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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안재성 지음 / 창비 / 2018년 3월
평점 :
잊혀진 전쟁에서 한복판에 서 있던 한 남자의 이야기.
작년에 봤던 한 영화는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배를 타고 숨어서도 무수하게 떨어지는 총알을 빗겨나가지 못하고 사람을, 배를, 비행기를 격추시켰다. 해안 너머로 끝도 없이 늘어져 서있는 군인들의 모습은 저마다 자신의 기지로 살려고 하지만 적극적인 대응을 하면 할수록 총알은 더 빨리, 깊이 박혔다. 어디로 가도 피할 수 없이 그저 총알받이가 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어떻게 그 시간을 빠져 나가야 할까,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운이 짙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잘 기록되었고, 작년에는 유명감독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그때의 상황을 잘 구현해냈다. 어느 진영의 싸움이 아닌 삶과 죽음의 길목에서 인간의 감정을 날 것으로 드러냈다.
시간이 지나도 많은 전쟁의 아픔을 다시 되돌아보게 효과를 영화를 통해 다시금 보여주고 있지만, 우리에게 가장 큰 마음의 상흔을 남겼던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남과 북의 전쟁. 시작은 알고 있지만 언제 끝이 나고, 누가 전쟁의 승기를 잡고 명문을 얻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갈등이 많이 있다. 전쟁은 각 나라의 지도자들이 어떤 명분 아래 일으켰지만, 보이지 않는 많은 개인들이 피를 흘리고, 쓰러지고, 다치고, 죽는 과정들이 즐비하게 일어난다. 보이지 않는 길을 가다가 운 좋게 다치지 않고 힘겨운 시간을 지나갔다가면 다행이지만 그 역동적인 시대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휘둘린 한 남자의 이야기는 영화 <덩케르크> 만큼이나 참혹하다.
북한에서 엘리트로 한 학교의 선생님으로 자리잡고 있던 정찬우는 누군가의 부름으로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상부에서 지시가 떨어지고, 그는 한창 전쟁이 발발해 열심히 싸우고 있는 전선 사령관을 만나라는 특명을 받는다. 남쪽으로 내려가 교육위원으로 북의 사상과 문화를 전파하라는 명이 떨어지고 학교 총장의 딸과 약혼하기로 되어 있는 허인숙과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헤어진다.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뽑히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가 아닌가 싶다. 자신의 삶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채 그는 당의 특명을 받고 군인들의 지시아래 떠났지만 그들의 희망찬 계획과 달리 떨어지는 포탄과 총알과 화염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상황을 마주하고 만다. 배고픔을 넘어 생과 사의 희미가 오락가락 할 정도로 사투를 겪는다.
사실, 그의 고향은 북이 아니라 남한의 한 도시였고, 어렸을 때 유복하게 자랐으나 동생이 누군가의 손에 죽임을 당해 시신으로 발견되고, 그의 아버지는 만주로 가족들을 데리고 거처를 옮겨버린다. 그렇게 그는 아버지의 엄한 훈육으로 공부를 잘 하게 되고, 어느 곳이나 가도 우등생으로 자라게 된다. 그러나 그가 가고자 하는 목표를 세울 때마다 시대의 불운으로 하여금 꺾이게 되고, 일제시대의 패망을 넘어 한국전쟁의 발발은 한 남자의 삶을 엘리트가 아닌 포로 수용소에 수감된 한 사람으로 강등되고야 만다. 진주에서 광주, 대구에서 목포, 끊임없이 돌고 돌아 정찬우라는 이름 보다 수감번호로 불리고, 그의 선의로 시작된 행동들이 누군가에게는 눈꼴시려울 정도로 아니꼬운 행동으로 그를 위협하곤 했다. 선과 악의 두 시선은 늘 그를 따랐고, 그의 영혼은 10년이 넘는 수감생활 동안 깎이고 깎여 피폐해져 나갔다. 그가 포로수용소에 있으면서 '자신이 무엇을 그리 잘못 했기에 그랬나'라는 물음이 차 올랐던 것처럼 시대는 그를 한 번도 자유롭게, 평온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의 오랜 수감생활은 화염에 둘러싼 전쟁터 만큼이나 피폐했고, 악랄했고, 폭렬적이다. 사회의 갈등과 분열의 전시장이라고 할만큼 그들은 자신들의 추구하는 이념만을 외치며 그들을 몰고 나갔다. 실제 수기를 통해 한 인간이 거쳐왔던 시간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혹독한 시간들을 그는 기록해왔다. 역사 교과서나 세계사에서 기록되지 않는 이야기지만 우리에게는 절대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이야기는 그는 묵묵히 써내려갔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전쟁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누군가에게는 이미 잊혀진 전쟁 중 하나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상흔이다.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역사의 진짜 얼굴이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지만 마지막 작가의 말에 쓰여진 그의 후의 이야기는 더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끝끝내 자유를 누릴 수 없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오랫동안 마음에 짠하게 남는 책이다.
정찬우는 폭발의 후퐁풍이 닥칠 때마다 몽유병 환자처럼 쓰러졌다가 일어나기를 되풀이하며 방향도 없이 이리저리 허둥지둥 어지러운 발길을 옮겼다. 기어코 살아야겠다는 의지도, 절대 죽어서는 안된다는 생각도 가질 수 없었다. 생명을 노리는 포탄 파편이 귓전을 쌕쌕 날아가는 사선이었다. 살기를 바라는 것도, 죽지 않으리라는 희망도 사치스러운 감정이었다. 포탄이 어디 떨어질지 모르니 달아날 곳이 어딘지도 알 수 없는 채, 그저 되는대로 이리저리 헤매고 다닐 뿐이었다. - p.80~81
"자수해봤자 친일파 악질경찰 출신들에게 고문당하고 감옥살이 할 게 뻔한데 어떻게 그리합니까? 저는 잉민군도 싫고 국방군도 싫습니다. 모든 게 전쟁 때문이려니 생각하고 종전이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지요. 어느 쪽이 이기든 상관 안 할랍니다. 무사히 살아 남으면 고향에 돌아가 농사나 지을 겁니다." - p.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