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을 읽는 시간 - 김수행 교수의 자본주의 강의
김수행 지음, 카를 마르크스 원작, 박도영 정리 / 해냄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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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자본주의는 영원할까. 이 질문이 공허하게 들리던 시절이 있었다. 냉전이 끝나고 소련이 붕괴된 이후, 많은 사람들은 역사가 자본주의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는 그 확신에 균열을 냈다. 거대 투자은행들이 연달아 쓰러지고 수백만 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는 현장에서, 바로 얼마 전까지 "시장은 항상 효율적이다"라고 가르치던 경제학자들이 공적 자금을 투입해 금융기관을 살려야 한다며 목청을 높였다. 이 뻔뻔한 돌변 앞에서 사람들은 다시 마르크스를 꺼내 들었다. <자본론을 읽는 시간>은 그 맥락에서 태어난 책이다. 마르크스의 생애와 방법론, 화폐론, 노동론, 그리고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을 압축하여 독자에게 건네는 이 책은,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싶은 사람 누구에게나 유효한 안내서다.


이 책이 먼저 짚는 것은 주류경제학의 한계다. 주류경제학은 인간을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으로 전제하며, 이들이 자신의 재산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효용과 이윤을 극대화한다고 본다. 이 단순한 가정 위에 정교한 수학적 모델이 쌓인다. 그러나 이 모델은 자본과 노동 사이의 갈등을 처음부터 지워버린다. 갈등이 없으니 착취도 없고, 착취가 없으니 위기의 구조적 원인도 설명할 수 없다. 2008년의 사태가 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마르크스는 이보다 훨씬 앞서 이 문제를 꿰뚫었다. 그는 주류경제학이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그들의 상식을 정교하게 합리화하는 속류 경제학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어떤 이론이 옳은가를 따지지 않고, 그 이론이 자본가에게 이익이 되는가만을 기준으로 삼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이 비판은 150년이 넘은 지금도 날카롭게 살아있다.

마르크스를 읽는 일은 그의 삶을 이해하는 일과 떼어낼 수 없다. 그는 프러시아 왕정으로부터 교수직을 거부당하고,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추방되었으며, 결국 런던으로 망명하여 평생 가난 속에서 살았다.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들은 읽기 민망할 정도로 절박하다. 전당포에 옷을 맡겨두어 외출도 못 하고, 돈이 없어 아픈 가족에게 의사를 부르지 못했으며, 수입의 4분의 1을 전당포 이자로 냈다. 세금 독촉장을 받으며 재산 압류를 걱정하는 처지였다. 그럼에도 그는 대영박물관 도서실에서 아담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를 비롯한 경제학자 199명의 저작을 섭렵하며 연구를 이어갔다. 『자본론』 제1권이 나온 것은 1867년, 그가 이미 49세였을 때다. 제2권과 제3권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엥겔스가 남겨진 원고를 정리하여 출간했다. 이 책이 한 개인의 헌신으로만 완성될 수 없었음을, 그리고 엥겔스라는 평생의 동지 없이는 마르크스도 없었음을 저자는 조용히 상기시킨다. 그의 성격에 관한 묘사도 흥미롭다. 딸들과 함께한 고백 게임에서 마르크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은 "싸우는 것"이고 불행은 "굴복하는 것"이라 답했다. 가장 좋아하는 좌우명은 "모든 것을 의심하라"였다. 이 말들은 그가 단순한 학자가 아니라 세계를 변혁하려 한 혁명가였음을 보여준다.


마르크스의 핵심 기여 중 하나는 자본주의를 인류 역사의 영원한 종착점이 아니라 특수한 하나의 단계로 파악한 것이다. 원시공산 사회, 노예 사회, 봉건 사회를 거쳐 자본주의에 이른 인류는 앞으로도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것이다. 이 관점은 주류경제학이 자본주의를 인간 본성에 가장 적합한 영구불멸의 체제라 보는 것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를 분석하기 위해 마르크스가 만들어낸 개념이 생산양식이다. 생산양식은 경제적 토대와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로 구성된다. 토대는 생산력과 생산관계로 이루어지며, 토대 위에 정치·법률·문화 등 상부구조가 세워진다.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기존의 생산관계와 모순을 일으킬 때 사회혁명이 발생한다는 것이 역사적 유물론의 핵심이다. 헤겔이 절대정신이 역사를 움직인다고 본 것과 달리, 마르크스는 인간의 물질적 생산 조건이 역사를 규정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주연배우는 자본가 계급과 임금노동자 계급이다. 마르크스는 자본가를 "자본이 사람으로 변신한 것"이라 불렀다. 자본가가 박애주의자여서 노동자에게 높은 임금을 준다면 경쟁에서 밀려 문을 닫게 된다. 이 구조 안에서 자본가는 이윤을 추구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 주류경제학이 개인의 본성에서 출발한다면, 마르크스는 개인이 놓인 구조와 관계에서 출발한다.

