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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의심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9년 2월
평점 :
합리적의심 (2019년 초판)
저자 - 도진기
출판사 - 비채
정가 - 13800원
페이지 - 306p
합리적 의심 없는 입증의 원칙 : 의심스러운 때에는 피고인의 이익을 따른다는 원칙에 근거, 피고인이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존재한다면 판사는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
실제로 부장판사를 지내고 현재는 변호사로 활동중인 소설가 도진기의 신작이 출간되었다. 개인적으로 본업을 두고 소설가를 병행하는 국내 작가중 가장 깊이있고 뛰어나면서 재미를 놓치지 않는 작품을 써내는 상업작가로 도진기 작가를 손꼽는다. 수많은 범죄와 맞닿아있는 판사라는 직업적 특성도 있겠지만 현업작가와 견주어도 떨어지지 않는 치밀한 사건구성과 짜임새 있는 플롯 아래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반전을 숨겨놓는 추리작가로서의 기교는 이미 완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작가의 작품이라고는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과 [정신자살] 달랑 두 권만 읽었지만 정통추리소설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과 추리소설의 탈을 쓴 초현실 고어소설 [정신자살]만 보아도 이 사람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란건 누구나 알 수 있으리라...그런 그의 이번 신작은 법정소설이다. 전직판사로 있었던 작가의 경험과 고뇌를 십분 작품에 녹여낼 수 있고, 누구보다 사실적으로 법정현장을 그려낼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작품에 대한 기대치는 한껏 높아진다. 더군다나 판사시절 원고를 탈고했으나 출간하지 않고 있다가 법복을 벗고 변호사가 되어서야 작품을 출간했다는 출판사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었을땐 일종의 어떤'감'을 느꼈던것 같다.
'이거 진짜 대박이겠구나!' 라고....-_-
작품을 다 읽은 지금 나의 '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언급한다. 최소한 법정미스터리에 한해서는 우리와는 다른 나라의 상황에서 비롯되는 이질적 감정이 전혀 없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지극히 한국적 감정에서 비롯된 공감을 이끌어 내는 작품이다. 대부분의 법정미스터리가 범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변호사를 주역으로 내새운 작품들인 반면 법정내 최고의 상석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의사를 결정짓는 판사라는 직업을 가장 잘 표현해낸 작품이라 생각된다. 작품을 통해 그동안 알지 못했던 판사라는 조직과 체계, 그들의 행동 매커니즘에 대해 조금은 알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배테랑 부장판사 현민우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두 명의 배석판사와 함께 쉴틈없는 재판일정을 보낸다. 그러던중 세상에서 떠들썩한 젤리살인사건의 판사로 배정되고, 판사로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립적 입장을 고수하려 노력하면서 첫 심리에 들어간다. 평소 주량을 넘어서는 술을 나눠마신 커플이 모텔에가고, 모텔에서 한차례 더 술을 마신뒤 정신이 없을때즈음...젤리를 삼킨 남자친구가 질식하는 모습을 발견한 여자친구는 급히 모텔 종업원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종업원이 남자를 들쳐업고 병원에 달려갔으나 호흡정지로 뇌사에 빠진 남자는 입원 15일만에 목숨을 잃는다. 남자의 가족은 별의심 없이 사고사로 판단하여 남자를 화장하고 불행한 기억을 잊으려 노력하는데, 사고 50여일뒤 남자의 가족에게 날라온 한통의 보험금 지급통지서...그런데 사망보험금 3억의 지급자가 여자친구?....그로인하여 수사가 시작되고 여자친구가 남자친구의 살인범으로 재판에 오른것이다. 모든 정황들이 여자친구가 범인이라 지목하고 있지만 살인범으로 확정지을 수 있는 결정적 증거는 없는 상황...피고인을 100% 범인으로 확정지을 수 없는 '합리적 의심'이 현민우 판사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무죄추정의 원칙과 합리적 의심 없는 입증의 원칙과 인간으로서 범인이라 판단할 수 밖에 없는 정황들 사이에서 고심하고 고뇌하던 현민우 판사의 판결은?......
