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비밀 네트워크 - 나무가 구름을 만들고 지렁이가 멧돼지를 조종하는 방법
페터 볼레벤 지음, 강영옥 옮김 / 더숲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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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17 어떤 일을 하나요


《자연의 비밀 네트워크》

피터 볼레벤 글

강영옥 옮김

더숲

2018.04.10.



《자연의 비밀 네트워크》를 지지난봄에 샀다. 이 책을 사던 날 책시렁 이곳저곳을 기웃하는데, 나이든 어느 분이 옆에서 ‘글쓰기를 잘 하고 싶다면 이바지할 책’이 있다면서 여러 가지를 얘기하셨다. 그런가 보다 하고 이분이 알려주는 책을 집어서 펼치는데, “어떤 일을 하나요?” 하고 묻고, “일하는 곳이 이곳만 해요?” 하고도 물어보았다. 나는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우리 일터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선뜻 밝히지 못 했다. 처음 보는 어르신이 물어보았기 때문이기보다는, 내가 하는 일이 어설프고 부끄럽다고 여기는 마음이었다.


《자연의 비밀 네트워크》는 사람이 함부로 숲(자연)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들려준다. 숲이라는 그물은 빈틈이 없이 짜인 터전이기에, 사람이 멋모르고 건드리면서 작은 목숨붙이 하나라도 사라지면,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도 흔들리고 무너진다고 들려준다. 늑대가 사라질 적에 사슴이 불어나면서 들숲이 어떻게 바뀌는지 들려주고, 이러면서 비버가 살아갈 터전이 흔들리면 또 잇달아 다른 터전이 어떻게 흔들리는지 들려준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비밀 네트워크”라기보다 그냥 ‘숲’이다. 숲에서는 어느 하나도 잘나거나 못나지 않다. 더 좋은 나무나 꽃이 없고, 더 나쁜 나무나 꽃이 없다. 어릴 적에 어머니하고 아버지 곁에서 논밭일을 도울 적에 매는 김도, 김을 매니까 맬 뿐이지만, 봄뿐 아니라 다른 때에는 나물이었다. 먹을 적에는 나물이고, 맬 적에는 김이다. 우리가 겨우내 쓸 만큼 나무를 해서 장작을 팰 뿐, 넘치게 나무를 하는 일이 없다.


우리 어머니하고 아버지도 그러셨지만, 더 먼 옛날 옛적 모든 어머니하고 아버지도 시골살림을 스스로 하나하나 지으면서 아이들한테 ‘숲’을 그대로 보여주고 알려주고 이야기했다. ‘자연의 비밀 네트워크’처럼 어렵게 말하는 일은 없었지만, 어른도 아이도 언제나 ‘숲’ 곁에서 숲을 알고 느끼고 마주하면서 스스로 ‘숲’답게 푸르게 자라고 살았다.


내가 일하는 대구 한켠 마을가게(마트)는 어떤 터전일까. 이 일터도 ‘숲’일 수 있을까? 내가 우리 일터인 가게에서 손질해서 파는 나물 한 꾸러미는 이 별(지구)에서 어떤 몫으로 이바지를 하려나? 마을가게에서 다루는 과일이나 라면이나 여러 살림살이는 마을에 어떻게 숲빛으로 이바지를 하려나? 나는 우리 일터가 썩 숲답지 않다고 여겨서 ‘내가 하는 일’을 낯선 어르신한테 선선히 말하지 못 하고 쭈뼛거렸을 텐데, 아무래도 여러 눈치를 먼저 느끼는구나 싶다.


우리 어머니 같은 흙일꾼이 땡볕에서 키운 능금 복숭아 수박이다. 우리 아버지 같은 논밭일꾼이 뙤약볕에서 돌본 벼 보리 수수이다. 목마른 땅에 들에 숲에 구름이 피어나고 비가 내린다. 빗물은 샘물이 되고 냇물이 된다. 나뭇잎이 말라서 가랑잎으로 떨어지면 땅을 다시 살린다. 풀 한 포기도 나무 한 그루도 숲이고, 어느 하나도 빠질 수 없다. 나도 틀림없이 우리 별을 이루는 작은 풀포기나 나무일 텐데, 어쩐지 부끄럽다고 여겨 고개를 들지 못 하는 할미꽃일지 모르겠다.


