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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맞춤법 때문에 전화했습니다 - 국립국어원 상담실 연구원의 365일 노동기
이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맞춤법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 시대에 살고 있다. 썸을 타던 사람이 "빨리 낳으세요"라고 문자를 보내는 순간 호감이 사라진다는 이야기는 이제 낯설지 않다. 글자가 얼굴을 대신하는 시대, 문장이 곧 그 사람의 첫인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맞춤법을 정말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걸까. 아니, 그 전에 물어야 할 것이 있다. 맞춤법이란 대체 무엇인가.
국립국어원에서 국어 상담을 하는 연구원이 하루에 처리하는 질문이 평균 60건에서 100건이라고 한다. 전화로, 카카오톡으로, 온라인 게시판으로 쏟아지는 질문들은 한 해에 20만 건에 육박한다. 이 숫자 앞에서 나는 처음에 감탄했다. 한국인의 언어에 대한 관심이 이토록 크구나, 하고. 그런데 곧 다른 감정이 밀려왔다. 그 20만 건의 질문들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순수한 호기심? 아니면 틀릴지도 모른다는 불안?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그리고 그 불안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가 언어를 대하는 방식이 보인다. 맞춤법을 잘 지키는 것이 교양의 증거가 되고, 한 글자의 실수가 그 사람 전체를 흐릿하게 만드는 세상. 이것이 언어 본연의 기능과 얼마나 가까운 것인지, 나는 자꾸 의심하게 된다.
언어는 원래 소통을 위한 도구다. 의미를 전달하고, 마음을 나누고, 관계를 잇는 것.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언어는 그 자체로 평가의 도구가 되었다. 문자 메시지 하나에 담긴 맞춤법이 그 사람의 지성을, 성실함을, 심지어 인품을 가늠하는 척도처럼 여겨진다. SNS 시대의 소통이 글로 먼저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그럴듯하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글로 소통하는 방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그 글을 읽는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몇 십 년 전만 해도 동네 가게에 "마춤 양복", "어름 있슴" 같은 표기가 버젓이 붙어 있었고, 아무도 그것을 교양의 결함으로 여기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간판이 가리키는 의미를 읽었지, 표기법을 심판하지 않았다.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사람들이 더 학식 있어진 것일까, 아니면 언어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된 것일까.
맞춤법이 고정된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 규칙을 만들고 지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더 선명해진다. '늘이다'와 '늘리다' 사이에서 수년째 논쟁이 이어지고, '못하다'와 '못 해' 사이의 경계는 무려 두 차례 연찬회를 거쳐 결론이 뒤집혔다. '그쪽 분'과 '그쪽분' 중 어느 것이 맞는지를 두고 언어 전문가들이 열띤 토론을 벌인다. '다시 한번'의 띄어쓰기 문제는 5년 동안 세 차례나 회의 안건으로 올라온다. 이 사실이 내게는 묘한 안도감을 준다. 국어의 규범을 만들고 지키는 사람들조차 끊임없이 의심하고, 토론하고, 때로는 결론을 번복한다. 맞춤법은 완성된 체계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움직이는 유기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틀림'이란 무엇인가. 오늘의 정답이 내일은 달라질 수 있는 세계에서, 한 글자의 오기가 사람을 평가하는 절대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아밀라아제'가 '아밀레이스'로 바뀐 이야기는 특히 인상적이다. 수십 년간 교과서에 실렸던 단어가 일제강점기의 흔적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어느 날 조용히 교체되었다는 사실. 그것을 모르는 세대와 아는 세대 사이에 자연스럽게 세대 차이가 생겼다. 언어는 이처럼 시간과 역사를 품고 흐른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표현 하나에도 오랜 시간의 켜가 쌓여 있다. 언어를 규범으로만 보면 이 두께를 느끼기 어렵다. '짜장면'과 '자장면'이 함께 표준어가 된 이후에도, 국립국어원 사람들끼리 밥을 먹으러 가면 절반은 자장면을, 절반은 짜장면을 시킨다는 이야기도 그렇다. 표준어 결정이 사람들의 언어 습관을 하루아침에 바꾸지는 못한다. 언어는 규범보다 먼저 삶 속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규정이 정해지기 전부터 이미 말하고 있었고, 규정이 바뀐 후에도 몸에 익은 말을 쉽게 놓지 못한다. 이것은 언어의 특성인 동시에, 언어와 인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맞춤법에 대한 강박이 오히려 언어의 자유로움을 해칠 수 있다는 생각을 나는 오랫동안 막연하게 품어왔다. 언어를 연구하는 사람이 어떤 문장을 보는 순간 "이건 비문이다", "이건 어색하다"고 무의식적으로 판단하고, 그 이유를 거꾸로 끌어맞추는 습관이 생긴다는 고백은 그 막연함을 언어로 풀어준다. 교정하는 능력이 정교해질수록 오히려 언어 현실을 받아들이는 눈이 좁아질 수 있다는 것. 규범을 지키는 일과 언어를 이해하는 일은 같은 방향을 향하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것이다. '개맛있다'는 표현을 생각해본다. 표준어도 아니고, 어법에도 맞지 않지만, 그 표현이 가진 전달력은 "매우 맛있다"나 "정말 맛있다"가 따라갈 수 없다. 그 잡채덮밥이 얼마나 사람을 화나게 만들 정도로 맛있는지, 그 찰진 감각을 "개맛있다"는 말은 순간적으로 전달한다. 언어의 힘은 때로 규범의 바깥에서 온다. 그리고 그 힘을 알아보는 것 역시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이다. 규범은 소통을 돕기 위한 도구다. 그 출발점을 잊으면 규범은 소통을 막는 장벽이 된다. 맞춤법을 이유로 마음이 멀어지고, 한 글자의 실수로 사람 전체가 평가받는 문화는, 언어가 가진 본래의 역할로부터 멀어진 모습이다. 틀린 표기 너머에 있는 그 사람의 마음을, 그 말이 전하려 했던 의미를 먼저 읽으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국어 상담 연구원의 말처럼, 모든 규정을 외우고 있는 것이 전문가가 아니다. 빠르고 정확하게 찾아내는 기술, 그리고 정답을 모르기에 더 겸손해지는 자세. 그것이 오히려 언어를 진지하게 대하는 방식일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맞춤법을 완벽하게 구사해야 한다는 강박보다, 내가 전하려는 말이 상대에게 닿았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그 방향으로 조금 이동할 수 있다면, 언어는 우리를 가르는 선이 아니라 이어주는 다리가 될 것이다. 우리글은 지금도 살아 움직이고 있다. 연찬회 탁자 위에서, 상담 전화 수화기 너머에서, 카카오톡 메시지창 안에서. 그 움직임을 조금 더 따뜻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맞춤법은 흥미로운 탐구의 대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