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너를 저 높은 곳에 올라가도록 만들었을까
아무도 보아주지 않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곳
누가 너를 이 높은 곳에 올라가도록 만들었을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곳
같은 얘기를 목이 쉬게 같은 길을 발이 부르트게
걸어도, 벽이 높아서 나는 오를 수밖에 없어
차갑게 퍼붓는 비보다 마음 속에 내리는 비가
나를 떨게해, 이제 앞엔 떨어지는 길만 남은 걸까
바래왔던 건 아주 작은,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따스한 집에 돌아가는 것
바래왔던 건 아주 작은, 땀방울의 소중함을 알고
아름다운 미소를 알며 따스한 네게 돌아가는 것
누가 너를 저 높은 곳에 올라가도록 만들었을까
누가 너를 저 높은 곳에 올라가도록 만들었을까
-----<누가 너를 저 높은 곳에 올라가도록 만들었을까>, <<오지은 3집>>
https://youtu.be/gSfmk9Ar3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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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존엄성이 바닥에 내쳐지고 짙뭉개질 때
사람들은 높은 곳에 오른다.
지상에서 거처할 공간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하늘 가까운 곳으로 오른다.
공부기계로 전락해 꿈을 잃은 아이들이 아파트 옥상에 오르고
하루 아침에 일터를 빼앗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타워크레인에 오른다.
1월 20일이다.
7년 전 용산 남일당 망루에도 그 높은 곳에 오른 사람들이 있었다.
6명이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감옥에 갔다.
당시 살인진압에 나섰던 공권력은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고 최소한의 사과조차도 없었다.
7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진압 책임자는 국회의원이 되려고 선거에 출마한다고 한다.
이 부도덕한 국가권력 하에서 작년에도 한 농민이 물대포에 맞아 의식불명이 되었다.
역시 사과도 책임자 처벌도 없었다.
누군가가 또다시 외로이 망루에 올라 죽어가지 않게 하려면
우선 물어야한다. 무엇이 그들을 저 높은 곳에 오를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는지...누가 그들이 깃들 장소를 빼앗고 몰아냈는지...물어야한다. 집요하게 물어야만 한다.
그러나...지금 우리는...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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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공간을 이미 품고 있다. `인권의 사각지대`는 단순히 은유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공간에서, 공간을 통한, 공간/장소를 위한 연대가 필요하다. `몫 없는 자`가 외치는 몫은 자리이고 장소이고 공간이다. 그러나 이것은 훌륭한 도시 계획으로 모두를 위한 공간을 만들거나, 모두의 의견을 듣는 민주적 절차를 거쳐 공간을 기획하거나 하는 이야기와 다르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몫 없는 자`가 요구하는 몫은 기존의 틀 안에서의 분배가 아니라 다른 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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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이 실현되는 공동체에 대한 권리가 곧 인권이며, 이러한 정치공동체는 어떤 형식으로든 공간의 경계를 함축한다. 거기에는 누군가가 어디엔가 있다. 공간과 인권은 만나야 하며, 이미 만나고 있다. 공간이 인권을 안고 인권이 공간을 품어야 할 때다.
------pp94~95 <제 3장 누가 어디에 있나요?>, <<공간주권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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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오늘..누가 어디에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