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가들 - 완전 무삭제판, 태원 5월 할인행사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 마이클 피트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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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은 영화를 통해 혁명이 가능하리라는 믿음이 결국 하나의 몽상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영화를 통해 사회를 바꾼다고? 당치도 않은. 영화는 사회는 고사하고 인간의 관습, 고정관념마저도 바꾸어 놓지 못한다는 것을 베르톨루치는 고전 영화를 삶보다 더 중요시하는 시네필들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영화를 보고, 숭배하고 그것을 흉내냄으로써 현실의 관습과 고정관념을 조롱하고 전복시키려는 그들의 행동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귀결된다. 영화와 삶이 일치된 세계. 그들은 영화를 통해 혁명으로 이어질 행동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방에 붙여진 마오의 사진이 그것을 대변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족적 세계를 구축해놓고 그 안에 머문다.

 

자족적 세계라고 했지만 그 세계는 불안정한 세계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 소울메이트이기도 한 쌍둥이 남매와 그들 사이에 초대된, 혹은 끼어든 미국인 청년. 이 셋은 안정적인 오이디푸스 삼각형을 구축하지 못한다. 한편 그들이 구축한 자족적 세계란 사실 아버지의 집, 아버지의 서명이 담긴 수표가 없다면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사실 역시 우리는 고려해야 한다. 세 청춘남녀들의 행동은 진정 급진적 의미를 갖지 못한다. 단지 영화를 흉내낸 것, 혁명을 흉내낸 몸짓에 다름 아니다. 

 

도대체 가족주의를 깨지 못하고서야 공산주의란 게, 혁명이란 게 가능한가? 이 질문은 근대적 가족 관념이 부르주아적 의미의 소유 개념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는 점을 적극 고려할 때 유효할 것이다. 일찍이 엥겔스는 이 문제를 회피했다.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널리 퍼진 오해 중 하나가 생산 수단만이 아니라 여성(아내)까지 공유한다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말이다.

 

엥겔스가 회피한 이 문제는 1960년대에 다시 대두된다. 1960년대, 신좌파들과 히피들은 혁명과 사랑을 동일시했다. 그들은 바리케이드 뒤에서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든 채 키스한다. 그러나 두 남자가 한 여성을 공유하는 게, 혹은 그 반대 역시, 가능한가? 키스하는 커플은 질투심 가득한 눈들에 둘러싸여 있었을 것이다. 어제 나와 키스한 이가 오늘은 다른 이와 키스하는 것을 본 이들 역시 질투심에 휩싸였을 것이다. 사랑은 항상 질투를 내포한다. 이렇게만 보더라도, 사랑은 근대적 관념이 확실하다.

 

인간은 '소유'를 통해 인간이 된다. '소유'는 근대 주체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가장 기본적 행위이다. '소유'가 없다면 모든 것은 모호해지고 만다. 이름, 재산, 여자, 명성, 각종 브랜드, 문화 상품들, 취향, 지식 등등을 '갖고 있지' 않는다면 인간은 그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망 속에 위치하지 못한다. 주체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관계망에 어떻게든 맞춰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체의 의지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맞춰나가려는 의지가 없더라도, 오히려 그 관계망을 벗어나려 하더라도, 주체는 어느덧 관계망에 포섭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영화 초반의 지포 라이터 장면을 통해 베르톨루치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주체를 규정하는, 인간을 주체로 만드는 이 사회적 관계망을 완전히 거부하려 들 때 인간은 혼란에 빠지고 희미해진다. 단적인 실례로 히피들은 마약을 상용했다. 혁명은 오직 내가 나 자신을 잊을 때만, 몽롱한 상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공산주의는 약의 힘을 빌어 달성될 수 있다. 물론 농담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보다 섬세한 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자족적 세계에 날아들어온 하나의 돌. 이것은 세 남녀를 현실 세계로, 혁명의 한 복판으로 이끌어낸다. 그러나 갈등은 남아 있다. 미국인 청년은 프랑스인 남매를 말리고 프랑스인 남매는 그런 미국인을 뿌리친다. 에뒤뜨 피아프의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가 어지러운 거리 장면 위로 들리면 엔딩 크레딧이 아래에서 위로 거꾸로 올라간다.

