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민수 요리 역사 특강 - 읽기만 해도 배부른
최고민수(박민수) 지음 / 온더페이지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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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 댁에 가면 항상 따뜻한 국밥이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새벽부터 사골을 고아 국물을 냈고, 그 냄새가 골목 어귀까지 번졌다. 그때는 몰랐다. 그 국밥 한 그릇에 수천 년의 역사가 담겨 있다는 걸. 소를 키우고, 뼈를 고고, 소금으로 간을 맞추는 그 행위 하나하나가 문명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음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인간의 역사와 깊이 얽혀 있다. 전쟁이 음식을 바꾸고, 음식이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종교가 식탁을 규정하고, 식탁이 종교를 먹여 살리기도 했다. 와인 한 잔에는 디오니소스 신화가 녹아 있고, 빵 한 조각에는 파라오의 치세와 혁명의 함성이 배어 있다. 음식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일은, 곧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최고민수 박민수님은 책을 통해 흥미로운 음식과 역사를 재미있게 설명해 주어 단숨이 읽을 수 있었다. ^.^

와인을 처음 제대로 마신 건 20대 중반이었다. 선배가 잔을 건네며 말했다. "일단 돌려봐."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와인이 잔벽을 타고 흘러내렸고, 선배는 그걸 '와인의 눈물'이라 불렀다. 그때 나는 그게 그저 낭만적인 표현인 줄만 알았다. 알코올이 물보다 빨리 증발하기 때문에 생기는 마랑고니 효과라는 걸 알게 된 건 한참 후의 일이었다. 와인의 역사는 기원전 6000년경 조지아 코카서스 지역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포도씨와 항아리, 와인 제조 도구의 흔적이 발견된 곳이다. 성경 속 노아도 방주에서 내려와 포도를 심고 와인을 빚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와인이 음료를 넘어 문명의 산물로 자리 잡게 된 건 로마 덕분이었다. 유럽의 물은 석회질이 많아 마시기 어려웠고, 로마 병사들은 와인을 물 대신 마셨다. 제국의 영토가 넓어지면서 와인을 멀리 운반하기보다 아예 현지에서 포도를 재배하는 쪽이 낫다는 판단이 섰다. 프랑스, 독일의 포도밭은 그렇게 생겨났다. 와인이 종교와 만나면서 그 운명은 더욱 깊어졌다.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빵과 와인을 나눈 이후, 와인은 가톨릭 미사의 필수품이 되었다. 수도원은 와인을 생산하고 양조법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14세기, 교황이 프랑스 아비뇽으로 강제로 이주당하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아비뇽 유수라 불리는 이 사건은 단순한 권력 투쟁이 아니었다. 교황과 사제단이 70년간 프랑스 땅에 머물면서 미사에 쓸 와인을 프랑스에서 조달하게 되었고, 아비뇽 인근 론 지역은 비로소 세계적인 와인 산지로 발돋움했다. 와인 한 병의 탄생 뒤에 이토록 복잡한 역사가 숨어 있을 줄이야.

위스키와 브랜디 이야기는 또 다른 세계로 나를 이끈다. 이슬람 세계에서 발전한 연금술과 증류 기술이 십자군 전쟁을 거쳐 유럽으로 전해졌다. 본래 금을 만들려던 시도가 술을 만드는 기술로 변모했다. 인류의 위대한 실패담 중 하나가 아닐 수 없다. 금을 얻지 못하는 대신, 저울과 플라스크와 증류기를 얻었다. 그리고 스카치 위스키를, 코냑을, 보드카를 얻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위스키를 빚기 시작한 건 포도가 자라지 않는 척박한 땅 때문이었다. 와인 대신 보리로 증류주를 만들었다. 그런데 잉글랜드가 합병 이후 전통 증류주에 높은 세금을 매기자, 스코틀랜드 양조업자들은 북부 고지대의 계곡으로 숨어들었다. 그곳에서 이탄으로 맥아를 건조하면서 독특한 스모키 향이 스며들었고, 셰리 오크통 안에서 몇 년을 숨어 지낸 밀주는 어느새 황금빛 호박색 위스키로 변신해 있었다. 탄압이 명주를 만든 셈이다. 왕실 귀족들마저 이 밀주에 손을 댔고, 결국 영국 정부는 세금을 대폭 낮추며 합법적인 양조장을 허용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맛있는 형태로 남은 경우다. 브랜디의 탄생도 비슷한 우연들의 산물이었다. 프랑스 코냑 지방은 석회질 토양에서 자란 신맛 강한 포도로는 와인 경쟁력이 없었다. 종교전쟁으로 포도밭이 황폐해지자, 네덜란드 상인들이 와인을 증류하자고 권했다. 실패한 땅에서 세계 최고의 술이 탄생했다. 브랜디라는 이름 자체도 네덜란드어 '브란데베인', 즉 '태운 와인'에서 왔다. 불에 태워 증류한다는 의미였다.

