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얻는 힘 : 인간력
다사카 히로시 지음, 장은주 옮김 / 북플레저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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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관계 속에 던져진다.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 친구와 동료, 연인과 낯선 이. 삶의 모든 장면에는 반드시 '타인'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인간은 수천 년간 문명을 쌓고 기술을 발전시켜 왔지만, 정작 '옆 사람과 잘 지내는 법'은 여전히 서툴기만 하다. 회사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관계의 문제로 상처받고, 지치고, 무너지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나는 오랫동안 이 질문을 붙잡고 살아왔다. "왜 나는 가까운 사람에게 더 쉽게 상처를 주는가?" 그리 고 어느 순간 깨달았다. 문제는 상대방이 아니었다. 문제는 언제나 나 자신이었다. 더 정확히는, 나 자신을 들여다보기를 두려워했던 나의 태도였다. 다사카 히로시의 인간력을 통해 그동안 생각못했던 인간 관계에 대한 조언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 사회는 완벽함을 강요한다. 실수하지 말 것, 약점을 보이지 말 것, 언제나 강하고 유능하게 보일 것. 이러한 압박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결점을 철저히 숨기는 법을 배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자신의 허점을 숨기면 숨길수록 인간관계는 점점 더 얕아진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진심으로 마음을 열게 되는 사람은 대개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실수하면서도 솔직하게 인정하고, 때로는 엉뚱하고 어설프지만 그 자체를 감추지 않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에게 우리는 마음을 연다. 약함 을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상대의 마음을 열게 하는 열쇠가 된다. 미숙함을 인정하는 것은 자기 비하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에 대한 깊은 이해이며, 성장을 향한 첫 걸음이다. "나는 아직 부족하다"는 고백은 약자의 언어가 아니라, 끊임없이 나아가려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강자의 언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완벽한 사람이 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솔직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실수했을 때 먼저 손을 내밀고, 불편한 감정이 생겼을 때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 그것이 내가 꿈꾸는 관계의 시작점이다.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두 개의 목소리가 공존한다. 하나는 "내가 옳아, 내 잘못이 아니야"라고 속삭이는 목소리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부족했어, 더 나아지자"라고 말하는 목소리다. 전자는 자아를 보호하려는 본능에서 비롯된다. 잘못을 인정하면 체면이 깎이고, 무능해 보이고, 상처받을 것 같다는 두려움.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책임을 회피하고, 타인에 게 원인을 돌리며,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이 방어 기제는 결국 관계를 갉아먹는 독이 된다. 자신의 잘못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 사람 곁에 남고 싶은 이는 없다. 반면, 잘못을 인정하고 "내가 틀렸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신뢰가 쌓인다. 신뢰는 관계의 토대이자, 그 어떤 갈등도 녹여낼 수 있는 온기다. 나는 종종 내 마음속 작은 목소리가 고개를 들 때를 느낀다. 누군가와 다툰 뒤 "어차피 저 사람도 잘못이 있어"라고 합리화하고 싶어질 때, 혹은 칭찬받아야 할 상황에서 타인이 먼저 인정받으면 묘한 불편함이 올라올 때. 그 순간, 나는 그 감정을 억누르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저 조용히 바라본다. 아, 내 안에 지금 이런 감정이 일어나고 있구나.' 그렇게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그 감정의 힘은 신기하게 줄어든다. 감정을 다스리는 것은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 자체가 성숙함의 시작이다.