책은 마르크스의 화폐론도 비교적 상세히 소개한다. 화폐는 처음부터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상품들이 서로의 가치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점차 하나의 상품이 모든 상품의 가치를 대표하는 일반적 등가물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화폐가 탄생했다. 금이 그 역할을 맡은 것은 썩지 않고, 분할할 수 있으며, 운반이 쉬운 특성 덕분이었다. 마르크스는 사람들이 금이 처음부터 모든 상품을 구매할 힘을 가진 것처럼 착각하는 현상을 화폐에 대한 물신숭배라 불렀다. 신하들이 왕이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복종하기 때문에 그가 왕이 되는 것처럼, 금도 화폐로 선택되었기 때문에 그 힘을 갖게 된 것이다. 현재의 불환지폐도 이 연장선에 있다. 오늘날의 지폐는 금과 아무 관련이 없지만 국가가 법화로 지정하고 모든 상거래에서 통용되기 때문에 화폐로 기능한다. 그 가치는 지폐 자체를 생산하는 비용이 아니라, 그 지폐가 실제로 구매하는 상품들의 가치를 반영함으로써 형성된다. 달이 스스로 빛을 내지 않고 태양빛을 반사하듯, 불환지폐는 노동생산물의 가치를 반영한다. 화폐경제가 물물교환경제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판매와 구매가 시간적·공간적으로 분리된다는 것이다. 이 분리 자체가 과잉생산 공황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상품을 팔아 화폐를 손에 쥔 사람이 곧바로 다른 상품을 구매하지 않으면, 누군가의 상품은 팔리지 않은 채 창고에 쌓인다.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조한다"는 세의 법칙은 물물교환 경제에서나 통하는 이야기다.


책에서 가장 설득력 있게 전개되는 부분은 노동과 기계에 관한 논의다. 기계 그 자체는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힘든 일을 대신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가가 이윤을 위해 기계를 도입하면 결과는 정반대가 된다. 노동시간은 오히려 늘어나고, 컨베이어벨트는 더 빠르게 돌며, 기존 노동자들은 해고된다. 기계 자체는 노동자를 해방시킬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자본주의적 이용은 노동자를 더 깊이 속박한다. 단순협업, 매뉴팩처, 기계제 대공업으로 이어지는 생산방식의 발전은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동시에 노동자를 점점 더 자본에 종속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매뉴팩처에서 숙련노동자는 아직 자본가에게 협상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기계가 들어오자 숙련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노동자는 기계의 리듬에 맞추는 부속물로 전락했다. 형식적 종속에서 실질적 종속으로의 전환이다. 이 구조 안에서 노동자가 창조하는 가치는 임금과 잉여가치로 나뉜다. 산업자본가는 이 잉여가치에서 금융자본가에게 이자를, 상업자본가에게 상업이윤을, 지주에게 지대를 지급하고 남는 것을 기업이윤으로 가진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이 기본 구도이지만, 잉여가치를 둘러싼 자본가들 사이의 갈등도 항상 존재한다. 그러나 임금을 낮추고 잉여가치를 늘리는 문제에서는 자본가 계급 전체가 합심하여 노동자 계급과 싸운다.