음식의 역사를 읽다 보면 자주 마주치는 감각이 있다. 허기다. 물리적인 허기가 아니라, 알고자 하는 허기. 이 재료는 어디서 왔을까, 이 요리는 왜 이 모양일까, 이 맛에는 어떤 사연이 담겼을까. 한 잔의 와인을 마시면서 기원전 코카서스의 포도밭을 떠올리고, 바게트를 한 입 베어 물면서 프랑스 혁명 전야의 굶주린 파리 시민들을 생각하는 것. 그것이 음식을 역사로 읽는 방식이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빵이 없으면 브리오슈를 먹으라"고 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장 자크 루소의 글에서 비롯된 오해였고, 그 오해가 한 여인의 목숨을 단두대로 이끄는 데 일조했다. 가짜뉴스의 역사는 오래되었고, 그 피해는 언제나 현실이었다. 음식의 이야기는 그렇게 권력과 정치와 인간의 나약함을 동시에 품는다. 요리는 인간이 자연을 길들인 방식이다. 불을 사용하고, 발효를 이용하고, 증류를 고안하고, 숙성을 기다린다. 그 모든 과정이 문명이다. 우리가 오늘 무엇을 먹는가는, 수천 년 전 누군가가 어떤 선택을 했는가의 결과다. 식탁 위의 모든 것은 기억이다. 그 기억들을 하나하나 풀어내는 일이 이토록 맛있을 줄은, 음식의 역사를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미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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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속 5센티미터 the novel
스즈키 아야코 지음, 민경욱 옮김, 신카이 마코토 원작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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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벚꽃잎이 떨어지는 속도는 초속 5센티미터라고 한다. 그 느리고도 아득한 속도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왜 그렇게 가슴이 먹먹해졌을까. 대학 시절, 작은 노트북 화면으로 처음 신카이마코토의 애니메이션을 보던 밤을 지금도 기억한다. 기숙사 방의 형광등을 끄고, 이어폰을 꽂고, 63분짜리 그 짧은 세계 속으로 천천히 빠져들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뭔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가질 수 없었던 무언가를 손끝으 로 스쳤다가 놓쳐버린 것 같은 감각. 그것이 바로 '초속 5센티미터'가 내게 처음 남긴 흔적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다. 머리카락이 짧아졌다 길어졌고, 사랑도 왔다가 떠났고, 나는 어느새 타카키처럼 매일 모니터를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런 내가 실사 영화 '초속 5센티미터'를 보러 극장에 들어섰다. 원작이 실사화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솔직히 반갑지만은 않았다. 어린 시절 소중하게 쥐고 있던 물건을 누군가가 다시 만든다는 것, 그것은 기대보다 불안이 앞서 는 일이다. 과연 그 섬세한 결, 그 빛의 질감, 그 침묵의 밀도를 인간의 몸으로 재현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도 있었다. 그러나 극장을 나오면서 나는 조용히 인정해야 했다. 이 영화는 원작을 따라가지 않았다. 같은 출발선에서, 전혀 다른 속도로 달려가는 두 사람의 이야기처럼, 실사 영화 역시 원작 애니메이션과 같은 정서를 품고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무게 로 가슴에 내려앉았다.