이다음에 어느 누가 불쑥 또 “어떤 일을 하나요?” 하고 물으면 “마을가게를 해요.”나 “동네마트를 꾸려요.” 하고 선뜻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앞으로도 내 일이 무엇인지 말을 않고 살아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나무를 언제나 곁에 둘 생각이다. 작은 풀꽃을 마음에 담을 생각이다. 빗물을 바라보고 햇볕을 듬뿍 쬘 생각이다. 그리고 《자연의 비밀 네트워크》는 옮김말이 우리말답지 않아서 읽기가 힘들었다.



2023.08.10.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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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
최명희 지음 / 한길사 / 199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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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16 집안이라는 이름



《혼불 1》

최명희 글

한길사

1996.12.5.



《혼불 1》을 처음 장만해서 읽던 2019년 3월 26일을 돌아본다. 이날은 가게일꾼이 달삯을 미리 당겨서 달라고 했다. 어디에 쓰려고 하는지 슬쩍 물으니 은행에 빌린 돈을 갚는다고 했다. 결혼한 딸이 어디로 사라지고 은행 금리가 11% 되는 빚을 갚는다고 했다. 가게일꾼은 아저씨한테 늘 두들겨맞다가 집을 뛰쳐나온 지 열 해째란다.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데 딸은 어쩌다가 돈수렁이 얽혔더라. 퇴직금이라는 돈에 목숨을 걸은 듯싶다. 이날 나는 오그랑이도 사그랑이도 새줄랑이도 아니지만, 뿔난 마음을 감춘 채 일하는 모습을 봤다. 내가 오기를 하마하마 기다린 날 참 슬프게 보였는데 일이 커졌다. 이 삶을 어떻게든 앞당기거나 미리 갚을 수 있을까? 이 삶에 매듭삯(퇴직금)은 무엇으로 받을까.


근심에 걱정에 휩싸이면서 펼친 《혼불》은 어떤 삶을 들려주는가. 집안하고 집안이 억지로 맞추는 길은 꽃길일 수 없겠지. 꽃 같은 두 사람이 만나서 꽃 같은 집안을 가꾸어 나갈 삶길이어야 아름다울 텐데, 처음부터 꽃짝이 아닌 ‘집안이라는 이름·돈·힘’을 지키려는 굴레를 씌운다면, 두 가시버시는 서로 다르게 멍울이 맺고 생채기가 자라면서 자꾸 바깥으로 눈을 돌리겠지.


꽃길에 꽃집을 바라는 꽃맺음(혼례)을 으리으리한 잔치로 벌여야 할까? 사랑을 바라지 않고서 돈과 이름과 힘을 바란다면, 두 사람이 참말로 꽃 같은 보금자리를 이룰까?


가만히 보면 모든 ‘집안’은 ‘집안이라는 이름’으로 사내(아들)만 바란다. 꽃 같은 보금자리라면서 가시내(딸)가 태어나면 ‘집안을 못 잇는다’고 여기고, 이 굴레를 자꾸 이어가려 한다.


사랑을 잇지 않고 집안을 이으려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랑을 물려주고 알려주고 보여주는 어른이 아니라, 그저 사내(아들)만 새로 낳아서 ‘집안 지키기’를 해야 한다고 여기면, 할머니도 어머니도 무슨 뜻이고 보람일까?


지난날 숱한 ‘뼈대 있는 집안’은 ‘딸은 없는 사람’으로 치면서 ‘아들만 사람’으로 높이는 굴레로 스스로 갇혔다. 이제는 이런 굴레가 꽤 걷혔다고 하지만, 아직 다 걷히지 않았고, 굴레를 걷어낸 자리에 사랑을 어떻게 심어야 하는가를 잘 모르는구나 싶다.


우리 시할머니에 시어머니도 청암부인과 같은 마음이었지 싶다. 나는 딸을 둘 낳았는데, 시할머니는 아들 하나 낳으라고 노래를 부르셨다. 시어머니는 내가 이미 배를 두 번 갈랐으니 세 번까지는 가르지 못하리라 여겨 서울에 있는 병원에 가서 미혼모가 나은 아기를 사자는 말을 했다.


너무 놀랐다. 아들을 더 낳기 어려운 몸이면 ‘어디 가서라도 아들을 돈으로 사오면’ 되는가? 이렇게 해서 아들한테 물려준다는 ‘집안’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지키고 잇겠다는 마음일까?