살아가다 보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을 만난다. 말투가 거슬리거나, 일하는 방식이 나와 전혀 달라 답답하거나, 가치관이 충돌하여 대화 자체가 불편한 사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런 사람을 '문제 있는 사람', '결점이 많은 사람'으로 분류해버린다. 하지만 잠시 멈춰 생각해보자. 과연 그 기준은 무엇인가? 그 기준은 결국 '나 자신'이다. 내 방식, 내 기준, 내 가 치관. 우리는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두고 타인을 재단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편협한 시각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만의 고유한 역사가 있고, 그 역사 속에서 형성된 독특한 성격과 방식이 있다. 그것을 결점이라 부르는 것은 타인의 삶 전체를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오히려 그 다름은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세계를 열어주는 창문이 될 수 있다. 특히 조직을 이끄는 리더의 위치에 있다면, 이 관점은 더욱 중요해진다. 구성원 각자의 개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강점으로 연결할 때, 조직은 비로소 살아 숨쉬는 공동체가 된다. 직원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의 부족함을 고쳐야할 결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각자의 색깔을 인정하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다. 말은 관계의 온도를 결정하고, 나아가 감정 자체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흔히 감정이 먼저 생기고 그에 따라 말이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누군가에 대한 험담을 계속하다 보면 처음에는 그저 불편했던 사람이 점점 더 싫어진다. 반대로 억지로라도 상대의 장점을 찾아 입 밖으로 내뱉다 보면, 어느새 그 사람에 대한 시선이 조금씩 달라진다. 말이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이것은 심리적 트릭이 아니다. 말은 뇌의 인 식 방식을 바꾸고, 관계의 패턴을 바꾸며, 결국 현실 자체를 바꾼다. 그렇기에 어떤 말을 선택하느냐는 단순한 예의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선택이 된다. 나는 이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의식적으로 말을 선택하려 노력한다. 불편한 상황에서도 감사의 말을 찾고, 비판하고 싶은 순간에도 먼저 공감의 말을 꺼내려 한다. 쉽지 않다. 하지만 그 노력이 쌓 일 때, 관계는 조금씩 따뜻해진다.

인생을 돌아보면, 가장 나를 힘들게 했던 관계가 가장 많이 나를 성장시켰음을 깨닫는다. 호된 질책을 받았던 상사, 배신 감을 안겨주었던 친구, 뜻이 맞지 않아 멀어진 동료. 그 만남들은 당시에는 상처였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느새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준 연마의 과정이었다. 물론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상처받은 마음으로 "그래, 그 만남에 감사해"라고 말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억지로 용서하거나, 무리하게 화해할 필요도 없다. 다만, 그 경험 속에서 '나는 무엇을 배웠는가'를 묻는 것만으로도 그 만남의 의미는 달라진다. 불행한 사건이 성장의 계기로 재해석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그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관계를 끊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멀어진 사람에 대해 마음속으로 라도 문을 닫지 않는 것, 언제든 다시 연결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그것은 상대를 위한 배려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을 위한 자유다. 관계의 문을 닫는 순간, 그 문 안에 갇히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는 결국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결정한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도 사랑하기 어렵고, 자신에게 가혹한 사람은 타인에게도 가혹해지기 쉽다. 인간력이란 화려한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타인의 다름을 존중하며,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의식하고, 고통 스러운 경험에서도 의미를 찾아내는 조용하고 깊은 능력이다. 특별한 재능이 아니라, 매일의 선택과 실천 속에서 만들어 지는 삶의 자세다. 나는 앞으로도 수없이 실수하고,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 속에서 나는 배울 것이다. 더 나은 관계를 위해, 더 나은 나 자신을 위해.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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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달리기 - 승복 입은 러너의 11,450킬로미터 마음 수행기
지찬 지음 / 유노북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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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신호등이 깜빡이는 횡단보도 앞, 승복을 입은 채 냅다 뛰어버린 한 스님. 그 장면 하나가 이 책 전체의 씨앗이다. 딱히 바쁜 일도 없었건만 몸이 먼저 반응했고, 겨우 몇 걸음 뛰었을 뿐인데 숨이 차올랐다. 중년을 넘어서며 어느새 둔해진 육신을 스스로 마주한 순간이었다. 지찬 스님은 그 당혹감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선원에서 치열하게 정진하던 시절의 자신은 어디로 갔는가. 수행자로서 몸을 돌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물음이 달리기라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그를 이끈다. 헬스장에 등록하고, 처음에는 천천히 걷듯 뛰기 시작했다. 특별한 목표도, 화려한 의지도 아니었다. 단지 흐트러진 몸을 다시 세워 보겠다는 소박한 다짐이었다. 이 출발점이 인상 깊은 까닭은, 스님이 수행과 육체를 분리하지 않는 데 있다. 몸이 무너지면 의지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것, 숨이 가빠지면 생각도 거칠어진다는 것을 그는 수행의 언어로 풀어낸다. 달리기는 수행의 도구가 아니라 수행 그 자체였다.

