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복 - 누릴 복을 아껴라
정민 지음 / 김영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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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우지 말고 비우고, 아낀 복을 함께 나누다.


 언젠가부터 '아껴쓰라'는 말 보다는 '쓰라'는 풍속도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은행에 가도 백화점에 가도 '절제의 미학'은 없고 무조건 써야 이득을 볼 수 있다. 현금 보다는 신용카드로 긁어야 혜택이 더 있다니, 마구 긁어야 하는 것일까. 아끼려는 노력하는 이와 쓰라고 부추기는 자 사이에서 고민이 되기도 하지만 계획없이 계속해서 쓰기만 하면 안될 것 같아 최소한의 것만 구매했다. 요즘은 워낙 소비의 폭이 넓어서 빈익부 부인빈의 차이가 클 뿐만 아니라 다양한 제품, 먹을거리가 풍부하다 보니 어디까지 제한을 두어야할지 고민스럽다. 그러다보니 요즘은 많은 것을 구매하기 보다는 꼭 필요한 것들만 사고, 불필요한 것을 줄이자는 의견들이 속속 나오는 것 같다. 어떤 부분에서는 미니멀리스트적인 면도 어떤 면에서는 절대 줄일 수 없는 것도 있으니 법정스님이 말하신 '무소유'와는 거리가 먼 인사이지만 물질적은 풍요로움 보다는 절제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정민 교수의 <석복>은 복을 아낀다는 뜻이다. 누릴 복을 풍족하게 누리기 보다는 복 마저도 아꼈다가 함께 나눈다는 의미인데, 그 의미가 좋아 여러번 읊조려본다.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돈이 최고의 으뜸되는 가치이고,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 쓰는 사람이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지만 흥청망청 돈을 쓰기 보다는 적절하게 돈을 쓰는 사람이 대우 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석복>에서는 총 4장의 구성으로 되었는데 마음 간수, 공부의 요령, 발및의 행복, 바로 보고 멀리 보자 라는 뜻의 고사성어들이 25개씩 담겨져 있다. 단어들에 얽힌 이야기들이 한 꼭지씩 들어 있는데 그 이야기 중에서는 낯익은 다산 선생의 이야기도 담겨져 있고, 연암 박지원 선생과 간서치로 유명한 이덕무 선생의 이야기도 수록되어 있다.


원두의 향이 좋은 커피 한 잔도 좋지만, 고즈넉한 공간에 앉아 담백하고 쌉싸름한 차 한잔을 마시며 옛 선인들의 문장을 음미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요즘은 너도나도 빨리빨리를 외치다 보니 그저 맛을 음미하기 보다는 무엇이든 허겁지것 담기 바쁜 것 같다. 느릿느릿 산책을 하듯 발걸음을 옮기며 시공간을 떠나 장자가 한 이야기, 고려의 사람이 한 이야기, 조선의 한 선비가 말한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우리가 잊고 있던 절제의 미덕을 깨닫게 된다. 슬로우 푸드, 슬로우 라이프는 이미 옛 사람들이 밥먹듯 하고 있는 것이기에 줄창 외국 것만 외치지 말고 우리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거쳤던 시간들의 삶과 경구들을 읽으며 그 뜻을 헤아려보는 것은 어떨까.


절제미가 느껴지는 많은 이야기 중에서는 보고픈 이를 청하는 마음, 그리움이 녹아드는 마음, 책 한자 한자를 놓치지 않으려는 혜안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곤 한다. 어느 글귀 하나 놓칠까 싶어 포스트잇을 붙여놓으니 책 가득히 붙여 놓을 수 밖에 없었지만 검소하면서도 마음만은 부자인 그들에게 배우는 삶의 여유와 청렴함, 삶의 지혜은 계속해서 배우고 또 배우고 싶은 이야기다. 오랜만에 정민 교수의 <석복>을 읽으면서 오래전 다산 정약용 선생의 저서들을 읽었던 기억들이 떠오르기도 했고, 연암 박지원 선생의 글을 더 읽고픈 마음이 들었다. 잊지 말고 그들의 언어와 생각을 더 깊이 읽어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다짐을 다시금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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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가 말했다. "입과 배의 욕망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매양 절약하고 검소함을 더함이 또한 복을 아끼고 수명을 늘리는 방법이다." 이제는 '새해 복 많이 지으세요'를 '새해 복 많이 아끼세요'로 바꿔 말하고 싶다. 부족함보다 넘치는 것이 더문제다. 채우지 말고 비우고, 움켜쥐는 대신 내려놓는 것이 어떤가? - p.13


