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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마음에 드는 시집은 여러 번 반복해서 읽을 수 있지만, 소설은 여간해서 반복하여 읽기가 힘들다. 대신 기억에 남는 장면과 문장, 이야기가 주는 매력과 위로로 작품을 기억한다. 그런데 김은국의 <<순교자>>는 장편소설이지만 예외였다. 이 소설은 대학시절 갓 입학한 신입생인 나와 친구들에게 교수님이 내준 과제였다. 지금은 절판된 을유 출판사에 나온 회색 바탕의 <순교자>로, 소설을 읽고 그 내용과 감상을 오픈 북 테스트로 중간고사를 보았었다. 당시 스무 살도 채 안 된 나는 시험 보기 직전까지 조바심 내며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내 답안지에는 ‘신과 성도들을 배신한 12명의 목사들은 순교자의 영광을 얻고,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킨 두 명의 목사들은 배신자로 낙인찍힌 채 살아가는 기독교 소설이다’가 주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험을 끝내고 나오면서 무언가에 끌린 듯 다시 시간을 갖고 깊이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책보다 재미있고 짜릿했던 대학 생활에 그 호기심은 금세 잊혀 졌었다.
그러다 20년도 훌쩍 넘어버린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새롭게 디자인 되어 나온 세계문학전집 중에서 <<순교자>>를 만났다. 한국 작가가 쓴 글이 세계문학 속에 들어있다는 것과 ‘김은국’이란 작가의 이름이 아주 옛날 기억을 소환했고, 2019년 가을, 책상에 앉아 시험을 공부를 하듯 탐독한 <<순교자>>는 내가 기억하는 소설과 전혀 다른 작품이었다. 그 시절 나는 무엇을 읽었던 걸까? 세월이 흐르면서 사유의 능력은 조금씩 변하고 성숙해졌다. 그동안 꾸준한 독서가 이해와 감동의 폭을 넓혀 주기도 했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낮아진 마음과 독서에 대한 애정이 읽게 되는 작품들과 그것을 쓴 작가에게 존경심을 갖게 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기독교 소설이란 좁은 카테고리 속에 가둘 수 없었다. 기독교와 전쟁을 의지하고 있지만 오히려 인간에 의한, 인간에 대한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혹은 신을 가진 인간과 이성을 의지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까. 또한 진실을 밝히려는 자와 감추려는 자에 대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쪽으로 선택하고 해석하든 전쟁이란 고통의 역사 속에서 신음하고 고통당하나 쉽게 전멸하지 않는 인간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대학에서 인류문명사를 강의했던 ‘나’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육군 대위가 되어 평양으로 파견된다. 그가 평양에 도착하여 처음 본 광경은 전쟁으로 파괴되고 부서진 장로교 평양 중앙교회였다. ‘나’와 대학에서 함께 근무한 박 중위의 아버지가 시무했던 교회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기독교 역사 속에서 평양은 한때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신앙의 열기는 북쪽 사람들의 마음을 새롭게 달구었고, 평양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그런 땅에 아이러니하게도 공산정권이 들어섰고 식민지시대와 견주어도 나을 것 없는 심한 박해를 받게 된다. 그런 평양에서 ‘나’는 장 대령의 명령으로 공산군에게 순교당한 12명의 목사들에 대하여 자세히 조사한 뒤 마무리 짓는 일을 맡게 된다.
