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임당 빛의 일기 - 하
박은령 원작, 손현경 각색 / 비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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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순애보와 치열한 예술혼이 겸비된 소설.


 어렸을 때 책은 많이 읽지 않아도 위인전은 꽤 많이 읽었다. 내가 알고 있는 신사임당의 이미지는 <사임당 빛의 일기>에 그려진 것과 달리 현모양처의 표본이었고,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지만 남편과 아이들을 현명하게 길러낸 여인으로 기억되었다. 신사임당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조선 중기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율곡이이의 어머니, 그가 태어난 오죽헌, 오천원, 오만원 지폐가 떠오른다. 오랫동안 현모양처라는 이미지에 각인되었던 인물이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는 그림을 보고자 하는 욕망과 그리고자 하는 예술혼이 합쳐져 어린 나이에도 당찬 사임당의 모습이 비춰진다. 사임당과 닮은 꼴인 의성군 이겸 역시 사회적인 위치만 달랐을 뿐 사임당과 같은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고, 함께 세상을 나아가기를 바랬으나 중종이 적어 준 시를 옮겨 적어 한 아이에게 주는 순간 그녀의 꿈도, 사랑도 모두 날라가 버렸다.

훗날 그것이 사임당의 실수가 아니라 민정학이 쳐 놓은 함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진실을 알게 되었어도 그녀의 곁에 남아있었던 모든 것을 되돌릴 수가 없었다. 책에서는 계속해서 민정학, 휘음당 최씨가 계속해서 이겸과 신사임당의 목을 조르고 있으나, 내가 생각하는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의 악인은 '중종'이다. 민치형은 자신이 계속해서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기를 열망하는 인물로서 욕망의 화신으로 그려져 있고, 휘음당 최씨 또한 이겸의 사랑을 받고자 했으나 오로지 사임당을 보는 그가 미워 복수하고픈 마음에 독한 마음을 품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중종은 그 모든 것을 쥐고 있지만, 일렁이는 바람처럼 줏대없는 결단에 이겸도 사임당도, 민치형도 모두 그에 의해 죽임을 당할 뻔 했다. 

사임당 곁에는 오직 그녀만 바라보는 이겸이 지켜보고 있고, 사임당 역시 겉으로는 표현을 하지 않지만 이겸과 같은 마음이다. 그런 마음을 남편인 이원수가 알게 되고, 그녀 곁을 떠나 주막집 아낙을 품는다. 아이들의 아버지이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내, 사랑은 하지만 함께 삶을 살 수 없는 이겸의 존재는 늘 사임당을 외롭게 만든다. 이겸은 사임당이 하는 것들을 지지하며 그녀를 돕지만, 모든 권위를 갖고 있는 중종에게는 이겸이라는 인물이 한때 벗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세자와 친하게 지내는 것조차 못마땅해 한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사내이기에 더욱더 권좌에 대한 열망이 대리청정을 하는 세자에게로 옮겨가는 것이 불안했을지도 모르겠다. 대리청정 역시 그의 결단이었지만 자신의 말을 뒤집으며 다시 권력의 고삐를 쥐어 나간다.

현대로 돌아와 서지윤의 상황 역시 사임당과 같이 민정학과의 싸움이 계속된다. 서로의 눈을 피하고 있지만 금강산도 진본을 움켜쥐려는 그의 마수 때문에 여러번 지윤은 곤란을 겪는다. 다시 조선시대로 돌아와 화가로서의 사임당을 돕다가 중종의 눈밖에 나 옥에 갖히게 되고, 사임당은 그를 옥에서 꺼내기 위해 동분서주 한다. 함께 할 수 없지만 오직 너와 나의 마음 속에는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사임당의 바램대로 이겸은 그녀의 곁은 떠난다. 지윤 역시 민정학의 마수에서 벗어나 그의 악행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민석과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

 

책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부분은 이겸과 중종, 민치형이 함께 사냥을 하는 장면이었다. 이겸이 민치형의 헛된 욕망을 꼬집으면서도 중종에게 '제대로'된 시각으로 그를 바라보며 조정을 운영하라는 힌트 아닌 힌트였으나, 이겸이 그림 매의 그림을 마지막 하이라이트인 '눈'을 중종에게 그리고자 했다. 붓을 든 중종이 그린 매의 눈은 흐리멍덩 했고, 이겸은 종이의 질이 나쁨을 인식시키는 순간이었다.