마르크스가 새로운 사회에 대해 남긴 묘사는 자본론 전체의 0.5퍼센트에 불과하다. 그는 청사진을 그리는 대신 자본주의가 왜 스스로 붕괴할 수밖에 없는지를 분석하는 데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했다. 공황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발전한 생산력을 더 이상 담아내지 못하는 순간에 주기적으로 폭발한다. 새로운 사회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다. 생산수단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각자의 노동력을 사회적 노동력으로 의식적으로 사용한다. 낮은 단계에서는 노동한 만큼 분배하고, 높은 단계에서는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 상품이 사라지면 화폐도 사라진다. 비생산적 노동이 줄어들고 노동생산성이 높아지면서 각 개인의 노동시간은 대폭 단축된다. 과잉생산 공황은 생산의 목적이 자본 증식이 아니라 주민의 필요 충족으로 바뀌는 순간 사라진다. 이 전망이 유토피아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이 소수가 다수를 수탈했던 자본주의의 형성보다 훨씬 쉽다고 보았다. 전자는 소수가 인민대중을 수탈하는 과정이었지만, 후자는 다수인 인민대중이 소수 횡령자를 수탈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책은 방대한 마르크스 경제학을 압축하면서도 핵심을 놓치지 않는다. 읽다 보면 오늘의 현실이 책 속 묘사와 겹쳐 보이는 순간이 여러 번 찾아온다. 비정규직의 확산, 플랫폼 자본주의에서의 노동 착취, 금융 투기의 반복적 붕괴, 양극화의 심화. 마르크스가 분석한 구조는 150년이 지난 지금도 작동 중이다. 물론 이 책이 모든 답을 주지는 않는다. 새로운 사회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오늘의 조건에서 어떤 전략이 가능한가는 여전히 열린 질문이다. 마르크스 자신도 이를 현장에서 씨름하는 사람들이 구체화해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그 씨름을 시작하기 위한 지적 토대를 닦는 일, 그것이 이 책이 독자에게 건네는 초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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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맞춤법 때문에 전화했습니다 - 국립국어원 상담실 연구원의 365일 노동기
이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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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맞춤법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 시대에 살고 있다. 썸을 타던 사람이 "빨리 낳으세요"라고 문자를 보내는 순간 호감이 사라진다는 이야기는 이제 낯설지 않다. 글자가 얼굴을 대신하는 시대, 문장이 곧 그 사람의 첫인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맞춤법을 정말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걸까. 아니, 그 전에 물어야 할 것이 있다. 맞춤법이란 대체 무엇인가.

국립국어원에서 국어 상담을 하는 연구원이 하루에 처리하는 질문이 평균 60건에서 100건이라고 한다. 전화로, 카카오톡으로, 온라인 게시판으로 쏟아지는 질문들은 한 해에 20만 건에 육박한다. 이 숫자 앞에서 나는 처음에 감탄했다. 한국인의 언어에 대한 관심이 이토록 크구나, 하고. 그런데 곧 다른 감정이 밀려왔다. 그 20만 건의 질문들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순수한 호기심? 아니면 틀릴지도 모른다는 불안?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그리고 그 불안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가 언어를 대하는 방식이 보인다. 맞춤법을 잘 지키는 것이 교양의 증거가 되고, 한 글자의 실수가 그 사람 전체를 흐릿하게 만드는 세상. 이것이 언어 본연의 기능과 얼마나 가까운 것인지, 나는 자꾸 의심하게 된다.

언어는 원래 소통을 위한 도구다. 의미를 전달하고, 마음을 나누고, 관계를 잇는 것.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언어는 그 자체로 평가의 도구가 되었다. 문자 메시지 하나에 담긴 맞춤법이 그 사람의 지성을, 성실함을, 심지어 인품을 가늠하는 척도처럼 여겨진다. SNS 시대의 소통이 글로 먼저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그럴듯하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글로 소통하는 방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그 글을 읽는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몇 십 년 전만 해도 동네 가게에 "마춤 양복", "어름 있슴" 같은 표기가 버젓이 붙어 있었고, 아무도 그것을 교양의 결함으로 여기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간판이 가리키는 의미를 읽었지, 표기법을 심판하지 않았다.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사람들이 더 학식 있어진 것일까, 아니면 언어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된 것일까.

