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 - 상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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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眞相)’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사건의 진상을 알고 싶어 한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사건의 진상을 버거워하기도 한다. 우리들 각자의 주변에는 진상이 밝혀졌으면 하는 일도 많지만 굳이 진상을 알고 싶지 않은 일들도 많다. 실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비밀과 오해로 둘러싸인 어떤 불합리한 사건이 있다. 그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수반한다. “밝혀진 진상을 감당할 용기가 내게 있는가?”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고 오해를 푸는 과정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비밀과 오해가 없는 인생은 없다. 겉으로 내보이는 나의 상()은 그런 비밀과 오해를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다. (로맹 가리의 소설 제목이 보여주듯) ‘가면의 생인 것이다. 하지만 이 가면을 벗을 수 있는 것일까? 가면 뒤의 진상-진실은 존재하는 것일까?

 

 

그때 오고간 말들은 형이나 저나 흥분한 상태에서 뱉은 거였어요.”

그러냐? 내가 보기에는 본심 같은데.”

본심이란 것도 다 허상이죠.

오호? 재미난 말을 하는군.

속에 담고 있을 때는 이것이 바로 진짜 자기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입 밖에 내는 순간부터 이상해지죠. 본심이라 믿고 싶은 생각만 남아서 고집이 됩니다. 제가 그랬듯이 아마 형도 그랬겠죠.”

뭐든 규정을 지어 버리면 거기에 미처 담기지 못하는 부분이 남게 마련이다. (, 481)

 

 

우리들 각자는 ‘이거야 말로 나의 진짜 모습이라 여기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상을 품고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스스로에 의해 왜곡된 하나의 '(허)상'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가면을 벗어던졌다고 생각한 순간, 그 안에 있는 또 다른 가면이 발견된다. 아니 실은 가면을 쓰기 전과 가면을 벗어던진 후의 내 모습 자체가 달라진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계속 변화하는 무엇이다.

 

<진상>은 사건의 이면과 사람의 이면을 바라보는 게 어떤 것인지를 말하는 작품이다. <진상>의 원제는 오마에상(당신)’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우리는 이 호칭을 쓴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것은 과연 당신자체인가? ‘당신이 내게 보여주고 싶은 일면인가, 아니면 당신의 본모습까지를 포함한 모든 것인가? 우리는 당연히 사랑하는 대상과의 사이라면 비밀이 없기를 바란다. 겉으로 연출된 모습이 아니라 본모습을 확인하고 그것까지를 사랑하고자 한다. 하지만 문제는 당신의 본모습(진상)을 알아가는 동안 나 자신의 본모습, ‘나 자신진상역시 드러난다는 데 있다. 양쪽의 경우 모두 다 본모습은 실망스러운 것이지만 우리가 더욱 깊이 실망하는 것은 단연 나 자신의 본모습이다. 사랑 앞에서 우리가 망설이고 두려움을 품는 이유다. "나는 나의 진상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이렇듯 <진상>은 이면을 바라보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하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면표면을 분리하는 게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 대해 말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는 화자인 헤이시로에 의해 외양 묘사가 자주 이뤄진다. 젊고 촉망받는 마치 순시관이지만 '어디에도 비할 바 없는 극강의 추남인 마지마 신노스케의 얼굴이 점점 변해가는 모습을 그리는 것이 좋은 예다.

 

 

사람 얼굴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곳은 역시 눈이리라. 헤이시로는 심심풀이 삼아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저 얼굴에서 다른 부위는 그대로 두고 최소한 눈이라도 제대로 생겼다면 조금은 보기가 낫겠지, 그렇다면 이 얼굴에 어떤 눈을 달아야 여자들의 심미안이라는 엄격한 잣대가 다만 얼마라도 값을 매겨 줄까, 하고 말이다. 참으로 쓸데없는 걱정이구나. 더구나 자신의 말상 얼굴은 제쳐 놓고.

하지만 헤이시로도 마냥 장난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마지마 신노스케의 인품은 선량하고 성실하며 두뇌는 명석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 얼굴이라는 간판은 하늘의 장난이랄까 천부의 재앙처럼 느껴진다. 아니, 그렇게까지 말하면 지나친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오호 통재라. 하고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68)

 

상대는 매혹적인 아가씨다. 기량과 미모가 뛰어난 아가씨가 눈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헤이시로는 늦기는 했지만 깨달았다. 마지마 신노스케의 외모가 나아 보이는 까닭은 상투나 옷차림을 바꾼 탓만은 아니다. 후미노의 눈물이 신노스케의 얼굴 분위기를 바꾼 게 아닐까. (, 419)

 

