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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소설가 -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평점 :
소설과 소설가(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
현대 터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오르한 파묵, 열여덟살에서 서른살까지 독학으로 공부한 그의 소설쓰기 공부는 도스토옙스키, 토마스 만, 제임스 조이스, 마르셀 프루스트, 윌리엄 포크너 등의 위대한 작가들의 소설을 읽으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의 두번째 삶이라 말하는 소설에서 현실보다 더 사실적인 소설의 세계에 빠져드는 우리의 순진함과 착각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리는 소설을 읽으면서 때때로 현실로 착각하기도 하고, 때때로 소설속에 완전히 몰입하여 소설속의 세계에 빠져들기도 한다. 소설을 읽을때 우리의 머릿속에서는 도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우리는 한 페이지 뒤에서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 가운데 한 명인 시장과 마주하게 되고, 곧 그의 성격을 알게 되지요. 소설읽기의 진정한 희열은 세계를 외부가 아니라, 안에서, 그 세계에 속한 등장인물의 눈으로 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다른 그 어떤 문학 형식도 제공하지 못하는 속도로, 전체 풍경과 찰나의 순간을, 일반적인 생각과 특별한 사건 사이를 오갑니다. 풍경화를 멀리서 볼 때면 우리는 순간적으로 풍경 속 사람들의 생각과 미묘한 분위기를 알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p18
그는 인위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이러한 유의 독자와 작가를 '소박한 사람', 그리고 이것과 정 반대되는 감성, 소설을 쓸때 사용되는 방법과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특별하게 관심을 두는 독자와 작가를 '성찰적인 사람'이라 말한다. 소설의 창작은 소박한 동시에 성찰적인 일이기도 하다.
소설을 쓰는 작가가 묘사한 세계에 대한 언급 중에서, 마치 운전할 때 자신이 하는 동작을 의식하지 못하는 운전자처럼, 우리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의식하지 못하는 소박한 독자, 반대로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대해, 유리에 묻은 진흙까지도 한정되어있다고 보는 성찰적인 소설가.
파묵씨 당신은 이런 것들을 정말로 경험했나요?
"집에 가기는 가는데, 난 여기 살지 않는걸..."
"정말이야? 난 자네 소설을 읽을 때 주인공 케말이 그의 어머니와 이곳에 함께 살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러다 나도 모르게 자네도 어머니와 함게 이곳으로 이사왔다고 생각했나 봐."
작가의 책을 읽은 사람들은 간혹 작가의 작품속 인물과 작가의 실제 생활을 동일시하기도 한다. 그리곤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작가는 작가의 경험들을 허구의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반영하기도 하고, 개인적인 삶에 의한 경험들을 소설속에 투영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으로 작가와 소설 사이의 허구에 대한 이해를 은연중에 느끼게 된다. 소박한 작가나 성찰적인 작가 모두 소설의 모호함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 개그는 개그일뿐?이라는 말처럼 소설은 소설이니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느끼기 바라면서.
소설은 기본적으로 시각적 문학입니다. 소설은 주로 우리의 시각적 지능, 즉 사물들을 눈앞에 떠올리고 단어를 머릿속에서 그림으로 전환하는 능력에 호소하여 우리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다른 문학 장르와 비교했을 때, 소설은 우리의 평범한 인생 경험과 대로는 알아차리지도 못했던 감각에 대한 기억에 의존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 고 있습니다 p92
작가가 말하는 시각적인 혹은 단어적인 소설의 분석에서, 우리의 상상력의 산물인 소설을 통해 그림을 그리고 계속된 영상들을 전환시킨다. 작아의 <내이름은 빨강>속의 주인공들처럼 색과 사물들까지 말을 하도록 한다면 독자들은 역시 그 곳으로 들어가 간접 경험을 통해 폭 넓은 경험을 하게 된다. 단어적 방면에 치우친 괴테의 문학적 재능이나 톨스토이 작품속 안나의 시각적 묘사, 두 종류의 소설 모두 명확하게 구분되어진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건간에 그림처럼 명확하지 않은 소설은 평론가들이 떠들기 좋아하는 말보다는 직접 소설을 읽는 개인의 취향이 더 중요한 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