"옛 책을 소리 내어 읽는다", "손을 모두고 무릎을 여민다", "조촐해서 잡스러움이 없다", "종일 단정히 앉아 있다", "한 심지의 향을 사른다", "고요히 시서와 마주한다", "오도카니 단정히 앉는다", "도서가 벽에 가득하다".  우리는 너무 말이 많고 심히 부산스럽다. 볕 잘 드는 창 아래 앉아 책상을 말끔히 치우고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힌다.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아 세상을 지우고 침묵을 깃들인다. - p.19


순욱荀勖은 진晉 무제武帝의 잔칫상에서 죽순 반찬을 맛보더니 "이것은 고생한 나무를 불 때서 요리한 것이로군"이라고 했다. 조용히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과연 오래된 수레바퀴를 쪼개 땔나무로 썼다는 전갈이었다. 《세설신어 世設新語》에 나온다. 사람 감별도 한입에 알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 p.21


선득한 추위에 깬 새벽잠이 다시 들지 않는다. 나는 너무 늦어버린 느낌이다. 공부에 아무 진전 없이 이렇게 끝나는 건가? 그래도 그는 다짐한다. 이제부터라도 더 시간을 아껴쓰고, 몸을 함부로 굴리지 말아야지. - p.46


편지 받고 부인의 병환이 이미 회복된 줄은 알았으나 그래도 몹시 놀라 탄식하였습니다. 제 병증은 전과 같습니다. 제생들이 과거시험을 함께 보러 가서 거처가 텅 비어 적막하군요. 매일 밤 달빛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지각 地閣에 밤이 깊어 산달이 점점 올라오면 텅 빈 섬돌은 마름풀이 떠다니는 듯 너울너울 춤을 추며 옷깃을 당기지요. 홀로 정신을 내달려 복희씨와 신농씨의 세상으로 가곤 합니다. 다만 곁에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 만한 운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꽃이 한창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형께서는 건강이 어떠신지요. 보고 싶습니다. 저는 별일 없이 그럭저럭 지냅니다. 봄 동산의 붉고 푸른 빛깔이 날마다 사랑스럽군요. 이러한 때 한번 들르셔서 노년에 봄을 보내며 드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달래보는 것이 어떠실는지요. 진작 하인을 시켜 평상을 닦아놓고 기다리고 있으니 혼자 있게 하지 않으시면 고맙겠습니다. 어떠십니까. 이만 줄입니다. - p.56~57 (다산 선생의 편지글 중에서)


일곱째, 읽는 데 그치지 말고 자기 글로 엮어보는 연습을 병행하는 것이다. 안으로 구겨넣기만 하고 밖으로 펼침이 없으면 독서의 마지막 화룡점정 畵龍點精은 이뤄지지 않는다. - p.90


글에는 세 가지 등급이 있다. 상등는 예봉을 감춰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읽고 나면 절로 맛이 있는 글이다. 중등은 마음껏 내달려 돌멩이가 튀는 글이다. 하등은 담긴 뜻이 용렬해서 온통 말을 쥐어짜내기만 일삼는 글이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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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빵 고양이의 비밀
최봉수 지음 / 비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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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 몽글몽글, 사랑스러움이 묻어나는 식빵 고양이.