영화를 보고 며칠이 지났을 무렵, 나는 소설판을 집어 들었다. 각본가 스즈키 아야코가 직접 쓴 소설은 신카이 마코토 특유의 몽환적 문체보다는 훨씬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전한다. 도쿄의 붐비는 출퇴근길, 눈 덮인 이와후네의 작은 역, 로켓이 솟아오르는 하늘. 그 풍경들은 애니메이션처럼 과포화된 색채로 빛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가 매일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는 풍경들과 닮아 있었다. 그래서 더 아팠다. 소설 속 타카키는 회사에서 '무풍'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는 뜻. 처음에는 그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인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의미처럼 들렸으니까. 그런데 책장을 넘기며 나는 점점 다른 감각을 느꼈다. 무풍이란 아무것도 통과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쁨도, 슬픔도, 바람도. 무엇 하나 제대로 닿지 않는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 그것이 30대의 타카키가 도달한 현재였다. 나는 소설을 읽다가 몇 번 이나 책을 덮었다. 타카키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아서였다. 우리는 자라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무풍'이 되어간 다. 첫사랑의 온도를 잊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동안에도, 현실은 끊임없이 다른 속도로 우리를 밀어붙인다. 그러다 어 느 날 문득 돌아보면, 간절하게 붙잡으려 했던 그 감정이 이미 기억의 안쪽 깊숙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물러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원작 애니메이션을 처음 봤을 때, 나는 타카키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과거에 묶인 채 나아가지 못하는 그가 조금은 답답 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이 이야기를 소설로 읽으면서, 나는 그 시선이 얼마나 어린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지금의 나는 타카키를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조금 이해된다. 어떤 감정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놓아지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이 꼭 약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냥, 그만큼 진했던 것이다. 아카리는 반대의 방향으로 걸어간다. 소설 속 아카리는타카키와 함께했던 순간들을 '일상'으로 안고 살아간다. 그것이 추억의 박제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힘의 일부가 된다. 타카키에게는 멈춰 있는 것이 아카리에게는 계속 흐르고 있는 것이다. 같은 기억을 품고도 두 사람이 이렇게나 다른 속도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이 이야기에서 가장 아리고도 아름다운 부분이다. 사랑은 두 사람이 나누지만, 그것이 남기는 무게는 각자의 몫이다.

소설 속 한 장면이 오래 남는다. 타카키와 스미다의 관계에서, 아카리가스미다의 투명한 마음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장면. 아카리는 그 마음을 외면한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서 거리를 유지한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자리에 서 있기로 선택한 것이다. 이 장면에서 나는 이 이야기가 첫사랑의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님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이것은 인간이 타인 앞에서 얼마나 조심스럽고, 얼마나 많은 것을 삼키며 살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실사 영화를 연출한 오쿠야마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이 영화가 '마이크로가 매크로가 되는 이야기'라고. 누군가의 솜털을 바라보다 보면 우주를 발견하게 되는 영화라고. 처음에 그 말을 읽었을 때는 다소 거창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소설을 다 읽고 난 뒤에는 그 말이 정확하게 이해되었다. 이 이야기는 타카키와아카리, 딱 두 사람의 아주 사소하고 개인 적인 감정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그 감정의 끝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 모두의 이야기에 가닿는다. 놓쳐버린 것 들, 붙잡으려 했지만 결국 흘러가 버린 시간들,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오늘이다.

벚꽃잎이 초속 5센티미터로 떨어지는 그 속도는, 어쩌면 우리가 누군가를 잃어가는 속도이기도 하고, 우리가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속도이기도 하다. 너무 느려서 눈치채지 못하지만, 돌아보면 이미 땅 위에 소복이 쌓여 있는 것들. 나는 이 소설을 덮으며 한동안 그 속도에 대해 생각했다. 대학 시절의 나, 이어폰을 꽂고 형광등을 끄고 혼자 울던 그 밤. 그리고 지금의 나, 극장을 나서며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던 저녁을 떠올려 본다. 시간은 우리에게 공평하게 흐른다. 그러나 우리가 그 시간을 통과하는 속도는 제각각이다. 그것이 때로는 어긋남이 되고, 때로는 그리움이 되고, 때로는 구원이 된다. 초속 5센티미터. 그 느린 속도로, 이 이야기는 또 한번 내 안에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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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 파워 - 부와 권력을 결정짓는 토지의 힘