순교당한 12명의 목사들과 살아서 돌아온 2명, 바로 ‘신 목사’와 ‘한 목사’이다. 그 중 순교당한 박 목사를 아버지처럼 믿고 따랐던 젊은 ‘한 목사’는 무엇 때문인지 정신적 충격을 입고 폐허가 된 교회에서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알 수 없는 기도를 하다가 사라지곤 한다. 그런 ‘한 목사’를 마주 했을 때, 이 대위는 북진 초기에 후퇴하던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을 목격하고, 그 현장에서 경험했던 어떤 분노를 떠올리며 힘겨워한다. 시체와 배설물 속에서 끌어낸 한 사람, 꺼져가는 목숨을 부여잡고 힘겹게 의식을 잃어가는 그에게 수없이 많은 플래시가 터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나는 어떤 이상하고도 강렬한 부끄러움에 휩싸였다. 나는 카메라 뒤의 무관심하고 차가운 눈초리들로부터 한 인간이 지닌 고난의 말없는 위엄을 내 온몸으로 지켜주기라도 할 듯 이, 남자의 몸 위로 상체를 구부리고 연옥과도 같은 그의 납빛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36.p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 비참하게 죽어가는 같은 종족을 향해 세상 어느 생물이 카메라를 누르며 보도를 하고 기록을 남기려고 혈안이 될 수 있는지,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이 대위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울부짖으며 카메라를 부수었다. 이 대위가 느낀 부끄러움은 애도 받지 못한 인간에 대한, 나아가 생명에 대한 존엄함이 무시당하는데서 오는 수치심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나또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나 존엄함을 지니고 있는지, 슬픔과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부조리한 세상에 분노하기보다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기 위해 애써 외면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아마 그 누구도 이런 의구심 앞에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적당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움직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의 모습이 신의 침묵을 가져왔는지 아니면 내려진 신의 대답을 못 듣게 한 것은 아닌지 짐작해 볼 뿐이다. 그때와 비슷한 부끄러움을 느낀 이 대위는 비틀거리다 쓰러진 한 목사를 부축하여 돌아가는 신 목사에게 질문한다.
“목사님의 신― 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37.p
신을 섬기는 목사는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대답할 수가 없다. 목사 또한 신이 가르쳐주지 않는 이상 알 수가 없다. 고난은 고스란히 인간의 몫이고 그 순간 할 수 있는 일이란 고통 중에서 견디는 것뿐이니까. 어쩌면 고난 속에서 답을 찾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박해와 억압에 눌려있던 성도들은 광적인 모습으로 순교한 12명의 목사들을 추앙하고, 비겁하게 살아남은 두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간다. 무언가 비밀을 감춘 채 동료 목사들을 잃고, 정신이 나간 젊은 후배를 돌보며 간신히 버티고 있는 신 목사 또한 고난에 대해 대답해 줄 수가 없다. 그는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호소하기보다 모든 것을 떠안고 죄인이라 고백한다. 그런 신 목사에게 진실을 알려달라고 이 대위는 끈질기게 매달린다. 진실이란 과연 무엇일까? 장 대령 또한 굳이 진실을 밝힐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전쟁이 나기 전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오게 된 고 군목 또한 집요하게 진실을 캐고 다니는 이 대위에게 그 젊음과 열정이 부럽다고 말 할 뿐 그가 알고자 하는 진실에 대해서는 답해 주지 않는다.
“…… 진실을 타협해버릴 순 없어. 진실은 숨겨둘 수 없는 거야. 어쩌면 이렇게 뼈아픈 진실이 교인들에게 찾아온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인지도 몰라.”