가끔씩 빵이 먹고 싶을 때면, 유명 프랜차이즈의 빵집 대신 동네 빵집에 들러 갓 구운 빵을 사러간다. 워낙 유명한 집이라 빵의 회전율은 빠르지만 계산대의 긴 줄은 덤이랄까. 그럼에도 고르고 고른 빵을 골라 서 있다보면 빵의 고소한 냄새가 코 끝을 자극한다. 많은 빵 가운데에서도 고소함과 바삭함 혹은 촉촉함이 묻어나는 빵을 좋아하기에 식빵이나 바케트, 소보르를 즐겨 먹는데 <식빵 고양이의 비밀>을 읽고 있으니 절로 빵집의 문을 두드릴 것 같다.
뚱냥이의 몸매로 변신하면 안되기에 최대한 '밀가루 음식'을 참고 있는데 <식빵 고양의 비밀>을 집어 드는 순간 말랑말랑, 몽글몽글한 식빵 고양이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삼켜졌다. 그림만으로도 이미 뻑하고 넘어갔는데 워낙 책 자체가 말랑한 식빵 같아서 나도 모르게 자꾸만 책 표지를 쓰다듬고, 누르고, 만지게 된다.

예전에는 워낙 고양이에 대한 편견이 심해 길에 다니는 고양이를 '도둑 고양이'라고 칭했을 만큼 사람들의 이미지에 고양이는 무서움으로 자리 잡을 때가 있었다. 밤에 아기 우는 소리인지, 고양이 울음 소리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을 만큼 들려오는 소리가 무섭고, 무엇보다 날큼하게 쳐다보는 고양이의 눈빛이 무서워 피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강아지 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고양이의 매력에 풍덩 빠져 버렸다. 고양이를 키우는 이들이 많아진 영향도 있지만 각각의 고양이 캐릭터를 자주 접하면서 친숙해졌고, 날큼한 눈빛이 사납기 보다는 도도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더욱이 요즘 하는 운동도 한 몫을 하고 있다. 고양이들이 자주 하는 동작을 따라하고 있고, 그렇게 몸을 늘리고 나면 절로 어깨와 등이 쫙 펴지곤 한다.

 

고양이는 강아지와 다른 매력을 갖고 있고, 특유의 몸짓이 우아하고, 날렵하다. 발끝을 만지면 젤리처럼 말랑말랑 하기도 하고, 따스한 햇볕에 몸을 말고 한껏 햇살에 몸을 맡기기도 한다. <식빵 고양이의 비밀>은 고양이 특유의 몸짓이 잘 묻어나는 동화여서 읽는 내내 앞발로 빵을 반죽하는 고양이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몇 번을 다시 읽었다. 일명 '꾹꾹이 반죽'. 빵인지 아기 고양이인지 컨벨트에 타고 오르는 고양이를 볼 때면 절로 엄마미소가 지어진다. '귀여운 녀석들'

고양이 만큼이나 눈에 사로잡는 것은 우아함이 돋보이는 찻잔이다. 트레이 가득 차와 함께 마실 케익과 빵이 올려져 있고, 서로 담소를 나눌 수 있도록 따스한 차와 함께 나른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식빵 모양의 차를 타고, 빵에 들어갈 우유를 한모금씩 마시며 일을 하는 고양이의 일과는 '여유'가 아닌가 싶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더없이 좋은 이야기이자 여유가 없는 이들에게는 하나의 쉼표가 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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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안재성 지음 / 창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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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전쟁에서 한복판에 서 있던 한 남자의 이야기.


작년에 봤던 한 영화는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배를 타고 숨어서도 무수하게 떨어지는 총알을 빗겨나가지 못하고 사람을, 배를, 비행기를 격추시켰다. 해안 너머로 끝도 없이 늘어져 서있는 군인들의 모습은 저마다 자신의 기지로 살려고 하지만 적극적인 대응을 하면 할수록 총알은 더 빨리, 깊이 박혔다. 어디로 가도 피할 수 없이 그저 총알받이가 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어떻게 그 시간을 빠져 나가야 할까,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운이 짙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잘 기록되었고, 작년에는 유명감독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그때의 상황을 잘 구현해냈다. 어느 진영의 싸움이 아닌 삶과 죽음의 길목에서 인간의 감정을 날 것으로 드러냈다.