 

 

사임당은 차분하고도 단호한 자세로 천천히 붓을 집는다. 붓을 든 손이 파르르 떨린다. 그녀는 심기일전하듯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작게 심호흡을 내쉰다. 이내 붓이 춤을 추듯 움직인다. 부인들의 눈동자가 붓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인다. 절대몰입의 순간, 사임당은 주위 상황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몰아의 경지에 빠져든다. 붓이 지나간 자리마다 포도송이가 생겨난다. 양옆으로 길게 퍼져 나간 얼룩은 포도 넝쿨로 변한다. 붓을 든 사임당의 손은 나비의 날갯짓처럼 치마 위를 나풀나풀 날아다닌다. 거침없는 붓질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진다. 성글게 열린 포도송이 하나하나가 먹음직스럽다. 포도송이가 완성될 때마다 사임당의 얼굴에 희열이 차오른다. - p.67

 

절대몰입의 순간의 표현한 사임당의 예술혼이 가장 잘 표현된 장면이다. 신사임당 하면 치마에 그려넣은 포도넝쿨이 떠오르지만 초충도는 물론이고 산수화에 능했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틀에서 사임당을 봤을 때보다 더 넓고 깊게 사임당을 표현해내어 훨씬 더 생동감있게 한 인물을 알게 되었다. 소설에서는 실제와 허구를 섞어 넣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사임당 보다 더 큰 사임당을 알 수 있어서 더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늘 그녀를 향해 모진 바람이 불었지만 사임당과 이겸은 흔들림없이 서로를 아끼며, 그들이 사랑한 그림 마저도 없어서는 안 될 그들의 혼이자 꿈이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사임당 빛의 일기 下>권에서는 사임당 뿐만 아니라 그녀의 아이들이 가고자 했던 길이 조금씩 비춰진다. 그녀의 딸인 매창 역시 그녀의 재능을 닮아 수려하게 그림을 그렸다고 알려져 있어 上권의 리뷰처럼 민화 작가인 오순경의 <민화, 색을 품다>(2017,나무를 심는 사람들)에 나오는 그림들을 함께 올려 놓는다. 소설에서의 사임당과 실제 사임당이 그린 그림을 마주하고 있으니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진짜 신사임당이라는 인물과 더 가까이 조우하게 되는 것 같다. 소설과 함께 오순경 민화 작가의 책을 곁들여 읽으니 폭넓게 그녀의 이야기가 손에 잡힐듯 가까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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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비하인드
변종필 지음 / arte(아르테)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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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주제 다른 작품들의 진짜 이야기.


 

 그림을 보면 볼수록 화수분같이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저 작품을 보면 제목과 그림을 그린 이의 이름만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림책을 보기 시작했다. 가장 상식적인 것만 알아도 도움이 되겠다싶었으나 미술책을 보면 볼수록 같은 그림이라도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나왔다. 그림에 대한 이야기, 그 작품을 그린 화가의 이야기가 양지에서든 음지에서든 계속해서 터져 나오니 알고 있었던 내용도, 그림도 다시 보게 되었다. 마치 금단현상을 일으키는 것처럼 미술책을 끊을 수 없어 자꾸만 보다보니 새로운 그림과 화가들의 보고 싶었다.


단골손님처럼 나오는 명화 뿐만 아니라 생활 곳곳에 그들의 작품이, 그의 정신이 숨어있는 작품을 같은 주제로 놓고 보는 책이 바로 <아트 비하인드>다. 39개의 질문과 39쌍의 짝을 통해 같은 주제, 다른 작품들을 통해 느껴지는 이야기는 지금까지 읽었던 많은 미술책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저자는 미술평론가이자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장으로 하나의 독립된 작품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주제가 같다면 동서양의 작품은 물론이고, 그림과 조각을 한데모아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친숙한 작품들과 익숙한 화가들의 이름 사이로 그들의 생애, 작품의 세밀한 묘사, 열정, 그들의 사고, 정신, 재능, 시대적인 이야기를 담았다. 앤디 워홀이 왜 총을 맞을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질문과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를 비교하는 글도 흥미롭게 읽었다.