지금 마지마 신노스케는 좋은 얼굴을 하고 있다. 옴팡눈에 코도 납작한 생김새는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좋은 얼굴로 변했다. (, 525)

 

후미노에게 면전에서 살인자라는 비난을 들었다. 그보다 더 나쁜 일은 신노스케에게 있을 수 없다. 그것을 받아들였다. 받아들일 각오가 있었기에 후미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던 것이다. 신노스케는 한없이 무참한 심정으로 고개를 넘었다. 이제 같은 산에서는 길을 잃지 않으리라. (, 530)

 

 

추남마지마 신노스케는 약방 주인 신베의 딸 후미노와의 일을 통해 좋은 얼굴관리의 얼굴을 얻는다. 물론 이 얼굴 역시 하나의 가면이다. 하지만 신노스케가 얻은 이 가면은 단순한 가면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소설 말미에 묘사된 신노스케의 얼굴은 사건에 연루된 많은 이들의 '가면 뒤 본심'을, '사건의 진상'을 목격한 후에 얻은 얼굴 표정이기 때문이다. 가면 뒤 본심과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신노스케는 그가 마음속에 품은 당신에게 살인자라는 비난을 듣는다. 하지만 그 비난을 한 당사자가 살인자. 그리고 그녀가 살인자가 된 것은 그녀 마음속에 아버지가 비열한 살인자라는 ‘()()’이 맺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의 배후에는 자신이 설 자리를 잃은 마쓰카와 뎃슈라는 젊은이의 실의가 존재했고 그를 향한 후미노의 사랑이 존재했다. 각자가 마음속에 품은 애증의 화살줄은 각자가 마음속에 품은 '허상'들을 매개로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다. 어딘가에서 매듭을 지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관리의 얼굴, 법의 얼굴이 필요한 것이다.

 

 

마고하치가 저지른 악업은 밝혀졌고 그에 걸맞은 벌을 받았다. 지금도 받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죄는 일단 깨끗이 청산되었. 그렇다면 이제 아무 문제도 없어야 할 텐데, 어째서 또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까.

가슴은 여전히 텁텁했지만 마침내 한 가지 결론에 다다랐다. 죄를 청산했어도, 그 사실을 주위에 널리 알리지 않으면 청산한 것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일러주지 않으면 모르기 때문이다. 나랏법은 그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 245)

 

 

물론 법의 한계도 뚜렷하다.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다보면 인간다움을 잃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헤이시로의 아내가 말하듯 인연이란 어디선가 끊어 내거나 풀어 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재앙을 불러들이며, “죄라는 것은 아무리 괴롭고 슬프더라도 한 번은 깨끗이 청산해야 하며, 눈처럼 시나브로 녹아서 없어지는 일은 없다.” (, 128) 여기서 법은 인연과 마음속에 맺힌 괴로움과 슬픔의 상()을 포함한다. 마음속의 여러 감정들사랑인지 증오인지 집착인지 질투인지를 분간할 수 없는이 얽히고설켜 맺힌 상을 일단 매듭짓기 위해서라도 법의 얼굴은 필요하다. 어디서 어떻게 매듭을 지을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참조점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마지마 나리.”

허락이나 마나 나는 그런 걸 결정할 위치도 아니다, 라고 말하려던 신노스케의 머릿속에 뭔가가 퍼뜩 스쳤다.

매듭이다. 오신을 위해 오토쿠는 그걸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 알겠습니다.”

짐짓 엄숙한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오토쿠를 오신의 보증인으로 인정하겠습니다. 오신, 무슨 일에서나 오토쿠를 따르며 열심히 일하도록 해라.”

, 감사합니다.”

[...]

죄송합니다. 이렇게 고마운 일도 없는데, 왜 자꾸 눈물이 나는지, 저도 알 수가 없네요. 제가 저를 모르겠어요. 너무나 바보 같고 분별이 없어 눈앞이 캄캄합니다. 뭍으로 떠밀려 와 이제 물로 돌아갈 수 없는데도 여전히 팔딱거리는 물고기처럼, 마음이 전혀 가라앉질 않아요.”

