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새를 보았다고 믿은 남자
켄 코프먼 지음, 조주희 옮김 / 일레븐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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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존 제임스 오듀본(John James Audubon)의 이름은 북미 조류학사에서 거의 신화에 가깝다. 1827년부터 출판된 그의 대작 <아메리카의 새들(Birds of America)>은 실물 크기의 수채화로 그려진 435점의 조류 초상화를 담고 있으며, 이후 200년 가까이 조류 예술의 기준점으로 군림해 왔다. 그의 그림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동감을 포착한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 불멸의 작업에도 빈자리가 있었다. 19세기 북미의 자연을 그토록 열정적으로 기록하려 했던 오듀본이, 분명히 마주쳤을 법한 수많은 새를 그리지 않았거나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지나쳤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켄 카우프만(Kenn Kaufman)의 신작 <모든 새를 보았다고 믿은 남자>는 오듀본의 전기를 다시 쓰거나 그의 실수를 나열하려는 것이 아니다. 책은 초기 북미 조류학의 역사 전체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조명하면서, 과학적 발견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우연적이며 때로는 의도적으로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카우프만은 발견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카우프만이 그리는 19세기 초 북미 조류학의 세계는 순수한 지적 탐구의 공간이 아니었다. 알렉산더 윌슨(Alexander Wilson), 찰스 루시앵 보나파르트(Charles Lucien Bonaparte), 존 타운센드(John Townsend) 같은 자연학자들이 경쟁적으로 새로운 종을 발견하고 기록하려 했던 그 시대는, 명성과 금전적 이익, 그리고 학문적 선취권을 둘러싼 치열한 각축장이기도 했다. 특히 오듀본과 윌슨 사이의 필라델피아에서의 갈등은 이 시대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카우프만은 이를 '필라델피아에서의 불화'라는 장에서 생생하게 다루는데, 그것은 개인적 반목이 아니라 당대의 과학적·사회적 권력 구조가 빚어낸 필연적 충돌이었다. 이 시대의 자연학자들이 새를 '발견'하는 방식은 오늘날의 조류 관찰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쌍안경도 없이, 때로는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가 채집해 온 표본 하나에 의존해 종을 동정하거나, 이미 기술된 종을 새로운 종으로 잘못 발표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카우프만은 도요새류, 솔새류, 개똥지빠귀류 등 당시에도 혼란스러웠고 지금도 여전히 조류 관찰자들을 어렵게 만드는 분류군들을 추적하면서, 그 혼동의 역사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스마트폰도, 이베드(eBird)도, 심지어 제대로 된 쌍안경조차 없던 시대의 조류학자들이 이 작은 생명체들을 얼마나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겠는가라는 공감 어린 시선이 책 전반에 흐른다. 오듀본의 실수 중 일부는 정직한 오류였지만,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이미 기술된 새를 새로운 종인 것처럼 발표하기도 했고, 동료들의 경험을 자신의 것인 양 삽입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워싱턴의 새(Bird of Washington)'처럼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새를 완전히 만들어내기도 했다. 카우프만은 이러한 행위들을 단순히 시대의 산물로 용인하지도, 그렇다고 오늘날의 기준으로 일방적으로 단죄하지도 않는다. 그는 오듀본을 입체적으로 바라본다. 예술적 천재성과 도덕적 결함, 대담한 탐구 정신과 노예제도에 대한 가담이라는 모순적 요소들을 모두 안고 있는 복잡한 역사적 인물이다.

책의 중심부에는 오듀본이 마주쳤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기록하지 못한 새들의 이야기가 자리한다. 스웨인슨개똥지빠귀, 회빰개똥지빠귀, 필라델피아비레오, 카스피해제비갈매기, 달팽이연, 캐롤라이나박새, 두꺼운부리멧새, 커크랜드솔새 등이 그 목록에 포함된다. 이 새들이 놓쳐진 이유는 다양하다. 일부는 지나치게 눈에 띄지 않아서, 일부는 비슷하게 생긴 종과 구별하기 어려워서, 또 일부는 단순히 지리적·계절적으로 엇갈렸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흥미로운 것은 1837년 오듀본의 텍사스 방문 이야기다. 그는 정부 선박을 타고 갤버스턴과 휴스턴 지역을 방문했는데, 오늘날 조류 관찰자들이 환상적인 철새 이동을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바로 그 지역, 그 시기에 있었다. 그러나 오듀본은 루이지애나와 큰 차이가 없다고 판단하고 해안을 따라 200마일만 더 내려가면 만날 수 있었을 수많은 새로운 종들을 외면했다. 카우프만은 안타까움을 숨기지 않는다. 만약 오듀본이 그 200마일을 더 갔다면, 초록어치나 다른 남부 텍사스 특산종들을 담은 그림이 탄생했을 것이라는 상상이 책 속에 생생히 펼쳐진다. 카우프만이 제기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관점은 '발견'의 개념 자체에 대한 재고다. 유럽계 자연학자들이 '발견'했다고 기록한 수많은 새들은 사실 수천 년 전부터 이 땅에 살아온 원주민들에게 이미 알려진 존재들이었다. 카우프만은 이 점을 명시적으로 지적하면서, 진정한 발견이란 누군가에게는 재발견에 불과할 수 있음을 환기한다. 이는 과학적 발견의 역사에 내재된 식민주의적 시각을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비판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책에서 가장 독특하고 매력적인 부분은 카우프만이 오듀본이 놓친 새들을 직접 오듀본의 화풍으로 그려보려 했다는 점이다. 그는 오듀본이 사용한 것과 같은 도구와 종이를 구해 수채화로 15종 가까운 새들을 그리려 시도했고, 그 과정을 '삽화가를 따라서(Channeling the Illustrator)'라는 짧은 막간 장들에 기록한다. 이 시도는 처음부터 겸허한 고백으로 시작된다. 카우프만은 자신의 최선의 시도조차 오듀본의 가장 부족한 작품 수준에 겨우 도달했을 뿐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이 실패의 경험은 자기 비하가 아니다. 오히려 직접 붓을 들고 씨름하면서 카우프만은 오듀본의 그림에 더 깊이 다가갈 수 있었다. 새를 포착하는 방식, 식물과의 구도, 화면 속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방법 등을 몸소 체험함으로써 그는 오듀본의 천재성을 학술적 분석이 아닌 실천적 경험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오늘 자연으로 나갈 보고자 한다. 새소리가 기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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