……
“대령님, 진실은 그것이 그저 진실이기 때문에 밝혀지고 발표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진실은 묻어두어도 여전히 진실이야. 그걸 꼭 까발리고 떠들어야 하나?” 152~153.p
진실을 감추고 죄인의 길로 들어가 기꺼이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하는 신 목사와 열 두 명의 순교자들을 빨갱이들에 대한 정신적 승리의 상징으로 둔갑시키려고 하는 장 대령이나 이 대위에게는 진실을 왜곡하는 사람들이다. 과연 진실은 밝혀지고 발표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 진실의 무게를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지 고민해 보아야 한다. 반면에 진실은 묻어 두어도 여전히 진실이기에 까발리고 떠들어 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면 거짓에 짓눌려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영원히 외면하며 살 수 있을지 묻고 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 대위는 군인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인류문명사를 가르치는 교수로서 역사 속 사건들을 연구하며 인간의 고통에 대해 추상적으로 해석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이론을 세워 나갔을 것이다. 열 네 명의 목사들 또한 신에 대한 믿음을 지키며 자신들의 신앙을 살아가며 그들이 밝히거나 숨겨야 할 진실은 또 다른 곳에서 맞닥뜨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 속에서 만약이란 것은 가정할 수 없다고 한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있고 그것을 맞이하는 인간은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고통은 잔인하지만 인간이 인간일수 있는 이유를 알게 해주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애써 감추려고 했던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주 우연한 기회에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순식간에 튀어 나올 수도 있다. 상황이 수없이 바뀌면서 각 진영에 유리한 쪽으로 왜곡될 수 있지만, 해석하는 데 차이가 있을 뿐이지 벌어진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평양을 점령했던 국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상황은 또 바뀌게 된다. 국군은 서울을 버리고 피란을 갔던 것처럼 또 평양을 떠난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 뒤를 따라 고향을 버리고 살고자 남으로 내려온다. 살아온 터전을 버리고 기약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나가는 동안 사람들은 또 많은 고난을 겪게 될 것이다. 굶주림과 추위에 떨다가 죽어갈 수 도 있을 것이고, 인간이 아닌 짐승처럼 본능만 남은 사람들에게 여자들은 강간을 당하며 공포와 수치심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 누구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지만 한 번 전쟁 속에 내버려진 인간은 싸우고 견디며 살 수 밖에 없다. 결국 고통은 인간의 몫이지만 그것을 통해 인간은 자신들의 존재를 재확인하게 된다.
어쩌면 인간이 살고 있는 곳곳이 전쟁터일지 모른다. 물리적으로 일어나는 전쟁이 아닐지라도 살고 버티기 위해 매일을 바동거리며 살아야 하는 삶에 진정한 평화가 자리하기란 쉽지 않을 테니까. 마음속에서도 수많은 갈등과 잔인함이 도사리고 싸우기를 반복한다. 그럼에도 인간의 삶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삶의 한순간, 반짝거리며 빛나게 해 주는 환희의 순간을 경험하기 위해서일지 모른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 수 없으나 한번쯤 주어진 인생 속에 느끼고 나서야 떠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는 그것을 절망에 대한 희망이라고 말 할 수 있고, 또 누군가는 죽음 속에서도 다시 태어나는 생명이라고 할 것이다. 아니면 사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확실한 것은 그것은 오로지 한계가 있고 유한한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천사도 악마도 그것은 누릴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그 짜릿한 순간을 온 몸으로 체험하고 느끼기 위해 수많은 고통의 시간을 견뎌왔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의 삶은 너무 슬프고 무의미하다.
신 목사가 다시 소곤거리듯 말했다. “인간을 사랑하시오. 대위, 그들을 사랑해주시오! 용기를 갖고 십자가를 지시오. 절망과 싸우고 인간을 사랑하고 이 유한한 인간을 동정해줄 용기를 가지시오.” 283.p
신 목사의 당부 속에서 이성적이던 이 대위도 흔들리게 된다. 당신의 백성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신은 알고 있는지 여전히 의문을 떨칠 수 없으나 고통 중에서 힘겹게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는 또 다른 질문을 만들고 애정을 느낀다.
사람들은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하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사람들은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그들을 향해 들려오는 두 개의 목소리―하나는 역사의 안에서, 또 하나는 역사의 건너편 저 멀리에서 각기 구원과 정의를 약속하며 각각 자기 쪽에 충성해줄 것을 요구하는 그 두 개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 것인가? 310.p
신은 끊임없이 인간에게 질문할 것이고, 인간은 그 속에서 방황하며 답을 찾으려고 애쓰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신을 믿지 않는 인간도 고통 속에서 무언가 찾기 위해 발버둥치고, 각자의 진실을 찾기 위해 애쓰며 살아갈 것이다. 생명은 살아가라는 명령이니까. 산다는 것은 역시 무언가를 계속 하는 것일 테니까. 살아가는 한 아무리 죽음과 썩은 배설물 같은 땅을 헤맬지라도 각자에게 주어진 반짝거리는 고유한 순간을 찾으려고 노력할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초에 창조되던 순간 신이 불어넣은 생령을 가진 존재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