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왔습니다. 봄이라고 하면 저는 왠지 단편이 땡깁니다. 예비군 훈련의 추억 때문인지도. 왜 하필 예비군 훈련이냐 하면, 군복 건빵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가서 틈날 때마다 읽기 좋기 때문입니다. 예비군 훈련 받을 때 읽기 좋은 봄에 읽기 좋은 단편집 몇 권 골라봤습니다.
1. 첫 번째 추천 작가는 안톤 체홉(체호프)입니다. '단편'이라고 했을 때, 에드거
앨런 포, 오. 헨리와 더불어 즉각 생각나는 작가 중 한 명입니다. 체홉은 장편도 썼지만 단편에서 최고 수준의 예술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보코프 역시 <러시아 문학 강의>에서 체홉을 가리켜 장거리 주자라기보다 단거리 주자다, 라고 평한 바 있습니다.
체홉 단편집은 아주 많은 판본들이 나와 있습니다. 어느 것으로 보든 큰 상관은 없겠습니다만, 전집이 아니라 선집이기 때문에, 단편집에 따라
수록된 작품이 많이 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두실 필요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좋아하는) <상자 속의 사나이>라는 단편은 (다음
세 판본 중) 펭귄클래식 출판사본에만 수록되어 있습니다.
체홉의 단편이 마음에 드셨다면 세 개의 판본을 모두 구비해놓고 읽어나가도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체홉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2. 두 번째 추천 작품은 사무엘 베케트의 <첫사랑>입니다. 베케트는 물론,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네 편의 단편이 실린 <첫사랑>도 읽어볼만한 작품집입니다. [문지스펙트럼 문고]로 출간되어 가볍게 지니고 다니며 읽을 수 있다는 점도 장점입니다. 제목은 물론, 내용도 (이의는 있겠지만) 왠지 봄과 어울린달까요.
'가볍게 지니고 다니며' 읽을 수 있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책의 물리적 속성이 그렇다는 것일 뿐, 쉽게 읽히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베케트의 소설이니까요. 하지만 쉽지 않다고 해서 재밌지 않다는 건 아닙니다. 또 쉽지 않다고 해서 쉬엄쉬엄 읽을 수 없다는 걸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써놓고 나니, 저도 이게 무슨 말인가 싶네요. 아마, 직접 읽어보시면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지스펙트럼 문고]라고 하니, 플로베르의 단편 모음집인 <세 개의 짧은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3.. 세 번째로는 한국 작가의 단편집을 추천해봅니다. 따지고 보면
한국이야말로 '단편 강국'이기도 하지요. '신춘문예'라는 오래된 제도적 전통, 그리고 단편을 위주로 공모를 해온 문학계간지가 문단을 주도해온 덕택에 한국에서는 장편보다는
단편이 장려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플로베르가 한 것처럼) 오랜 기간 동안 문제 의식을 갈고 닦아 길고 묵직한 대장편을 쓸 수 있는
작가는 없고, 그때 그때 시의에 따라 순발력 있게 짧은 단편을 써내는 작가들이 대다수를 이루게 되었다는 비판이 지난 2000년대 중반부터 일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한 비판의 결과로, 최근 들어 장편만을 공모하는 '장편 문학상'들이 제정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한국에서 단편이 주를 이루게 된 것은 식민지 시대부터라고 하니, 그 연원이 꽤 깊은 셈입니다('신춘문예'라는 제도 자체가 식민지
시기에 생긴 것이기도 합니다).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문학 작품들 역시 단편이 주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가르치기에도 좋고, 시험 문제 출제하기도 편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 어쨌거나 여러 작가 중에서도 일찍이 단편
소설에서 최고의 성취를 보인 작가는 아무래도 상허 이태준이 아닌가 합니다. 이태준은 '단편 소설의 명수'로
불렸고, 체홉에 비견되기도 했습니다.
이태준의 단편은 <복덕방> <달밤> 등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얼마 전 다시 읽은
<밤길>이라는 작품이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4. 1930년대에 이태준이 있었다면, 1960년대에는 김승옥이 있었습니다. 네 번째 추천 작품은 김승옥 단편집입니다. '감수성의 혁명'이라 평가되는, 그야 말로 톡톡 튀는 단편들을 통해 60년대라는 시기, 그리고 당대를 넘어 한국문학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작가인 김승옥은, 그 다재다능함으로 인해(영화 시나리오를 썼음은 물론 영화 감독까지 했습니다) 한국의 '장 콕토'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김승옥 소설전집은 총 다섯 권으로 나와 있는데, 1권에 주요 단편들이 모두 수록되어 있습니다. 2-5권에는 중, 장편과 콩트들이 실려
있습니다. 여유가 된다면 다섯 권 모두 봐도 좋겠지만, 김승옥 역시 체홉처럼 장거리 주자라기보다는 단거리 주자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1권으로도 충분합니다... 물론 <강변 부인> 같은 대중 소설도 읽어보면 꽤 재밌긴 합니다.
5. 일본 작가 중에서도 훌륭한 단편을 남긴 작가가 여럿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한국에서 유독 인기가 높은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집 역시 읽어볼만 합니다. 다자이 오사무는 아무래도 <인간 실격>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사양>과 같은 소설이나 단편들을 더 좋아합니다. 하긴 다자이 오사무를 좋아했던 것도 어느 덧 오래 전 이야기..... 네요.