당연하지. 너는 오랜 세월 동안 혼자만의 연심을 품고 살았다. 그 마음이 하루 이틀 만에 지워진다면 세상에 괴로울 일이 뭐가 있겠나. 너만 바보인 것은 아니다. 너 혼자만 분별없는 게 아니다. 너 하나만 캄캄한 어둠 속에 있는 게 아니야. (, 455-6)

 

 

그렇게 지은 매듭이 반드시 옳은 방식으로 지은 것이라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매듭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매듭을 짓는 최선의 방식이 아니라 그 타이밍이 아닐까. 어떤 방식으로든 매듭을 지어야할 순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닐까. 매듭을 지어야할 타이밍을 놓칠 때 사건이 발생한다. 그때 법이 개입하는 것이다. 물론 법의 얼굴을 한 자도 캄캄한 어둠 속에 있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는 어쨌든 매듭을 지어야만 한다. 그것이 법의 얼굴을 한 자의 사명이다. ‘과 통하는 것은 학문이라는 점에서 이는 학문의 일이기도 하다.

 

 

너는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사람이 제 이름을 쓸 줄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제 이름을 쓸 수 있게 되면 자기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자기와 자기 이외의 것을 분간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학문의 첫걸음이다. 전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학문에 힘쓰면,

힘쓸수록 사람이라는 존재의 모호함, 혼돈의 깊이를 알게 된다. 동시에 사람이 학문이라는 정밀한 체계를 만든 까닭도 그 모호함과 깊은 혼돈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

그래서 흥미롭다. 그래서 그 길은 멀다. (, 462)

 

 

마지마 신노스케의 종조부이자 가문의 곁가지 모토미야 겐에몬은 사건의 말미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젊어서 그는 결혼을 했고 처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갔지만 아내가 젊은 무사와 도망을 치고 만다. 이해할 수 없는 사태에 마주한 그는 그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하고자 학문의 세계로 뛰어든다. 하지만,

 

 

역시, 모르겠더구나.”

학문을 계속할수록 오히려 모르는 것이 늘어만 갔다고 한다.

그래도 나는 학문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라는 존재의 혼돈이, 그 혼돈을 해결하고자 만들어 낸 학문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늘 그걸 기쁨으로 알았다.

[...]

나는 너무 오래 살았다.겐에몬이 말했다. “하지만 그래서 좋았다. 아직도 더 배울 수 있다. 앞으로 내가 배울 것은 사람이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다. 배울 가치가 있는 문제지.

오래 살길 잘했다. 겐에몬은 다시 한 번 말했다. (, 464-5)

 

 

학문은 이런 것이다. 내가 마주친 인생의 문제를 풀 수는 없다. 학문을 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역시 모를 일로 이해불가능의 영역에 남는다. 학문은 인간사를 속속들이 이해하기에는 부족하다. 인간은 다만, 계속해서 배울 수 있을 뿐이다.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 과정의 연속이다. 이를 두고 허망하다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허망한 것이 어디 학문뿐인가.

 

 

재주가 있는 것과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는 다른 이야기인 듯합니다요.”

그런 말을 처음 듣는데요라고 말하던 준자부로가 유미노스케의 볼에 묻은 밥풀을 알아차리고 얼른 떼어내서 먹는다.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가 아니라, 결국은 장사가 되는 일이냐 아니냐의 차이겠지요.”

준자부로는 허공에 손가락으로 쓰윽 선을 그어 보였다.

장사가 되는 선이란 게 있어서, 그걸 넘을 수 있는 일이냐 아니냐가 중요합니다.”

[...]

투미하다, 느리다 잔소리를 들었지만 열심히 만들면 종종 볼만한 물건이 나왔지요. 하지만 제 손에 떨어지는 돈이 늘 쥐꼬리만 해서. 마누라한테 머리빗 하나 사 주지 못했습니다요.”

그렇다면 더 노력해서 수량을 늘리자, 혹은 이름을 알려서 제값을 받도록 해 보자, 라고 생각하는 편이 장인답겠지만, 마루스케의 마음은 그런 쪽으로는 움직이지는 않았다.

허망하다라는 어휘를 마루스케는 모른다. 알았으면 그렇게 말했으리라. (, 329-30)

 

 

이해할 수 없고 허망하기로는 직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인생살이란 게 원래 허망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나의 마음, 나의 본심조차 이해할 수 없다는 게 문제일 것이다. 어째서 마루스케의 마음은 그런 쪽으로 움직이지 않았을까? 재주가 있고 어울리는 일을 했음에도 장사가 되는 선을 끝내 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진상>에서 미야베 미유키는 허망함에 대해 말하고, 그와 동시에 허망함의 다음 단계를 암시한다. 허망함은 삶을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삶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건 아니다. ‘매듭을 지어주는 묘를 발휘할 수 있다면 말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이 소설에서 숱한 곁가지인생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데, 생각해보면 한 가문의 장남이 아닌 차남 이하 다른 자식들의 인생만큼 허망한 것도 없다. 아니 실은 (유미노스케와 그의 첫째 형 사이의 말다툼에서 드러나듯) 가문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인생이 결정된 장남의 인생 역시 허망한 것이기도 하다.