표지의 시뻘건 젤리가 대체 무슨 의미인가 싶었는데...젤리질식살인사건을 의미하는 것일 줄이야...그런데...시사프로그램을 즐겨보는 이라면 이 젤리사건이 실존사건을 모티브로 했다는 것을 손쉽게 알아챌 것이다. [그것이 알고싶다], [궁금한 이야기 Y]에서 다루어지며 수많은 대중들의 공분을 샀고 재판결과를 통해 또한번 커다란 논란이 되었던 사건...바로 낙지 살인사건이다. (물론 작품에서는 실제사건의 모티브만 땄을뿐 실제와는 많은 부분 다르게 변형시킨다.)
실존사건을 모티브로 하는 만큼 이야기의 깊이 있는 리얼리즘에 더욱 몰입하게 되고, 그 무게에 힘이 실리는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의 사건을 바라보는 판사로서의 시선과 대중들과 같은 일반인으로서의 시선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으니 어찌보면 판사들의 고뇌와 애환을 엿볼 수 있었던것 같기도 하다. 그저 남들보다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법복을 입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심판하는 판사...언제나 냉철하고 냉정하게 사실에 입각하여 판단해야 하지만...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일뿐이다. 검은 법복에 가려져 굳은 얼굴로 사건을 청취하지만 그들의 머리속은 검사와 변호사의 공방에 쉴새없이 이러저리 휘둘린다. 그리고 모든 사실들을 종합하여 결론을 내려야할 시간...그들은 진정 한치의 오점없이 정의를 위해 판사봉을 휘둘렀다고 말할 수 있을까?...겨우 한 명의 부장판사와 두 명의 배석판사라는 3명의 의견을 통해서 말이다. 작품은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이 오판을 내릴 수도있는, 지극히 계급적이고 폐쇄적인 조직의 분위기, 외압에 의해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도 있는 현 사법부 재판시스템에 의문을 던지고, 그들의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반면 재판을 통해 억울하게 벌을 받는일을 막기위해 마련된 절대적 증거주위라는 제도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범죄자를 비추며 현재의 사법재판이 갖는 헛점을 꼬집어 내기도 한다. 100% 확증에 의한 범인을 입증하지 못해 범인은 무죄를 선고받아 발뻗고 편히살고, 피해자의 가족은 어쩔 수 없이 쓰디쓴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분통터지는 엿같은 상황...죄인을 벌하기 위해 자신들의 권한을 위임하여 만들어진것이 재판이라는 측면에서 볼때 이런 상황은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 아닌가...그런면에서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시리즈의 심신미약자는 처벌하지 못하는 일본의 형법 제39조와도 연계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물론...'도진기'작가의 작품답게, 첨예한 사건을 대하는 판사의 인간적 고뇌만을 담은 법정물은 절대 아니다. 무려 [정신자살]의 싸이코틱한 충격적 결말을 던진 '도진기'작가가 아닌가!! 이 작품 역시 결말부에 전혀 예상치 못한 반전으로 전신이 감전된듯한 전율을 선사한다. 260여페이지의 심도깊은 법정공방에 이어 마지막 40여페이지에 반전 때리는 미스터리가 독자의 뒷통수를 후려갈기니...현민수 판사의 인간적 입장으로 독자의 생각과 시선을 가둬놓은 후 결말에서야 가려져있던 시선 밖의 진실을 느닷없이 턱!하고 내놓아 충격적 진실을 날카로운 쾌감으로 뒤바꿔 버리는 작가의 영리함에 속절없이 휘둘리게 되는 것이다. 전직판사로 이 작품의 출간을 망설였던 자각의 마음이 십분 이해된다. 이렇게 사법부 최고조직인 재판부의 불편하고 적나라한 면을 긁어내는 작품이 있었던가...그런의미에서 내게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사회파 법정 미스터리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