책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는 대목은 호흡에 관한 성찰이다. 불교의 수식법(數息法)은 호흡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다. 스님은 달리기를 하면서 그 수식법이 길 위에서도 고스란히 작동함을 발견한다. 숨이 흐트러질 때 억지로 다잡으려 할수록 오히려 더 빠르게 무너진다. 반면 몸의 리듬을 믿고 기다리면 호흡은 스스로 제자리를 찾는다. 이 이치는 좌선에서도 같다. 억지로 고요를 만들려는 수행은 금세 긴장으로 변한다. 고요란 어떤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방해하지 않을 때 저절로 드러나는 상태에 가깝다. 스님은 달리기라는 몸의 훈련을 통해 이 진실을 다시 배웠다고 고백한다. 들이쉬고 내쉬는 숨을 그저 아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단순함이 수행의 본질임을 몸으로 깨달은 것이다. 7킬로미터 지점에서 숨이 턱까지 차올라 멈추려던 순간, 무언가 가득했던 것이 빠져나가듯 호흡이 수월해지고 잡념이 일시에 가라앉았다는 대목에서는 나도 모르게 숨을 참게 된다. 스님이 러너스 하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그 상태를, 그는 행복감보다 무념무상에 가까운 평온으로 기억한다. 젊은 시절 선원에서 몰입에 들었을 때와 같은 감각이었다고. 달리기는 그렇게 움직이는 좌선이 되었다.

스님은 달리기를 통해 욕심의 얼굴을 새롭게 마주한다. 기록이 조금씩 나아지면서 더 잘 달리고 싶은 마음이 고개를 든다. 즐거움으로 시작한 달리기가 어느새 증명해야 할 과제가 되고, 하루의 훈련을 빠뜨리면 괜한 불편함이 찾아온다. 부상 이후에야 스님은 그 사실을 직면한다. 몸이 신호를 보냈지만 마음이 듣지 않았다. 수행자도 집착을 피해 가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수행자이기에 더 깊이 그 올가미에 걸릴 수 있다. 정진한다는 자부심, 이 정도는 해낼 수 있다는 과신이 몸의 신호를 흐리게 한다. 스님은 회복력이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中道)에 가장 가까운 감각이 아닐까 한다고 적는다. 극단을 피하고 지금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달리기에서도 삶에서도 오래가는 힘이다. 연장만 갈고닦지 말고 풀을 뽑으라는 도반의 글귀가 책 중반에 등장한다. 기록이 연장이 될 때도 있고, 침묵이 연장이 될 때도 있다. 손에 쥔 것이 무엇인가보다 그 손이 어디를 향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 달리기를 통해 스님이 배운 덜어냄의 진리다. 더 멀리 가기 위해 비워야 할 것이 있고, 오래가기 위해 내려놓아야 할 것이 있다는 말이 쉽게 잊히지 않는다.

스님은 '레푸기움(refugium)'이라는 라틴어를 빌려 달리기의 의미를 정의한다. 피난처이자 휴식처. 그러나 도망치는 장소가 아니라, 다시 돌아오기 위한 자리. 달리고 나서 마음이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정돈된 상태가 된다는 표현이 정확하게 와닿는다. 무언가를 더 얻은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들이 자연스럽게 내려앉은 느낌. 이 레푸기움은 특정한 장소가 아니다. 어떤 이에게는 오래된 책상이고, 어떤 이에게는 조용한 차 한 잔이며, 스님에게는 길 위에서 호흡과 발걸음이 나란히 이어지는 그 짧은 시간이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역할도, 이름도, 직함도 잠시 물러나고, 지금 이 순간의 자신으로만 머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달리는 동안 판단이 줄어들고, 잘하고 있는지 따지는 마음이 사그라든다. 길 위에서 회복한 것은 체력보다 감각이라는 스님의 말이 책의 핵심을 담는다. 지금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마음이 어디쯤 와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힘. 그 힘 덕분에 다시 수행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더 나아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상에서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석정 스님의 인장에는 삼락자(三樂者)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한다. 세 가지 즐거움이 있는 사람. 그 즐거움은 중이 된 일, 머리를 깎는 일, 국수 잡수시는 일. 어떤 대단한 성취도 아니고, 남보다 나아야 할 이유도 없다. 그 자리에 있으면 되는 즐거움이다. 스님도 그림을 그리고 자전거를 탄다. 잘 그리지 못하고, 빠르게 달리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 시간이 좋다. 결과를 향한 욕심이 자연스럽게 빠져나가고, 지금 이 순간의 몸이 현재를 만끽하기 때문이다. 잘하지 않아도 되는 즐거움은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다. 거기서 우리는 비교를 내려놓고, 지금의 나로 충분하다는 감각을 배운다. 마라톤도 그런 운동이다. 서브3만이 인정받는 경기가 아니라, 결승선을 통과한 모든 사람이 박수를 받는 드문 스포츠. 누군가에게는 생애 첫 10킬로미터가 다른 누군가의 풀코스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불교적 깨달음도 이와 닮았다고 스님은 말한다. 깨달음에는 등수가 없고, 속도가 빠르다고 더 옳지 않다. 각자가 서 있는 자리에서 삶을 온전히 통과해 냈을 때, 그만큼의 깊이가 주어진다.