안 가던 점집에 가기도 했다. 안 그래도 일터 창구에 앉으면, 어느 아주머니는 “여기 앉아서 돈 버는 일이 중요하지 않아요” 하고 토를 단다. 수염이 길고 갓을 쓰고 하얀 모시옷을 입고 지팡이를 짚고 오는 아흔 살 할아버지는 창구 앞에 앉아서 내가 같은 김씨라서 알려준다며, 아들 낳는 시간을 알려주더라. 아들을 꼭 낳으라고 말하더라.


어지럽고 힘든 나날이었다. 어떻게 할는지 내가 스스로 길을 잡아야 했다. 집안을 잇는다느니 김씨를 잇는다느니 하는 뜻은 나하고 멀다. 다만, 나는 내 배를 세 번째 가르더라도 아이를 더 낳아 보기로 했다. 참말로 아들을 낳을 수 있는지, 아니면 막냇딸을 낳을는지 모르는 일이었는데, 셋째는 아들을 낳았다. 


《혼불》을 읽으면, 청암 부인은 “사람들이 나라가 망했다고 하지만 결코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같은 말을 한다. “나라와 백성 관계는 콩꼬투리와 콩알 같은 것, 비록 콩껍질이 말라 비틀어 시든다 해도 그 속에 든 콩알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콩은 잠시 어둠속에 떨어져 새숨을 기르다가 다시 싹터 무수한 열매를 조롱조롱 가득 맺게 한다.” 하고 덧붙인다. 내가 아이를 낳으니 나라가 있다. 내가, 나 같은 어머니가, 딸이건 아들이건 기쁘게 받아들여 낳아서 사랑으로 돌보는 수수한 아줌마가 있으니 나라가 있다.



2023.08.13.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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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의 집 1 - 큰 숲 속의 작은 집
로라 잉걸스 와일더 지음, 가스 윌리엄즈 그림, 김석희 옮김 / 비룡소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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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15 초원의 집 



《초원의 집-첫 번째 이야기》

로라 잉걸스 와일더 글

김석희 옮김

비룡소

2005.09.25.



백 해쯤 앞서 우리는 어떻게 살았을까? 나도 어느새 나이가 들었기에, 내가 경북 의성 멧골에서 보낸 어린 나날을 돌아보면 ‘쉰 해가 지난’ 일이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하고 손가락을 꼽다가 ‘백 해가 훌쩍 지난 미국 어느 들판 이야기’가 그리 멀지않은, 어쩌면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는 조촐한 살림살이일 수 있겠다고 느낀다.


쉰 해쯤 앞서 멧골집 어린이는 멧자락을 타고 넘으면서 배움터를 다녔다. 멧골에서 사니까 늘 멧자락을 탈밖에 없었겠지만, 자동차나 버스를 타고서 집이랑 배움터를 오간다는 생각부터 없었다. 다들 걸었다. 누구나 걸었다. 어린이라면 걷다가 달리고, 뛰고, 놀고, 웃고, 노래했다.


이제 나는 대구에서 살며 자동차를 몬다. 자동차를 몰면서 대구 시내를 지나다 보면, 길에서 걸어다니는 어린이를 보기 어렵다. 나도 우리 아이를 자동차에 태워서 배움터를 보냈다. 다들 아이들을 자동차에 태워서 오간다. 요즈음은 아이들끼리 걷고, 뛰고, 달리고, 놀고, 웃고, 노래할 틈이 없다고 할 만하다.


《초원의 집-첫 번째 이야기》를 읽었다. 내 어릴 적 의성 멧골자락 이야기를 글로 써도 되려나 부끄럽다고 여기던 무렵, 이웃님 한 분이 이 책을 읽어 보라고 알려주었다. 시골에서 나고자랐어도, 여느 시골보다 깊은 멧골에서 나고자랐어도, 아니 시골이나 멧골에서 나고자랐다면 더더욱 즐겁게 어릴 적 이야기를 글로 옮길 만하다고 귀띔하면서 이 책을 천천히 읽어 보라고 하더라.



《초원의 집》에 나오는 아이한테는 책조차 없다시피 한 나날이다. 텔레비전이나 손전화나 인터넷은 아예 어림조차 없던 나날이다. 맨손에 맨발로 들판을 휘젓는다. 나무를 타고 흙을 주물럭거린다. 어머니 아버지 곁에서 함께 집안일을 한다. 이러면서 어린 동생도 돌본다. 들판에 흙과 나무와 돌로 집을 지어서 살고, 우물을 파서 손수 길어서 마시고 씻는다.


