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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척학전집 : 훔친 부 편 - 있어 보이는 척하기 좋은 돈의 문법 ㅣ 세계척학전집 3
이클립스 지음 / 모티브 / 2026년 3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매달 25일이 되면 나는 휴대폰을 열어 은행 앱을 확인한다. 숫자가 뜨는 순간, 묘한 감정이 밀려온다. 안도인지 허탈인지 구분이 안되는 그 감정. 숫자는 분명 늘었는데 왜 마음은 여전히 불안한가. 오랫동안 나는 그것이 내 문제라고 생각했다. 더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 더 아끼지 않아서, 더 현명하게 투자하지 않아서.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정말 문제가 나에게 있는 걸까? 아니면 내가 참여하고 있는 이 게임 자체에 있는 걸까?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돈 안에서 자란다. 돈이 있으면 먹을 수 있고, 없으면 먹을 수 없다. 돈이 있으면 좋은 학교에 가고, 없으면 선택지가 줄어든다. 돈이 있으면 아플 때 치료받고, 없으면 참아야 한다. 이것이 너무 자연 스럽기 때문에 우리는 한 번도 묻지 않는다. 왜 이런 구조인가?"라고. 물고기가 물을 모르듯, 우리는 돈을 모른다.
내가 처음으로 돈에 대해 진지하게 의문을 품은 건 아주 사소한 순간이었다. 지갑에서 만 원짜리를 꺼내다가 문득 이 종이 한 장이 왜 밥 한 끼가 되는지가 갑자기 이상하게 느껴진 것이다. 한국은행이 보증하니까? 정부가 인정하니까? 그렇다면 정부는 왜 이 종이를 받 는가? 국민이 가치 있다고 믿으니까. 왜 믿는가? 정부가 받으니까. 논리는 뱀이 자기 꼬리를 삼키듯 빙글빙글 제자리를 돌았다. 결국 남는 것은 딱 한 문장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것을 가치 있다고 믿으니까." 그 순간 뭔가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매달 한 달의 시간을 바쳐 받는 것이, 집단적 믿음 위에 세워진 숫자라는 사실. 전기가 끊기면 사라지는 서버 속 신호라는 사실. 되돌릴 수 없는 내 시간과,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숫자를 교환하고 있었다는 사실. 이 거래의 조건을 정한 것이 나라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책 속의 파홈 이야기가 불편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가 어리석어서가 아니다. 그가 규칙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못했기 때문 이다. 하루 동안 걸어서 돌아온 만큼이 자기 것이 된다는 규칙은 명확했다. 그는 그 규칙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런데도 뛰었다. 더 넓 게, 더 멀리. 규칙이 자신을 어디로 이끄는지 모른 채. 나는 파홈을 비웃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 역시 매일 뛰고 있기 때문이다. 승 진, 연봉 협상, 내 집 마련, 노후 준비. 점심때가 되면 이미 엄청나게 멀리 와 있는데, 저기 좋아 보이는 것이 또 눈에 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것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멈추면 뒤처진다는 구조, 저축해도 물가가 더 빠르게 오르는 구조, 같은 시간을 일해도 누군가는 자본 수익으로 더 벌어가는 구조. 이 구조 안에서 우리는 뛰지 않을 수가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 문제는 이 구조가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보이지 않으니 문제를 자신에게서 찾는다. 더 게으르기 때문에, 더 무능하기 때문에, 더 운이 나쁘기 때문에. 자책은 구조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장치다.
돈이 허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처음에 허무함을 느꼈다. 내가 평생을 바쳐 모아온 것이 집단적 믿음에 불과하다면, 이 모든 노력은 무의미한 것인가?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구라는 사실이 돈의 힘을 없애지는 않는다. 대한민국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법이 집행되지 않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사랑이 뇌의 화학 반응이라고 해서 그것이 덜 진실한 것이 아닌 것처럼. 허구는 작동하거나, 작동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돈은 지금 이 순간에도 놀랍도록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허구임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다. 돈을 자연법칙처럼 여기는 사람은 돈에 지배당한다. 돈이 만든 위계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시스템이 만든 불평등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왜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부자이고 어떤 사람은 평생 일해도 가난한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며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반면 돈이 허구임을 아는 사람은 도구로서 바라본다. 망치를 숭배하는 목수가 없듯, 돈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인식한다. 게임의 규칙을 이해하고, 그 규칙이 누구에 의해, 누구의 이익을 위해 설 계되었는지를 볼 수 있게 된다. 이 시야가 생기면 더 이상 게임에 플레이 당하지 않는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이 된다.
2,300년 전 에피쿠로스는 물었다. "얼마면 충분한가?" 이 질문이 지금 이 시대에 더 날카롭게 꽂히는 이유는, 우리 중 누구도 이 질문 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연봉이 5천만 원일 때는 7천만 원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7천만 원이 되자 1억이 기준이 됐다. 1 억이 되면 그 다음 숫자가 기다리고 있다. 욕망의 기준선은 언제나 현실보다 조금 앞에 있다. 이것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이제는 안다. 욕망은 절대적 크기가 아니라 상대적 비교로 작동한다. 옆 사람보다 조금 더 많으면 되는 구조, 그래서 결코 충분해질 수 없 는 구조다. 그렇다면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벌 수 있을까"가 아니라,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라는 질 문. 파홈이 진짜로 필요했던 것은 얼마나 많은 땅이었을까. 가족과 함께 먹고살 수 있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는 그 정도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뛰었다. 더 넓게, 더 멀리. 나는 지금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 두려웠다. 충분하다고 인정하는 순간 뒤처질 것 같았다. 그런데 어쩌면 그 두려움 자체가 구조가 심어놓은 것일지 도 모른다. 멈추지 못하게 설계된 게임의 가장 정교한 장치다. 돈의 문법을 안다는 것은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돈 안 에서 살면서도 돈에 지배당하지 않는 것이다. 게임에 참여하되 게임에 속지 않는 것. 뛰되, 눈을 뜨고 뛰는 것이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2미터. 파홈에게 마지막으로 필요했던 땅의 크기다.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그보다 훨씬 작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그것이 돈의 문법을 배우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