 

베르톨루치는 (영화를 통해) 혁명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세대다. 몇 십 년 후 만든 영화 <몽상가들>에서 그는 그러한 믿음이 순진한 것이었음을 인정한다. 혁명을 믿었던 젊은 시절의 행동들은 한때의 '치기' 같은 것이 된다. 그러나 <몽상가들>이 말하는 것이 그게 전부인 것은 아니다. 베르톨루치는 순진한 혁명가들의 젊은 날을 돌아보며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거리 앞에서 누군가는 망설이고 있고 누군가는 뛰어드는 장면에서 멈춘다. 여기서 크레딧이 위로 올라가는 것은 정말이지 의미심장하다. 오늘날 우리는 "혁명이 불가능하다"라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다. 현재는 물론이고, 과거에도 그랬으니까. 우리 선배들은 모두 실패했으니까. 그러나 그러한 결론은 당연히 섣부른 것이고 섣부름을 넘어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혁명을 어린 시절의 치기와 동일한 것으로 여길 수는 없다.

 

거리(혁명) 앞에서 혁명에 대한 회의를 보이는 사람과 망설임 없이 무작정 뛰어드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거기에서 멈춤으로써, 그리고 크레딧을 거꾸로 올림으로써 감독은 우리에게 지금(혁명에 치기와 동일하게 여겨지는)이 바로 진지하게 과거를 돌아보아야 할 시점이라고 제안한다. 이러한 제안은 혁명을 자신의 볼거리로만 대하는 데 익숙해진 오늘날 특히 울림이 큰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혁명을 재현한 영화, 혁명가를 다룬 책이 절찬리에 상영되고 베스트셀러가 되는 오늘날, 혁명은 흥미진진한 볼거리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우리는 영화를 통해 혁명이 가능하지 않음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세대에 속한다. 아니 애초에 그런 가능성 자체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우리에게 영화는 그것이 무슨 소재를 다루고 있든, 하나의 오락거리이며, 잘해봐야 문화자본이다. 물론 몇몇 시네필에게는 숭고한 예술일 수도 있을 것이고 수집가에게는 소중한 수집 대상일 수도 있다. 오늘날 영화의 존재 방식은 이 범주 안에서 구성된다. 오락과 자본, 예술과 취향 사이. 이런 시기에 베르톨루치는 영화와 혁명 간의 관계를 생각해보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낡은 오래된, 시대착오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꼭 필요한 질문이기도 하다. 영화가 우리 삶에 어떤 식으로든 의미 있는 것이라면 이 문제를 회피할 수는 없다. 영화를 통해 혁명이 불가능하다면 정확히 왜 불가능한지라도 우리는 물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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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렘브란트의 천재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사실상 그에 대한 비판은 그의 천재성이라는 문제를 제쳐 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비판은 주문화에만 의존하여 먹고 사는 화가에게는 불행하게도 치명적인 것이었다. 사람들은 렘브란트가 '자신의 욕구에만 충실한 그림'을 그린다고 비난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기대한 것은 한 점의 집단초상화였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예술 작품을 그렸다. 그는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객들은 렘브란트의 천재성이 아니라 실제와 똑같은 이미지에 대가를 지불했다. 초상화는 모델과 똑같아야 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자신의 내면, 파악하기 힘든 본질, 그리고 변형된 사물을 그리고 있었다. 오히려 렘브란트의 몇몇 제자들이 더 대중의 환영을 받았다.

 

- 파스칼 보나푸, <렘브란트, 빛과 혼의 화가>

 

 