맞춤법이 고정된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 규칙을 만들고 지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더 선명해진다. '늘이다'와 '늘리다' 사이에서 수년째 논쟁이 이어지고, '못하다'와 '못 해' 사이의 경계는 무려 두 차례 연찬회를 거쳐 결론이 뒤집혔다. '그쪽 분'과 '그쪽분' 중 어느 것이 맞는지를 두고 언어 전문가들이 열띤 토론을 벌인다. '다시 한번'의 띄어쓰기 문제는 5년 동안 세 차례나 회의 안건으로 올라온다. 이 사실이 내게는 묘한 안도감을 준다. 국어의 규범을 만들고 지키는 사람들조차 끊임없이 의심하고, 토론하고, 때로는 결론을 번복한다. 맞춤법은 완성된 체계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움직이는 유기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틀림'이란 무엇인가. 오늘의 정답이 내일은 달라질 수 있는 세계에서, 한 글자의 오기가 사람을 평가하는 절대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아밀라아제'가 '아밀레이스'로 바뀐 이야기는 특히 인상적이다. 수십 년간 교과서에 실렸던 단어가 일제강점기의 흔적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어느 날 조용히 교체되었다는 사실. 그것을 모르는 세대와 아는 세대 사이에 자연스럽게 세대 차이가 생겼다. 언어는 이처럼 시간과 역사를 품고 흐른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표현 하나에도 오랜 시간의 켜가 쌓여 있다. 언어를 규범으로만 보면 이 두께를 느끼기 어렵다. '짜장면'과 '자장면'이 함께 표준어가 된 이후에도, 국립국어원 사람들끼리 밥을 먹으러 가면 절반은 자장면을, 절반은 짜장면을 시킨다는 이야기도 그렇다. 표준어 결정이 사람들의 언어 습관을 하루아침에 바꾸지는 못한다. 언어는 규범보다 먼저 삶 속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규정이 정해지기 전부터 이미 말하고 있었고, 규정이 바뀐 후에도 몸에 익은 말을 쉽게 놓지 못한다. 이것은 언어의 특성인 동시에, 언어와 인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맞춤법에 대한 강박이 오히려 언어의 자유로움을 해칠 수 있다는 생각을 나는 오랫동안 막연하게 품어왔다. 언어를 연구하는 사람이 어떤 문장을 보는 순간 "이건 비문이다", "이건 어색하다"고 무의식적으로 판단하고, 그 이유를 거꾸로 끌어맞추는 습관이 생긴다는 고백은 그 막연함을 언어로 풀어준다. 교정하는 능력이 정교해질수록 오히려 언어 현실을 받아들이는 눈이 좁아질 수 있다는 것. 규범을 지키는 일과 언어를 이해하는 일은 같은 방향을 향하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것이다. '개맛있다'는 표현을 생각해본다. 표준어도 아니고, 어법에도 맞지 않지만, 그 표현이 가진 전달력은 "매우 맛있다"나 "정말 맛있다"가 따라갈 수 없다. 그 잡채덮밥이 얼마나 사람을 화나게 만들 정도로 맛있는지, 그 찰진 감각을 "개맛있다"는 말은 순간적으로 전달한다. 언어의 힘은 때로 규범의 바깥에서 온다. 그리고 그 힘을 알아보는 것 역시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이다. 규범은 소통을 돕기 위한 도구다. 그 출발점을 잊으면 규범은 소통을 막는 장벽이 된다. 맞춤법을 이유로 마음이 멀어지고, 한 글자의 실수로 사람 전체가 평가받는 문화는, 언어가 가진 본래의 역할로부터 멀어진 모습이다. 틀린 표기 너머에 있는 그 사람의 마음을, 그 말이 전하려 했던 의미를 먼저 읽으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국어 상담 연구원의 말처럼, 모든 규정을 외우고 있는 것이 전문가가 아니다. 빠르고 정확하게 찾아내는 기술, 그리고 정답을 모르기에 더 겸손해지는 자세. 그것이 오히려 언어를 진지하게 대하는 방식일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맞춤법을 완벽하게 구사해야 한다는 강박보다, 내가 전하려는 말이 상대에게 닿았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그 방향으로 조금 이동할 수 있다면, 언어는 우리를 가르는 선이 아니라 이어주는 다리가 될 것이다. 우리글은 지금도 살아 움직이고 있다. 연찬회 탁자 위에서, 상담 전화 수화기 너머에서, 카카오톡 메시지창 안에서. 그 움직임을 조금 더 따뜻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맞춤법은 흥미로운 탐구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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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찌지 않는 몸 - 평생 가볍게 살아가는 4주 대사 회복 프로젝트
우창윤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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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잠깐 망설인다. 아주 잠깐, 0.5초쯤. 그리고 손은 이미 원하던 것을 집고 있다. 그게 내 오랜 패턴이었다. 다이어트를 처음 결심한 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마 고등학교 시절쯤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수십 번의 다이어트를 시작했고, 수십 번을 포기했으며, 매번 더 자책하는 마음만 키워왔다. 의지가 약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충동적인 성격 때문이라고 단정 지었다. 먹으면서 자책하고, 자책하면서 또 먹는 이상한 루프를 나는 그냥 '내 성격 문제'로 여기고 살았다. 그런데 살찌지 않는 몸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이 물음이 생겼다. 정말 내 의지가 문제였을까?


