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먹다 - 제1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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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3월 초, 악양으로 귀촌한 친구 집에서 3일 동안 머물렀었다. 아내를 위해 목수인 친구 남편이 시골집을 사서 다시 짓고, 따뜻한 황토 방도 만들었다. 우리는 그 방에서 먹고 자고 차 마시기를 반복하다가 심심해지면 대충 운동화를 꾸겨 신고, 평사리 부부송이 한 눈에 들어오는 뒷산 언덕에 올랐다. 머무는 동안 밤새 비가 내리다가 아침이 되면 그치기를 반복했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여전히 흐렸고, 물기를 머금은 구름은 천천히 낮게 움직였다. 산에는 매화가 옥수수 알갱이가 하얗게 터지기 전 모습처럼, 아기 병아리 하얀 머리에 솜털이 뽀송 올라오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친구는 내게 너 서울 가고 나면 활짝 피겠다.”고 말한 뒤 아쉬워했다.

 

  차들이 다니는 길 위로 매화나무 가지가 부러져 있는 것을 주워와 꽃병에 꽂았다. 친구는 세 모금 정도 마실 수 있는 작은 찻잔에 매화 두 송이 동동 띄운 매화차를 내주었다. 차를 마시기 위해 잔을 들었을 때 나는 향기에 놀라 몸을 움칫했다. 가까이 다가서지 않으면 맡을 수 없지만, 한 번 맡으면 평생 잊을 수 없는 은은하면서도 품위 있는 향기가 퍼지고 있었다. 김진규 소설 <달을 먹다>를 읽어 가는 동안 내내 그 향기가 떠올랐다. 오랜만에 읽는 장편소설이라 시간이 오래 걸릴까 걱정했는데 무색하게도 한숨에 읽어 내려갔다. 다 읽고 나자 하루가 기울고 있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무수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다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사랑과 미움, 아픔과 상처 입기를 반복한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하나의 단어로 묶는다면 사랑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죄이지 사랑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미움과 고통, 아픔이 시작되기에 우리의 삶은 고달프다.

 

  소설의 구성도 삶과 닿아있다. ‘이른 아침, 겨울’, 묘연의 첫 번째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깊은 밤, ’, ‘한낮, 여름’, ‘다시 밤, 가을기현의 여덟 번째 이야기로 끝난다. 침묵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간 묘연을 중심으로 남편 태겸, 아들 희우, 향이를 사랑한 여문과 향이, 향이의 엄마이자 묘연의 지기인 하연과 희우가 사랑한 누이동생 난이, 아버지 류호 등의 사랑과 무심함이 피었다가 지기를 반복한다. 작가는 고요한 침묵을 품고 앉아 단단히 꼬여 버린, 눈에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을 묵묵히 풀어내고 있다. 끈이 하나씩 풀릴 때마다 인물들의 힘겨운 사랑이 피었다가 졌고, 그러면 그 자리에 죽음과 후회, 자책과 고통이 다시 피었다가 졌다.

 

  한편 조선 영·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가의 선택은 탁월하다. 왜란과 호란을 겪은 이후, 신분질서는 붕괴되고 이미 맛보아 알게 된 자본의 힘과 개혁군주 시대의 희망이 바탕을 이루는 가운데 슬슬 시작되는 세도정치와 전통, 체면, 가문을 중시하는 인간들의 군상이 더욱 돋보이는 구조이다. 예의와 법도, 멋과 효의 가면을 썼지만 그 안으로 거스를 수 없는 인간 본성을 보여주고 있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누구나 외롭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미워하며 살아간다. 작가는 사랑하면서도 외로움에 힘겨워하는 인간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소설을 읽는 동안 문학이란 먼저, 작가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신의 선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작가를 따라 곧 독자도 그 속에서 외로움을 달래고, 숨기도 하다가 다시 힘을 얻어 세상으로 나아가는 땅과 하늘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계 같은 곳 말이다. <달을 먹다>를 읽는 동안 가을 하늘처럼 푸르고 높고 깊고 넓은 곳에서 난이가 키운 꽃차를 마시는 것 같아 좋았다. 지금은 봄과 여름도 지나고 가을 한 가운데 있으니 매화차가 아닌 노랗게 우러나오는 국화차 한 잔 마시고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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