시간이 지나도 많은 전쟁의 아픔을 다시 되돌아보게 효과를 영화를 통해 다시금 보여주고 있지만, 우리에게 가장 큰 마음의 상흔을 남겼던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남과 북의 전쟁. 시작은 알고 있지만 언제 끝이 나고, 누가 전쟁의 승기를 잡고 명문을 얻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갈등이 많이 있다. 전쟁은 각 나라의 지도자들이 어떤 명분 아래 일으켰지만, 보이지 않는 많은 개인들이 피를 흘리고, 쓰러지고, 다치고, 죽는 과정들이 즐비하게 일어난다. 보이지 않는 길을 가다가 운 좋게 다치지 않고 힘겨운 시간을 지나갔다가면 다행이지만 그 역동적인 시대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휘둘린 한 남자의 이야기는 영화 <덩케르크> 만큼이나 참혹하다.


북한에서 엘리트로 한 학교의 선생님으로 자리잡고 있던 정찬우는 누군가의 부름으로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상부에서 지시가 떨어지고, 그는 한창 전쟁이 발발해 열심히 싸우고 있는 전선 사령관을 만나라는 특명을 받는다. 남쪽으로 내려가 교육위원으로 북의 사상과 문화를 전파하라는 명이 떨어지고 학교 총장의 딸과 약혼하기로 되어 있는 허인숙과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헤어진다.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뽑히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가 아닌가 싶다. 자신의 삶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채 그는 당의 특명을 받고 군인들의 지시아래 떠났지만 그들의 희망찬 계획과 달리 떨어지는 포탄과 총알과 화염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상황을 마주하고 만다. 배고픔을 넘어 생과 사의 희미가 오락가락 할 정도로 사투를 겪는다.


사실, 그의 고향은 북이 아니라 남한의 한 도시였고, 어렸을 때 유복하게 자랐으나 동생이 누군가의 손에 죽임을 당해 시신으로 발견되고, 그의 아버지는 만주로 가족들을 데리고 거처를 옮겨버린다. 그렇게 그는 아버지의 엄한 훈육으로 공부를 잘 하게 되고, 어느 곳이나 가도 우등생으로 자라게 된다. 그러나 그가 가고자 하는 목표를 세울 때마다 시대의 불운으로 하여금 꺾이게 되고, 일제시대의 패망을 넘어 한국전쟁의 발발은 한 남자의 삶을 엘리트가 아닌 포로 수용소에 수감된 한 사람으로 강등되고야 만다. 진주에서 광주, 대구에서 목포, 끊임없이 돌고 돌아 정찬우라는 이름 보다 수감번호로 불리고, 그의 선의로 시작된 행동들이 누군가에게는 눈꼴시려울 정도로 아니꼬운 행동으로 그를 위협하곤 했다. 선과 악의 두 시선은 늘 그를 따랐고, 그의 영혼은 10년이 넘는 수감생활 동안 깎이고 깎여 피폐해져 나갔다. 그가 포로수용소에 있으면서 '자신이 무엇을 그리 잘못 했기에 그랬나'라는 물음이 차 올랐던 것처럼 시대는 그를 한 번도 자유롭게, 평온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의 오랜 수감생활은 화염에 둘러싼 전쟁터 만큼이나 피폐했고, 악랄했고, 폭렬적이다. 사회의 갈등과 분열의 전시장이라고 할만큼 그들은 자신들의 추구하는 이념만을 외치며 그들을 몰고 나갔다. 실제 수기를 통해 한 인간이 거쳐왔던 시간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혹독한 시간들을 그는 기록해왔다. 역사 교과서나 세계사에서 기록되지 않는 이야기지만 우리에게는 절대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이야기는 그는 묵묵히 써내려갔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전쟁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누군가에게는 이미 잊혀진 전쟁 중 하나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상흔이다.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역사의 진짜 얼굴이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지만 마지막 작가의 말에 쓰여진 그의 후의 이야기는 더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끝끝내 자유를 누릴 수 없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오랫동안 마음에 짠하게 남는 책이다.