책은 첫 장부터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살찐 것은 게을러서가 아니라고.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위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억울하기도 했다. 나는 그 말이 너무 듣고 싶어서 오래 기다려온 것 같았으니까. 사실 나는 먹는 것에 의미를 붙이는 사람이다. 힘든 하루를 보냈을 때, 기쁜 일이 생겼을 때,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허전할 때, 음식은 언제나 가장 손쉬운 답이었다. 특히 스트레스가 쌓이는 날이면 작업실 한켠에 놓인 달달한 커피 한 캔은 일종의 신호탄이었다. 이것 하나로 오늘의 고단함을 닫을 수 있다는 착각. 그게 반복되면서 나는 음식을 통해 감정을 조절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책은 이 현상을 대사의 언어로 설명한다. 혈당이 자주 오르내리면 뇌는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되고, 식사는 배고픔에 대한 반응이 아닌 보상의 수단으로 바뀐다고. 그렇다면 내가 끊지 못한 건 의지력 부족이 아니라, 이미 그렇게 작동하도록 재설정된 몸의 문제였다는 이야기다. 이 사실이 나를 편하게 해주는 동시에, 무섭게 만들었다.


나의 작업실은 먹기 좋은 환경으로 최적화되어 있다. 서랍 속 간식, 책상 위 커피, 밤늦게 작업하다 켜는 배달 앱. 의식하지 않으면 하루 종일 뭔가를 입에 달고 살 수 있는 구조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 환경을 굳이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조심하면 되지'라는 안일함으로. 그런데 헨리 딤블비가 말한 것처럼, 개인의 의지는 애초에 이 환경과 싸워 이기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다. 정크푸드 산업은 수십 년의 연구와 막대한 자본을 투자해 사람들이 멈추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영국 성인 셋 중 하나가 비만이라는 통계, 한국도 다르지 않다. 개인이 매일 그 시스템을 상대로 의지력 싸움을 벌이는 건 처음부터 공정하지 않은 게임이다. 나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왜냐하면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내 실패가 나의 잘못이 아니게 되어버리니까. 역설적으로, 실패를 온전히 내 탓으로 돌리는 게 더 편할 때가 있다. 그쪽이 통제감을 주기 때문이다. 내가 못난 것이라면, 내가 잘 하면 되는 것이니까. 그러나 사실은 그게 더 위험한 착각이다. 스스로를 벌하는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다이어트에 실패할 때마다 '이번엔 진짜'를 외치고 더 혹독하게 굶으며 더 빨리 포기하는 악순환. 나는 그걸 너무 많이 반복했다. 의지는 소모되는 자원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유혹에 저항하면서 쓰고 나면, 밤이 되면 남아있지 않다. 문제는 그 의지를 계속 써야만 유지되는 구조 속에 나를 밀어 넣고 있었다는 것이다. 구조가 잘못된 거였다. 나의 의지력이 아니라.


위고비, 마운자로. 이름이 자꾸 머릿속을 맴돈다. 주사 한 방이면 식욕이 줄고, 저절로 살이 빠진다는 이야기들. 솔직히 말하면,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평생 이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면, 조금이라도 쉬운 방법이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책은 이 부분에서 냉정하게 말한다. 약이 만들어주는 식욕 감소를 제대로 된 생활 변화 없이 그냥 굶기로 소진하면, 결국 근육을 잃고 요요만 남는다고. GLP-1 계열 약물이 열어준 가능성은 분명히 있지만, 그것이 마법은 아니다. 약은 도구이고, 도구를 어떻게 쓰느냐가 결과를 결정한다. 책에서 제시하는 3M 즉 식사, 활동, 마음 관리라는 세 축은 사실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잘 먹고, 잘 움직이고, 마음을 잘 돌봐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안다. 문제는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의지로, 처음부터 완벽하게 해내려 한다는 것이다. 책이 말하는 핵심은 다르다. 지금 가장 무너진 축이 어디인지 진단하고, 거기서부터 시작하라는 것이다. 나에게는 마음 관리가 가장 먼저였다. 먹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먹는 것으로 감정을 처리하는 습관이 문제였으니까. 식후에 10분 산책하는 것, 천천히 먹는 것, 수면 전 스마트폰을 줄이는 것. 거창한 변화가 아니다. 이미 있는 생활의 리듬에 아주 작은 것을 연결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한 번 빠져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이 책에서 가장 붙잡고 싶었던 문장이다. 습관은 완벽하게 지켜야 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돌아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비만은 게으름의 결과가 아니라 질병이다. 세계보건기구도 그렇게 분류하고 있고, 대사와 호르몬의 언어로 설명하면 내 몸이 왜 이렇게 작동해왔는지 이해가 된다. 이해가 된다는 것은 용서의 시작이기도 하다. 나를 향한 오래된 비난을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살찌지 않는 몸을 만들겠다는 목표보다, 살찌기 어려운 방향으로 일상을 설계하겠다는 것. 의지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구조가 나를 돕도록 바꾸는 것. 그것이 내가 이 책을 덮고 나서 생각한 것이다. 아직도 작업실에 달달한 커피가 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더 천천히 마셨다. 그게 지금 나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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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6-04-14 0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생활의 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말에 크게 공감합니다.
 