내가 나고자라던 멧숲을 떠올려 본다. 그래, 쉰 해 앞서 그 멧숲에서는 별이 쏟아졌다. 오늘 살아가는 대구에서는 별이 아닌 전기로 밝힌 불빛이 쏟아진다. 아파트에서 누가 별을 바라볼까. 아니, 밤하늘에 별이 돋는지 마는지 마음을 쓰는 사람이 있겠는가.


오늘날처럼 엘리베이터 소리라든지 자동차 소리에 물들지 않은, 새와 풀벌레와 바람과 비가 들려주는 노래에 덮인 《초원의 집》을 그려 본다. 우리도 쉰 해쯤 앞서 웬만한 시골아이랑 멧골아이는 이렇게 놀고 살았고 집안일을 함께했다.


그러고 보면 《초원의 집》 아이들은 들짐승을 쉽게 만난다. 아마 들짐승하고 마음으로 이야기를 했겠지. 나도 쉰 해쯤 앞서 멧숲집에서 멧짐승을 쉽게 만났다. 그때 나는 멧짐승하고 마음으로 이야기를 하려는 생각이 있었을까? 그저 무섭거나 두렵다고 여겼을까? 고작 쉰 해나 백 해 만에 시골살이도 숲살이도 잊히는 오늘날 같다. 이런 오늘날일수록 《초원의 집》은 더욱 빛나는 책 같다. 아니, 참으로 빛나는 책이다. 우리도 우리 어린 나날을 이렇게 글로 옮길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가 흙빛으로 놀던, 우리가 들빛으로 달리던, 우리가 바람빛으로 노래하던, 모든 하루는 고스란히 글이자 꿈일 테지.



2023.08.11.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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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끓는 사랑 - 세계문화예술기행 3
김혜순 지음 / 학고재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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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14 살아가는 집


《세계문화예술기행 3 스페인, 들끓는 사랑》

김혜순 지음

학고재

1996.11.1.



《세계문화예술기행 3 스페인, 들끓는 사랑》을 처음 장만한 2018년 12월 겨울을 떠올린다. 그무렵 작은딸은 필리핀 세부로 동무하고 나들이를 갔다. 작은딸은 필리핀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오자마다 큰딸하고 대만으로 나들이를 간다고 했다. 두 딸이 나누는 말을 들으면서, 두 딸이 함께 다닐 나들이를 헤아리면서, 나도 둘 사이에 섞여 같이 나들이를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두 딸은 저희끼리 나들이를 떠났다. 나는 대구에 남아 가게일을 보았다. 아쉽고 서운한 마음을 책을 읽으면서 달랬다. 그런데 《세계문화예술기행 3》을 쓴 분은 딸하고 스페인 나들이를 했구나. 글쓴이는 “예술가는 폼잡는 엄숙주의가 말할 수 없이 싫었다” 하고 밝히면서, 세르반테스에 여러 스페인 글님 이야기와 삶을 곁들여서 줄거리를 풀어낸다.


글을 쓰는 사람은 왜 머나먼 곳으로 나들이를 가는가? 뭔가 남기고 싶은 하루를 글로 쓰는가? 어느 삶자락을 잃거나 잊지 않으려고, 어느 날 품은 꿈이 날아가지 않도록 글로 붙잡는가?


《세계문화예술기행 3》을 쓴 분은 바르셀로나를 누비고, 가우디에 미로에 피카소에 고야에 게르니카라는 여러 사람들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무엇을 느끼는지 적는다. 바람새(집시)가 보여주는 춤을 보려고 거닐고, 알함브라궁전에, 시에라네 바다에, 알푸하라스에, 세비아 성당에, 이름만 들어도 어질어질할 구석구석을 찾아다닌다.


그렇지만 나는 책을 쥔 채 대구에 있다. 집안일이 바쁘고, 가게일이 바쁘다. 돈을 벌어야 하는 일을 하고, 여러모로 챙길 자잘한 일이 끝이 없다.


너무 쳇바퀴 같은 하루를 벗어나고 싶어서, 문학단체에서 간다는 대마도 나들이를 따라갔고, 울릉도에도 다녀왔고, 또 몽골도 간다고 해서 몽골에도 가려고 했다. 이러다가 문득 멈추었다.