책을 읽고 나면 달리기라는 행위가 달라 보인다. 빠르게 달리는 것, 오래 달리는 것, 멀리 달리는 것보다 어떤 마음으로 달리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스님은 몸으로 보여 준다. 수행도, 운동도, 나아가 삶도 결국은 성취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라는 말이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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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적 혼자의 시대
김수영 지음 / 다산초당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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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퇴근길 지하철 안을 둘러본다. 저마다의 이어폰을 꽂고, 저마다의 화면을 들여다보며, 저마다의 세계 속으로 침잠해 있는 사람들. 우 리는 이토록 가까이 붙어 있으면서도 서로에게 완벽하게 닿지 않는다. 문득 이 풍경이 오늘날 우리 삶의 축소판처럼 느껴진다. 붐비는 도시 한가운데서, 우리는 각자의 섬이 되어가고 있다. 통계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변화를 숫자로 말해왔다. 대한민국 전체 가구의 35 퍼센트가 넘는 수가 1인 가구다. 둘이 살거나 셋이 사는 집보다 혼자 사는 집이 더 많은 시대. 그러나 나는 이 숫자보다 그 숫자 뒤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더 오래 마음에 걸린다. 그들은 어떤 밤을 보내고 있을까.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불 꺼진 집으로 돌아가는 그 귀 갓길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 본다. 김수영님의 책을 통해 그 의미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았다.

나는 종종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어떻게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가.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혼자를 선택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하 루하루를 버티다 보니, 일에 치이고 관계에 지치다 보니, 어느 순간 주변이 조용해져 있었다. 결혼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결혼을 생각 할 여백이 없었고, 누군가를 밀어낸 것이 아니라 나를 들여다볼 틈조차 없었다. 그렇게 '어쩌다 혼자'가 되었다. 아마 지금 이 글을 읽 는 많은 사람도 비슷한 이야기를 갖고 있을 것이다. 드라마틱한 결심이나 분명한 사연 없이, 그냥 그렇게 흘러온 것이다. 그런 의미에 서 혼자라는 삶은 선택이기도 하고, 선택이 아니기도 하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사회 자체가 이미 특정한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

취업 시장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경영하라'고 말하고, 사회는 '스스로 책임지라'고 요구한다. 그 구조 안에서 개인들은 생존을 위해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게 된다. 가족을 꾸리는 일은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뒤로 밀려난다. 인풋 대비 아웃풋이 불분명한 영 역에 에너지를 쏟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사업체를 경영해야 하는 사람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나는 왜 혼자 지?'라고 물었을 때 이미 혼자가 된 지 오래인 것이다. 혼자 사는 삶에는 분명 자유가 있다. 아무에게도 맞추지 않아도 되고,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나만의 속도로 하 루를 채울 수 있다. 그 자유는 진짜다.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자유의 이면에는 묘한 허기가 있다. 맛있는 것을 먹었을 때 '이거 먹어봤어?'라고 말을 건넬 사람이 없다는 것. 아플 때 '나 좀 이상한 것 같아'라고 꺼내놓을 누군가가 없다는 것이다.