세계사를 바꾼 명화 이야기
니시오카 후미히코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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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미술관 앞에 줄을 서는 사람들은 무엇을 보러 가는 것일까. 거장의 붓 터치를? 역사의 숨결을? 아니면 SNS에 올릴 인증샷을? 어느 것이든 틀리지 않다. 그러나 그 줄의 기원을, 그 명화가 오늘날 '명화'로 불리게 된 경위를 추적해 들어가다 보면 뜻밖의 풍경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는 붓과 물감보다 더 치열하게 움직인 다른 종류의 손들이 있었다. 화상의 손, 권력자의 손, 마케터의 손이다. 예술과 비즈니스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느껴진다. 예술은 숭고한 것이고, 비즈니스는 세속적인 것이라는 이분법이 우리 머릿속에 오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술의 역사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구분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금방 드러난다. 위대한 작품 뒤에는 언제나 그것을 팔기 위한 전략이 있었고, 그 전략이 때로는 작품 자체만큼이나 역사를 바꾸었다.


16세기 유럽을 뒤흔든 종교개혁은 예술계에 청천벽력이었다.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개혁의 물결은 교회 내 성상과 종교화를 우상숭배로 규정했고, 그 결과 수백 년간 화가들의 가장 큰 고객이었던 교회가 시장에서 사라져버렸다. 화가와 화상들에게는 그야말로 생존의 위기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종교화 파괴가 가장 격렬했던 네덜란드에서, 역설적으로 역사상 유례없는 '회화 열풍'이 일어난 것이다. 잃어버린 고객을 대신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했던 화가와 화상들은 시선을 돌렸다. 교회도 왕실도 아닌, 도시에서 부를 축적해가던 일반 시민들을 향해서. 이 전환은 단순히 고객층의 변화가 아니라 미술품 생산 시스템 전체의 혁명이었다. 기존의 방식은 의뢰가 들어온 후에야 붓을 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화가들은 누가 살지도 모르는 불특정 다수를 위해 작품을 미리 만들어 선반에 올려두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갤러리 전시 판매' 모델이 바로 이 위기의 산물이다. 17세기 네덜란드 한 나라에서 제작된 그림이 수백만 점에 달했다는 사실은 이 전략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를 웅변한다. 소재도 바뀌었다.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가 사라진 자리에 정물화와 풍경화, 그리고 일상의 인물들이 들어섰다. 예술의 주인공이 신에서 인간으로, 성당에서 부엌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취향의 변화가 아니라 새로운 고객의 욕구에 철저하게 부응한 상품 개발의 결과였다.


오늘날 수천만 명의 관람객을 불러 모으는 페르메이르의 '우유를 따르는 여인'은 처음부터 미술관에 걸려 있던 게 아니었다. 한 프랑스 미술 애호가의 기록에 따르면, 그 그림은 페르메이르 집 근처의 평범한 빵집 벽에 걸려 있었다. 화가가 3년치 빵값 대신 납품한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단지 가난한 화가의 궁여지책이었을까. 그림 속을 들여다보면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화면 안의 하녀는 빵 푸딩을 만들기 위해 우유를 따르고 있다. 탁자에는 빵 바구니와 맥주잔이 놓여 있다. 딱딱하게 굳은 빵도 우유와 함께 조리하면 훌륭한 음식이 된다는 메시지를, 이 그림보다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시각 자료가 또 있을까. 오늘날의 언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탁월한 제품 광고였다. 이 에피소드가 알려주는 것은 예술이 처음부터 숭고한 영역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페르메이르의 그림은 빵집의 벽에 걸렸고, 거래의 수단이었으며, 생활의 도구였다. 그것이 수백 년의 시간을 거쳐 '명화'라는 지위를 얻게 된 것은, 작품 자체의 질 외에도 그것을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와 해석과 제도적 장치들이 쌓인 결과다.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에서 황제는 백마 위에서 폭풍처럼 펄럭이는 망토를 두르고 용맹하게 산을 오른다. 그러나 사실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을 때 탄 것은 추위에 강한 노새였다. 실제 체형도 그림 속 훤칠한 미남 청년과는 거리가 있었다. 나폴레옹은 회화가 가진 커뮤니케이션의 힘을 본능적으로 꿰뚫고 있었다. 그는 예술가를 고용해 자신의 이미지를 철저하게 설계했다. 그림 속 바위에는 한니발과 샤를마뉴 대제의 이름 옆에 '보나파르트'를 새겨 넣었다. 전설적 영웅들의 반열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이 의도적 구성은 오늘날의 브랜딩 전략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그리고 이 그림은 여러 점 복제되어 각지에 배포되었다. 제국의 이미지를 전파하는 홍보물로 기능한 것이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 교과서에 실려 나폴레옹의 영웅적 이미지를 재생산하고 있으니, 이것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이미지 마케팅 사례 중 하나로 꼽아도 손색이 없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 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인상파 작품들은, 처음 등장했을 때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혹독한 외면을 받았다. 당시 사람들의 눈에 그것은 미완성처럼 보이는 낯선 그림들이었다. 이 '잡동사니' 같은 그림들의 가치를 세상에 알린 인물이 화상 폴 뒤랑뤼엘이었다. 그의 전략은 단순하지만 강력했다.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연출된 매장에 금테 액자와 화려한 소품들을 배치하고, 찾아오는 고객을 귀빈처럼 대접했다. 높은 가격표는 오히려 고객의 욕망을 자극했다. 작품을 이해하지 못해도 그 호화로운 연출 속에서 고객은 자신이 세련된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는 기분에 취했고, 체면 때문에라도 지갑을 열었다. 이것은 오늘날 명품 브랜드들이 구사하는 마케팅의 원형이다. 상품의 기능적 가치만으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유하는 경험 자체를 판매하는 방식. 인상파 그림을 팔기 위해 고안된 이 전략은 이후 갤러리, 보석 매장, 고급 호텔에 이르기까지 프리미엄 시장 전반의 공통 문법이 되었다.