마이클 앨버터스 지음, 노승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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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인류 문명의 역사는 어떤 면에서 토지를 둘러싼 투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렵•채집 사회에서 농경 사회로 이행하면서 인간 은 처음으로 땅을 '소유'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그 순간부터 토지는 생존 수단을 넘어 권력과 지배의 핵심 도구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마이클 앨버터스(Michael Albertus)는 누가 땅을 소유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사회 전체의 운명을 어떻게 결정하는가?질 분을 통해 논제를 시작한다. 저자는 방대한 현장 연구와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지난 두 세기 동안 전 세계에서 일어난 토지 재편의 역 사를 추적하며, 그것이 인종 불평등, 젠더 차별, 경제적 빈곤, 환경 파괴라는 현대 사회의 핵심 문제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저자가 제시하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위대한 재편(The Great Reshufile)'이다. 그는 지난 약 200년을 인구 증가, 국가 형성, 사회 적 갈등이 뒤엉키면서 전 세계 토지 소유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격변의 시대로 규정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의 토지 재분배, 소련 과 중국의 집단화, 라틴아메리카의 동지 개혁, 아프리카의 탈식민지화 과정에 이르기까지, 역사는 토지가 끊임없이 새로운 손으로 넘 어가는 과정을 반복해왔다. 누가 더 강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권력의 성격, 지배 엘리트의 이해관계, 그리고 피지배층의 저항이 복잡하게 얽히며 토지 소유권의 지형이 변화해왔다. 볼셰비키 혁명은 귀족 계급의 대토지를 해체하고 농민에게 재분배했으며, 이는 사회 질서 전체를 뒤집는 혁명적 행위였다. 같은 논리로, 20세기 중반 라틴아메리카의 군부 정권들은 때로는 대지주와 결탁하여 토지 개혁을 억압했고, 때로는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제한적인 재분배를 허용하기도 했다. 이 재편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흑인 농민들에게 수천만 에이커의 토지를 돌려주는 작업이 여전히 진행 중이며, 호주 에서는 원주민(First Nations) 공동체가 자신들의 조상 땅에 대한 권리를 조금씩 되찾아가고 있다. 즉, 위대한 재편은 끝나지 않았으 며, 그 결과가 어떻게 귀결되느냐에 따라 미래 사회의 형태가 달라질 것이다. 저자의 주장 중 하나는,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인종 불평등, 젠더 차별, 경제적 빈곤의 상당 부분이 과거 토지 수탈과 재편의 역사적 유산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를 '현대 사회의 네 가지 재앙(Four Horsemen of modern social maladies)'으로 규정하며, 각각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입증한다.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스의 아과 칼리엔테 카우이야(Agua Caliente Band of Cahuilla Indians) 부 족 사례는 미국 원주민이 수세기에 걸쳐 어떻게 토지를 박탈당해왔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1852년 연방 정부와 체결한 불평등 조 약, 이후 남태평양 철도에 부여된 토지 통행권, 체커보드 방식으로 축소된 보호구역까지, 이 과정은 단계적이고 체계적인 수탈이었다. 그 결과는 통계로 명확하게 드러난다. 2018년 기준 아메리카 원주민의 빈곤율은 25%로, 백인의 10%에 비해 두 배 이상 높으며, 대 학 학위 보유율도 24% 대 47%로 크게 뒤진다. 당뇨, 심장병, 약물 관련 사망률도 현저히 높고, 토지 수탈에서 비롯된 역사적 트라우 마로 인한 정신 건강 문제도 심각하다. 이는 현재의 인종 불평등이 개인의 역량이나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토지 수탈이 대물림한 결과임을 시사한다. 아무리 개인이 노력해도, 공동체가 처음부터 경제적 기반이 되는 토지를 빼앗겼 다면 평등한 출발선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젠더 불평등의 맥락에서 캐나다의 1872년 자치령 토지법(Dominion Lands Act)은 극단적인 사례다. 이 법은 60년 동안 1억 에이 커 이상의 토지를 남성에게만 불하했으며, 여성은 사실상 완전히 배제되었다. 결혼한 여성은 재산 상속권조차 없었기에, 남편이 사망 하거나 가족을 떠나면 경제적으로 극도의 취약한 상황에 놓였다. 이 법이 1930년 폐지된 이후에도 그 영향은 오래 지속되어, 법이 시 행되던 시기에 캐나다 대초원 지역에서 태어난 여성들은 1990년대에 60~70대가 되었을 때 캐나다 여성 중 가장 높은 빈곤율을 기록 했다. 과거의 제도적 차별이 반세기 이상 지나서도 개인의 삶에 그 흔적을 남긴다는 사실은, 제도적 불평등이 얼마나 깊고 오랜 뿌리 를 가지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토지 재편은 환경에도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 중국의 집단화와 탈집단화 과정은 대규모 산림 파괴, 초지 황폐화, 토양 침식, 지하수 오염을 초래했으며, 이를 복구하는 데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고 있다. 브라질의 경우, 1960년대 부터 군사 정권이 아마존 열대우림을 개방해 정착을 허용했으며, 그 결과 지구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생태계 중 하나가 빠른 속도로 파 괴되고 있다. 토지를 경제적 자산으로만 바라보고 단기적 이익을 위해 무분별하게 개발할 때, 그 비용은 환경 재앙이라는 형태로 사회 전체가 치르게 된다는 것을 이 사례들은 잘 보여준다.