렘브란트의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그에 따른 불행은 그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살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만약 그가 르네상스기의 이탈리아에서 살았더라면 상황은 아주 달랐을 것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야경>(1642)은, 지금이야 물론 '불후의 명작'으로 간주되지만 실은 일정한 보수를 받고 그린 집단 초상화이다. 물론 화가에게 보수가 지급되는 것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당연한 일이며, <야경>의 그림 값인 1600플로린은 서른 넷의 젊은 화가에게는 어마어마하게 큰 돈 이었지만, 17세기 네덜란드에는 렘브란트 말고도 초상화가가 많았다. 베르메르, 호흐, 얀 스텐, 테르보르흐 등 널리 알려진 네덜란드 장르화(일상 생활을 소재로 한 17세기 네덜란드의 대표적 화풍)의 대가들 역시 대부분 초상화를 그려 생활비를 충당했다. 미켈란젤로가 성 베드로 성당의 천장화를 그리는 것과 렘브란트가 집단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 할 수 있다. 신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었기에 그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작업에 매진할 수 있었던 시대는 이미 지나버린 것이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정치적, 종교적 분쟁의 중심지였다. 그 시기는 네덜란드가 경제적 번영을 누린 시기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 유럽의 대국과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인 시기이기도 하다. 경제적 번영과 전쟁이라는 양극단의 현실 사이에서 네덜란드인들은 살았다. 그리고 그들은 '일상'을 예찬했다. 경제적 풍요로움과 전쟁(죽음)에 대한 공포 사이에서 그들은 (종교 등을 통해) 현실을 초월하려하기 보다 현실을 수긍하고자 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예술에 반영되어 새로운 주제와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야경>의 중심 인물인) 바닝 코크는 암스테르담 정치계의 거물로 경비 부대를 지휘했다. 그는 볼크트 오부르란든 시장의 딸과 결혼했으며, 대단한 재력가였다. 그는 퓌르메르란트 영지를 사들였으며, 그 뒤에 자크 2세로부터 작위를 받은 뒤 시장이 된다. <야경>은 특별한 역사적 사건과 관련이 있다. 1637년 프랑스의 여왕 마리 드 메디시스가 암스테르담을 방문하자 전 경비대가 동원되어 성대한 환영행사를 한다. 이때 코크는 명성이 자자한 이 경비 부대의 지휘를 맡는다. 그는 이 영예로운 일을 영원히 기리고 싶어 렘브란트에게 자신의 부대가 집결해서 행진명령을 기다리는 순간을 그려달라고 주문한다.

 

네덜란드 군인조합은 초창기에 성직자와 군주들에게 의장대를 공급했으며, 이들의 후원에 입입어 차츰 눈에 띄게 번창해나갔다. 군인조합은 도시의 명사들 가운데서 모집했으며, 공공 치안을 담당했다. 각 조합별로 집회장소와 훈련장이 따로 있었다. 일 년에 한 번씩 사격대회가 열렸다. ... 지휘관과 부관의 지위는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기수는 인물이 가장 훤칠하고 촉망받는 젊은이 가운데서 뽑았다. ... 경비대의 고위직들은 자신의 직분에 대한 추억을 길이 전하려고 흔히 군복 차림의 초상화를 그려 소속 조합에 기증하여 회의실을 장식했다.

 

단체 초상화는 구성에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대개 한 줄이나 두 줄로 나란히 세운 인물들을 무릎 위부터 보여주었고 모든 인물들이 다 들어가게 가로로 긴 캔버스를 사용했고, 반쯤 펴진 깃발의 사선만이 그림이 활기를 불어넣는 유일한 요소였다. 화가가 바뀌어도 인물의 외모와 자세만 달라졌다.

 

렘브란트는 전통에 구애받을 화가는 아니었다. ... 전통적 단체초상화에서 나타나는 사진을 찍는 듯한 자세가 이 작품에서는 동작으로 바뀐다. ... <야경>은 연출 장면을 담고 있는, 단체초상화라기보다 역사화에 가까운 그림이다. ...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의 중앙 전시실에는 <야경> 이 한 작품만을 걸어두고 오직 여기에만 불빛을 비추려고 미술관 전체의 조명을 어둡게 해두었다. ... <야경>은 마치 공연예술처럼 상연된다. ... 이처럼 소란스럽고 현란한 작품은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 장-루이, 페리에, <시선의 모험>

 

 

페리에는 <야경>을 당대의 여타 집단초상화와 비교하면서 그 위대함을 입증한다. 구성과 인물의 동작 묘사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요소가 <야경>의 위대함을 보증할 수 있을까? "소란스럽고 현란한 작품"이란 평가는, "생동감"이라는 찬사를 염두에 두고 쓴 설명이라고 여겨지지만, 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찬사와는 거리가 먼 설명이지 않은가?  

 

아니나다를까, 19세기 프랑스의 화가이자 영향력 있는 미술 비평가인 외젠 프로망탱은 <옛 거장들>이란 책에서 <야경>의 구성과 인물 묘사 등에 대해 혹평을 하고 있다.

 

 

이 그림은 놀랍고도 당혹스럽다. 이 그림은 우리에게 강요할 뿐, 우리를 압도하는 매력이라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첫눈에 이 그림은 비위를 거스른다. 우리 시각은 분명한 형태와 맑은 사유, 그리고 분명하게 규정된 대상을 선호한다. 그러나 이 그림은 익숙한 논리와 정직함을 공격한다. 이 그림의 무엇인가가 이성과 마찬가지로 상상은 반쪽짜리이고, 우리의 마음에 가장 쉽게 설득되는 것은 오랜 습관에 종속된 것이며 논증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것은 반드시 그림의 오류라고는 할 수 없는 여러 원인과 관련된다. 여기에는 혐오스러운 빛이 있다.