명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예술이 왠지 속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명화들이 사실은 광고였고, 프로파간다였고, 마케팅의 산물이었다니. 그러나 이것은 예술의 가치를 폄하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예술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권력자들이 그림을 이용해 자신을 홍보하고, 화상들이 시장을 만들어낸 것은, 결국 시각 이미지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직접적인 언어이기 때문이었다. 그 언어의 힘을 누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비즈니스의 렌즈로 미술사를 들여다보는 것은 예술을 세속화하는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술이 언제나 사람 사는 세상 한가운데 있었음을, 시대의 욕망과 갈등하고 타협하며 존재해왔음을 이해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복잡한 맥락을 알고 난 뒤에도 작품이 여전히 아름답다면, 그때 비로소 우리는 예술의 진짜 힘을 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팔리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그러나 살아남은 것들 중에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미술의 역사는 이 두 명제가 서로를 파괴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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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의 몰입 - 평범한 소년은 어떻게 수학사의 난제를 해결한 위대한 수학자가 되었을까?
오카 기요시 지음, 정회성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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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시험지를 내고 교실 문을 나서는 순간, 갑자기 알아버리는 것들이 있다. 긴장이 풀리는 바로 그 찰나, "아, 거기서 틀렸구나"라는 깨달음이 불쑥 찾아온다.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이 경험을 두고 일본의 수학자 오카 기요시는 범상치 않은 이름을 붙였다. 그는 그것을 대자연의 순수 직관이라고 불렀다. 틀린 것을 알아챈 것이니 실패의 순간처럼 보이지만, 오카에게 그것은 오히려 지성이 제대로 작동하는 증거였다. 긴장과 강박이 걷히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맑아지고, 그 맑아진 순간에 지성의 빛이 스며든다는 것이다. 뜨겁게 달구고 차갑게 식히기를 반복하는 도검 장인의 방식처럼, 인간의 지성도 그렇게 단련된다고 그는 믿었다. 끊임없이 가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식히고 쉬고 내려놓는 과정이 있어야 비로소 날카로워진다는 것이다. 오카는 몰입을 단순한 집중력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 오랫동안 우리는 몰입을 의지의 언어로 설명해왔다. 더 오래, 더 강하게, 더 끈질기게 버티는 것. 하지만 오카가 말하는 몰입은 그보다 훨씬 섬세한 무엇이다. 그것은 정서(情緒)를 통해 이루어지는 행위다.