현대미술 보다는 인상파 작품이 보기도 쉽고, 친숙한 그림이기에 그들의 작품과 생애를 담은 책들이 많이 쏟아져 나와 그들의 이야기를 세밀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유럽의 미술에 대해서는 그토록 친숙하게 미술사를 거론할 정도로 배우려고 노력하지만 우리나라의 그림에는 무관심하게 된다. 저자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친숙하지만 때로는 생경하게 느껴지는 우리의 그림 또한 지면을 할애해 같은 모습 다른 작품들의 도판을 수록해 놓았다. 각각 본 적은 있지만 함께 담아 놓으니 그림에 있어서 동서양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구도나 색감에 있어서도 차이가 크다.


예술가의 삶과 뮤즈의 삶을 다룬 이야기에서는 로댕과 끌로델과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이야기가 쓰여져 있다. 네 사람은 예술가로도 유명하지만 두 연인으로서도 유명해졌고, 특히 끌로델과 프리다 칼로는 너무나 유명한 남자를 만나 그녀들의 삶에 있어서 행복 보다는 고통의 크기가 컸던 여인들로 기억된다. 특히 끌로델은 로댕에게 있어서 뮤즈로서 그에게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켰으나 훗날 그녀에게는 삶의 나락으로 떨어질만큼 로댕과의 만남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프리다 칼로는 어렸을 때 버스 사고로 인해 많은 육체적 고통을 겪었으나 다시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 마음의 고통까지 얻었다. 그런 마음을 승화시켜 화폭에 담았으나 대단한 남자들을 만나 작품에 승화시키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다.


이처럼 고통과 슬픔이 베여진 작품 속에는 그들의 열정과 마음의 고단함이 그대로 남아있다. 때론 예술작품이 시대적인 상황과 당대 유행했던 패션과 생활들이 드러나기도 한다. 양지에서의 모습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의 모습까지도 화가들의 화폭에 들어있다. 인생의 희노애락을 담은 것이 예술이고, 그것을 그리고, 만든 이들은 사라졌으나 계속해서 그들이 만든 예술만은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시공간을 떠나 예술의 진짜 이야기를 마주 할 수 있는 책이라 많은 작품들과 화가들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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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남자
박성신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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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남자의 사랑.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 p. 213


 남북이 분단된지 70년이 넘었다. 올해로 분단 72주년을 맞았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녔을 때에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곧잘 불렀으나 남과 북의 관계는 온탕과 냉탕을 오갔다. 아이였을 시절에도 그랬지만 나이가 먹은 요즘에도 뉴스에서 어김없이 터져나오는 북한의 뉴스는 우리에게 늘 '위협'의 존재로 느껴진다. 교과서를 통해 보았던 많은 이념적 논쟁들이 휩쓸고 지나갔고, 그 속에서 많은 이들의 투쟁이 소리소문없이 사그러들었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많은 세대들이 겪었을 나라를 뺏긴 서러움, 전쟁, 이념들의 시간들이 많은 족적을 냈으나 흔적도 없이 사라져간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박성신 작가의 <제3의 남자>는 한 국가의 비극적인 역사를 관통하는 작품이자 한 개인의 엇갈린 사랑을 강렬하게 그려내고 있다. 책의 시작은 알 수 없는 한 여자가 죽음을 맞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누군가 그녀를 총으로 저격한다. 탕! 아내와 이혼하고 단 돈 만원도 없는 대국에게 한 남자가 찾아온다. 그의 아버지가 백주 대낮게 누군가에게 총을 맞아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남자를 따라 병원에 가게 되고, 다른 병원과 달리 외진 곳에 조용한 병원에서 누워있는 아버지를 보게 된다. 그곳에서 한 남자는 아버지가 숨겨둔 수첩을 찾아주면 거액의 돈을 준다는 유혹을 하게 되고, 대국은 그 미끼를 물고 아버지의 수첩을 찾아다닌다.