 

번역 상의 오류가 들어있는 것일까? 무슨 의미인지 파악되지 않는다. 페리에의 묘사를 참조한다면, 프로망탱은 <야경>의 소란함, 현란함, 산만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즉 렘브란트의 관습에 반하는 구성(반쪽짜리 상상)과 원근법, 그리고 '빛'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는 논조다. 비판은 계속된다. 

 

<야경>은 수수께끼 같은 작품이다. 이 점은 이 그림에 커다란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듯이 이 작품의 위대함은 구도가 아니다. 작품의 주제를 직접 선정했던 것도 아니었고, 작품 착수 방식은 첫 소묘에서부터 그의 능동적 행동이나 명료성을 한 단계 고양시킬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지 않았다. 그 결과, 장면은 불확실하고 행동은 비현실적이며, 관심이 초점은 매우 분산되어 있다. 첫 소묘에서부터 결함이 있었던 탓에 그림이 이해되고 배치되고 효과를 산출하는 방법에 처음부터 우유부단함이 깃들어 있었다. 결국 전체적인 구도에는 진실된 면이나 회화적인 독창성이 없는 셈이다. ... 인물들은 비례에 맞지 않는다. ... 초상화의 관점에서 인물들 하나하나를 봐도 성공적이라 말하기는 힘들다.

 

얼굴은 인간의 혈색을 표현했다기보다 겉치레로 칠했다는 인상을 준다. 얼굴들은 붉은색이나 포두줏빛을 띠거나 아니면 창백하다. 하지만 이 창백함마저도 벨라스케스가 그의 인물에 부여한 실제적인 창백함이 아니다. 더욱이 프란스 할스가 인물의 기질을 표현하기 위해 인물 하나하나에 피색, 노란색, 회색, 보라색을 미묘하게 배합한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 색채는 정확하지도 표현적이지도 않다.

 

프로망탱은 <야경>의 구성, 인물 묘사에 이어 색채까지도 비판한다. 그러나 색채에 관한 그의 논의는 면밀히 읽을 필요가 있다. 어느 순간 프로망탱은 어조를 바꾸어 <야경>의 부정할 수 없는 가치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빛'이다.

 

진실은 이렇다. 그림의 중앙에 위치한 빛을 표현해야만 하는 이 인물에 렘브란트는 빛을 입힌 것이다. 명도 처리는 매우 능숙하게, 색채의 처리는 매우 부주의하게 말이다. 여기에서 컬러리스트로서 렘브란트가 드러난다. 추상적인 빛은 없다. 빛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빛은 반사되거나 흡수되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다양하게 비춰지고 발산되는 색채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매우 어두운 색조도 밝은 빛을 발할 수 있고, 또한 매우 밝은 색조도 그렇지 못할 수가 있다. 컬러리스트에게 빛의 표현은 오로지 그것을 어떤 색으로 묘사하느냐에 달려있으며, 이것은 빛과 색을 하나로 만드는 명암의 농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나 <야경>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명암의 농도는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것과 같이 빛 속으로 사라졌다. 그림자는 검고 빛은 희다. 모든 것은 밝거나 어둡거나 둘 중 하나이다.

 

드디어 이 그림의 부정할 수 없는 가치를 논할 순서이다. ... 나는 렘브란트가 사물을 바라보는 고유한 방법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키아로스쿠로라 불리는 기법이다. 어느 누구도 이 기법을 그렇게 지속적이고 독창적으로 사용하지 못했다. ... 가장 가리워진 동시에 가장 생략된, 그리고 가장 암시적인 이 기법... 이것은 잘 포착되지 않는 사물에 매력을 부여하고 기묘함을 자극하며, 지적인 사유에 우아함을 더해준다. 이것은 느낌과 감성, 불확실한 것, 규정하기 힘든 것, 무한한 것, 그리고 꿈과 이상과 함께하는 것이다.