저자는 문제 제기에서 그치지 않고, 성공적인 토지 개혁 사례를 통해 희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페루의 재산권 개혁, 콜롬비아와 볼 리비아의 여성 토지 소유권 확대, 칠레의 공공-민간 파트너십을 통한 대규모 자연 보호 구역 조성(2014~2018년 사이 보호 면적을 4%에서 36%로 확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호주의 원주민 토지 반환 정책 등은 모두 토지가 불평등을 심화하는 도구가 아니라 정의와 평등을 실현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재산권의 중요성이다. 개인이든 가족이든, 혹은 지역 공동체든 간에 자신이 일구는 토지에 대한 명확한 권리를 갖는 것이 장기적인 발전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중국의 1980년대 탈집 단화가 좋은 예다. 완전한 사유재산권을 부여하지 않더라도, 농가에 장기 임차 형태의 사용권을 부여한 것만으로도 농업 생산성이 크 게 향상되었다. 권리가 불명확한 상태는 투자를 억제하고 방어적 행동을 유발하며, 그것이 빈곤의 함정을 고착시킨다는 논지는 설득 력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저자가 제시하는 성공 사례들도 완전한 해결책은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이후 3400만 에이커의 토지를 흑인 농민들에게 반환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토지를 돌려받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경제적 역량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금융 접근성, 기술 교육, 시장 인프라 등 다양한 지원이 뒷받침되어야만 토지 재분배가 실질적인 삶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Land Power는 우리에게 불편하지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삶의 기반이 어떠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 인지, 그리고 과거의 부당함이 현재에도 어떻게 재생산되고 있는지를 직시하게 만든다. 토지는 부동산이나 경제적 자산만이 아니다. 그것은 정체성이고, 역사이며, 공동체의 뿌리다. 땅을 빼앗긴다는 것은 단순히 재산을 잃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기반과 존엄성 자체를 박탈당하는 것이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낙관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사회는 과거에도 불가능해 보이던 일을 해왔으며, 토지 재분배를 통해 더 공정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그 희망이 순진한 이상주의에 그치지 않으려면, 토지 문제를 단독으로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교육, 금융, 법제도, 사회 인프라 등 다양한 정책 도구와 연계하여 접근해야 할 것이다. 또한 토지 개혁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 의지와 사회적 합의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도 필요하다. Land Power가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과거의 토지 결정이 현재를 규정하듯, 오늘 우리가 토지에 대해 내리는 결정이 미래 세대의 삶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 책임을 자각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을 읽는 가장 큰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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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척학전집 : 훔친 부 편 - 있어 보이는 척하기 좋은 돈의 문법 세계척학전집 3
이클립스 지음 / 모티브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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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매달 25일이 되면 나는 휴대폰을 열어 은행 앱을 확인한다. 숫자가 뜨는 순간, 묘한 감정이 밀려온다. 안도인지 허탈인지 구분이 안되는 그 감정. 숫자는 분명 늘었는데 왜 마음은 여전히 불안한가. 오랫동안 나는 그것이 내 문제라고 생각했다. 더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 더 아끼지 않아서, 더 현명하게 투자하지 않아서.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정말 문제가 나에게 있는 걸까? 아니면 내가 참여하고 있는 이 게임 자체에 있는 걸까?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돈 안에서 자란다. 돈이 있으면 먹을 수 있고, 없으면 먹을 수 없다. 돈이 있으면 좋은 학교에 가고, 없으면 선택지가 줄어든다. 돈이 있으면 아플 때 치료받고, 없으면 참아야 한다. 이것이 너무 자연 스럽기 때문에 우리는 한 번도 묻지 않는다. 왜 이런 구조인가?"라고. 물고기가 물을 모르듯, 우리는 돈을 모른다.