웃긴 일이 생겼을 때, 슬픈 일이 생겼을 때, 그냥 아무 이유 없이 피곤할 때, 옆에 사람이 있다는 그 감각이 없다는 것. 경제적 결핍보다 훨씬 조용하게, 그러나 훨씬 깊이 스며드는 결핍. 그것이 관계의 결핍이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식물에 말을 걸고, 오래된 물건에 이름 을 붙이고, 좋아하는 책을 곁에 두고 위안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낯설지 않다. 처음엔 그저 개인의 취향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교 감하고 싶다는 인간의 본능이 찾아낸 출구다. 연결되고 싶다는 마음은 어떤 방식으로든 흘러나온다. 아무리 혼자이기를 택한 사람이 라도, 그 마음까지 지울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거창한 답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당장 결혼을 하라거나, 다시 가족을 이루라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는 더 작고, 더 유연하고, 더 인간적인 무언가를 생각한다. 예컨대 느슨한 연대. 혈연도 아니고, 계약도 아니고, 의무도 아닌, 그 저 '나는 당신이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라고 말해주는 관계. 매일 만나지 않아도 되고, 깊이 얽히지 않아도 되지만, 어떤 순간에 는 서로의 안부를 묻고, 밥 한 끼를 나누고, 그 사람이 힘들어 보일 때 눈을 마주쳐 주는 관계. 현대 사회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아마 도 이런 종류의 연결일 것이다. 꼭 가족이 아니어도, 꼭 친한 친구가 아니어도, 그냥 같은 시간을 사는 사람으로서 서로를 알아봐 주는 것이다. 그것이 너무 이상적으로 들린다면, 적어도 이것만은 생각해보자. 나 자신을 잘 돌보는 일. 누군가가 나를 챙겨줄 거라는 기대를 내려놓은 자리에서, 내가 먼저 나를 먹이고, 재우고, 쉬게 해주는 것. 혼자 사는 삶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역량을 요구한다. 요리도, 살림도, 건강도, 감정의 관리도 모두 혼자 감당해야 한다. 그 무게를 가볍게 볼 수 없다. 그래서 더더욱, 자기 자신을 가장 먼저 돌보는 일이 사치가 아니라 생존의 기술이 된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피하고 싶지 않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불안 중 하나는 바로 '혼자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다. 고독사는 특별히 불행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혼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가능성이다. 죽음 그 자체보 다,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내가 이 세상에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 두려움 은 비극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장 솔직한 고백이다. 아마도 그것이 우리가 연결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아무리 자유 롭고 독립적인 삶을 사랑한다 해도, 우리는 결국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고,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남고 싶다. 그 마음을 부끄 럽게 여길 필요는 없다. 그것이 인간이다. 어쩌면 지금 이 시대는 거대한 전환의 한가운데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낡은 제도는 아직 그 자리에 있고, 새로운 삶의 방식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그 사이를 연결해줄 언어와 시스템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 틈새에서 많 은 사람이, 조용히, 이유도 잘 모른 채, 다치고 있다.

하나의 아픔이 다른 아픔을 알아보며, 함께 덜 외로워지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어쩌면, 이 필연적 혼자의 시대를 우리가 살아낼 수 있는 방 법일 것이다. 혼자지만, 혼자가 아닌 방식으로 살아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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팁 프롬 더 탑 - 창작의 기본과 이니셔티브에 관한 원칙 66
켄 양 외 엮음, 정지현 옮김 / 디플롯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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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건축은 인간의 삶을 담아내는 그릇을 빚는 일이며, 사회와 문화, 자연과 인간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중재하는 사유의 실천이다. 책은 전 세계 건축가들의 경험과 철학을 압축하여 담아낸 결과물이다. 비교적 얇 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건축 입문자와 학생들에게 직업적 조언을 넘어선 삶의 방향성을 제시한 다는 점에서 묵직한 울림을 지닌다. 책의 구성 방식은 멘토 박스와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선형적으로 읽는 책이 아니라,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조각을 꺼내어 음미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건축적 삶 자체가 그러한 방식으로 축적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경험은 순서대로 쌓이지 않으며, 지혜는 예기치 않은 순간에 되살아나기 마련이다.