 

정찬우는 폭발의 후퐁풍이 닥칠 때마다 몽유병 환자처럼 쓰러졌다가 일어나기를 되풀이하며 방향도 없이 이리저리 허둥지둥 어지러운 발길을 옮겼다. 기어코 살아야겠다는 의지도, 절대 죽어서는 안된다는 생각도 가질 수 없었다. 생명을 노리는 포탄 파편이 귓전을 쌕쌕 날아가는 사선이었다. 살기를 바라는 것도, 죽지 않으리라는 희망도 사치스러운 감정이었다. 포탄이 어디 떨어질지 모르니 달아날 곳이 어딘지도 알 수 없는 채, 그저 되는대로 이리저리 헤매고 다닐 뿐이었다. - p.80~81


"자수해봤자 친일파 악질경찰 출신들에게 고문당하고 감옥살이 할 게 뻔한데 어떻게 그리합니까? 저는 잉민군도 싫고 국방군도 싫습니다. 모든 게 전쟁 때문이려니 생각하고 종전이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지요. 어느 쪽이 이기든 상관 안 할랍니다. 무사히 살아 남으면 고향에 돌아가 농사나 지을 겁니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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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우스 로마사 1 - 1000년 로마의 시작 리비우스 로마사 1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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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고, 재미있게, 깊이 읽어볼 수 있는 로마 역사의 모든 것


 로마 역사의 재미를 알게 된 것은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 평설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를 읽고 난 이후 부터였다. 읽기 전에는 언젠가 꼭 읽어야 하는 독서 리스트 중 하나였기에 읽어보고 싶었고, 읽은 후에는 생각과 달리 그녀의 많은 사견이 담긴 이야기에 놀라움과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다. 시오노 나나미의 목소리로 된 긴 호흡의 책을 읽기 이전에 티투스 리비우스의 시선이 담긴 책을 읽었더라면 로마 역사를 더 중립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만큼 <리비우스 로마사 1>은 2000년간의 로마 역사를 정통적으로 그려놓은 책이다. 고대에 잘 알려져 저술가로 알려져 있는 티투스 리비우스는 오래 전 부터 그의 문장이 매혹적으로 아름답다는 평을 지니고 있으며, 많은 로마사 가운데 가장 정통한 책이라는 평가를 받은 책이기도 하다.


그가 저술 했을 당시에는 142권의 어마어마한 분량으로 집필 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썼던 저작들이 유실되어 일부분만 남아 있다. 다행히도 그의 쓴 책 중 유익하고, 사료로서 가치가 있으며, 동시에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남았다고 한다. 1권에서 10권, 21권에서 45권, 총 35권의 원서가 두루마리 휴지처럼 쓰여진 그의 저작을 모아 4권의 책으로 출간된다고 한다. <리비우스 로마사 1>은 원서 1에서 5권을 담고 있으며, 문장은 짧게 서술되어 있다. 오래된 책이기에 문장 또한 세월감이 많이 남아있을 줄 알았지만 단문으로 읽히는 것이 좋고, 무엇보다 티투스 리비우스 특유의 유머가 스며있어 재밌게 읽힌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시오노 나나미 작가의 책을 읽고 로마사에 관심이 생겨 로마사를 비롯해 로마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을 즐겨 읽었지만 소설만큼이나 그의 책 또한 재미 뿐만 아니라 해박한 지식을 느낄 수 있게 만든다. 로마사의 시작이 그렇듯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로마를 건국하는 것을 시작으로 로마 역사의 첫 발걸음이 떼어진다. 그림이 하나도 없이 그저 글로만 채워져 있지만 상상이상으로 고대의 로마를 상상하게 만들고, 마치 옆에 그들이 있는 것처럼 사실적으로 그려놓았다.