내가 처음으로 돈에 대해 진지하게 의문을 품은 건 아주 사소한 순간이었다. 지갑에서 만 원짜리를 꺼내다가 문득 이 종이 한 장이 왜 밥 한 끼가 되는지가 갑자기 이상하게 느껴진 것이다. 한국은행이 보증하니까? 정부가 인정하니까? 그렇다면 정부는 왜 이 종이를 받 는가? 국민이 가치 있다고 믿으니까. 왜 믿는가? 정부가 받으니까. 논리는 뱀이 자기 꼬리를 삼키듯 빙글빙글 제자리를 돌았다. 결국 남는 것은 딱 한 문장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것을 가치 있다고 믿으니까." 그 순간 뭔가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매달 한 달의 시간을 바쳐 받는 것이, 집단적 믿음 위에 세워진 숫자라는 사실. 전기가 끊기면 사라지는 서버 속 신호라는 사실. 되돌릴 수 없는 내 시간과,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숫자를 교환하고 있었다는 사실. 이 거래의 조건을 정한 것이 나라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책 속의 파홈 이야기가 불편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가 어리석어서가 아니다. 그가 규칙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못했기 때문 이다. 하루 동안 걸어서 돌아온 만큼이 자기 것이 된다는 규칙은 명확했다. 그는 그 규칙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런데도 뛰었다. 더 넓 게, 더 멀리. 규칙이 자신을 어디로 이끄는지 모른 채. 나는 파홈을 비웃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 역시 매일 뛰고 있기 때문이다. 승 진, 연봉 협상, 내 집 마련, 노후 준비. 점심때가 되면 이미 엄청나게 멀리 와 있는데, 저기 좋아 보이는 것이 또 눈에 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것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멈추면 뒤처진다는 구조, 저축해도 물가가 더 빠르게 오르는 구조, 같은 시간을 일해도 누군가는 자본 수익으로 더 벌어가는 구조. 이 구조 안에서 우리는 뛰지 않을 수가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 문제는 이 구조가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보이지 않으니 문제를 자신에게서 찾는다. 더 게으르기 때문에, 더 무능하기 때문에, 더 운이 나쁘기 때문에. 자책은 구조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장치다.

돈이 허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처음에 허무함을 느꼈다. 내가 평생을 바쳐 모아온 것이 집단적 믿음에 불과하다면, 이 모든 노력은 무의미한 것인가?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구라는 사실이 돈의 힘을 없애지는 않는다. 대한민국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법이 집행되지 않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사랑이 뇌의 화학 반응이라고 해서 그것이 덜 진실한 것이 아닌 것처럼. 허구는 작동하거나, 작동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돈은 지금 이 순간에도 놀랍도록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허구임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다. 돈을 자연법칙처럼 여기는 사람은 돈에 지배당한다. 돈이 만든 위계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시스템이 만든 불평등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왜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부자이고 어떤 사람은 평생 일해도 가난한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며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반면 돈이 허구임을 아는 사람은 도구로서 바라본다. 망치를 숭배하는 목수가 없듯, 돈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인식한다. 게임의 규칙을 이해하고, 그 규칙이 누구에 의해, 누구의 이익을 위해 설 계되었는지를 볼 수 있게 된다. 이 시야가 생기면 더 이상 게임에 플레이 당하지 않는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이 된다.

2,300년 전 에피쿠로스는 물었다. "얼마면 충분한가?" 이 질문이 지금 이 시대에 더 날카롭게 꽂히는 이유는, 우리 중 누구도 이 질문 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연봉이 5천만 원일 때는 7천만 원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7천만 원이 되자 1억이 기준이 됐다. 1 억이 되면 그 다음 숫자가 기다리고 있다. 욕망의 기준선은 언제나 현실보다 조금 앞에 있다. 이것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이제는 안다. 욕망은 절대적 크기가 아니라 상대적 비교로 작동한다. 옆 사람보다 조금 더 많으면 되는 구조, 그래서 결코 충분해질 수 없 는 구조다. 그렇다면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벌 수 있을까"가 아니라,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라는 질 문. 파홈이 진짜로 필요했던 것은 얼마나 많은 땅이었을까. 가족과 함께 먹고살 수 있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는 그 정도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뛰었다. 더 넓게, 더 멀리. 나는 지금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 두려웠다. 충분하다고 인정하는 순간 뒤처질 것 같았다. 그런데 어쩌면 그 두려움 자체가 구조가 심어놓은 것일지 도 모른다. 멈추지 못하게 설계된 게임의 가장 정교한 장치다. 돈의 문법을 안다는 것은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돈 안 에서 살면서도 돈에 지배당하지 않는 것이다. 게임에 참여하되 게임에 속지 않는 것. 뛰되, 눈을 뜨고 뛰는 것이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2미터. 파홈에게 마지막으로 필요했던 땅의 크기다.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그보다 훨씬 작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그것이 돈의 문법을 배우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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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주식투자가 처음인데요 (2026년 완전개정판) - 제대로 시작하고 처음부터 돈 버는 주식 공부 교과서 처음인데요 시리즈 (경제)
강병욱 지음 / 한빛비즈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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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스마트폰 화면 속 숫자가 6,000을 넘어서던 날, 나는 소파에 앉아 멍하니 뉴스를 바라보았다. 아나운서는 환한 표정으로 "사상 최고 치 경신"을 외쳤고, 스튜디오 뒤편의 그래프는 한껏 허리를 펴고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그 순간 내 뱃속 어딘가에서 묘한 감각이 올 라왔다. 두려움인지 설렘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꼭 오랫동안 문을 닫아두었던 방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 그 방 이름은 '주식'이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그 흔한 삼성전자 주식 한 주도 없는 사람이다. 동학개미 운동이 온 나라를 들썩이던 시절에도 나는 귀를 닫았고, 삼성전자가 4만 원이던 시절에 이미 팔아버렸고, 크고 작은 손실 끝에 증권 계좌를 아예 닫아버린 사람이다. 한화에어 로스페이스가 몇 배씩 뛰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하이닉스가 AI 반도체 수혜주로 각광받는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나는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역시 주식이랑 안 맞아.' 그런데 코스피가 6,000을 찍었다. 그리고 그 숫자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내가 '안 맞는' 것이 아니라, 그냥 '겁이 났던' 것이었다고.


