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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
최명희 지음 / 한길사 / 199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작게 삶으로 016 집안이라는 이름
《혼불 1》
최명희 글
한길사
1996.12.5.
《혼불 1》을 처음 장만해서 읽던 2019년 3월 26일을 돌아본다. 이날은 가게일꾼이 달삯을 미리 당겨서 달라고 했다. 어디에 쓰려고 하는지 슬쩍 물으니 은행에 빌린 돈을 갚는다고 했다. 결혼한 딸이 어디로 사라지고 은행 금리가 11% 되는 빚을 갚는다고 했다. 가게일꾼은 아저씨한테 늘 두들겨맞다가 집을 뛰쳐나온 지 열 해째란다.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데 딸은 어쩌다가 돈수렁이 얽혔더라. 퇴직금이라는 돈에 목숨을 걸은 듯싶다. 이날 나는 오그랑이도 사그랑이도 새줄랑이도 아니지만, 뿔난 마음을 감춘 채 일하는 모습을 봤다. 내가 오기를 하마하마 기다린 날 참 슬프게 보였는데 일이 커졌다. 이 삶을 어떻게든 앞당기거나 미리 갚을 수 있을까? 이 삶에 매듭삯(퇴직금)은 무엇으로 받을까.
근심에 걱정에 휩싸이면서 펼친 《혼불》은 어떤 삶을 들려주는가. 집안하고 집안이 억지로 맞추는 길은 꽃길일 수 없겠지. 꽃 같은 두 사람이 만나서 꽃 같은 집안을 가꾸어 나갈 삶길이어야 아름다울 텐데, 처음부터 꽃짝이 아닌 ‘집안이라는 이름·돈·힘’을 지키려는 굴레를 씌운다면, 두 가시버시는 서로 다르게 멍울이 맺고 생채기가 자라면서 자꾸 바깥으로 눈을 돌리겠지.
꽃길에 꽃집을 바라는 꽃맺음(혼례)을 으리으리한 잔치로 벌여야 할까? 사랑을 바라지 않고서 돈과 이름과 힘을 바란다면, 두 사람이 참말로 꽃 같은 보금자리를 이룰까?
가만히 보면 모든 ‘집안’은 ‘집안이라는 이름’으로 사내(아들)만 바란다. 꽃 같은 보금자리라면서 가시내(딸)가 태어나면 ‘집안을 못 잇는다’고 여기고, 이 굴레를 자꾸 이어가려 한다.
사랑을 잇지 않고 집안을 이으려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랑을 물려주고 알려주고 보여주는 어른이 아니라, 그저 사내(아들)만 새로 낳아서 ‘집안 지키기’를 해야 한다고 여기면, 할머니도 어머니도 무슨 뜻이고 보람일까?
지난날 숱한 ‘뼈대 있는 집안’은 ‘딸은 없는 사람’으로 치면서 ‘아들만 사람’으로 높이는 굴레로 스스로 갇혔다. 이제는 이런 굴레가 꽤 걷혔다고 하지만, 아직 다 걷히지 않았고, 굴레를 걷어낸 자리에 사랑을 어떻게 심어야 하는가를 잘 모르는구나 싶다.
우리 시할머니에 시어머니도 청암부인과 같은 마음이었지 싶다. 나는 딸을 둘 낳았는데, 시할머니는 아들 하나 낳으라고 노래를 부르셨다. 시어머니는 내가 이미 배를 두 번 갈랐으니 세 번까지는 가르지 못하리라 여겨 서울에 있는 병원에 가서 미혼모가 나은 아기를 사자는 말을 했다.
너무 놀랐다. 아들을 더 낳기 어려운 몸이면 ‘어디 가서라도 아들을 돈으로 사오면’ 되는가? 이렇게 해서 아들한테 물려준다는 ‘집안’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지키고 잇겠다는 마음일까?
안 가던 점집에 가기도 했다. 안 그래도 일터 창구에 앉으면, 어느 아주머니는 “여기 앉아서 돈 버는 일이 중요하지 않아요” 하고 토를 단다. 수염이 길고 갓을 쓰고 하얀 모시옷을 입고 지팡이를 짚고 오는 아흔 살 할아버지는 창구 앞에 앉아서 내가 같은 김씨라서 알려준다며, 아들 낳는 시간을 알려주더라. 아들을 꼭 낳으라고 말하더라.
어지럽고 힘든 나날이었다. 어떻게 할는지 내가 스스로 길을 잡아야 했다. 집안을 잇는다느니 김씨를 잇는다느니 하는 뜻은 나하고 멀다. 다만, 나는 내 배를 세 번째 가르더라도 아이를 더 낳아 보기로 했다. 참말로 아들을 낳을 수 있는지, 아니면 막냇딸을 낳을는지 모르는 일이었는데, 셋째는 아들을 낳았다.
《혼불》을 읽으면, 청암 부인은 “사람들이 나라가 망했다고 하지만 결코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같은 말을 한다. “나라와 백성 관계는 콩꼬투리와 콩알 같은 것, 비록 콩껍질이 말라 비틀어 시든다 해도 그 속에 든 콩알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콩은 잠시 어둠속에 떨어져 새숨을 기르다가 다시 싹터 무수한 열매를 조롱조롱 가득 맺게 한다.” 하고 덧붙인다. 내가 아이를 낳으니 나라가 있다. 내가, 나 같은 어머니가, 딸이건 아들이건 기쁘게 받아들여 낳아서 사랑으로 돌보는 수수한 아줌마가 있으니 나라가 있다.
2023.08.13.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