건국의 시작은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이 수반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미비하다. 그들은 사비니족 여자들을 취해 가족을 이루었으며, 점차 로마 권력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의 과정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그들의 전쟁은 치열했고, 승리의 영광은 가문의 영광 뿐 아니라 나라의 영광이 되어 점점 로마는 뻗어나가는데 일단, 시작점이기에 그들이 로마라는 나라에 대한 시스템을 어떻게 갖춰가는지를 세밀하게 보면 보이지 않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로마인들이 여러 전쟁에서 승리하여 얻은 영광은 너무나 크고 찬란하기 때문에 마르스가 로마의 첫 번째 부모요 국가 창건자의 아버지라고 주장해도, 온 세상의 모든 나라들은 로마 제국의 통치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처럼 그런 주장도 즉각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비교적 사소한 일들이고 그래서 나는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나는 독자들이 우리의 조상이 어떤 종류의 삶을 살았고,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으며. 로마의 권력이 처음 획득되어 그 후 계속 확장되어가는 과정에서 어떤 정치와 전쟁의 수단을 사용했는지 등을 좀 더 진지하게 고려해 보기를 촉구한다. - p.16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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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서에서 온 남부 장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처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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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느끼고 싶은 자유.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글은 독특하다. 그의 작품 중 <임신중절>을 읽었을 때도 잃지 않았던 길을 여러번 헤메고, 또 헤메이면서 그가 쓴 문장과 행간을 읽어내려갔다. '빅서'라는 공간은 남북전쟁 때  조지아와 아칸소, 미시시피를 비롯해 남부연합의 열두 번째 주다. 남북전쟁이 일어났을 무렵 역사적인 의의가 있었던 곳이었으며, 연합군의 장군으로 많은 활약상을 남긴 리 멜론의 증조 할아버지의 후일담이 그의 친구 제시의 입으로, 리 멜론의 입으로 전해지지만 아쉽게도 오거스터스 멜론 장군의 동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는다. 친지들의 입과 입으로 전해들었을 뿐 잃어버린 역사에 대해 되찮을 길이 없는 리 멜론과 제시, 그들의 친구들, 그리고 리 멜론과 관계를 맺은 많은 여자들의 이야기는 바람과 같다.


내 노트의 요약은 이렇게 되어 있을 것이다. 전도서의 첫 장은 57개의 구두점으로 되어 있는데, 다시 나누면 22개의 쉼표와 8개의 쌍점, 8개의 세미콜론, 그리고 2개의 물음표, 17개의 마침표로 이루어져 있다. 전도서의 두 번째 장은 구두점이 모두 103개인데, 45개의 쉼표와 12개의 세미콜론, 15개의 쌍점, 6개의 물음표, 25개의 마침표로 되어 있다. 전도서의 세 번째 장에는 77개의 구두점이 있는데, 33개의 쉼표아 21개의 세미콜론과 8개의 쌍점, 그리고 3개의 물음표와 12개의 마침표로 되어 있다. 전도서의 네 번째 장은 구두점이 모두 58개인데, 그중 쉼표가 25개, 세미콜론이 9개, 쌍점이 5개, 그리고 물음표가 2개, 마침표가 17개 있다. 전도서의 다섯 번째 장은 67개의 구두점으로 되어 있는데, 쉼표가 25개, 세미콜론이 7개, 쌍점이 15개, 물음표가 3개, 그리고 마침표가 17개이다. 이것이 내가 빅서의 밤에 등불 옆에서 하는 일이다. 나는 이 일이 보람 있다. 개인적으로 성경은 등불 밑에서 읽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원래가 전등 밑에서 읽도록 쓰인 것은 아니므로. -p.96~97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듣다보면 허름한 집에 살고 있는 리 멜론과 제시의 이야기가 손에 잡힐듯 그려지지만 어느새 싹둑 잘려져 버린 연의 실처럼 바람에 날라가 버린다. 이야기의 전개와 맞물려 뒷 이야기는 만담이나 당시의 상황을 빗대며 블랙유머로 그들의 상황에 썩소를 날린다. 치기어린 남자들의 모습들이 그려지기도 하고 때로는 리 멜론을 바라보는 제시는 그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를 내버려둔채 여자와 어울리며 자신의 욕구를 채워나가기도 한다. 잠시 술집에 버렸다가 다시 줏어 그들과 함께 동행하며 함께 여행을 하기도 하고, 값싼 술과 마약, 여자들로 하루하루를 채워나간다.