FOMO. Fear Of Missing Out. 기회를 놓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 단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코인 열풍이 한창이던 몇 해 전이었는 데, 그때는 '저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며 넘겼다. 그러나 코스피 6,000이라는 숫자 앞에서 나는 비로소 그 단어의 진짜 의미를 몸으로 이해했다. 두려워서 뛰어들지 못하는 것과, 놓쳐버릴까 봐 두려운 것. 그 두 가지 두려움 사이에서 나는 한참 동안 흔들렸다. 그래서 선 택한 것이 책이었다. 강병욱 저자의 저는 주식투자가 처음인데요>. 2010년 초판 이후 50만 독자를 주식의 세계로 이끌었다는 그 책의 2026 완전개정판이다. 사실 나는 예전에 한 번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읽은 책이 너무 많은 탓인지, 그 시절의 나는 책을 읽고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아마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때의 나는 주식을 이해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빨리 돈 을 벌고 싶었던 것이었으니까. 두 번째로 펼친 이 책은 달랐다. 아니, 책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내가 달라졌다. 이번에는 밑술을 그으며 읽었다. 형광펜이 아까울 정도였다. 특히 첫 장을 넘기자마자 나온 이 문장에서 손이 멈췄다. "매일 아침 MTS를 열어 오늘의 시가와 거래량을 확인하고, 관심 종목의 뉴스를 읽고, 왜 그 기업의 주가가 오르거나 내렸는지 이유를 찾아보는 것. 이 단순한 반복이 투자자 의 기초 체력을 만들어줍니다. 거창한 기법도, 비밀스러운 공식도 아니었다. 그냥 매일 아침, 보고, 읽고, 생각하는 것. 그 단순한 루틴 이 투자자를 만든다는 말, 어쩐지 오래된 친구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뜨끔했다. 나는 지금껏 '주식은 복잡한 것'이라는 선입견 뒤에 숨어서, 복잡하게 생각하느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코스피 6,000 시대에 주식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위험은 사실 '폭락'이 아니다. 진짜 위험은 '조급함'이다. 남들이 다 벌고 있는 것 같고, 나만 뒤처지는 것 같은 그 불안감. 그 불안감이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어딘가에서 들은 종목을 사게 만들고, 조금만 떨어져도 패닉 셀을 하게 만든다. 책에는 그 조급함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는 말들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감 정으로 매수하지 않는다. 이유 없는 매도는 하지 않는다. 손실을 두려워하지 않되,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는다." 나는 메모 앱에 그 대로 옮겨 적었다. 투자 원칙이란 것이 반드시 거창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이 세 줄이 증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감정으로 매수 하지 않는다"는 말은 FOMO를 정면으로 겨냥한 말처럼 느껴졌다. 코스피가 6,000을 넘었다는 뉴스에 흥분해서, 남들이 다 산다는 이야기에 흔들려서 매수 버튼을 누르는 행위. 그것이 바로 감정으로 하는 매수다. 그리고 손절에 관한 이야기도 가슴을 찔렀다. "아무 리 어렵더라도 손절이 안 되면 투자 인생에 다음 단계는 없습니다." 과거의 나는 손절을 못 했다. 떨어지면 언젠가 오르겠지, 하는 막연 한 희망으로 버티다가 더 크게 잃었다. 손절은 패배가 아니라 다음을 위한 선택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물타기도 마찬가지였다. 평균 단가를 낮추면 된다는 생각으로 계속 샀다가, 결국 한 종목에 모든 돈이 물려버린 경험. 책은 단호하게 말한다. 물타기는 하지 마 라. "매수는 천천히, 매도는 신속하게." 내가 해온 것과 정반대였다.


