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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와 메모광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누군가 마음의 문을 열고 찾아올 지도
점점 책 읽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책을 사고 글을 쓰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과거에는 책이 귀하고 비싼 것이었고, 문자를 알고 뜻을 독해할 수 있는 사람이 극히 소수였기 때문에 책 읽는 사람들이 적었다. 시간이 흘러 현대에는 책값이 저렴해지고 문자를 너무나도 쉽게 독해할 수 있는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스마트 폰과 인터넷 등과 같은 매체의 발전과 바쁜 일상에 쫓겨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보면 책을 많이 읽고 그 속에서 재미와 깊은 철학,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행운아 중에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정민 교수의 <책벌레와 메모광>을 읽으면서 시간을 초월하여 책에 미치고, 그 책속에서 새로운 세상과 길을 발견한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발견했다. 그런 책벌레들의 책을 사랑하는 모습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메모하는 것을 한 수 배울 수 있었다. 옛날 엄마들은 뒤주와 항아리에 쌀과 물이 가득 차 있는 것만 보아도 배가 부르다고 하셨다. 마찬가지로 나를 비롯하여 주변의 책벌레들은 책장도 모자라 방안 구석구석에 책이 가득 차 있으면 신나했다. 새로 나온 좋은 신간을 구입했거나 갖고 싶었던 책을 선물 받았을 때 그 책 표지만 보고도 행복한 미소가 떠오르는 사람들은 요즘 세상에 그리 흔하지 않아 더 귀하다.
나는 책을 사서 재어 두는 편이다. 한 달 평균 4~5만원 정도 책값에 할애하는 편인데 그렇게 구입한 책들을 다 읽지는 못한다. 그러나 내 손에 들어온 책들을 정돈하고 책장에 꽂아 두거나 책상에 올려놓고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다. 지금 당장은 그 책들을 다 읽을 수는 없지만 읽고 싶을 때 바로 찾아서 읽거나 그 책들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 책은 재산이면서 좋은 친구이다. 책만 있으면 혼자 있는 시간을 오롯이 즐길 수 있으며, 누군가 방해하는 것을 피해 숨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 그 재미를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아쉬우면서도 내심 다행이다 싶을 때도 있고, 진짜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해 아쉽기도 하다.
나는 이 책을 2015년 11월 11일 수요일에 읽기 시작해서 11월 29일 일요일에 다 읽었다. 책을 읽을 때마다 일기처럼 책 맨 위쪽에 읽은 날짜를 쓰고, 읽은 부분에는 시간을 썼다. 날씨도 쓰고, 간단한 기분과 했던 일도 썼다. 역사 속 책벌레들도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책을 읽으며 공감이 가면서도 재미있어서 혼자 많이 웃었다. 11월 23일 월요일에 읽었던 ‘고서 속의 메모’편 위에는 ‘오늘이 소설인데 첫 눈은 내리지 않았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메모는 나의 힘, 밤 12시가 다 되어 가는데 오늘 읽어야 할 목표가 있기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다.’라는 말도 함께. 11월 27일 금요일 ‘다산 필첩 퍼즐 맞추기’부분에는 ‘오늘 김장하는 날인데 엄마랑 이모가 다 해버리고 나는 할 게 별로 없어서 책을 읽기로 했다.’라고 써져 있다. 선조들의 책속에서도 이런 메모와 다양한 습관들이 펼쳐져 있었다. 특히 저자인 정민 교수가 2012년 겨울, 하버드 대학교 옌칭연구소에 체류하고 있을 때 만난 우규승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메모해 둔 글들을 읽었을 때 큰 감동을 받았다. 메모의 내용도 물론 좋았지만, 우규승 선생이 말하고 있는 동안 무언가를 정신없이 적고 있는 저자의 모습이 눈 앞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때로는 한 줄의 메모가 마음을 울리기도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한 줄의 메모를 적기까지 그것을 몸에 배도록 습관화 시킨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책을 읽다보면 순서가 생긴다. 처음 눈으로 읽기 시작했지만, 손에 형광펜이나 볼펜, 연필을 들게 되고, 밑줄을 긋게 되며, 그 아래에 자신의 생각을 쓰기도 한다. 시간을 내어 책에 대한 독후감이나 서평을 남기게 되고, 더 전문적인 글쓰기로 나갈 수도 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다는 것은 단순히 정적인 읽기 행동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긋고, 쓰고, 나누고, 다양한 방법으로 확장시키는 동적인 행동으로 발전하기 쉽다. 책을 읽고 메모를 나누는 것이 작은 몸부림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사과 씨 속에 커다란 사과나무가 들어있는 것과 같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다산의 위대한 학문 뒤에는 이렇듯 체질화된 메모의 습관이 있었다. 메모로 남의 오 류를 지적하고, 메모로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다산이 다산인 까닭은 메모를 통 한 생각 관리의 탁월성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생각 관리가 안 되면 학문은 물 건너 간 일이 된다. 불과 며칠 전에 자신이 쓴 메모를 보면서도 내가 쓴 것이 맞나 하는 것이 우리의 기억력이다. 메모로 남겨두지 않으면 아예 안 본 것과 같다. 밥 먹듯 메모하고 숨쉬듯 기록해야 마땅하다.
p.180
책을 다 읽었다고 해서 그 책에 대해 모두 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알기 위해서는 책을 다 읽고 나서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 두어야 한다. 기록으로 남긴 것만이 내가 진짜 아는 것이다. 글로 쓸 때 내가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구체화되고 지식이 된다. 글로 쓰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진짜 알고 있는 것도 이해한 것도 아니다. 때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고, TV와 영화 속에서 본 것들이기에 스스로 알고 있다고 착각할 때가 있다. 자신이 자신에게 속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렇기에 책읽기와 메모는 같이 간다. 그것은 떨어질 수 없는 동작이며 그런 과정을 통해 책 읽는 사람은 성장하고 발전하게 된다.
누군가 물었다. 먼 훗날 80이 넘고 지나간 시간과 추억을 떠올린다면 무엇이 생각날 것 같은지. 가족과 친구들, 그들과 나눈 행복하고 즐거웠던 시간들도 물론 떠오르겠지만 늦은 밤까지 나 혼자 책을 읽기 시작하여 밤을 새웠던 일들,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이나 에세이 등을 읽고 그 책의 읽은 부분이 늘어나면서 읽을 부분이 조금밖에 남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워했던 일들을 기억할 것 같다. 그리고 그 책에 대하여, 나의 생각에 대하여, 때로는 읽기가 아닌 쓰기 위해 애쓰고, 힘들어 하며 뿌듯해 했던 순간들도 떠올릴 것 같다. 아름답지 않은가? 벚꽃 핀 봄밤에 설레는 가슴을 붙잡고 읽었던 많은 소설들, 무더운 여름 미친 듯이 울어대던 매미울음소리를 견디며 붙잡고 씨름했던 글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며 많은 책을 구입했지만, 그 책을 읽지는 못하고 붙잡고만 있었던 날들, 추운 겨울, 깊어가는 밤이나 눈 오는 밤에 TV를 보거나 스마트폰만 들여다보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을 한 장씩 넘기며 읽어 나가는 사람의 모습들이 말이다.
책 읽는 모습, 그 위에 자신만의 생각을 한 자 한 자 써내려 가는 사람의 모습은 참 아름답고 오묘하다. 그러다 보면 누군가 마음의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를 듣게 될 지도 모른다. 우주의 한 부분이 내게 찾아온 것일 수도 있고, 새로운 내가 나를 찾아온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지나가는 바람 소리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