나는 왜 나들이를 다니는가? 나는 나들이를 다니면서 무엇을 느끼고 보고 배우면서 글을 써 보려고 하는가? 나도 ‘문화예술기행’이나 ‘문학여행’을 하고 싶어서, 또 ‘문학여행기’ 같은 글을 남기고 싶어서 자꾸 어디론가 기웃거리면서 따라가는 셈은 아닐까?


책으로 만나는 스페인 여러 사람들과 살림집과 숲이 놀랍다. 그러나 대구에서 곧잘 오르내리는 작은 뒷동산도 푸르고 아기자기하다. 대구에 있는 작은 뒷동산에도 꾀꼬리가 찾아와서 노래하더라. 밤에는 멧길을 오르내리지 않아서 모르지만, 어쩌면 소쩍새도 있지 않을까. 내가 나고자란 경북 의성 멧자락에는 꾀꼬리도 소쩍새도, 숱한 멧새도 어우러졌다.


집이란 어떤 곳일까. 우리나라에서 내가 살아가는 곳도 집이고, 두 딸하고 막내아들이 살아가는 곳도 집이다. 대마도나 울릉도나 여러 곳을 찾아다니면서 스치는 여러 마을도 숱한 이웃들이 살아가는 집이다.


역사나 문화나 예술에 이름이 남을 일이 없을는지 모르나, 시골마을을 일구며 살아온 사람들이 품은 살림집이 있다. 내가 살아가는 집도, 세 아이가 저마다 살아가는 집도, 또 이름난 사람들이 살아가는 집도, 다 다르게 삶이 흐른다.


내가 내 보금자리인 이 집을 스스럼없이 사랑한다면, 스페인까지 가지 않아도 될까. 몽골에 따로 안 가도 될까. 집하고 일터를 오가는 길도 나들이(여행)로 삼을 수 있을까. 집하고 일터를 오가면서 겪고 느끼고 만난 삶을 옮겨도 글이 될까.


어느새 여름이 지나간다. 아직 덥지만 여름이 끝나간다.

  




2023.08.10.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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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 (양장) - 무기.병균.금속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 개정증보판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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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13 바람 바다 숲

《총, 균, 쇠》

재레드 다이아몬드

김진준 옮김

문학사상

1998.8.8.



2019년 1월에 《총, 균, 쇠》라는 책을 장만했다. 어느새 다섯 해가 지나는데, 그때에는 글을 잘 쓰고 싶어서 둘레에서 좋다고 말하는 책이면 덥석덥석 장만부터 했다. 나한테 맞는 글이 무엇인지 느긋이 살피지 않았고, 내가 글쓰기 첫걸음을 떼기에 어울리는 책을 천천히 헤아리지 않던 즈음이다. 창피한 소리인데, 누가 좋다고 하는 말을 들으려고 귀를 쫑긋 세웠다. 무턱대고 사서 쌓아두었다. 집에 좋은 책을 잔뜩 갖추면 좋은 글도 척척 나오는 줄 여겼다.


2019년에는 이 두꺼운 책을 읽으며 무엇을 느끼고 배웠을까? 2023년 8월에 다시 읽으면서 생각해 보는데, 줄거리도 이야기도 도무지 안 떠오른다. 낯선 책을 처음 읽는 듯하다. 예전에 읽고서 귀퉁이를 접은 데를 들여다보아도, 띠종이를 붙인 대목을 다시 펴 보아도, 어쩐지 썩 와닿지 않는다.


다섯 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래, 다섯 해 사이에 두 딸이 제금을 나서 짝을 만났고, 막내가 군대를 다녀왔고, 막내가 군대에 있던 무렵 코로나가 번져 면회조차 갈 수 없었고, 막내는 휴가조차 나오지 못 했다. 곁님하고 꾸리는 가게도 힘이 들었고, 그래도 틈틈이 멧골이나 숲을 찾아가서 숨을 돌렸고, 책을 어찌저찌 두 자락 써내기도 했다.


‘인류 출현’이나 ‘문명 발전’이나 ‘정복과 정벌’이라는 말은 낯설다. ‘인류’라는 이름을 ‘총과 균과 쇠’ 세 가지로 풀어내어 들려주는 《총, 균, 쇠》인데, ‘인류 출현’이 아닌 ‘사람이 숲에서 태어남’이라든지 ‘사람이 서로 사랑하며 살림을 지음’이라든지 ‘사람이 오순도순 아이를 낳고 마을을 이룸’이라는 눈길로 바라본다면 줄거리가 확 다르겠지. ‘총과 균과 쇠’가 아니라 ‘풀과 꽃과 나무’를 본다면, 또는 ‘해와 별과 바람과 비와 흙과 바다’를 본다면, 이야기도 아주 다르리라.