책에서 먼저 눈에 띄는 주제는 '보는 능력'에 대한 강조이다. 건축가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을 상상력으로 감각하는 능력이다. 건축의 바깥, 즉 음악, 문학, 자연, 예술 속에서 '고음의 순간들(high notes)'을 수집하고, 그것을 정신의 카탈로그로 축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시각적 내면의 창고가 결국 새로운 프로젝트의 비전을 만들 어내는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영감을 받으라"는 상투적인 조언과는 결이 다르다. 수동적인 감상이 아니라 능동적인 수집과 내면화이며, 그렇게 형성된 비전을 동료 및 클라이언트와 나누는 합의의 과정이다. 비전은 혼자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이해로 확장될 때 비로소 건축적 힘을 발휘한다는 통찰은 오늘날 협업이 기본값이 된 건축 현장에서 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다. 벡터 아키텍츠의 동공은 이 감수성을 나무의 이미지로 풀어낸다. 뿌리는 땅속 깊이 파고들어 힘을 비축하고, 가지는 바람에 유연하게 흔들린다. 이 긴장 상태가 건축가가 지켜야 할 자세라는 것이다. 사회는 눈부시게 빠르게 변하고, 트렌드는 하루가 다르게 바뀌지만, 빛과 공기, 스케일과 재료감, 분위기와 같은 본질적 가치들은 변하지 않는다. 이 불변의 가치들이야말로 건축을 인간의 몸과 정신에 연결시키는 고리이며, 아무리 혁신적인 디자인도 이 뿌리를 잃으면 공허해진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책의 또 다른 중심 주제는 건축가의 사회적 책임이다. 건축가가 단지 개인의 커리어와 야망에 답하는 존재가 아니라 공공선의 수호자임을 이야기한다. 오늘날의 시대적 맥락, 즉 사회적 불평등과 환경적 위기가 교차하는 현실 속에서 건축가의 책임이 그 어느 때보다 무겁다고 강조한다. 환경, 회복력, 지속 가능성은 결국 건축가의 손에서 결정된다. 좋은 디자인이 특권층만의 향유물이 아니라 민주 사회에서 모든 시민이 누릴 권리임을 선언한다. 흥미로운 것은 규모와 명성은 중요하지 않다고 단언한다는 점이다. 화려한 예산을 가진 프레스티지 프로젝트가 아니라, 일상의 주변부에 놓인 소박하지만 절실한 공간들, 그 '고귀한 프로젝트들(noble projects)에서 오히려 진정한 건축적 탁월함이 발현된다는 것이다. 이 관점은 건축 교육이 종종 화려한 스타 건축과 프리츠커상 수상자들의 작업에 집중하는 경향에 대한 조용한 반론이기도 하다. 지역사회 도서관 한 채, 접근성이 개선된 공중 화장실 하나가 누군가의 삶을 실질적으로 바꾼다면, 그 설계 행위는 어떤 아이콘 건물보다 윤리적으로 더 강렬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건축이 '문제 해결'이며, 단순하고 시공 가능하며 통합적인 해결책이야말로 아름다움이 라고 말한다. 독창성은 과대평가되어 있지만, 혁신은 우아하고 진보적인 디자인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은 젊은 건축가들이 되새겨볼 만한 가르침이다.