 

마지마 신노스케와 모토미야 겐에몬의 공통점은 당신들이 내게 가한 모욕을 극복했다는 것이다. 아니 극복했다기보다 무시무시하게 육박해오는 모욕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들은 감정을 조롱당한 처지이고, 존재를 존중받지 못하는 곁가지이고 떨거지인 처지이지만 그러한 처지를, 그리고 그러한 처지에 있다는 데서 오는 모욕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허망함의 다음 단계로서의 삶은 바로 여기, 모욕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에서부터 시작된다. 물론 쉽진 않다.

 

내 자리가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모욕감과 초조함, 이것을 극복하려 애쓰는 것은 인간이 사회적으로 성장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17-20세기의 기간 동안 일본과 유럽에서는 수많은 차남들이 직인으로, 상인으로, 군인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좁은 가정을 벗어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약탈과 착취의 첨병으로 활약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 모욕감의 극복은 쉽게 지배욕의 발현으로 이어진다.

 

<진상>에 등장하는 차남들의 사연은 다양하다. 헤이시로부터 모토미야 겐에몬, 유미노스케, 준자부로, 조카의 몸으로 가업을 계승한 나오미치 도에몬, 강한 어머니 때문에 자기 자리를 굳건히 하지 못한 센조, 그리고 연쇄살인의 주인공 마쓰카와 뎃슈까지. ‘내 자리가 없다는 사실에 초조해하는 것은 차남들뿐만이 아니다. <진상>에 등장하는 많은 여성 인물들 역시 동일한 이유로 초조해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맹렬히 돌진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짱구 산타로의 모친 오키에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여자를 골라 갈고닦아서 자기 취향대로 다듬어 보고 싶은 취미를 갖게 된 센조와 짝을 이룬다. 센조가 그렇게 된 것은 강한 어머니로 인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자리를 갖지 못한 데 있다. 자기존중감이 약한 것이다. 그런 센조를 토대로 오키에는 자기 자리를 구성하려 한다.

 

내 자리란 자기존중감을 기르고 또 확보할 수 있는 자리일 것이다. 이런 자리를 갖는 데는 개인의 역량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기반 및 인식도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미야베 미유키가 많은 인물들을 차남 이하의 자식들로 설정한 이유, 그리고 특히 연쇄살인의 범인을 차남으로 설정하고 그가 범죄를 저지르게 된 심리를 묘사하는 데 많은 공을 들인 이유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겠다. 미야베 미유키는 차남의 사정을 적극 끌어들임으로써, 범죄를 범죄자 개인의 원한의 틀 안에서만 다루지 않고, 사회구조적인 문제까지를 건드리는 셈이다. 사회파 미스터리의 거장답다.

 

<진상>은 결국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기서의 사랑은 존중과 결부된 사랑이다.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를 존중할 수 있는 마음 말이다. ‘내 마음의 자리를 탄탄하게 확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사랑은 집착으로 이어지기 쉽다. 집착으로서의 사랑은 쉽게 모욕감에 시달리게 되고 이것이 증오와 원한으로 발전한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누구든 이면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사람은 또한 상상력을 지녔기에 타인의 이면-본모습-본마음을 부풀려 보고서는 그것을 사건의 진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신베의 딸 후미노가 한 일, 후미노와 함께 마쓰카와가 저지른 일이 여기서 비롯된다. 자기존중감이 결여된 채 상대에게 의존하는 사랑은 쉽게 무너지거나 쉽게 오해를 낳는다. 애초에 신베 역시 장식품이자 그만의 신으로서 사타에를 대우했던 걸 떠올려본다면 그렇다.

 

차남의 문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다. 스스로의 삶을 곁가지’ ‘떨거지인생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상당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 은퇴 직장인, 외국인 노동자, 청년실업 문제 등등. 스스로를 자조적으로 잉여라 지칭하는 게 하나의 문화가 되어 있는 게 현재의 상황이다. 이른바 잉여 담론(문화)’에서 자조를 넘어선 어떤 역설적 자기존중감이 깔려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내 자리가 없다또는 내 자리가 위태롭다또는 조만간 내 자리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느낌, 위기감, 초조감은 자유 경쟁이 일반화된 오늘날 한국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 이것이 오늘날 겉보기엔 발전과 번영을 거듭하는 한국사회가 지닌 이면의 얼굴, 진면목즉 진상일 것이다. 겉보기엔 번듯하고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는(그러려고 애쓰는) 우리 내면의 진상일 것이다. 우리들 중 이러한 진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매듭을 지을 수 있는 자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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