현재의 시점과 대국의 아버지 최희도 아니 월출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1년에 볼까말까 한 아버지, 마주하며 밥을 먹는 것 조차 서걱거리는 관계였다. 운동을 하고 싶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할 수 없었고 결국 자신의 무릎을 부러트렸다는 오해로 그를 더 미워하며 살았다. 거액의 돈을 받기 위해 수첩의 행방을 찾는 대국은 서서히 그가 걸었던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남북이 분단되어 대치 상황에 있고, 북에서 내려온 간첩들이 남한으로 내려와 생활 속에 틈입해 있었다. 북한에 가족을 두고 가족과 민족을 위해 지령을 받은 이들은 남한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처럼 자연스럽게 위장을 하며 살고 있었다. 주인공 월출 또한 자그마한 책방을 운영하는 그런 사내로 보였다. 자연스레 녹아들듯 남한 사회에 숨어있지만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위협이나 미행 만큼은 칼같이 눈치채고 날렵하게 그들의 뒤를 캐어 물리친다. 그러던 중 책방에 온 한 여대생인 김혜경과 만나게 되고, 그녀의 집에 책을 배달해준다. 그러던 어느날 경찰이 그녀를 뒤쫓게 되고, 월출은 혜경을 자신의 책방으로 그녀를 피신시키게 되고 그렇게 그녀가 월출에게는 남한에서 살아야하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뒤를 쫓는 형사 서중태는 날렵한 눈매를 가진 그의 모습을 보고 그에 대한 뒷조사를 하게 된다.


그러던 중 책방에 불이 나게 되고, 혜경은 사라져버렸다. 몇 년후 윤숙희라는 이름의 가수로 세상 밖에 나오게 되고 다시 월출과 만나게 되지만 월출을 좋아하는 문자에 의해 혜경이 보내는 메세지를 전달받지 못한다. 그렇게 어긋나버린 인연은 결국 월출의 가슴 속에 영원히 박힐 수 밖에 없었다.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지만 불행하게 함께 할 수 없었고 그는 그녀가 남겨놓은 보물을 지켜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그의 마음과 달리 상황은 항상 어긋나 있고, 어느새 그도 그를 괴롭히던 이들도 저마다 나이를 먹게 되는데...


월출과 대국의 이야기가 교차되면서도 서서히 밝혀지는 진실의 이야기가 숨막히듯 다가왔다. 부모 형제를 위해 남한으로 내려온 한 남자는 지령을 받고 간첩으로 활동하고 있으나 이내 시국은 많이 달라졌고, 남한에서의 삶을 살게된다. 그러나 틈틈이 내려오는 지령에 북도 남도 믿을 수 없게 되고 자신의 목숨과 사랑하는 이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애처롭게 다가왔다. 영화 '실미도'를 비롯하여 김영하 작가의 <빛의 제국>등 많은 작품들이 지령을 받고 북으로, 남으로 가는 이야기였지만 결국 국가에 의해 희생되는 개인의 이야기였다. 손에 땀을 쥐듯 서서히 조여오는 인간의 악날함과 어떤 폭풍이 휘몰아쳐도 일편단심 한 여자를 사랑하는 묵묵한 남자의 이야기가 굉장히 흡입력 있게 다가왔다. 결코 드러낼 수 없는 진실에 대한 한 남자의 일대기를 아들에 의해 하나둘 밝혀지는 이야기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신예작가로 알려진 작가의 작품이 무색할 만큼 깊은 흡입력과 이야기를 끌어가는 능력이 대단한 작품이다.


나는 진남이란 이름에 결박당해 꼼짝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눈동자가 출렁이다 고요히 가라앉는다. 통일의 꿈으로 터덕였을 청년. 가장의 짐을 짊어지고 그대로 삭아 버린 청년. 아버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그의 손을 간신히 움켜쥐었다. -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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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광주 5월 민주항쟁의 기록, 전면개정판
황석영.이재의.전용호 기록, (사)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엮음 / 창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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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기억해야 할 이야기.

