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다른 곳에서 마주한 같은 이름들. 그 때문에 빚어진 오해와 이해에 대한 궁시렁거림이다.

 

    

* 이 미쓰비시는 그 미쓰비시가 아니었다!’

 

나이를 먹어서까지 나잇값을 못하고 연필 냄새에 깊이 탐닉하던 나는 얼마 전부터 연필 덕후로 커밍아웃을 하고 연필 카페에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미쓰비시라는 일본 필기구 회사가 있다. 거기서 만드는 하이엔드급 연필들은 높은 품질로 아주 유명하다. 그럼에도 내가 최근까지 미쓰비시 연필을 써보지 못한 이유는 그 바디에 찍혀있는 선명한 다이아몬드 로고 때문이다. 악명 높은 미쓰비시사의 쓰리 다이아몬드 로고. 전범기업 미쓰비시의 제품을 팔아줄 수 없다면서 문방구에서 허벅지를 꼬집으면서 돌아서기가 여러 번, 호기심과 소소한 역사의식 사이에서 늘 딜레마에 처하곤 했다. 그런데 최근에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 ‘이 미쓰비시는 그 미쓰비시가 아니었다!’ 연필을 만드는 미쓰비시 연필주식회사는 전법기업인 미쓰비시 중공업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기업이라는 것을 최근 연필 덕후질을 하다가 알게 되었다. 이름과 로고가 같은 것도 어디까지나 우연. 재벌인 미쓰비시 중공업에서 한때 미쓰비시 연필주식회사를 합병하려고 했다는 설도 있으나 어쨌든 사업 영역이 겹치지 않는 관계로 지금까지 같은 상표를 써오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같은 이름에서 비롯된 하나의 오해는 행복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지금까지의 맘고생(?)을 보상하듯 미쓰비시 연필들을 잔뜩 지르는 것으로.

 

 

 

 

 

* 얼마 전 새로 나온 책들을 검색하니 오에 겐자부로의 만엔 원년의 풋볼이 새 단장 되어 나온 것이 눈에 띄었다. 젊은 시절 한때 탐닉한 적이 있는 작가라서 가끔 새 책이 나오면 매우 반갑다. 탐닉은 했지만 지금에 와서 별로 한 마디 할 거리가 없다는 것이 함정이면 함정이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매우 난해한 관계로) 그래도 일본 제국의 변두리인 자기 고향 시코쿠의 역사와 신화에 천착하고, 한 언어가 다른 언어로 옮겨지는 과정의 긴장에 주목함으로서 중심의 중력에 저항하고자 하는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알다시피 매우 난해한 관계로) 그의 작품세계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굳이 반핵 운동이나 평화헌법 9조를 지키는 활동 같은, 작품 외적인 모습 등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이번엔 새삼 만엔 원년의 풋볼의 번역자가 박유하인 것이 눈에 딱 띠었으니..... 박유하, 박유하....눈에 익은 이름. 제국의 위안부의 그 박유하?? 왠지 모르게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알라딘을 검색해보니 맞다!

 

이 박유하는 그 박유하가 맞았다!’

 

찾아보니 내가 가지고 있는 고려원판 만엔 원년의 풋볼도 박유하 번역본이다. 그것이 2007년도에 웅진지식하우스에서 다시 출간되고 올 4월에 동일 출판사에서 개정판이 나온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오에 상의 책들을 찾아보니 이외에도 아름다운 에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익사가 박유하의 번역이다. 둘 다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고 아름다운 에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제국의 위안부가 문제되기 이전에 나왔지만 익사제국의 위안부의 삭제개정판이 나온 것과 같은 해인 2015년에 나왔다. 그 외에 내가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인생의 친척도 같은 이의 번역이다. 박유하는 소세키 전문가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오에 겐자부로의 책도 네 권이나 번역을 한 것이다.

 

그래서...그래서...

찜찜하다.

오에 겐자부로와 박유하라는 조합이. 고개를 돌릴 때마다 내 책꽂이에 꽂힌 박유하가 번역한 책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마치 이 미쓰비시를 그 미쓰비시로 오해하고 있을 때 연필에 박힌 쓰리 다이아몬드 로고가 몹시 불길하게 내 눈에 들어와 박히던 것처럼.

 

 

 

 

* 얼마 전 제국의 위안부2심에서는 명예 훼손 혐의에 대해서 유죄가 선고되었다. 당사자인 박유하 교수는 일관되게 억울함을 말한다. 이것저것 검색해보다가 구명을 위한 거점인 것으로 보이는 박유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구구절절이 오해라고 말하고 있다. 과연 오해일까 라는 의심이 강하지만 (그의 해명들이 내 눈에는 자꾸만 텍스트와 텍스트 행간 너머에 존재하는 유령과도 같은 의도를 소환하는 것처럼 보인다) 제국의 위안부를 읽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함부로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참에 도서관에서 제국의 위안부초판을 빌려서 읽어봐야겠다.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등도 같이 찾아 읽어봐야겠고.