책을 다시 읽으면서 처음보다 훨씬 눈에 들어온 챕터가 있었다. ETF에 관한 부분이다. 예전에는 그냥 '펀드 비슷한 것' 정도로 이해하 고 넘어갔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다르게 읽혔다. 개별 종목은 성공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부실해져 상장폐지되는 등 망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그러나 시장 전체는 망하지 않는다. ETF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우리가 개별 종목을 고를 때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어떤 기 업이 살아남을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이다. 아무리 공부해도, 아무리 재무제표를 들여다봐도, 기업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워 런 버핏조차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시장 전체는 다르다. 한국 경제 전체가 망하는 일은 개별 기업이 망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그 리고 코스피가 장기적으로 우상향해 왔다는 역사가 그것을 증명해 왔다. ETF는 그 '시장 전체'에 투자하는 방법이다. KODEX 200 갈 은 국내 ETF 하나를 사는 것만으로도 우리나라 대표 200개 기업에 분산 투자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삼성전자가 잠시 주춤해도 한 화에어로스페이스가 오르고, 하이닉스가 조정을 받아도 또 다른 기업이 버텨주는 구조.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 것의 가장 손쉬 운 실천이 ETF다. 여기에 더해 요즘은 ETF의 종류도 눈부시게 다양해졌다. 미국 S&P500 지수를 추종하는 ETF를 사면 애플, 엔비디 아,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세계 최고 기업들에 자동으로 투자하는 것과 같다. AI 반도체 테마 ETF, 배당주 ETF, 국채 ETF까지. 한때 기 관투자자들의 전유물이었던 분산투자 전략을 이제는 개인도 소액으로 구현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비용 면에서도 ETF는 압도 적이다. 일반 펀드는 운용 보수가 연 12%를 넘는 경우가 많지만, ETF는 대부분 0.10.5% 수준이다. 장기 투자에서 비용은 수의률을 갉아먹는 조용한 적이다. 30년 복리 투자에서 연 1%의 비용 차이가 만들어내는 결과는 생각보다 훨씬 크다. 그런 의미에서 ETF는 초 보 투자자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첫 발걸음이다. 물론 ETF라고 해서 무조건 안전한 것은 아니다. 레버리지 ETF나 인버스 ETF처럼 방향성을 베팅하거나 수익률을 몇 배로 증폭시키는 상품들은 손실도 그만큼 커진다. 그러므로 처음 시작하는 투자자라면 시 장 전체를 추종하는 기본형 ETF로 시작하는 것이 현명하다. FOMO에 흔들려 테마형 ETF를 단기로 사고파는 행위는 결국 개별 종목 단타와 다를 것이 없다.


스마트폰이 손에 있는 한, MTS를 열고 싶은 유혹은 언제나 찾아온다. 점심을 먹다가도, 회의 중간에도, 자기 전 침대에서도. 그 화면 속 숫자들이 실시간으로 요동칠 때마다 뇌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신호를 보낸다. 사거나, 팔거나. 그리고 그 충동의 대부분은 틀린 판단으로 이어진다. 기업의 가치는 하루에 바뀌지 않는다. 좋은 기업은 오늘 내가 매수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내일도 좋은 기업이다. 그러나 주가는 하루에도 수십 번 흔들린다. 그 흔들림을 하루 종일 들여다보고 있으면, 결국 그 흔들림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멀리서 보아야 추세가 보이고, 방향이 보이고, 자신의 원칙이 보인다. 책을 덮으면서 투자에 대한 새로운 다짐을 하나 했다. 매일 아침 딱 10 분만, MTS를 열어 시가와 거래량을 확인하고 관심 종목의 뉴스를 읽겠다는 것.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화면을 닫겠다는 것. 빠른 수 익보다 올바른 습관이 먼저라는 것을, 이번에는 진짜로 이해했다. 코스피 6,000 시대는 분명 기회의 시대다. 그러나 그 기회는 FOMO에 흔들린 사람이 아니라, 원칙을 가진 사람에게 온다. 나는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 계좌를 다시 열지 않았고, 첫 ETF 를 아직 사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이번에는 이유가 있는 매수를 할 것이고, 원칙 있는 매도를 할 것이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주식 화면은, 되도록 멀리서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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