건축의 본질을 '깊은 호기심'으로 정의한다. 불확실성과 씨름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하나의 답을 고집하는 것보 다 더 많은 질문을 발견하는 것이 더 만족스럽다고 고백한다. 이 역설적인 태도, 즉 해결책을 찾으면서도 새로운 의문을 품는 능력이 디자인을 살아있게 만든다. 자기 자신에 대한 호기심도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왜 나는 건축을 하는가? 수년간의 교육이 내게 무엇을 남겼는가? 그리고 아무도 가르쳐줄 수 없는 나만의 고유한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정직한 탐색이 결국 진정성 있는 건축을 만들어낸다. 이 호기심과 탐구 정신을 통해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는 자에 머물지 말고, '해결할 가치가 있는 문제를 만드는 자'가 되라고 촉구한다. 건축가의 역할을 수동적 서비스 제공자에서 능동적 의제 설정자로 전환하는 선언이다. 하이라인 프로젝트를 통해 뉴욕시 행정부와 긴밀히 협력하며 도시를 변화시킨 경험은, 급진적인 비전이 제도 안에서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증적 사례이기도 하다. 건축을 예술적, 사변적 문화 실천으로 추구할 때 마주치는 수많은 장벽들, 즉 재정적 불안정, 사회적 몰이해, 반복되는 좌절들을 직시하면서도, 이 길을 걷게 만드는 세 가지 필수 자질로 재능, 지성, 그리고 불굴의 의지를 꼽는다. 특히 의지, 즉 실패와 지연을 흡수하고 다시 일어서는 능력이 장기적으 로 가장 결정적인 요소임을 강조한다.

책이 출간된 현 시점은 인공지능이 창작과 노동의 경계를 허물고 있는 격변의 시기와 맞닿아 있다. 책은 AI에 대한 건축 업계의 복잡한 심경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흥분과 불안이 공존하는 이 기술은, 마치 특수 임무를 위해 파견하는 탐사선처럼 인간이 단독으로는 도달하지 못할 영역의 실마리를 제공하지만, 동시에 문화적 다양성의 배제와 저작권 침해라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특히 AI 학습 데이터가 특정 문화권에 편향되어 있다는 우려는 건축적으로도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건축은 문화의 물질적 표현이다. 만약 AI가 특정 서구 중심의 미학적 패턴만을 학습한다면, 그것이 생성하는 건축적 제안들은 지역성과 문화적 맥락을 소거한 균질화된 공간을 양산할 위험이 있다. 건축이 오랫동안 수호해온 장소성(place-making)의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널리스트들이 공유한 공통된 정서는 '비관보다는 낙관'이었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낙관과 호기심이 공통의 지반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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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새를 보았다고 믿은 남자
켄 코프먼 지음, 조주희 옮김 / 일레븐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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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존 제임스 오듀본(John James Audubon)의 이름은 북미 조류학사에서 거의 신화에 가깝다. 1827년부터 출판된 그의 대작 <아메리카의 새들(Birds of America)>은 실물 크기의 수채화로 그려진 435점의 조류 초상화를 담고 있으며, 이후 200년 가까이 조류 예술의 기준점으로 군림해 왔다. 그의 그림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동감을 포착한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 불멸의 작업에도 빈자리가 있었다. 19세기 북미의 자연을 그토록 열정적으로 기록하려 했던 오듀본이, 분명히 마주쳤을 법한 수많은 새를 그리지 않았거나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지나쳤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켄 카우프만(Kenn Kaufman)의 신작 <모든 새를 보았다고 믿은 남자>는 오듀본의 전기를 다시 쓰거나 그의 실수를 나열하려는 것이 아니다. 책은 초기 북미 조류학의 역사 전체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조명하면서, 과학적 발견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우연적이며 때로는 의도적으로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카우프만은 발견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카우프만이 그리는 19세기 초 북미 조류학의 세계는 순수한 지적 탐구의 공간이 아니었다. 알렉산더 윌슨(Alexander Wilson), 찰스 루시앵 보나파르트(Charles Lucien Bonaparte), 존 타운센드(John Townsend) 같은 자연학자들이 경쟁적으로 새로운 종을 발견하고 기록하려 했던 그 시대는, 명성과 금전적 이익, 그리고 학문적 선취권을 둘러싼 치열한 각축장이기도 했다. 특히 오듀본과 윌슨 사이의 필라델피아에서의 갈등은 이 시대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카우프만은 이를 '필라델피아에서의 불화'라는 장에서 생생하게 다루는데, 그것은 개인적 반목이 아니라 당대의 과학적·사회적 권력 구조가 빚어낸 필연적 충돌이었다. 이 시대의 자연학자들이 새를 '발견'하는 방식은 오늘날의 조류 관찰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쌍안경도 없이, 때로는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가 채집해 온 표본 하나에 의존해 종을 동정하거나, 이미 기술된 종을 새로운 종으로 잘못 발표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카우프만은 도요새류, 솔새류, 개똥지빠귀류 등 당시에도 혼란스러웠고 지금도 여전히 조류 관찰자들을 어렵게 만드는 분류군들을 추적하면서, 그 혼동의 역사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스마트폰도, 이베드(eBird)도, 심지어 제대로 된 쌍안경조차 없던 시대의 조류학자들이 이 작은 생명체들을 얼마나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겠는가라는 공감 어린 시선이 책 전반에 흐른다. 오듀본의 실수 중 일부는 정직한 오류였지만,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이미 기술된 새를 새로운 종인 것처럼 발표하기도 했고, 동료들의 경험을 자신의 것인 양 삽입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워싱턴의 새(Bird of Washington)'처럼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새를 완전히 만들어내기도 했다. 카우프만은 이러한 행위들을 단순히 시대의 산물로 용인하지도, 그렇다고 오늘날의 기준으로 일방적으로 단죄하지도 않는다. 그는 오듀본을 입체적으로 바라본다. 예술적 천재성과 도덕적 결함, 대담한 탐구 정신과 노예제도에 대한 가담이라는 모순적 요소들을 모두 안고 있는 복잡한 역사적 인물이다.