그러나 저자인 박유하 교수가 더 이상의 삭제를 거부함으로써 이 책이 자발적 금서가 될 위기에 놓인 것은 매우 유감이다.

 

 

미쓰비시에 대한 나의 오해는 오해인 것으로 밝혀지면서 행복한 결말을 맞았다. 그러나 박유하에 대한 오해는 오해로 결말이 날 수 있을까? 덕분에 내 책장의 한쪽이 매우 불길하다. 그렇지만 나는 그 불길함을 내 책장을 구성하는 한 요소로 받아들일 것이다. 가끔 한 번씩 째려보기는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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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1-04 18: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쓰비시 연필이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어요. 고려원에 나온 오에 겐자부로 전집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저는 《동시대 게임》만 가지고 있어요. ^^

풀꽃놀이 2017-11-04 20:21   좋아요 1 | URL
전집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구요...저도 중고 끝물에 한권한권 모은 것입니다. 많이 모으지는 못했습니다^^

닷슈 2017-11-10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흐비시볼펜도무관하겠죠?

풀꽃놀이 2017-11-10 20:59   좋아요 1 | URL
네~~ 볼펜도 미쓰비시 연필 주식회사에서 생산하는 제품입니다^^

닷슈 2017-11-10 21:04   좋아요 0 | URL
다행이군요 그걸 애용하거든요
 
Ici au loin : Photographies 1964-2011 (Album)
Pentti Sammallahti / Actes Sud Editions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이 고요하고 충만한 세상이여
여기, 저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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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너를 저 높은 곳에 올라가도록 만들었을까

아무도 보아주지 않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곳
누가 너를 이 높은 곳에 올라가도록 만들었을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곳
같은 얘기를 목이 쉬게 같은 길을 발이 부르트게
걸어도, 벽이 높아서 나는 오를 수밖에 없어
차갑게 퍼붓는 비보다 마음 속에 내리는 비가
나를 떨게해, 이제 앞엔 떨어지는 길만 남은 걸까

바래왔던 건 아주 작은,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따스한 집에 돌아가는 것
바래왔던 건 아주 작은, 땀방울의 소중함을 알고
아름다운 미소를 알며 따스한 네게 돌아가는 것

누가 너를 저 높은 곳에 올라가도록 만들었을까
누가 너를 저 높은 곳에 올라가도록 만들었을까

-----<누가 너를 저 높은 곳에 올라가도록 만들었을까>, <<오지은 3집>>


https://youtu.be/gSfmk9Ar3Fo

*


인간 존엄성이 바닥에 내쳐지고 짙뭉개질 때
사람들은 높은 곳에 오른다.
지상에서 거처할 공간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하늘 가까운 곳으로 오른다.
공부기계로 전락해 꿈을 잃은 아이들이 아파트 옥상에 오르고
하루 아침에 일터를 빼앗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타워크레인에 오른다.

1월 20일이다.
7년 전 용산 남일당 망루에도 그 높은 곳에 오른 사람들이 있었다.
6명이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감옥에 갔다.
당시 살인진압에 나섰던 공권력은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고 최소한의 사과조차도 없었다.
7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진압 책임자는 국회의원이 되려고 선거에 출마한다고 한다.

이 부도덕한 국가권력 하에서 작년에도 한 농민이 물대포에 맞아 의식불명이 되었다.
역시 사과도 책임자 처벌도 없었다.

누군가가 또다시 외로이 망루에 올라 죽어가지 않게 하려면
우선 물어야한다. 무엇이 그들을 저 높은 곳에 오를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는지...누가 그들이 깃들 장소를 빼앗고 몰아냈는지...물어야한다. 집요하게 물어야만 한다.
그러나...지금 우리는...
어떤가?


