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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속 5센티미터 the novel
스즈키 아야코 지음, 민경욱 옮김, 신카이 마코토 원작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26년 2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벚꽃잎이 떨어지는 속도는 초속 5센티미터라고 한다. 그 느리고도 아득한 속도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왜 그렇게 가슴이 먹먹해졌을까. 대학 시절, 작은 노트북 화면으로 처음 신카이마코토의 애니메이션을 보던 밤을 지금도 기억한다. 기숙사 방의 형광등을 끄고, 이어폰을 꽂고, 63분짜리 그 짧은 세계 속으로 천천히 빠져들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뭔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가질 수 없었던 무언가를 손끝으 로 스쳤다가 놓쳐버린 것 같은 감각. 그것이 바로 '초속 5센티미터'가 내게 처음 남긴 흔적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다. 머리카락이 짧아졌다 길어졌고, 사랑도 왔다가 떠났고, 나는 어느새 타카키처럼 매일 모니터를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런 내가 실사 영화 '초속 5센티미터'를 보러 극장에 들어섰다. 원작이 실사화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솔직히 반갑지만은 않았다. 어린 시절 소중하게 쥐고 있던 물건을 누군가가 다시 만든다는 것, 그것은 기대보다 불안이 앞서 는 일이다. 과연 그 섬세한 결, 그 빛의 질감, 그 침묵의 밀도를 인간의 몸으로 재현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도 있었다. 그러나 극장을 나오면서 나는 조용히 인정해야 했다. 이 영화는 원작을 따라가지 않았다. 같은 출발선에서, 전혀 다른 속도로 달려가는 두 사람의 이야기처럼, 실사 영화 역시 원작 애니메이션과 같은 정서를 품고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무게 로 가슴에 내려앉았다.
영화를 보고 며칠이 지났을 무렵, 나는 소설판을 집어 들었다. 각본가 스즈키 아야코가 직접 쓴 소설은 신카이 마코토 특유의 몽환적 문체보다는 훨씬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전한다. 도쿄의 붐비는 출퇴근길, 눈 덮인 이와후네의 작은 역, 로켓이 솟아오르는 하늘. 그 풍경들은 애니메이션처럼 과포화된 색채로 빛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가 매일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는 풍경들과 닮아 있었다. 그래서 더 아팠다. 소설 속 타카키는 회사에서 '무풍'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는 뜻. 처음에는 그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인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의미처럼 들렸으니까. 그런데 책장을 넘기며 나는 점점 다른 감각을 느꼈다. 무풍이란 아무것도 통과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쁨도, 슬픔도, 바람도. 무엇 하나 제대로 닿지 않는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 그것이 30대의 타카키가 도달한 현재였다. 나는 소설을 읽다가 몇 번 이나 책을 덮었다. 타카키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아서였다. 우리는 자라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무풍'이 되어간 다. 첫사랑의 온도를 잊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동안에도, 현실은 끊임없이 다른 속도로 우리를 밀어붙인다. 그러다 어 느 날 문득 돌아보면, 간절하게 붙잡으려 했던 그 감정이 이미 기억의 안쪽 깊숙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물러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원작 애니메이션을 처음 봤을 때, 나는 타카키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과거에 묶인 채 나아가지 못하는 그가 조금은 답답 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이 이야기를 소설로 읽으면서, 나는 그 시선이 얼마나 어린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지금의 나는 타카키를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조금 이해된다. 어떤 감정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놓아지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이 꼭 약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냥, 그만큼 진했던 것이다. 아카리는 반대의 방향으로 걸어간다. 소설 속 아카리는타카키와 함께했던 순간들을 '일상'으로 안고 살아간다. 그것이 추억의 박제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힘의 일부가 된다. 타카키에게는 멈춰 있는 것이 아카리에게는 계속 흐르고 있는 것이다. 같은 기억을 품고도 두 사람이 이렇게나 다른 속도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이 이야기에서 가장 아리고도 아름다운 부분이다. 사랑은 두 사람이 나누지만, 그것이 남기는 무게는 각자의 몫이다.
소설 속 한 장면이 오래 남는다. 타카키와 스미다의 관계에서, 아카리가스미다의 투명한 마음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장면. 아카리는 그 마음을 외면한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서 거리를 유지한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자리에 서 있기로 선택한 것이다. 이 장면에서 나는 이 이야기가 첫사랑의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님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이것은 인간이 타인 앞에서 얼마나 조심스럽고, 얼마나 많은 것을 삼키며 살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실사 영화를 연출한 오쿠야마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이 영화가 '마이크로가 매크로가 되는 이야기'라고. 누군가의 솜털을 바라보다 보면 우주를 발견하게 되는 영화라고. 처음에 그 말을 읽었을 때는 다소 거창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소설을 다 읽고 난 뒤에는 그 말이 정확하게 이해되었다. 이 이야기는 타카키와아카리, 딱 두 사람의 아주 사소하고 개인 적인 감정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그 감정의 끝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 모두의 이야기에 가닿는다. 놓쳐버린 것 들, 붙잡으려 했지만 결국 흘러가 버린 시간들,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오늘이다.
벚꽃잎이 초속 5센티미터로 떨어지는 그 속도는, 어쩌면 우리가 누군가를 잃어가는 속도이기도 하고, 우리가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속도이기도 하다. 너무 느려서 눈치채지 못하지만, 돌아보면 이미 땅 위에 소복이 쌓여 있는 것들. 나는 이 소설을 덮으며 한동안 그 속도에 대해 생각했다. 대학 시절의 나, 이어폰을 꽂고 형광등을 끄고 혼자 울던 그 밤. 그리고 지금의 나, 극장을 나서며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던 저녁을 떠올려 본다. 시간은 우리에게 공평하게 흐른다. 그러나 우리가 그 시간을 통과하는 속도는 제각각이다. 그것이 때로는 어긋남이 되고, 때로는 그리움이 되고, 때로는 구원이 된다. 초속 5센티미터. 그 느린 속도로, 이 이야기는 또 한번 내 안에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