까마귀가 광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기 주위에 거미줄을 쳤다. 다른 동물들, 쥐, 딱정벌레, 토끼도 거미줄을 쳤다. 지금은 땅벌레처럼 길고 날씬해진 거미처럼, 무덤의 입구에서 기다리며. 지진에 부서진 운동장처럼 찢어진 군복을 입은 16세 소년이. 군복을 입은 59세 된 노인 옆에, 교회처럼 장엄하고 완벽하게 죽은 채 땅에 누워 있었다. - p.163~164


그들의 증조부가 살았던 시절이 치열한 싸움의 1세대였다면, 그들의 후손은 그들이 싸웠던 이념이나, 영토싸움이 아닌 사회적으로 자신들의 일탈을 꿈꾸었고, 갖혀버린 세대가 아닌 자유에 열망을 드러내는 세대였다. 실제 리처드 브라우티건이 1950년대 후반에 활약을 했던 비트 작가로서 활약을 보였던 만큼 그의 첫 작품집인 <빅서에서 온 남부 장군>은 그의 기질이 많이 나타나는 소설이다. 기존의 문화와 도덕적인 것을 타파하고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성향을 작가의 분신인 리 멜론이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고, 가난하지만 아무 것도 두려울 것 없는 그들의 삶은 어렵게 며칠 일을 해 번 돈으로 마시고, 먹고, 자고, 여자들과 재미를 보며 자신만의 파라다이스를 얻곤한다. 그러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돈이 없으면 환상에 젖은 생각마저도 다시 현실로 돌아오곤 만다. 여러명이 모여 마약을 하고, 뿌리까지 나쁜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들은 끼리끼리 모여 몽환에 젖어 나간다. 그러다 다시 관계를 맺고. 어떤 황홀경에 젖어 그들은 자신만의 천국을 찾아 헤메었을까.


《빅서에서 온 남부 장군》은 186000개의 열린 결말로 끝난다. 마지막에 등장인물들은 현실과 기계를 떠나, 낭만적인 바다와 파도를 마주 보고 다시 한 번 환상적인 꿈을 꾼다. 꿈과 환상이 없는 인간의 삶이란 불행하고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과거는 한풀이나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길을 밝혀 보여주는 거울이자, 미래를 위한 목가적 꿈을 꾸게 하는 환상의 근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p.222 (옮긴이의 해설 중에서)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리 멜론과 제시의 이야기를 그 어떤 결말로 끝을 내지 않았다. 수 많은 결론으로 그들의 이야기가 앞으로 수 많은 이야기를 양산 할 것이고, 동전의 양면처럼 행복과 불행이 앞뒤로 지나가며 삶을 계속해서 살아갈 것을 보여주며 이야기는 끝이난다. 현실과 환상의 결계에서 그들은 다양한 변주로서 각각의 독립된 이야기로 느껴지기도 했고, 한 편의 장편소설로서 느껴지기도 했다. 붙이고, 자르고, 다시 붙이며 변주된 많은 이야기들을 읽으며 이 글을 쓴 작가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삶이 너무도 궁금했다. 많은 작가들의 효시가 된 그의 이야기는 날 것 같은 파닥임과 비트 세대로서 느껴지는 시대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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