개인적으로 다자이 오사무는 20대 초, 중반에 푹 빠져 있었던 작가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다자이 오사무는 '문학 청년(소녀)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데 최적화된 작가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일설에 의하면 김승옥 역시 청년기에 다자이 오사무를 즐겨 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학적 감수성'이란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미성숙'의 증거이기도 할 겁니다. 다자이 오사무를 읽다보면 문득, 뭐랄까, 내면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른이 ('감수성'을 앞세워) 마구 칭얼대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어른이 돼서 칭얼거리면 주변의 빈축을 사기 쉬위니, 다자이 오사무의 주인공들이 마구 칭얼대는 걸 읽으면서 대리만족하는 정도로 넘어가도 좋지 않을까...... 또는 아예 적극적으로 나서서, 마구 칭얼대는 와중에도 매력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비법을 다자이로부터 전수받는 방법도 있겠습니다.
일본 작가의 단편집을 또 하나 고르자면, 아쿠타가와 상으로 유명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집 역시 좋은
선택이 될 것입니다. 제가 읽은 것은 다음의 판본(<월식>)입니다.
그런가 하면 일본 화폐 5000엔의 모델인 여류 작가 히구치 이치요의 단편집 <키 재기 외> 도 읽어볼 만 합니다.
6. 다음은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고골의 단편집 <뻬쩨르부르그 이야기>입니다. 고골의 단편은
19세기 초, 중반 무렵에 쓰여진 것들이라 '현대적인' 느낌이 조금 덜한 편입니다. 민담이나 우화의 요소, 환상적 요소가 녹아들어
있습니다. 물론, 현대적인 느낌이 덜하다고 해서, 구닥다리 냄새가 나거나 공감대 형성이 어렵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마치 '외계의 것인 듯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단편들입니다. 게다가 언뜻 보기엔 굉장히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상상력인데, 조금만 읽다보면 작품에 훅 빨려들게 된다는 치명적인 매력을 갖추고 있기도 합니다. <코>, <외투> 등 유명한 단편들은 물론 <초상화>, <네프스끼 거리>와 같은 단편들
역시 훌륭합니다. 수록된 작품들 중에서도, 특히 <광인 일기>를 읽어보시면, 어떻게 그 당시에 이런 상상이 가능했는지 싶어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이렇게 여섯 권의 단편집을 소개해드렸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 그리고 읽은 것 위주로 소개를 해드렸기 때문에 리스트의 밀도가 헐겁습니다. (하긴
어떻게 뽑더라도 완벽한 리스트라는 게 존재할 순 없겠습니다만...) 가령 중국 작가 루쉰이나 미국 작가들의 단편은 아쉽게도 리스트에서 빠졌습니다. 혹시 루쉰에
관심이 있다면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루쉰 소설 전집>을 추천합니다. 또한 미국 작가들의 단편들을 쭉
훑어볼 수 있는 좋은 소설집으로는 창비에서 출간된 <필경사 바틀비 외>가 있습니다.
창비에서 나온 [세계문학 단편선]은 각 나라의 대표 단편들을 고루 접할 수 있게 해준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만, 대개 한 작가 당 한 편씩만 읽게 되어 있어서 감질맛이 나기도 합니다. 물론 관심이 가는 작가의 다른 단편집을 찾아 읽으면 되겠지만, 국내 출간이 아예 안 된 경우가 많아 그렇게 하기도 쉽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제 경우엔 [세계문학 단편선-미국편]에서 셔우드 앤더슨과 스티븐 크레인에 관심이 생겼는데, 셔우드 앤더슨은 다행히 단편집 <와인스버그, 오하이오>가 국내 출간되어 있으나 스티븐 크레인의 작품은 따로 출간된 게 없어서 매우 아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정 아쉽다면 원서를 구해서 읽어도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봄에 가볍게 지니고 다니면서 읽는다'는 애초의 컨셉에 맞지 않는 달까요... 하긴 뭐, 루쉰 소설 전집도 이미 '가볍게 들고 다니며' 읽을 만한 두께와 무게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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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은 분량이 짧기 때문에 부담 없이 달려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마음을 놓고 읽으면 잘 소화, 흡수가
안 된다는 점! 잘 쓰여진 단편은 고농축, 고단백 음식에 해당하기 때문에 나름의 '식이요법'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소화불량, 영양과다를
피하려면, 하루에 몇 편을 연달아 읽는 대신, 한 두 편을 읽고, 내용을 천천히 곱씹어 보는 시간(=소화시키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이렇게 소개를 하는 와중에, 저는 그 동안 건성으로 한 두 편 씩 읽었던 체홉의 작품들을 하루 한
편 씩 읽어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개인적 욕심이 반영되어서인지 첫 타자로 소개를 했네요.) 그렇습니다. 왠지 단편은 가벼운 마음으로, 달리 말하자면, '건성으로' 읽게 되는데,
실은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굉장히 '심혈을 기울여' '집중해서' 쓰는 것이 바로 단편이기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도 집중해서 읽을 필요가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