‘문명’이란 뭘까. 아이를 낳고서 밥을 지어서 함께 먹고, 옷을 지어서 함께 입고, 집을 지어서 함께 살아가는 길은 그냥그냥 ‘살림’이라 하는데, ‘문명’이나 ‘문화’ 같은 말을 들으면 어쩐지 너무 멀다.


오스트레일리아 뉴기니에 사람이 살던 즈음 배를 처음으로 지어서 탔다고 하는데, 백인이 들어오면서 성냥이나 의약품이나 음료나 우산 같은 여러 가지가 들어왔다는데, 이런 여러 가지를 ‘화물’이라고 가리키는데, 글쓴이는 어느 흑인이 “당신네 백인들은 그렇게 많은 화물을 발전시켜 뉴기니까지 가져왔는데 어째서 우리 흑인들은 그런 화물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하고 물었다기에 이 책을 썼다고 하는데, ‘화물’이나 ‘문명’이 아닌 ‘살림’이기에 서로 살리고 살아가며 사랑했으리라 본다. 그냥 그렇게 느낀다.


누가 누구보다 똑똑할 수는 없지 않을까? 원시인이나 유럽인 가운데 누가 더 똑똑하다고 갈라야 할까? 우리 어머니나 아버지는 학교를 다녀서 집안일이나 논밭일을 배우거나 익히지는 않았다. 먼 옛날부터 어머니가 어머니한테 집안일을 물려주었을 테고, 아버지가 아버지한테 논밭일을 물려주었겠지.


《총, 균, 쇠》에도 나오지만, 텔레비전에 라디오에 기울어버린 유럽인처럼 우리도 영상과 책과 학교에 기울어버렸다. 우리도 예전에는 원주민처럼 마을사람하고 두런두런 이야기하고, 집에서 엄마아빠 할매할배랑 이야기하고, 또 마을에서 동무랑 언니오빠랑 동생하고 이야기하면서 서로 배우고 가르쳤지 싶다.


틀림없이 총을 앞세워서 싸워 이길 만하다. 아무래도 균이 퍼져서 돌림앓이로 떼죽음을 맞이할 만하다. 이제 오늘날은 쇠로 높이높이 올린 문명으로 자동차를 달리고 아파트가 높고, 또 전쟁무기도 쇠로 만든다.


그런데 글을 몰라도 논밭을 짓는다. 글을 몰라도 아이를 사랑으로 돌볼 줄 안다. 글을 몰라도 새하고 이웃을 하고, 풀꽃이나 나무에 이름을 붙인다. 글을 몰라도 마음껏 이야기를 하고 생각을 편다.


스스로 지어서 누릴 적에는, 몸이 조금 아프면 이불을 뒤집어쓰고서 며칠 누우면 깨끗하게 나았다. 먹는샘물조차 사다가 마시는 요즈음은, 조금만 아파도 병원에 가서 약을 타먹는다. 예전에는 약은커녕 과자나 외식도 없었다. 비료나 농약이 없던 때에는, 또 비닐조차 없던 때에는, 누구나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잘살았다. 요새는 돈만 내면 다 사다가 쓸 수 있지만, 너무 쉽게 앓고 죽고 다치고, 또 싸우고 겨룬다.


이제는 하늘길도 바닷길도 열려, 돈이 있으면 자유롭게 여행을 한다. 바람도 바다도 섞인다. 어디로든 홀가분히 다닌다지만, 우리는 숲을 멀리한 채 헤매는 하루인지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땅에서 거두는 살림을 먹지 않고, 우리가 먹은 것을 우리 삶자리에 돌려주지 않는다. 돌개바람은 왜 휩쓸까? 우리가 어리석으니 씻어 주려는 마음이지 않을까?


돌개바람을 놓고서 역사나 문명을 돌아본다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 총과 균과 쇠가 아닌, 바람과 바다와 숲으로 우리 스스로 돌아본다면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글보다는 말이고, 말보다는 마음이고, 마음은 바로 우리 오늘인 삶이지 싶다.



2023.08.10.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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