오카 기요시는 다변수 함수론의 난제를 풀어낸 수학자로, 20세기 수학사에 굵직한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그가 남긴 글들을 읽다 보면, 이 사람이 수학을 대하는 태도가 보통의 과학자와 무언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는 수학과 예술이 본질에서 같다고 보았다. 수학이 추구하는 것은 진리 안에서의 조화이고, 예술이 추구하는 것은 아름다움 안에서의 조화이며, 그 두 가지 모두에서 작동하는 것이 바로 정서라는 것이다. 정서를 지식의 반대편에 있는 것, 혹은 논리적 사고를 흐리는 감정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이 주장은 낯설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오카에게 정서는 인간의 중심이었다. 논리나 계산이 아니라 정서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핵심 기관이었고, 수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정서 없이는 수학조차 존재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이것이 몰입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오카는 진정한 수학이란 칠판에 적힌 기호를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을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한동안 멈추어 있었다. 마음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수학 문제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본다고? 그것도 마음으로? 아마도 이것은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경험에 가까운 것일 터이다. 퍼즐을 기계적으로 맞추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것과 교감하고, 어느 순간 그것의 구조가 내면에서 환하게 드러나는 경험. 그 경험은 강제력이나 의지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서적으로 열려 있을 때, 마음이 고요하고 맑을 때 찾아온다.


오카는 들에 피는 제비꽃을 이야기했다. 제비꽃은 그저 제비꽃답게 피어 있을 뿐이다. 자신이 피어 있음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지 여부는 제비꽃이 알 바가 아니다. 그는 수학을 배우는 기쁨이 그런 것이라고 했다. 유용성이나 결과와 무관하게, 그저 발견의 기쁨 자체를 먹고 산다고. 이 비유는 단순히 낭만적인 수사가 아니다. 몰입의 조건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담겨 있다. 우리가 어떤 일에 깊이 몰입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일을 하는 내내 그것이 어디에 쓸모가 있는지, 결과는 어떻게 될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계산하기 때문이다. 앞뒤로 분산된 시선은 지금 이 순간의 깊이를 빼앗는다. 그러나 제비꽃처럼 지금 피어 있는 것 자체가 전부일 때, 의식은 오롯이 지금 여기에 머문다. 수학의 역사를 돌아보면 가장 위대한 발견들이 종종 아무런 실용적 목적 없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정수론, 위상수학,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처음에는 그저 아름다운 추상의 놀이였다. 그것들이 나중에 암호학과 물리학과 컴퓨터 과학의 언어가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목적 없는 몰입이 오히려 가장 멀리 나아갔다.


오카가 이 글들을 쓸때, 기계가 계산과 논리를 대신하게 되리라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러니 앞으로의 수학, 더 나아가 인간의 역할은 기계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데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조화의 정신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그는 썼다. 6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가 말한 세계 한가운데 서 있다. 생성형 AI는 방대한 텍스트를 학습하여 인간의 언어를 통계적으로 모방한다. 논문을 요약하고, 코드를 짜고, 그림을 그린다. 그 능력은 날이 갈수록 인상적이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과 기계가 할 수 있는 것의 경계가 점점 흐릿해지고 있다. 이런 시대에 오카의 말은 기묘한 울림을 갖는다. 기계는 계산하고, 기계는 패턴을 인식하고, 기계는 최적의 답을 찾는다. 하지만 기계는 마음의 눈으로 보지 않는다. 기계는 제비꽃처럼 피어 있음의 기쁨을 알지 못한다. 기계는 교실 문을 나서며 "아차" 하고 깨닫는 그 찰나의 정서적 경험을 할 수 없다. 오카가 말하는 몰입은 효율이나 성과의 언어가 아니라 정서의 언어로 이루어진다. 마음이 맑은 순간 찾아오는 깨달음, 강요 없이 솟구치는 발견의 기쁨, 대상과 조용히 교감하는 경험. 이것들은 기계가 모방하기 가장 어려운 것들이며, 동시에 인간이 가장 인간다운 것들이다.


우리는 종종 몰입을 생산성의 도구로 생각한다. 더 많이 집중하면 더 빨리 끝낼 수 있고,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고. 하지만 오카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진정한 몰입은 성과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처럼 보인다. 목적을 내려놓고, 긴장을 풀고, 대자연처럼 조용히 흐르는 것. 뜨겁게 달구는 것만큼 차갑게 식히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책을 읽는 것보다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먼저라는 그의 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억지로 밀어 넣는 지식보다, 저절로 당겨지는 호기심이 더 깊이 새겨진다. 그리고 그 호기심은 논리가 아니라 정서에서 태어난다. 무언가가 아름답다고 느낄 때, 무언가가 신기하다고 느낄 때, 무언가를 반드시 알고 싶다는 마음이 일 때, 비로소 진짜 몰입이 시작된다. 수학자의 몰입은 결국 이런 것이 아닐까. 답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와 오래 함께 앉아 있는 것. 마음의 눈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 그리고 그 기다림 속에서 정서가 지성의 불빛을 불러들이는 것. 교실 문을 나서는 그 한 걸음이 때로는 가장 중요한 수학적 순간이 된다는 것을, 오카는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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