 

실제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보고, 느끼고, 묘사하는 이 기법의 결과물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세계는 언제나 모습을 달리하기 때문에 선은 사그라지거나 없어져 버리고 색은 증발해버린다. 더 이상 엄격한 윤곽선에 가두어져 있지 않은 모델링(대상의 입체감을 표현하는 일)에서 붓질은 덜 명료해지고 표면에는 물결이 일어난다. 그리고 숙달되고 민감한 손에 그것은 가장 사실적이고 확신에 가득 찬 모습을 지니게 된다. 온갖 기교를 지닌 그 손은 이중의 생명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부여한다. 그 하나는 실제에서 부여받은 샘명이고, 다른 하나는 감정의 전달에 근원을 둔 생명이다. 여기에는 캔버스에 깊이와 거리를 부여하고, 가깝게 하거나, 위장하거나, 분명히 묘사하거나, 진실을 상상 속에 묻어버리는 여러 방법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키아로스쿠로라 불리는 예술이다.

 

그가 빛에만 중요성을 부여했던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을까? 아니었을까? 또는 그림의 주제는 그것을 요구하고 허용했을까, 아니면 거부했을까? 만약 전자라면 작품은 작품이 지닌 정신의 결과이다. 이 경우 작품은 숭배되어야 한다. 후자라면 작품은 불확실한 것이 된다. 작품은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 될 것이고 잘못 이해되어질 것이다.

 

사물의 빛과 어둠을 통해서만 주제를 묘사했던 렘브란트의 경향에 비추어 볼 때, <야경>에... 더 이상의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

 

- 외젠 프로망탱, <옛 거장들>

 

 

프로망탱은 먼저 화가로서 <야경>의 기교적 측면을 평가한다. 이 측면에서의 평가는 혹평에 가까운 것이 되고 말았지만, 그는 <야경>의 위대함을 '빛'이라는 측면에서 발견해낸다. 렘브란트는 집단초상화를 그리면서 관습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빛', 정확히 말하면 어둠을 통해 빛을 표현하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이었다. 돈을 받고 초상화를 그리면서 고객의 요구에 따르지 않고 "사물을 고유한 방식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화폭에 담아내고자하는 회화적 실험을 했던 것이다.

 

초상화는 인물을 사실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다. 초상화는 인물의 본성(미덕)을 표현해야 한다. 용기, 절제, 고상함, 순결 따위의 미덕을 말이다. 그러므로 항상 초상화 속에서 인물들은 경직된 자세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렘브란트의 <야경>은 초상화가 아니다. 그렇다면, 역사화인가? 그것도 단정할 수는 없다. 아니면, 프로망탱이 말하듯,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느낌과 생각을 표현한" 예술인가? 역시 단정할 수 없다. '예술적 천재'를 상정하는 낭만주의 시기를 거친 프로망탱의 사후적 의미 부여라는 느낌이 강하다. 

 

어쨌건, 지금까지 <야경>에 대한 논의를 살펴봄으로써 렘브란트의 고민, 문제의식은 그 윤곽이나마 약간 드러낸 셈이다. 빛과 어둠에 대한 집착은 세계를 바라보는 렘브란트의 독창적인 시선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양미술사>에서 곰브리치의 분류를 따르자면, 렘브란트는 '아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을 그리는 화가다. 그는 대상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것을 화폭에 담고자 했다. 변화를, 변화무쌍한 일상 생활의 한 순간을 정지한 형태로 그려내는 것, 그 순간 형태를 규정/제한하는 윤곽선은 사라지고 대상은 어둠 속에서 하나의 빛이 된다. 종교화나 역사화가 아닌 초상화에서, 즉 세속에서 초월의 계기가 생성된다. 일상은 환상과 결부된다. 물론 이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렘브란트는 빛과 어둠이라는 양 극단에의 모색을 통해 그것을 표현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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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만주조선인 문학연구
오양호 / 문예출판사 / 1996년 1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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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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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the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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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부르크하르트 뢰베캄프 지음, 장혜경 옮김 / 예경 / 2005년 12월
12,800원 → 12,160원(5%할인) / 마일리지 64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24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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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장르의 구조
토마스 샤츠 지음, 한창호 외 옮김 / 한나래 / 1995년 3월
9,800원 → 9,800원(0%할인) / 마일리지 49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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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Bakhtin and the Movies : New Ways of Understanding Hollywood Film (Hardcover)
Martin Flanagan / Palgrave Macmillan / 2009년 5월
218,720원 → 179,350원(18%할인) / 마일리지 8,97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15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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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ersistence of Hollywood (Hardcover)
Elsaesser, Thomas / Routledge / 2011년 12월
475,000원 → 389,500원(18%할인) / 마일리지 19,48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9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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