​ 올해 5.18 기념식을 생중계하는 것을 보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임을 위한 행진곡'에 대해 제창인지, 합창인지의 논란으로 언론에 대두되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뉴스의 화제로 오르지 않았다. 올해는 대통령의 방문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임을 위한 행진곡'에 대해 함께 부를 수 있는 자유로움인지 몰라도 언론에서는 꽤 오랫동안 5.18 기념식에 대해 보여주었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던 해의 일이기도 하고, 중고등학교를 다녔을 때 조차도 국사책 말미에 과거정부와 현정부에 대한 설명이 있는 현대사는 수업에서 깊게 다루지 않았다. 교과서 조차도 짧게 설명이 되어 있을 뿐 왜 그일이 일어나고, 어떤 이유에서 그 일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이유도 설명도 듣지 못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 학교 울타리 밖으로 벗어 났을 때, 언론에서 기획된 프로그램과 영화, 소설을 통해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그림자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각각의 매체에 따라 당시의 상황을 세밀하게 드러낸 부분도 있었고, 때론 은유적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2014,창비)를 통해 비로소 그때 그 일이 얼마나 무섭고, 잔악했는가를 가슴 속에 체감할 수 있었던 있었다. 한강 작가의 책을 읽을 후 너무도 무섭고, 무서워 책을 읽는 내내 잠을 잘 때마다 악몽을 꾸었고,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새로운 몇 권의 책을 접해도 <소년이 온다>의 잔영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가 당시에 있었던 일을 각 인물을 통해 문학적으로 잘 풀어냈다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당시 5.18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세밀하고도 체계적인 기록물로 평가 받는 책이다.

32년 전에 ​비밀리에 많은 이들의 증언과 자료수집, 취재를 통해 출간되었으나 올해 전두환 회고록이 출간되면서 다시 5.18에 대한 진실에 대해 설전이 오갔다. 채널을 돌리다가 SBS '그것이 알고싶다'를 통해 재점화되기 시작했고, 당사자라 할 수 있는 이의 회고록의 술회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과 반대되는 것들이었다. 시간이 지났다고 점점 왜곡되고 폄훼해 가는 시간 속에서 그때의 진실이 무엇이었는가를 다시 알리기 위해 새 옷을 입고 다시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초판으로 출간 될 때에는 320페이지 밖에 되지 않았으나 5.18에 관련된 재판, 특별법등이 수록되어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다시 책이 나왔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41분 늦가을 초저녁에 울려퍼지는 3발의 총격이 일어난 시간으로 시간을 되돌린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1961년 시작해 세 차례 헌법을 바꾸며 18년간 장기집권을 해 나갔으나 자신의 부하인 중앙정보부 부장인 김재규에 의해 정권의 막이 내렸다. 10.26사태 이후 나라에서는 대통령이 없는 큰 공백이 벌어졌고, 커다란 공백을 메우기 위해 노력했으나 다시 군부에 의해 새 정권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서서히 조여드는 군화의 세찬 발걸음이 다시 정권의 깃발을 거머쥐게 되었고, 민주화 운동이 봄을 맞던 시기였으나 그들을 제압하기 위한 신군부 세력의 진압은 과히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했다. 민주화 운동에 가담했던 이들만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광주에서 길을 가다가, 그곳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 아이, 어른 할 것없이 무차별적인 폭행이 자행되었다. 한강 작가의 소설 속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처음부터 그들은 시민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며 과잉 진압을 했고, 광주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이 곳에 일을 '폭동'이라며 언론을 조작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동'이라고 말한다. 혹은 북한군이 광주에 내려와서 진압을 했다는 식의 유언비어가 돌았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들 조차도 진실을 알 수 없었고, 그 시대를 경험하지 못했던 이들 또한 배운 적이 없어 5.18에 대해 알지 못한다. 왜곡과 오보 없이 진실 그대로의 광주는 보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일인가 싶다. 많은 이들이 히틀러가 자행한 나치즘에 대해 배우고, 공부하고, 많은 책을 읽고 알아가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 대해 더없이 무지한 것 같다.

수많은 시간의 기록들이 그들의 발자취를 기록하고, 아무런 이유없이 폭행을 당했던 시민들의 이야기에 마음이 아팠다. 한 개인의 삶의 시대의 어둠에 갖혀 어떤 의미도 없이 죽어갈 수 밖에 상황을 만든 이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책을 읽고 있으니 지금까지 눈을 감고 살았던 것처럼 아득하다. 눈을 뜨고 모르는 것들을 알아가기 위한 노력과 잘못에 대한 반성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이루어져야할 과제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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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트로드 모중석 스릴러 클럽 42
로리 로이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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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세한 균열로 만들어낸 오해와 진실.


