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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에논
폴 하딩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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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에 항상 살아있어요
노란 책표지를 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초판 인쇄 날짜를 확인했다. 마지막 페이지에 2016년 3월 10일이라고 찍혀 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몇 해 전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은 친구가 엄마는 돌아가셔도 사라지지 않고 가슴에 영원히 남는다고 말했다. 내게도 언젠가 닥칠 일이겠지만 내가 어떻게 견딜 수 있을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팠다. 딸 케이트를 교통사고 잃은 아빠 찰리의 고통은 극에 달한다. 철저하게 자신을 파멸로 몰아놓고, 죽음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삶을 시작한다. 슬픔을 밑바닥까지 내려가야만 다시 올라올 수 있는 것이 애도라는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오랜 시간 슬픔과 고통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이제 할 만큼 했으니 그만 슬퍼하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그런 말들을 해왔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아빠가 어렸을 때 여기 오래된 오두막이 있었어. 케이트.” 문지방이나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덤불을 발로 긁어보면서, 나는 소리 내어 속삭였다. “그런데 없네. 그냥 사라졌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66쪽
책을 읽는 내내 찰리의 이 독백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태어나 13년을 함께 살면서 찰리에게 기쁨과 삶의 소중함을 안겨준 케이트는 이제 세상에 없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딸 케이트를 잃고, 슬픔에 젖은 아내를 고향으로 떠난 보낸 상처 입은 가엾은 아빠 찰리만 남아 있을 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두 사람이 떠나고 혼자 남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슬퍼하는 것뿐이다. 혼자 살아있다는 사실이 미안하고, 같이 죽지 못한 것과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 등 모든 것이 쌓여서 가장 커다란 슬픔이 된다. 그 슬픔을 덜어내기 위한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본인만이 알 수 있다. 자신을 망가지게 하고, 약과 술에 육신과 정신을 모두 바쳐도 삐죽삐죽 뚫고 올라오는 딸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은 남아있는 자의 시간을 지옥을 만든다. 그리고 그 강을 건너야 한다는 것을, 슬픔의 바다를 건너 다시 태어나야 하는 애도의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하며, 주위 사람들은 그 시간을 기다려 주어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애도의 시간이 유통기한처럼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케이트가 내 삶에 기쁨을 주었다. 나는 그 아이를 전적으로 사랑했고, 내가 그 아이를 사랑하는 동안 세상은 사랑이었다. 내 딸이 죽고 나니 세상은 페허에 불과한 곳, 온통 괴물들만 나오는 연기 매캐한 꿈에 지나지 않은 곳임이 드러난 듯했다.”
315쪽
딸은 잃은 아빠의 고통이 바늘 끝에 찔린 것처럼 깊숙이 들어왔다. 얼마 전 방영된 드라마처럼 과거로 돌아가 이제는 세상에 없는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난다면 어떨까? 여자 주인공이 엄마를 만지고 따라다니는 장면을 보면서 내 친구는 돌아가신 엄마가 생각나 엉엉 울었다고 말했다. 아빠 찰리를 통해 내가 배운 것은 슬픈 사람들이 충분히 울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과 견뎌주는 것, 그리고 지금 옆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