고리즘이 우리의 취향을 패턴으로 읽어내는 과정, 이 모든 것이 결국 피타고라스학파가 세상을 수(數)로 이해하려 했던 시도의 현대적 연장선이라는 설명은, 왜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도 수학적 사고를 훈련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말해준다. 특히 마르코프 연쇄를 삶의 태도에 빗댄 대목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다음 상태를 결정짓는 것은 지나온 모든 과거가 아니라 지금 내가 서 있는 현재라는 것. 이 수학적 원리가 “과거의 실수에 발목 잡히지 말고 오늘의 선택에 집중하라”는 삶의 태도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지점에서, 나는 수학이 단지 세상을 설명하는 언어일 뿐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태도까지도 은유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계산은 기계가 대신할 수 있지만, 그 계산이 품고 있는 의미를 해석하고 삶에 적용하는 일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라는 것을 이 책은 거듭 강조한다.

요즈음 인공지능의 부작용이라 할 수 있는 딥페이크로 대표되는 가짜 정보의 시대에 수학이 지닌 또 다른 힘을 생각해 본다. 아무리 정교하게 위조된 정보라 해도 반드시 성립해야 할 논리, 즉 ‘불변량’은 존재하며, 이를 추적해내는 증명의 사고야말로 진실을 지켜내는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데이터의 홍수 속에서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가려내야 하는 우리 시대에, 수학적 사고는 실제로 절실하게 필요한 능력처럼 느껴졌다.

책을 덮으며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는 생각 하나. “막연한 불안을 계산 가능한 희망으로 바꾼다”. 우리는 흔히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막연한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문제를 정확히 정의하고, 그 안의 구조와 규칙을 논리적으로 파악하려는 태도를 가진다면, 막막해 보이던 문제도 하나씩 풀어나갈 수 있는 대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수학적 사고가 우리 삶에 줄 수 있는 가장 실질적인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며 수학을 대하는 태도를 조금 바꾸게 되었다. 더 이상 수학을 “정답이 하나뿐인 딱딱한 학문”으로만 보지 않고, 세상의 복잡함 속에서 질서를 찾아내려는 인간의 오래된 노력이자 태도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특히 인공지능이 계산과 반복 작업을 대신해주는 시대일수록,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더 빠른 계산 능력이 아니라 문제를 발견하고, 그 이면의 구조를 꿰뚫어 보며, 결과를 비판적으로 해석해내는 힘이라는 저자의 메시지에 깊이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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