책의 중심부에는 오듀본이 마주쳤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기록하지 못한 새들의 이야기가 자리한다. 스웨인슨개똥지빠귀, 회빰개똥지빠귀, 필라델피아비레오, 카스피해제비갈매기, 달팽이연, 캐롤라이나박새, 두꺼운부리멧새, 커크랜드솔새 등이 그 목록에 포함된다. 이 새들이 놓쳐진 이유는 다양하다. 일부는 지나치게 눈에 띄지 않아서, 일부는 비슷하게 생긴 종과 구별하기 어려워서, 또 일부는 단순히 지리적·계절적으로 엇갈렸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흥미로운 것은 1837년 오듀본의 텍사스 방문 이야기다. 그는 정부 선박을 타고 갤버스턴과 휴스턴 지역을 방문했는데, 오늘날 조류 관찰자들이 환상적인 철새 이동을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바로 그 지역, 그 시기에 있었다. 그러나 오듀본은 루이지애나와 큰 차이가 없다고 판단하고 해안을 따라 200마일만 더 내려가면 만날 수 있었을 수많은 새로운 종들을 외면했다. 카우프만은 안타까움을 숨기지 않는다. 만약 오듀본이 그 200마일을 더 갔다면, 초록어치나 다른 남부 텍사스 특산종들을 담은 그림이 탄생했을 것이라는 상상이 책 속에 생생히 펼쳐진다. 카우프만이 제기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관점은 '발견'의 개념 자체에 대한 재고다. 유럽계 자연학자들이 '발견'했다고 기록한 수많은 새들은 사실 수천 년 전부터 이 땅에 살아온 원주민들에게 이미 알려진 존재들이었다. 카우프만은 이 점을 명시적으로 지적하면서, 진정한 발견이란 누군가에게는 재발견에 불과할 수 있음을 환기한다. 이는 과학적 발견의 역사에 내재된 식민주의적 시각을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비판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책에서 가장 독특하고 매력적인 부분은 카우프만이 오듀본이 놓친 새들을 직접 오듀본의 화풍으로 그려보려 했다는 점이다. 그는 오듀본이 사용한 것과 같은 도구와 종이를 구해 수채화로 15종 가까운 새들을 그리려 시도했고, 그 과정을 '삽화가를 따라서(Channeling the Illustrator)'라는 짧은 막간 장들에 기록한다. 이 시도는 처음부터 겸허한 고백으로 시작된다. 카우프만은 자신의 최선의 시도조차 오듀본의 가장 부족한 작품 수준에 겨우 도달했을 뿐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이 실패의 경험은 자기 비하가 아니다. 오히려 직접 붓을 들고 씨름하면서 카우프만은 오듀본의 그림에 더 깊이 다가갈 수 있었다. 새를 포착하는 방식, 식물과의 구도, 화면 속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방법 등을 몸소 체험함으로써 그는 오듀본의 천재성을 학술적 분석이 아닌 실천적 경험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오늘 자연으로 나갈 보고자 한다. 새소리가 기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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