*


인권은 공간을 이미 품고 있다. `인권의 사각지대`는 단순히 은유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공간에서, 공간을 통한, 공간/장소를 위한 연대가 필요하다. `몫 없는 자`가 외치는 몫은 자리이고 장소이고 공간이다. 그러나 이것은 훌륭한 도시 계획으로 모두를 위한 공간을 만들거나, 모두의 의견을 듣는 민주적 절차를 거쳐 공간을 기획하거나 하는 이야기와 다르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몫 없는 자`가 요구하는 몫은 기존의 틀 안에서의 분배가 아니라 다른 틀이다.
- - - - -
인권이 실현되는 공동체에 대한 권리가 곧 인권이며, 이러한 정치공동체는 어떤 형식으로든 공간의 경계를 함축한다. 거기에는 누군가가 어디엔가 있다. 공간과 인권은 만나야 하며, 이미 만나고 있다. 공간이 인권을 안고 인권이 공간을 품어야 할 때다.
------pp94~95 <제 3장 누가 어디에 있나요?>, <<공간주권으로의 초대>>




*

지금..오늘..누가 어디에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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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강하고 시는 소멸을 향해 간다. 고도자본주의 사회에서 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 화폐의 순환이라는 거대한 고리에 끼어들지 못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를 옹호해야 한다.


`어떤 시`가 아니라 우선 `시`를 옹호해야 한다. 모든 것을 교환의 논리로 환원해버리는 자본주의의 폐단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바로 그 용인이야말로 시의 종언을 알리는 타종이다. 시가 어떠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우리가 시에 요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시에 자본주의의 `바깥`을 상상해야 한다고 요구해야 한다. 꿈을 깨지 말라고 해야 한다. 그것 이외에는 우리가 시에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시는 우리가 딛고 서 있는 현실을 그려야 하고, 현실이 바뀐만큼 다른 풍경을 그릴 것이다. 그러나 그 외의 것을 시에 요구할 수는 없다. 시가 변하기를, 시의 몸이 바뀌기를, 애플리케이션을 장착하고 다음 스테이지를 준비하기를, 소멸하지 않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시는 이미 소생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이 비관론을 체관으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소멸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소멸할 때 하더라도 시는 이 세계의 `바깥`을 궁리해야 한다. 나는 그런 시를 옹호하고 싶다. 자본주의는 강하지만 그래도 소멸을 향해 가고 있다. 이 시대에 적응해가는 시는 영원한 과거의 시에 머물 것이다.


나는 미래를 낳는 시를 옹호하고 싶은 것이다.


.....p. 43 <시적 환경의 변화와,
환경 부적응자의 이상한 옹호>



김현경씨의 「사람, 장소, 환대」를 읽고 난 참이라
「환대의 공간」 이라는 제목에 확 꽂혔네요.
시가 뭐에 쓰는 물건이냐고 이죽거리던 ` 그 녀석들`과
`시다운` 어떤 것, 변치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굳건히 믿으면서 오늘의 시들을 읽지 않는 분들께 들려드리고 싶은 말이지만...
아마 그 분들은 읽을 일이 없겠죠?

어차피 `시는 소생할 수 없는 운명` 이라는 발설을 듣고나니 외려 맘이 편해지네요.
그래, 나도 환경 부적응자다. 그래서...왜? 뭐...?!




누군가는 학창 시절 이후 처음 시를 읽었다며 하상욱의 시를 들이밀고
시를 읽을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누군가의 카톡 상태표시란에 황인찬의 시구가 올라와있는 요즘,
예전만큼 시를 많이 읽지는 않지만
시에 대한 생각은 많아지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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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씨 2016-01-12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상욱의 시... 누구나 쉽게 접할수 있는 그런 형태의 시.
그렇게 맛을 들이면 좀더 깊은 시의 셰게로 발을 들일수가 있겠죠.
이 책도 궁금해집니다.
 

˝모든 것은 노래한다˝는 마치 ˝관찰의 인문학˝과 짝꿍같다.
한 동네를 새로운 시각으로 성실하게 관찰한 결과를 47장의 아름다운 지도로 보여준다.
길이나 번지수, 뒷골목을 나타낸 지도는 그렇다치더라도 대체 새둥지나 숲에서 보이는 하늘, 신문의 이동경로, 단풍색을 나타낸 지도를 무엇에 쓴다는 말인가?
추천사에 쓰여있는 말처럼 `한마디로 이 지도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러나 `일반적인 지도는 세상을 확고부동한 것처럼 보여주지만` 진짜 `세상은 덧없이 빠르게 변해간다`.
그러므로 이 지도들은 다른 어떤 지도보다 `오히려 훨씬 더 진실에 가까운 모습이다`.

그렇기에 매우 아름답다.
지도라기보다 차라리 시에 가깝다.

지도로도 시를 쓸 수 있다니 놀랄 일이다.
놀라고 있는 내게 저자 우드씨는 이렇게 말할 것만 같다.
자기는 그저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받아적었을 뿐이라고.


*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저자 데니스 우드는 지도학자이다. 시인이나 민요수집가가 아니라.^^
참고로 표지 그림은 이 동네 보일런하이츠의 건물 층수를 나타낸 지도이다. 다시 강조하는데 저자는 지도학자이다. 추상화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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