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임당 빛의 일기 - 하
박은령 원작, 손현경 각색 / 비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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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순애보와 치열한 예술혼이 겸비된 소설.


 어렸을 때 책은 많이 읽지 않아도 위인전은 꽤 많이 읽었다. 내가 알고 있는 신사임당의 이미지는 <사임당 빛의 일기>에 그려진 것과 달리 현모양처의 표본이었고,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지만 남편과 아이들을 현명하게 길러낸 여인으로 기억되었다. 신사임당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조선 중기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율곡이이의 어머니, 그가 태어난 오죽헌, 오천원, 오만원 지폐가 떠오른다. 오랫동안 현모양처라는 이미지에 각인되었던 인물이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는 그림을 보고자 하는 욕망과 그리고자 하는 예술혼이 합쳐져 어린 나이에도 당찬 사임당의 모습이 비춰진다. 사임당과 닮은 꼴인 의성군 이겸 역시 사회적인 위치만 달랐을 뿐 사임당과 같은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고, 함께 세상을 나아가기를 바랬으나 중종이 적어 준 시를 옮겨 적어 한 아이에게 주는 순간 그녀의 꿈도, 사랑도 모두 날라가 버렸다.

훗날 그것이 사임당의 실수가 아니라 민정학이 쳐 놓은 함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진실을 알게 되었어도 그녀의 곁에 남아있었던 모든 것을 되돌릴 수가 없었다. 책에서는 계속해서 민정학, 휘음당 최씨가 계속해서 이겸과 신사임당의 목을 조르고 있으나, 내가 생각하는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의 악인은 '중종'이다. 민치형은 자신이 계속해서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기를 열망하는 인물로서 욕망의 화신으로 그려져 있고, 휘음당 최씨 또한 이겸의 사랑을 받고자 했으나 오로지 사임당을 보는 그가 미워 복수하고픈 마음에 독한 마음을 품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중종은 그 모든 것을 쥐고 있지만, 일렁이는 바람처럼 줏대없는 결단에 이겸도 사임당도, 민치형도 모두 그에 의해 죽임을 당할 뻔 했다. 

사임당 곁에는 오직 그녀만 바라보는 이겸이 지켜보고 있고, 사임당 역시 겉으로는 표현을 하지 않지만 이겸과 같은 마음이다. 그런 마음을 남편인 이원수가 알게 되고, 그녀 곁을 떠나 주막집 아낙을 품는다. 아이들의 아버지이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내, 사랑은 하지만 함께 삶을 살 수 없는 이겸의 존재는 늘 사임당을 외롭게 만든다. 이겸은 사임당이 하는 것들을 지지하며 그녀를 돕지만, 모든 권위를 갖고 있는 중종에게는 이겸이라는 인물이 한때 벗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세자와 친하게 지내는 것조차 못마땅해 한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사내이기에 더욱더 권좌에 대한 열망이 대리청정을 하는 세자에게로 옮겨가는 것이 불안했을지도 모르겠다. 대리청정 역시 그의 결단이었지만 자신의 말을 뒤집으며 다시 권력의 고삐를 쥐어 나간다.

현대로 돌아와 서지윤의 상황 역시 사임당과 같이 민정학과의 싸움이 계속된다. 서로의 눈을 피하고 있지만 금강산도 진본을 움켜쥐려는 그의 마수 때문에 여러번 지윤은 곤란을 겪는다. 다시 조선시대로 돌아와 화가로서의 사임당을 돕다가 중종의 눈밖에 나 옥에 갖히게 되고, 사임당은 그를 옥에서 꺼내기 위해 동분서주 한다. 함께 할 수 없지만 오직 너와 나의 마음 속에는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사임당의 바램대로 이겸은 그녀의 곁은 떠난다. 지윤 역시 민정학의 마수에서 벗어나 그의 악행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민석과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

 

책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부분은 이겸과 중종, 민치형이 함께 사냥을 하는 장면이었다. 이겸이 민치형의 헛된 욕망을 꼬집으면서도 중종에게 '제대로'된 시각으로 그를 바라보며 조정을 운영하라는 힌트 아닌 힌트였으나, 이겸이 그림 매의 그림을 마지막 하이라이트인 '눈'을 중종에게 그리고자 했다. 붓을 든 중종이 그린 매의 눈은 흐리멍덩 했고, 이겸은 종이의 질이 나쁨을 인식시키는 순간이었다.

 

 

사임당은 차분하고도 단호한 자세로 천천히 붓을 집는다. 붓을 든 손이 파르르 떨린다. 그녀는 심기일전하듯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작게 심호흡을 내쉰다. 이내 붓이 춤을 추듯 움직인다. 부인들의 눈동자가 붓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인다. 절대몰입의 순간, 사임당은 주위 상황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몰아의 경지에 빠져든다. 붓이 지나간 자리마다 포도송이가 생겨난다. 양옆으로 길게 퍼져 나간 얼룩은 포도 넝쿨로 변한다. 붓을 든 사임당의 손은 나비의 날갯짓처럼 치마 위를 나풀나풀 날아다닌다. 거침없는 붓질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진다. 성글게 열린 포도송이 하나하나가 먹음직스럽다. 포도송이가 완성될 때마다 사임당의 얼굴에 희열이 차오른다. - p.67

 

절대몰입의 순간의 표현한 사임당의 예술혼이 가장 잘 표현된 장면이다. 신사임당 하면 치마에 그려넣은 포도넝쿨이 떠오르지만 초충도는 물론이고 산수화에 능했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틀에서 사임당을 봤을 때보다 더 넓고 깊게 사임당을 표현해내어 훨씬 더 생동감있게 한 인물을 알게 되었다. 소설에서는 실제와 허구를 섞어 넣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사임당 보다 더 큰 사임당을 알 수 있어서 더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늘 그녀를 향해 모진 바람이 불었지만 사임당과 이겸은 흔들림없이 서로를 아끼며, 그들이 사랑한 그림 마저도 없어서는 안 될 그들의 혼이자 꿈이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사임당 빛의 일기 下>권에서는 사임당 뿐만 아니라 그녀의 아이들이 가고자 했던 길이 조금씩 비춰진다. 그녀의 딸인 매창 역시 그녀의 재능을 닮아 수려하게 그림을 그렸다고 알려져 있어 上권의 리뷰처럼 민화 작가인 오순경의 <민화, 색을 품다>(2017,나무를 심는 사람들)에 나오는 그림들을 함께 올려 놓는다. 소설에서의 사임당과 실제 사임당이 그린 그림을 마주하고 있으니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진짜 신사임당이라는 인물과 더 가까이 조우하게 되는 것 같다. 소설과 함께 오순경 민화 작가의 책을 곁들여 읽으니 폭넓게 그녀의 이야기가 손에 잡힐듯 가까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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