​ 강한 태풍이 불어와 나의 모든 것을 할퀴어 놓는 것과 잔잔한 바람이 불어와 조금씩 잠식하며 내 삶을 흐트러 놓는 것 중 어떤 바람이 더 세고 강한 것일까?라는 물음이 짙게 밀려온다. 모중석 스릴러 클럽 42번째 책인 로리 로이의 장편소설 <벤트로드>는 2012년 에드거상 최우수신인상을 수상한 신예작가의 작품이다. 책은 시종일관 처음부터 끝까지 조곤조곤한 말투로 섬세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마치 유리 위를 걷거나 흔들리는 다리에서 조금씩 발을 떼듯 느릿한 속도로 이야기를 몰아가고 있다. 캔자스 주의 한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고향을 떠났던 아서가 가족들과 함께 캔자스 주의 벤트로드에 다시 정착하면서 이야기는 고조된다.


어떠한 이유로 고향을 떠났다가 세월이 흘러 다시 고향을 찾았다면 아주 큰 성공을 해서 금의환향을 하지 않은 바에야 다시 되돌아오기가 쉽지 않다. 작은 마을일수록 더 베타적이지만, 다행히 그는 엄마와 작은누나가 살고 있었고 아서는 가족과 함께 벤트로드에 정착한다. 아서가 가족들과 이곳에 오기 전 도로에서 무언가 부딪힌 것이 하나의 복선인 것처럼 처음부터 그들의 발걸음에 미세하게 빗금이 쳐져있다. 아서는 실리어와 그의 아이들인 대니얼과 에비와 함께 평온하게 살아가려 하지만 곳곳에 묻어나오는 '그사건'의 흔적들이 함께 혼재되어 있다.

그의 큰 누나인 이브의 죽음으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고향을 떠나왔지만 본의아니게 아서의 딸인 에비는 이브의 유품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그러던중 마을에 한 소녀가 실종되고 마을사람들은 저마다 루스의 남편인 레이를 의심스럽게 바라본다. 둘째 누나인 루스가 남편인 레이에게 폭행을 당해 엉망인 몸을보고 아서는 화를 감추지 못하고 그와 한바탕 한 후 루스와 레이를 떨어뜨려 놓는다. 술을 먹으면 어떤 일을 할 줄 모르는 망나니가 되는 레이는 루스에게 풀듯 몸도 마음도 엉망이 되어있지만 이브가 죽기 전에 레이는 점잖으면서도 잘생긴 청년이었다. 그러나 이브가 집안에서 피를 흘리며 죽은 이후부터 그의 가족도 레이도 모두 변해있다. 언니의 애인이었던 남자와 결혼한 루스. 모든 것이 비틀어진 삶을 회복하기란 쉽지 않다.


마을에서는 예쁜 금발의 소녀가 실종되었을 때 이브를 떠올렸고 이브 역시 레이가 그렇게 죽였을 것이라고 마을사람들은 저마다 수군거린다. 대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심정적인 범인은 레이로 지목된다. 로리 로이가 그리는 인물들은 저마다 모두 불안정하다. 어딘가 모르게 시한폭탄이 터질 것 같은 예감에 숨을 죽이게 만든다. 이야기가 고조 될때마다 미세하게 균열이 가는 소리가 쩍쩍 들리지만 '그사건'에 대한 속내를 쉬이 펼치지 않는다. 다만, 그 속에서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인물이 레이였다.


모두가 불안정하지만 특히 이브의 드레스를 입고 이브와 레이가 찍힌 사진을 보면서 에비는 자꾸만 레이에게 주목한다. 형편없는 레이의 모습은 폭력에 시달리는 루스는 그의 아이를 품은 것과 상반되는 이미지로 다가왔다. 이야기는 끝까지 계속 반복하며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다가 마지막에 누가 더 무서운 사람인지를 펑하고 터트린다. 처음에는 책을 다 읽고 덮는 순간 밋밋한 소설이구나 싶었으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장 피해자라고 느꼈던 인물이 주는 무서움이 크게 다가왔던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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